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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국(女人國)과 옥저(沃沮) 〈1편〉
달단(韃靼) 서(西)쪽에 여인국이 있다.
○ 옥저(沃沮)【동옥저(東沃沮)·북옥저(北沃沮)】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일원(一員)으로, 단군(檀君)의 통치(統治)를 받았던 제후국(諸侯國)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 참 뒤에, 강성(强盛)해진 고구려(高句驪)에 흡수(吸收), 합병(合倂)되었다.
※ 옥저(沃沮)와 여인국(女人國)에 대해, 우리 카페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해설(解說)된 내용(內容)이다. 이번 게재(揭載)분은 보충(補充)과 재정리를 한 것임.
「단군(檀君)」이란 ‘임금(王) 또는 군주(君主)의 별칭(別稱)이다.’ 이것을 오해(誤解)한다면 고조선사(古朝鮮史)는, 전설(傳說)과 신화(神話)의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21세기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 ‘옥저국(沃沮國)은,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함경남북도(咸鏡南北道) 동해(東海)가에 있었다.’고 하며, ‘그 북(北)쪽 수백(數百)리 되는 곳에는, 별도(別途)의 “북옥저(北沃沮)”가 또 있었다.’고 설명(說明)한다.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다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소위(所謂) 대륙사(大陸史)라고 하는 후한서(後漢書)등의 많은 고전(古典)에서 “옥저(沃沮)”는 :〈평양성(平壤城)의 서(西)쪽에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만약(萬若) 후한서(後漢書)등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옥저국(沃沮國)은 반도(半島) 평양(平壤) 서(西)쪽의 바다 속(海中)에 있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조선사(朝鮮史)에 대해, 우리나라 역사학자(歷史學者)님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식민사관(植民史觀)과 똑같은 논리(論理)대로, 이야기하고, 학생(學生)들에게 가르칠까? 그런 이야기가 진실(眞實)이라고 말할 수 있는 논거(論據)를 충분히 갖고 있고, 이해(理解)하고 있다는 것일까? 알 수 없는 현실(現實)이다.
○ 조선사(朝鮮史)가 전개(展開)되어 온 땅의 지형지리(地形地理)와 그 방향(方向), 특이지형(特異地形), 토산물(土産物)등등을 살펴보면,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먼 곳의 이야기가 주(主)를 이룬다. 도대체 조선사(朝鮮史)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근세(近世)에 기록(記錄)되었다는 「해국도지(海國圖志)74 / 국지총론(國地總論)」에서 말하는 :《夫中華在蔥嶺之東,則山脈自西來,愈西愈高,高至蔥嶺而止,西洋在蔥嶺西,則山脈自東往,愈東愈高,亦高自蔥嶺而始.山居東西正中. : 중화(中華)는 총령(蔥嶺)의 동(東)쪽에 있다. 산맥이 서쪽으로 오는데, 점점 서쪽으로 점점 더 높게, 높은 것은 총령에서 멎었는데, 서양(西洋)은 총령(蔥嶺)의 서(西)쪽이며, 산맥(山脈)은 동쪽으로 오고가는데, 점점 동쪽으로 점점 높게, 또한 높은 것은 총령(蔥嶺)에서 비롯된다. 산(총령)은 동서(東西)의 정(正)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는 설명(說明)을 보면, 이곳을 중심(中心)으로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나누어,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사(朝鮮史) 영역(領域)이, 반도조선(半島朝鮮)과는 전혀 다른 “조선사(朝鮮史)”가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事實)이다. 이게 중요(重要)한 것이다.
서방(西方)은 태양(太陽)이 지는 곳이고, 동방(東方)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곳으로 양곡(暘谷)이라고 했다. 이곳엔 구이(九夷)들이 토착민(土着民)으로 터전을 이루고 살았고, 구이(九夷) 곧 옛 조선(古朝鮮)을 구성(構成)하고 있던 종족(種族)들이다.
「동방(東方)에 구이(九夷)가 산다.」고 했을 때,「동방(東方)이란 말이 한반도(韓半島)를 지칭(指稱)한다.」는 말과 해설(解說)은, 대한민국(大韓民國) 학자(學者)들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存在)들이다.
기준(基準)이 되는 곳으로부터 그 서(西)쪽은 서방이요,
기준(基準)이 되는 곳으로부터 그 동(東)쪽은 동방이다.
당연(當然)한 것이 아닌가!
총령(葱嶺)이든, 곤륜(崑崙)이든, 불주산(不周山)이든, 그곳으로부터 동(東)쪽을 일컫기를 동방(東方)이라한 것이고, 그곳으로부터 서(西)쪽을 일컫기를 서방(西方)이라 한 것임을…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한반도(韓半島) 사람들이다.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동방(東方)이란 한반도(韓半島)를 말한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기준(基準)으로, 어떤 기준(基準)으로, 동방(東方)이란 한반도(韓半島)를 말한다고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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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번, 천 번을 되 뇌여 봐도, 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歷史)해설(解說)은 이해(理解)할 수 없다. 오늘의 주제(主題)는, 옥저국(沃沮國)편의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소위(所謂) 대륙사(大陸史)라고 하는 고전(古典)의「옥저(沃沮)」편을 보면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구절(句節)이 많은데, 이 중에서도 「여국(女國)」에 관한 것은, 특허(特許)와 같은 존재(存在)다.
송(宋)나라 왕부(王溥)가 서력(西曆) 961년에 편찬(編纂)했다고 하는 당회요(唐會要) 99권을 보면 : 「여국(女國)」과「동여국(東女國)」편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또「여국(女國)」에 관한 것은, 「산해경(山海經)의 대황서경(大荒西經)편과 해외서경(海外西經)」편의 본문(本文)과 주석(註釋)에 설명(說明)되어 있다.
대륙사(大陸史)에서도, 여국(女國)에 대해 :〈총령(蔥嶺)의 서(西)쪽 또는 서남(西南)쪽에 있었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옥저(沃沮)의 노인(老人)들로부터 여인국(女人國)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옥저(沃沮)」는 반도(半島) 땅 동해(東海)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조그만 나라였고, 뒤에 고구려(高句驪)에 합병(合倂)되는 나라다. 이러한 옥저(沃沮)에서, 서(西)쪽으로 이만(二萬)리 쯤【직선거리(直線距離)로 5,000 km 이상(以上)】 떨어져 있었다는 여국(女國)에 대한 자세한 정보(情報)를 어떻게 습득(習得)할 수 있었으며,
대륙사(大陸史)에서 말하는 전한(前漢)이니 후한(後漢)이니 하는 많은 나라들은, 서역(西域)땅을 경략(經略)했다고 말하면서 왜, 여국(女國)에 대한 정보(情報)가 없었느냐? 하는 거다. 여국(女國)에 관한 정보(情報)는, 옥저(沃沮)로부터 얻은 것이 전부(全部)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이야기가 아닌가!
○ 고전(古典)의 기록(記錄)을 따라가 보자. 「이것은 왜곡(歪曲)이니, 조작(造作)이니 하는 것을 떠나, 옛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곳으로, 즉(卽) 지형(地形)지세(地勢)나 방위(方位), 기후(氣候), 특이(特異)지형(地形)등을 따라, 그곳으로 가보자는 것이다.」 그곳엘 가보면 기록(記錄)의 진실(眞實)여부(與否)를 가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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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山海經校注 第十六 大荒西經 : 《有女子之國. 여자국(女子國)이 있다. 注 : 郭璞云:王頎至沃沮國,盡東界,問其耆老,云:國人嘗乘船捕魚遭風,見吹數十日,東一國,在大海中,純女無男.即此國也. : 주(注) 곽박(郭璞)이 이르기를 : 왕기(王頎)가 옥저(沃沮)국에 이르러, 동쪽경계에 닿아, 나이 많은 노인(耆老)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 나라 사람이 배에 올라 고기를 잡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數十)일 바람만 불어대므로, 동쪽의 큰 바다가운데 있는 한 나라에 닿았는데, 여자는 있고, 남자는 없었다. 곧 이것이 그 나라이다. 珂案:女子國已見海外西經.郭注本三國志魏志烏丸鮮卑東夷傳. : 원가(袁珂)는, 여자국(女子國)은 해외서경(海外西經)을 보라. 곽박(郭璞)의 주석(註釋)은 본래(本來)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이다.》라고 하였다.
(2) 山海經第七.海外西經 :《女子國,在巫咸北,兩女子居,水周之,一曰居一門中.中略. : 여자국(女子國)은 무함(巫咸) 북에 있는데, 양쪽의 여자들이 살며, 물의 주변으로 한 문중의 가운데에 산다. 注 : 珂案:淮南子墬形篇有女子民.大荒西經云:有女子之國.三國志魏志東夷傳云:沃沮,耆老言:有一國亦在海中,純女無男.後漢書東夷傳云:或傳其國有神井,窺之輒生子.即此類也. : 주(注) : 원가(袁珂)의 설을 상고해 보면 : 회남자(淮南子) 지형(墬形)편에 여자민(女子民)이 있다. 대황서경(大荒西經)에서 이르기를 : 여자(女子)국이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東夷)전에서 이르기를 : 옥저(沃沮)의 나이 많은 노인이 말하기를 : 바다 가운데에 한 나라가 있는데, 남자는 없고 순 여자만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서 이르기를 : 혹 전하는 바 그 나라에는 신정(神井)이 있어, 엿보면 잉태하여 자식을 낳는데, 곧 이 부류들이다.》
(3) 山海經校注6 海外南經 : 《珂案:淮南子墬形篇云:凡海外三十六國:自西北至西南方,有修股民,天民,肅慎民,白民,沃民,女子民,丈夫民,奇股民,一臂民,三身民 : 원가(袁珂) :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墬形訓)편에, 무릇 해외(海外)에는 36개 나라가 있다. : 서북(西北)에서 서남(西南)사이이다. 수고민(修股民), 천민(天民), 숙신민(肅慎民), 백민(白民), 옥 민(沃民), 여자민(女子民), 장부민(丈夫民), 고민(奇股民), 일비민(一臂民), 삼신민(三身民)이 있다.》하였다.
산해경(山海經) (1)·(2)·(3)의 원문(原文)본문(本文) 및 주석(註釋) 내용(內容)은, “여자국(女子國)”에 대한 설명(說明)을 간추린 것이다. 산해경(山海經)의 편찬(編纂)시기(時期)에 대해서는, 설왕설래(說往說來)하지만, 가장 오래된 최고(最高)의 기서(奇書)라는 데에는, 이견(異見)이 없다.
○ 산해경(山海經)과 그 주석(註釋)에 따르면 :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은, 서남방(西南方)에서 서북방(西北方)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 공통분모(共通分母)다. 또 다른 고전(古典)에서는 「총령(蔥嶺)의 서(西)쪽에 있다」또는 「총령(葱嶺)의 서남(西南)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기원전(紀元前) 수천(數千)년 전(前)에 기록되었다〉는 산해경(山海經)속의 본문(本文) 기록(記錄) 내용(內容)은, 서력(西曆) 1,843년 청(淸) 위원(魏源)이 편찬한 해국도지(海國圖志)【(海國圖志 : 清代魏源所編撰,共一百卷.初版於一八四三年刊行)이라고 하였다.】속에서 설명(說明)하는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의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와 방위(方位) 또한 정확(正確)하게 일치(一致)하고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을 주석(注釋)한 학자(學者)들의 설명(說明) 또한 똑같다는 말은, 산해경(山海經)의 기록(記錄)은, 진실(眞實)을 담고 있으며, 사료(史料)로써 가치(價値)를 인정(認定)받아야 마땅하다고 본다.
이러한 구도(構圖)로 보면 : 기원전(紀元前)이나 기원후(紀元後) 2,000년이 지난 21세기 현재(現在)나, 인종(人種)과 종족(種族)과 부족(部族), 자연환경(自然環境)등등의 대부분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국(女國) 또는 여자국(女子國)」에 대한 정보(情報)를, 「옥저(沃沮)가 독점(獨占)하고 있었다.」는 말은, 「옥저(沃沮)가 여국(女國) 또는 여자국(女子國)과 인접(隣接)해 있었을 때만이, 그들에 대한 정보(情報)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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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회요(唐會要) 99 / 女國 : 女國.在蔥嶺之西.以女為王.每居層樓.侍女數百.五日一聽政. : 여국(女國)은, 총령(蔥嶺)의 서쪽에 있으며, 여자(女子)가 왕(王)이다. 수백(數百)의 시녀(侍女)와 함께, 늘 층루에서 살며, 5일에 한번 정사를 돌본다. 중략. 其俗貴女子.賤丈夫.婦人為吏.男子為軍士.: 그 풍속이 여자는 귀(貴)하며, 장부(丈夫)는 천하여, 부인(婦人)이 벼슬아치를 하며, 남자(男子)는 군사(軍士)이다. 生子皆從母姓.男子披髮.以青綠塗面.婦人辮髮而縈之.土宜六畜.多駿馬.貞觀八年十二月.朝貢使至. : 태어나는 자식들은 모두 어머니의 성을 따르며, 남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얼굴을 푸른 녹색으로 칠한다, 부인은 변발(辮髮)을 하여 두른다. 땅은 육축(六畜)이 마땅하고, 많은 준마(駿馬)가 있다. 정관(貞觀) 8년 12월에 조공사신이 이르렀다.
(5) 通典 西戎 / 女國:隋時通焉.在蔥嶺之南.其國代以女為國王.王姓蘇毗.中略. : 통전(通典)서융(西戎)여국(女國) : 수(隋)나라 때에 통하였다. 총령(葱嶺)의 남(南)쪽에 있다. 그 나라는 대대(代代)로 여자(女子)가 나라의 왕(王)이 되었다. 왕성(王姓)은 소비(蘇毗)이다. 중략.》
(6) 수서(隋書) 서역(西域)여국(女國) :《女國,在蔥嶺之南,其國代以女為王.王姓蘇毗,字末羯,在位二十年. : 여국은 총령(蔥嶺) 남(南)쪽에 있는데, 그 나라는 대대로 여인이 왕이 된다. 왕(王)의 성은 소비(蘇毗)이고, 자는 말갈(末鞨)이라고 하는데, 재위(在位) 20년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4)·(5)·(6)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 여국(女國) 또는 여자국(女子國)은, 「총령(葱嶺)의 서(西)쪽 또는 남(南)쪽에 있었으며, 여국(女國)에서는 모두 어머니(母)의 성(姓)을 따른다고 하니, 모계사회(母系社會)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말이다. 이렇게 수만리(數萬里) 떨어져 있던 여국(女國) 또는 여자국(女子國)에 대한 정보(情報)가 어떻게 옥저(沃沮)에 전달(傳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총령(葱嶺)의 남(南) 또는 서(西)쪽에서 반도(半島)까지, 무슨 재주로…그 중간(中間)의 대륙(大陸) 땅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고, 개미새끼 한 마리 살지 않았던 곳이란 이야긴가!
그런데 대륙(大陸) 땅에 수많은 왕조(王朝)들이 황제(黃帝)를 칭하고, 반도왕조(半島王朝)는, 제후(諸侯)로써 천조(天朝)에게 사대(事大)했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옥저(沃沮)를 반도(半島)에 놓고는, UFO의 과학(科學)문명(文明)을 들이대도, 해결(解決)할 수 없는 이야기다.
유일(唯一)한 방법(方法)은 “옥저(沃沮)”를 총령(葱嶺)이 있는 가까운 곳으로 이동(移動)시켜 놓으면, 손 놓고 발만 움직여도, 여국(女國)이나 여자국(女子國)의 상세(詳細)한 정보(情報)는 흘러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7) 위의 산해경(山海經)·통전(通典)·당회요(唐會要)·수서(隋書)등에서 말하는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 설명(說明)을 보면 : 「옥저국(沃沮國)의 동(東)쪽 경계(境界)」라고 하였으니…한 번 따져 보자.
➊「여국(女國)이나 여인국(女人國)이 총령(葱嶺)의 서(西)쪽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옥저국(沃沮國)의 동계(東界)가 총령(葱嶺) 서(西)쪽이다」라는 말과 같고, 이는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의 서(西)쪽에 옥저국(沃沮國)이 있다」라는 얘기다,
이것을 오늘날의 지형도(地形圖)를 놓고 보면 :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은 달단(韃靼)의 서(西)쪽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의 흑해(黑海) 동(東)쪽 연안(沿岸)인 「러시아·터키·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지(等地)에 있었다.」는 이야기고, 옥저국(沃沮國)은, 흑해(黑海)의 서(西)쪽인 「불가리아·루마니아·몰도바·우크라이나」등지에 있었고, 대해(大海)란 흑해(黑海)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할 수 있을 것이다.
➋ 그러면 당시(當時)에, 고구려(高句麗)를 토벌(討伐)하려 한「위(魏)」나라는, 로마(Roma)제국(帝國) 쯤이 될 것이고,
「고구려(高句驪)」는「현(現) 발칸(Balkan)반도(半島)의 넓은 땅과 체코(Czech)·독일(Germany)·폴란드(Poland)·우크라이나(Ukraine)·모스크바(Moscow)등지의 우랄(Ural)산맥(山脈) 서(西)쪽 땅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게 역사적(歷史的)인 이야기가 될 수 있겠는가? 구라파(歐羅巴)의 여러 나라는 모두가「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땅이었다.」는 이야기고, 우리들의 선대인(先大人)들은 모두가 ‘코카서스계열(系列)의 백인종(白人種)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동(東)쪽의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로부터 총령(葱嶺)의 동(東)쪽 땅은 누가 있었는가? 무인지경(無人之境)이었는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또 하나는…
➌ 우리가 얘기하는, 소위(所謂)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곳의 옛 왕조(王朝)들의 역사서(歷史書)에, 옥저국(沃沮國)에 대한 기록(記錄)에 빠지지 않고 등장(登場)하는 것이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관한 이야기다.
더더구나 현존(現存)하는 그 어떤 고전(古典)과 비교(比較)될 수 없는 “산해경(山海經) 본문(本文)”이나 그 “주석(注釋)”편에서는 :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관한 것들은 모두 대황서경(大荒西經)과 해외서경(海外西經)【경(經)에서 말하는 방위(方位) : 서남방(西南方)∼서북방(西北方)】편에 설명(說明)되어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정리(整理)해 보면 :
《산해경(山海經)과 주석(注釋)·회남자(淮南子)·25사·통전(通典)·자치통감(資治通鑑)·당회요(唐會要)·해국도지(海國圖志)등등의 많은 역사서(歷史書)는, 여국(女國)이나 여인국(女人國)은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 서남(西南) 또는 서(西)쪽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말한다.】에서는 : 「옥저국(沃沮國)은 극동(極東)지방인 반도(半島) 북방(北方) 동해안(東海岸)지방에 있었다.」고 한다.
➍ 그러나 중국(中國)역사서(歷史書)라고 하는 후한서(後漢書)에서는 《평양(平壤)의 서(西)쪽에 있다【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注: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中略.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九麗)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다. 주(注)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屬)했다. 그 산(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라고 하였다. 도대체 누구의 설명(說明)이 옳은 이야긴가?
반도사관(半島史觀)논자(論者)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옥저국(沃沮國)’과 ‘여국(女國)=여인국(女人國)’과는 정반대(正反對)의 이만(二萬) 리쯤 떨어져 있었던 셈이다. 복잡(複雜)한 고전(古典)의 설명(說明)을 쉽게 풀어보면 아주 간단(簡單)한 이야기다.
즉(卽) :「고구려(高句驪)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고,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 기슭에 옥저국(沃沮國)이 있다」는 얘기다. 또 「개마대산(蓋馬大山)은 개마현(蓋馬縣)에 속했는데, 개마현(蓋馬縣)은 현토군(玄菟郡)에 소속(所屬)되어 있었다.」하였다.
현토(玄菟)는 : 진서(晉書)재기(載記) 서두(序頭)에 기록(記錄)된 「然則燕築造陽之郊,秦塹臨洮之險,登天山,絕地脈,苞玄菟,款黃河,所以防夷狄之亂中華,其備豫如此.」속에 나오는 현토(玄菟)로 볼 때,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6995m) 또는 박격달산(博格達山:5445)과 하(河)가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곳【파미르고원(高原) 또는 곤륜(崑崙) 또는 총령(葱嶺)과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등으로 이어진 고원지대(高原地帶)】에 옥저국(沃沮國)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 서남(西南)쪽이나 서(西)쪽 지방에 있었던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대한 정보(情報)를 독점(獨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설명(說明)도 가능(可能)하며,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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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당회요(唐會要) 99 / 東女國 : 《東女.西羌之別種.以西海中有女國.故稱東女國也.俗以女為王.東與茂州黨項接界.隔羅女蠻及白狼夷. : 동여국(東女國)은 서강(西羌)의 별종(別種)인데, 서해(西海)가운데에 여국(女國)이 있다. 동여국(東女國)이다. 풍속에 여자(女子)가 왕(王)이며, 동쪽으로 무주(武州) 당항(黨項)과 접경(接境)하고, 라녀만(羅女蠻)과 백랑이(白狼夷)와 떨어져 있다. 有八十餘城.王所居名康延川.中有弱水南流.用牛皮為船以渡.戶口四萬. : 팔십(八十)여 성(城)이 있고, 왕(王)이 살고 있는 곳의 이름은 강연천(康延川)인데, 가운데를 약수(弱水)가 남쪽으로 흘러, 소가죽으로 만든 배로 건너는데, 사만(四萬)여 호가 있다. 女王號為賓就.有女官號曰高霸.中略.文字同於天竺.武德中.女王湯滂氏遣使貢方物 : 여왕(女王)을 빈취(賓就)라고 부르며, 여관(女官)은 고패라고 부른다. 중략. 문자(文字)는 천축(天竺)과 같다. 무덕(武德)중에, 여왕(女王) ‘탕방’씨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 이곳에서 말하는 「동여국(東女國)」에 대한 이야기는,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 또는 모계사회(母系社會)라는 특성(特性)과 천축(天竺)과 문자(文字)가 같다」는 것에 주목(注目)해야 한다. 많은 것들을 감안(勘案)하지 않고, 자신(自身)의 주관적(主觀的)인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면, 해발고도(海拔高度) 2,000m 또는 5,000m 높이의 산꼭대기에, 범선(帆船)이 바람에 나부끼는 어이없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위의 얘기를 보면 : 「모계사회(母系社會)의 특성(特性)·문자(文字)가 천축(天竺)과 같다·서해(西海)의 한 가운데에 있다·서강(西羌)의 별종(別種)·동(東)쪽으로 무주(武州) 당항(黨項)과 접경(接境)하고, 라녀만(羅女蠻)과 백랑이(白狼夷)와 떨어져 있다」는 것들을 참고(參考)해야 하는데,「서해(西海)가운데에 있다.(以 西 海 中 有 女 國)」는 말이 거슬린다. 서해(西海)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서강(西羌)의 별종(別種)이다」라는 말에서, 서강(西羌)은 서장(西藏) 곧 티베트계 종족(種族)이다. 무주(茂州)와 당항(黨項) 접경지대(接境地帶)라면, 청해(靑海) 남(南)쪽지 방으로 사천성(四川省)의 서(西)쪽 티베트지방을 일컫는다.
문제는 「서해(西海) 가운데에 산다.」는 것이다. ‘티베트’지방에는 “서해(西海)”라고 불릴만한 큰 내륙해(內陸海)가 없다. 서해(西海)가 바다(海) 또는 내륙해(內陸海)를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넓고 넓은 평원(平原) 가운데를 말하는 것일까? 또 하나는 천축(天竺)문자(文字)를 쓴다는 것이다. 이 말은 천축(天竺)과 어떤 연관(聯關)관계(關係)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해국도지(海國圖志) 28권에서는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인용(引用)하여 :《西女國在蔥嶺之西,其俗與東女同,附於拂菻.唐貞觀八年.朝貢始至. : 서여국(西女國)은 총령(葱嶺)의 서(西)쪽에 있는데, 그 풍속은 동여국(東女國)과 같다. 불름(拂菻)【필자(筆者) 注 : 불림(拂菻)이라고도 한다.】에 의지하였는데, 당(唐) 정관 8년에, 처음으로 조공(朝貢)하였다. 注:東女在蔥嶺東,南近吐番,後亦為吐番所滅. : 동여국(東女國)은 총령(葱嶺)의 동(東)쪽에 있으며, 남(南)쪽으로 토번(吐番)에 가깝다. 뒤에 역시 토번(吐番)에게 소멸(消滅)되었다.》고 하였다. 〈2편으로 계속〉
2017년 10월 15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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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어느 덧 계절도 가을이 깊어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선선 합니다. 댁내 평안 하시고 강건 하신지요.
변함없는 노고 하심에 감사를 드리며 다시금 깊은 경의를 표 합니다.
고전의 기록에서 말하고 있는 역사의 내용들은 극히 일부의 오류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실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고조선과 단군, 옥저, 부여, 고구려 등 조선사의 뿌리가 되는 이러한 나라들은, 오늘날의 중앙 아세아에 중심을 두고 동서를 아우르며 치고 달리던 천하의 막강한 나라 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역사의 유적을 따라 서쪽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고전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모두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식민의 반도 사관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재론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신라의 황금 보검이라고 알려진 유물, 경주의 천마총, 불국사의 석굴암, 경주 고대의 릉묘들에 있는 서역인상 등 이러한 유적들은 모두 중앙 아세아와, 오늘날의 흑해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연원이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옥저와 여국의 위치에 대하여 말씀 하시는 바는 모두 맞습니다. 역사의 연원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은 서로 왕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은 유적과 유물로, 그리고 사서를 통하여 고증과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역사를 거짓과 왜곡으로 가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들이 오늘날 천층의 탑을 쌓는다 해도 그것은 사상누각만도 못한 짓 입니다.
온갓 괴이한 잡설과 황당한 꿰변들이 난무하고 판을 치는 한국의 현실, 그저 담담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요. 천하의 흥망성쇠는 교만하고 간사하며 사악한 자들의 성쇠와 직결되고 있음을 역사는 후대들에게 진리와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동방의 서쪽에 있던 중국이라는 나라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나라들이 아니겠습니까 ?
중화의 문물을 고스란히 옮겨와 그 꽃을 피운 나라는, 다산 선생의 말씀대로 근대의 조선 이었습니다.
늘 노고가 많으신 문무 선생님께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두루 댁내 평안 하시고, 항상 강건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환국고려"님!
감사합니다. 더위를 피해 그늘 찾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한 낮의 해가 반가운 계절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7천5백만 국민들의 선대 나라였다는 옛 봉건왕조들의 역사강역은 "한반도"라는 한정된 땅에 고착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조선사의 왜곡과 조작이라는 거대 물결은, 거슬릴 수 없는 대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서구열강들과 조선의 광활한 땅을 접수한 대륙의 정치집단과, 열도 아이들은, 조선사영역에 대한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러한 물결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세를 거슬릴 수 있는 힘은 없다고 보아집니다.
그 큰 흐름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정의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큰 흐름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란 결국 국민들의 의식수준이라고 보는데, 이건 희망이 없다고 봐야겠죠?
원전 역사서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왜 조선의 역사가 이런 모습으로 조작되어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해답을 찾진 못했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하죠.
열강들의 조선사 조작과 같은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반도 국민들의 깨어난 역사의식이라고 봅니다.
이 길만이 조선인의 후예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환국고려"님과 같은 분이 계셔서 위안을 갖습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