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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림의 소리 스크랩 (두륜산 대흥사기행 제2부) 북미륵암과 상사화
현림 추천 0 조회 8 18.10.06 17: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두륜산 대흥사기행 제2) 북미륵암과 상사화


해남의 대흥사(大興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그래서 일주문이 두 개가 서 있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기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1665년부터 1667년에 걸쳐 심수가 중창했으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다.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이란 편액이 있고,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 응진전전3층석탑(보물 제320)이 있다.

 2018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번 두륜산 대흥사 기행은 산행코스 순서에 따라, 2부에서 북미륵암을,

3부에서는 노승봉에서 두륜봉의 산행을, 4부에서는 진불암을,

5부에서는 표충사를 그리고 마지막 제6부에서 대흥사를 포스팅한다.






부도전






대흥사는 일주문이 3개가 있는 셈이다. 첫번째 편액은 대둔사, 두번째 편액은 대흥사

여기 세번째 편액은 일주문 겸 해탈문이다.


보현동자


문수동자




두륜산의 주봉은 좌측 부처님의 발에 해당하는 고계봉, 

왼손과 오른 손에 해당하는 노승봉과 가련봉,

그리고 부처님의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두륜봉이다.

노승봉과 가련봉을 일러 비로자나불부처님의 수인이라 칭한 의미는

제3부에서 봉우리를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번 포스팅은 대흥사 대웅전 뒤길을 들머리로 북미륵암을 감으로

가는 길목에 보이는 대흥사의 전각들이다. 자세한 것은 마지막 제6부 대흥사편에서 후술한다.


승보박물관




문수전


심검당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너들길이다. 경사도 만만치 않지만 너들길이라 길이 좀 험하다.





두륜산 노승봉 아래에는 마애미륵불이 조성된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이 있다.

하나는 북쪽에 있다 하여 북미륵,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다 하여 남미륵이라 부른다.

이 두 암자는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대둔사지에는 1754년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는 북미륵암이 북암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으며

근세에 염담 유일(蓮潭有一), 벽담행인(碧潭幸仁), 아암혜장(兒庵惠藏)같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북암은 용화전 요사 등의 건물과 2기의 3층 석탑으로 이루어졌다.

1기는 용화전 옆에 있고, 1기는 용화전 맞은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19854월에 중수하였으며,

19954월에 중수한 요사채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자형의 건물이다.

그밖에 신중탱화 산신탱화와 1987년에 조성한 동종 및 위패가 있다.


요사체 옆 작은 텃밭에 상사화가 피어 있었다.




상사화(相思花)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구근식물로 봄에 잎이 먼저 올라오고,

초여름쯤 말라서 없어져 버리고 난 다음에 꽃대가 올라와서 분홍의 꽃을 피운다.

그래서 잎과 꽃이 만날 수 없는 사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 하여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꽃말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지금 북미륵암에서 보는 상사화는 정확히 말해 <꽃무릇>이라 불리는 석산(石蒜)이다.

 

@석산(石蒜)은 서해안과 남부 지방의 사찰 근처에 주로 분포하고,

가정에서도 흔히 가꾸는 여러해살이풀로 사찰 근처에 많이 심은 이유는

 이 식물에서 추출한 녹말로 불경을 제본하고, 탱화를 만들 때도 사용하며,

고승들의 진영을 붙일 때도 썼기 때문이다.

 

석산은 상사화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우선 석산과 상사화에는 무릇이라는 공통된 별칭이 들어 있다.

석산은 가을가재무릇, 상사화는 개가재무릇이라고 한다.

두 꽃을 언뜻 보면 아주 비슷한데, 특히 잎과 꽃이 함께 달리지 않는 것이 똑같다.

그러나 꽃 색깔이 달라서 석산은 붉은색이고 상사화는 홍자색이다.

 

상사화는 여름꽃이고 석산은 가을꽃이지만 최근 불갑사 등에서 상사화 축제를 열었는데,

이처럼 석산과 상사화는 혼동할 수 있으므로 눈여겨 감상해 볼 필요가 있다.

석산은 꽃대의 높이가 30~50정도로 자라며, 반그늘이나 양지 어디에서나 잘 자라고,

물기가 많은 곳에서도 잘 자라는 품종이다.

피처럼 붉은빛의 꽃과 달걀 모양의 비늘줄기가 가진 독성 탓에 죽음의 꽃으로 여겨져 왔는데,

그래서인지 꽃말도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슬픈 추억이다.

 

잎은 넓은 선 모양이며 짙은 녹색으로 광택이 난다.

잎의 길이는 30~40, 폭이 1.5정도이며,

10월경 꽃이 시들면 알뿌리에서 새잎이 올라온다.

 

꽃은 9~10월에 적색으로 피는데, 크기는 길이가 4,

폭이 0.5~0.6로 끝부분이 뒤로 약간 말리고 주름이 진다.

열매는 상사화처럼 맺지 않는다.

 

수선화과에 속하며 가을가재무릇, 꽃무릇, 지옥꽃이라고도 한다.

관상용으로 쓰이며, 한방에서는 비늘줄기를 약재로 이용한다.

석산의 비늘줄기는 여러 종류의 알칼로이드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데,

독성이 있지만, 이것을 제거하면 좋은 녹말을 얻을 수 있다.

원산지는 중국 양쯔강, 일본이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海南 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국보 제308)

공양 천인 상이 함께 바위 면에 고부조(高浮彫)로 표현된

독특한 도상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여래좌상으로

규모가 크고 조각 수법도 양감이 있고 유려하여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 평가된다.

 

@본존불의 육계(肉髻)가 뚜렷한 머리는 언뜻 머리칼이 없는 민머리(素髮)처럼 보이나 나발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목구비의 표현이 단정한 얼굴은 살이 찌고 둥글넓적하여 원만한 상이다.

그러나 눈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고 입을 굳게 다물어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큼직하니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으며,

유난히도 굵고 짧아진 목에는 두 가닥의 선으로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手印)과 발은 항마촉지인에 오른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吉祥坐)를 하였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냘픈 듯 섬세하고 가지런히 묘사하여

사실성이 엿보임과 더불어 곱상한 느낌을 준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다 덮은 통견의(通肩衣)로 그 주름은

거의 같은 간격으로 선각화(線刻化)하여 사실성이 뒤떨어지고,

무릎 사이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마치 키를 드리운 것처럼 늘어지는 등 도식적(圖式的)인 면이 강하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 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대둔사지에는 두륜봉 아래 남미륵암에 있는 미륵불은 전실(前室)이 없어 이끼가 끼어 있다라는

남미륵암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실제로 남미륵암은 지금도 전실이 없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바위틈새로 난 이끼를 볼 수가 있다  

북미륵암이 볼록하게 도드라져 올라오게 하는 양각의 조각 수법과 비교하면

남미륵암은 평평한 곳에 선을 이용해 그린 음각의 조각형식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두 미륵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조성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구전에 의하면 음각의 남미륵은 남자가 조성했고 양각의 북미륵은 여자가 조성했다 하며

이들은 모두 제석천이 하강하여 남북에 각각 조성한 것으로

 음양각으로 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북미륵은 완성되어 현재 보물 제48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남미륵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남미륵암 터에는 초라한 전각만 남아있다.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4.2m에 달하는 마애불로

마애불의 얼굴과 각부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시대 전반기인 11세기 무렵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은 조성과 관련한 전설이 내려온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하늘에서 죄를 짓고 쫓겨 난 천동과 천녀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시 하늘에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하루 만에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하루 만에 불상을 조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해가 지지 못하도록 천년수 나무에다 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천동은 남쪽 바위에다 입상의 불상을 조각하였고

 천녀는 북쪽 바위에 좌상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그런데 천녀는 앉아있는 좌상의 불상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입상의 모습을 조각한 천동보다 먼저 조각할 수 있었다.

 

불상의 조각을 다 마친 천녀는 먼저 하늘에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생겨

그만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 버렸다.

해가 지자 천동은 더 이상 불상을 조각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하늘에도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다.



용화전의 신중탱

















용화전 맞은 편 언덕에 위치한 3층석탑이다.




주지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 탑은 부처님 손 바닥 위헤 세워진 형상이라고 한다.

탑의 기단역을 하는 바위를 보면 손가락이 같은 주름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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