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산 선생은 이미 약관의 나이에 대각도통(大覺道通)을 향한 웅지를 품으시고 평생을 명리견성을 위한 수도정진의 진수를 보여주신 이 시대 최고의 명리학인이자, 도인이었습니다. 또한 송곳처럼 날카로운 통변과 천기를 꿰뚫는 신통한 예언으로 세간에 <朴도사>, <살아있는 토정>으로 회자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직관적 통찰로 전광석화 같이 명쾌한 통변을 선보이신 선생의 천재성은 가히 한국명리학계의 거목의 표상이자, 이 땅의 도맥을 이어온 증거일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성은 선생의 천재적인 자성의 덕도 있겠으나 더불어, 평생에 걸친 유불선을 넘나드는 방통한 학문적 탐구와 수련의 덕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후학들에게 사생결단,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을 강조하신 선생의 유지가 이를 웅변한다 할 것입니다. 이는 곧, 수많은 강호의 술사와 학인들에게 있어 대망의 성취욕과 무한정진의 자세를 가르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으로 허튼 소리로 혹세무민의 우를 범하지 말라 당부하시고 오직 공부와 수행에 지극정성을 다하여 법을 온전히 보라 하시던 경구를 되새기며 선생의 소개를 가름코자 합니다.
-霽山 門下 丁巖門衆 學人 書-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인물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는 믿음이다. 하다못해 시골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제산과 같이 100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은 반드시 지령과 관계 있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제산의 고향은 함양군 서상면 극락산 밑의 산동네다. 무주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서상 인터체인지가 나오는데 이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바로 우측에 자리잡은 동네다. 이 동네는 지리적으로 영·호남의 길목이었다. 경상도 거창·함양에서 전라도의 장계·장수 쪽으로 가려면 이 동네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영·호남을 오가는 많은 과객들이 이 동네를 지나갔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제산 집안에서는 지나가는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과객 가운데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 중 특히 풍수와 사주에 밝은 과객들도 있었는데,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제산의 집안에서는 이러한 술객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들이 사랑채에서 몇 달이고 무전취식을 하여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제산의 집은 영·호남의 문화가 활발하게 오갔던 지리산 실크로드의 중요한 베이스 캠프에 해당되었다. 그 과객들 중 풍수에 밝은 이가 명당자리를 하나 알려 주었다. 이른바 '을해(乙亥)명당'이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서 을해(乙亥)년에 태어난 손자가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을해년에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 집안은 망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산의 7대조는 그 을해명당에 묻히게 되었다. 그 후 이 집안에는 60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을해년에 과연 어떤 자손이 태어나는가 하고 유심히 지켜보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 명당의 이름을 하필 을해라고 붙인 데는 까닭이 있다. 그 명당자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지맥의 형태가 을자(乙字)의 형태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영어의 S자 형태와 같다. 을자의 끝에는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저수지는 물이다. 십간십이지에서 해(亥)는 물을 상징한다. 육십갑자를 순서대로 짚어볼 때 을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물은 해(亥)다. 그래서 을해(乙亥)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을자 모양으로 내려간 산줄기 밑에 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라서 이를 을해(乙亥)로 상징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인 1935년이 을해년이었다. 을해년을 맞이해 극락산자락의 박씨 집안에서는 인물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출렁거렸다. 5월에 첫 손자가 태어났다. 첫 손자는 장남이 아니라 3남에게서 나왔다. 집안의 분위기는 5월에 태어난 3남의 아들이 인물인가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아 문 앞에 금줄을 걸어 놓았는데, 아침에 보니 구렁이가 그 새*줄을 타고 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구렁이가 금줄을 타고 간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래서 이 손자는 '인물이 아니다'라고 판정되었다. 바로 이어서 손자가 또 태어났다. 이 손자는 둘째 아들이 낳은 자식이었다. 이 손자는 둘째 아들이 처가살이를 했던 덕분에 서상에 살지 않고 처가 동네인 서하에서 출생하였다. 외가인 서하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 손자는 관심권에서 밀려났다. 을해년이 다 지나갈 무렵인 동짓달 22일 장남에게서 손자가 하나 태어났다. 그 손자가 바로 제산이다. 제산을 낳을 무렵 제산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 딸을 다섯이나 둔 상태였다. 큰아들 하나에 그 밑으로 줄줄이 딸을 넷이나 낳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딸을 낳을 줄 알았다고 한다. 더구나 제산의 어머니는 당시 40세가 넘어 생리도 드문드문했는데 임신이 되어 창피한 데다 딸을 많이 낳아서 제산이 임신되자 또 딸인 줄 알고 낙태시키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하였다. 간장을 바가지로 퍼먹거나 쓴 약초를 먹는가 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해명당의 효력이 작동했는지 제산은 마침내 을해년 동짓달에 태어나고야 말았다. 낳아놓고 보니 얼굴은 시커멓고 볼품 없이 조그마한데 눈만 반짝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조부는 과연 이 아이가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아이란 말인가! 하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성장해 가면서 제산의 총기는 빛을 발하였다.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한번 글자를 보면 단번에 외워 버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상동에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함양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바야흐로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이렇다. 제산은 20대시절, 춥고 배고팠던 수련시절에 남원 운봉에 자주 들렀다. 운봉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노개식(盧价植)씨가 살고 있었다. 운봉은 지리산 일대의 명당이다. 해발 400미터의 고지대라서 여름에는 기온이 30도가 넘지 않는다. 풍수적으로 지세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땅기운도 좋아서 예로부터 기인달사들이 이곳에 많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그의 집안도 그런 집안의 하나였다. 노씨는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유년시절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유교경전을 단련 받아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한약방을 운영하니까 생활에 어려움이 없어서 친구인 제산이 찾아오면 항상 차비라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었고, 고전에 식견이 있어서 호학하는 성품이었던 제산과 잘 어울렸다. 어느 날이었다. 제산과 운봉의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제산이 이렇게 말하였다. "어이 오늘 한약방에 오는 첫 손님은 남자일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은 성씨가 황(黃)씨 일거야. 그리고 이름은 하수(河洙)이고, 아마도 그 사람은 대나무 울타리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과연 그럴까 하고 지켜보았다. 10시쯤 되어서 한약을 지으러 첫 손님이 왔는데, 이 사람 성씨를 물어보니 황씨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니 '하수(河洙)'라고 하지 않는가. 속으로 깜짝 놀란 그는 그 손님의 집까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대나무 숲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제산이라는 친구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아 맞추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의심이든 친구는 제산에게 다그쳤다."자네 이보(耳報)로 안 것이지?" 이보(이보)라는 말은 '귀에다 귀신이 보고를 해준다'는 뜻이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통령(耳報通靈)'이라고 부르는데, 줄여서 통상 '이보'라고 부른다.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접신(接神)이 되는 수가 있다. 접신이 되면 귀신이 접신된 사람의 귀에다 대고 정보를 알려준다. 이보가 된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마치 귀에다 리시버를 꽂은 상태로 말하는 것과같아서 두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귀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고 귀를 쫑긋한 상태에서 상대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이보통령한 사람과 이야기 하다 보면 헷갈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친구로부터 이보(귀신이 들려 말하는 것)로 알게 된 것이지,라고 추궁을 받은 제산은 "아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해서 안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서 알았다는 말이다. 귀신이 알려주어서 안 것이 아니고, 내가 이성적으로 이치를 분석해서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격물치지의 근거를 말해봐라" 하니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아침햇살이 장판을 비추는데 장판의 색깔이 노랗게 보이더라. 그래서 황(黃)씨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맡에 목마르면 먹으려고 흰 대접에 물을 떠놓았는데, 그 대접에 담겨있는 물이 아주 맑게 보이더라. 하수(河洙)는 그래서 알았다. 대접 위로 가로로 놓여있는 대뿌리 회초리를 보고 오늘 오는 사람이 대나무 울타리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듣고 보니 전부 이치에 맞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전쯤 어느날 제산이 남원 운봉에 있는 친구의 한약방에서 나눈 대화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운봉에서 원제당한약방을 운영하는 노개식씨로부터 듣고 제산의 천재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부산군수 기지 사령관 시절에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 대통령은 1970년대 초반 10월 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유신(維新)을 하려고 하는데 유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때 박 대통령의 메신저로서 제산을 찾아온 사람이 청와대의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유신(維新)의 앞날에 대해서 점괘를 물어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다가 유신(幽神)이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유신(維新)이 유신(幽神)으로 변한다는 예언이었다. '유신(幽神)의 뜻이 무엇인가? 자승 유(幽)자에 귀신 신(神)자가 아닌가. 만약 유신(維新)을 하면 그 결과는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의미의 예언이었다. 그러자 S비서관은 제산이 유신(幽神)이라고 끄적거린 담뱃갑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S비서관의 이 모습을 무심히 보고 있던 제산은 순간적으로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고 한다. 제산은 비서관에게 그 담뱃갑을 가져가지 말고 그냥 두고 가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S비서관은 "설마 제가 박 대통령에게 보이기야 하겠습니까?"하면서 주머니에 챙겨서 집을 나갔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있다가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유신(幽神)' 소리를 비서관으로부터 전해들은 박 대통령이 격노했던 것이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맞았다. 기관원들이 팔을 뒤로 묶어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1970년대는 민주투사만 남산지하실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솔바람이 키워냈던 박 도사도 남산 지하실에 초대받아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제산의 일생을 놓고 볼 때 지리산 시대 다음에는 가야산의 해인사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를 마치고 지리산에서 공부하던 제산은 집안의 강권에 의하여 결혼을 해야만 했다. 장손이라 씨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31세 때 결혼을 하였다. 신혼살림을 몇 달 한 후에 다시 산으로 간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신부에게 '나는 산으로 간다. 미처 끝내지 못한 공부를 해야하니 나를 놓아주어라'라고 하고 해인사로 들어간다. 함양에서 해인사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해인사가 어떤 절인가. 한국의 삼보사찰이 아니던가. 순천 송광사는 국사가 많이 배출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면, 양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佛寶寺刹), 그리고 합천 해인사는 불법의 총체인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다. 삼보사찰 가운데서도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기강이 가장 엄하기도 유명하다. 예비스님 과정인 행자생활에 있어서도 해인사에서 행자생활 했다고 하면 제대로 한 것으로 친다. 해인사 행자생활이 다른 절의 행자생활보다 배는 힘들다고 한다. 행자뿐만 아니라 주지도 해인사에서 주지노릇 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소문나 있다. 그만큼 원리원칙과 법대로 하는 가풍이 해인사 가풍이다. 그래서 일반 스님들도 해인사에 가면 바짝 긴장을 한다. 머리 깎은 스님들도 그런데 하물며 머리 길은 유발처사(有髮處士)는 어떠하겠는가. 사실 머리 긴 처사들은 해인사에서 잘 받아주지 않는다. 출가수행자의 청정 공부 도량에 유발처사들이 머무르면 엄격한 가풍이 흐려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명리를 연구하던 제산의 노선은 불가의 입장에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외도에 해당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산은 해인사에 허락을 받아 장기간 머무를 수 있었다. 물론 하숙비를 지불하지 않는 무전취식의 형태였지 않나 싶다. 유발처사가 한국에서 가장 규율이 엄한 사찰인 해인사에 장기간 머무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천대를 받았다. 그렇게 어정쩡한 신분으로 머무르는 과정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살인사건이었다. 참고로 제산은 31세이던 1965년에서 36세이던 1971년까지 해인사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살인사건도 아마 이 기간에 일어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살인사건이란 바로 20대 중반의 처녀가 해인사 경내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늦가을 이른 아침 장경각 밑에서 낙엽을 청소하다 보니 낙엽밑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사찰 경내에 처녀 시체가 발견됨으로 해서 해인사는 발칵 뒤집혔다. 관할 합천 경찰서에서는 매일 해인사 스님들을 한 명씩 경찰서로 호출하여 알리바이를 심문하였다. 이런 상황이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계속해서 스님들을 취조할 수밖에. 이러다 보니 해인사의 청정한 수행가풍이 잘못하면 망가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애가 타는 상황에서 홀연히 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자청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산이었다. 뒷방 요사체에서 밥이나 축내고 있던 처사가 이 사건을 해결해주겠다고 자청해서 나섰다. "'이 사건은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제산은 으름장을 놓았다. 그 동안 축적되어 있던 냉대의 설움을 한 순건에 만회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있는 선언이었다. "내가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단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아무개 총무스님이 가사장삼을 입고 와서 공손하게 큰 절을 3반 하여야 한다. 삼배를 하고 난 후 총무스님이 지필묵을 준비해와서 나에게 바치면 그 붓으로 사건의 해결책을 써줄 것이다"고 큰소리를 쳤다. 총무스님의 삼배를 요구한 배경에는 당시 해인사 총무를 맡았던 아무개 스님이 평소 제산을 천대했기 때문이다. 해인사 측에서 달리 해결방도가 없었으므로 오만방자한 이 처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살인범은 '일목탱천 목자지행(一木撑天 木子之行)'이라! 그때 제산이 총무스님의 삼배를 정식으로 받고 난 후 붓으로 써준 글씨는 다음과 같다. '일목탱천 목자지행(一木撑天 木子之行).' 탱(撑)자는 '버팀목 탱' 자이다. 해석하면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하는데, 목자(木子)즉 이(李)씨의 소행이다'는 뜻이다.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한다는 의미는 바로 목수를 지칭한다. 목수는 나무기둥을 세워 천장을 지탱하는 업종에 해당한다. 그 목수 중에서도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범인이라는 뜻이었다. 목수를 찾아보니 사건 1달 전에 대웅전 보수공사를 하느라고 목수들이 해인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공사가 끝난 후 목수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그 목수들 가운데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수소문해본 결과 한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합천 경찰서에서는 즉시 형사대를 서울에 급파하여 그 이씨 성을 가진 목수를 체포해서 심문을 하였다.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씨 성을 가진 젊은 목수는 살인을 자백하였다. 죽은 처녀는 목수와 사귀던 여자였고, 변심할 기미가 보이는 애인이 해인사를 찾아오자 그만 충동적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이 일로 해서 제산의 명성은 경상도 일대로 퍼졌다. '해인사에 천출귀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제산을 만나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해인사로 몰려왔다.
제산 선생은 이미 약관의 나이에 대각도통(大覺道通)을 향한 웅지를 품으시고 평생을 명리견성을 위한 수도정진의 진수를 보여주신 이 시대 최고의 명리학인이자, 도인이었습니다. 또한 송곳처럼 날카로운 통변과 천기를 꿰뚫는 신통한 예언으로 세간에 <朴도사>, <살아있는 토정>으로 회자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직관적 통찰로 전광석화 같이 명쾌한 통변을 선보이신 선생의 천재성은 가히 한국명리학계의 거목의 표상이자, 이 땅의 도맥을 이어온 증거일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성은 선생의 천재적인 자성의 덕도 있겠으나 더불어, 평생에 걸친 유불선을 넘나드는 방통한 학문적 탐구와 수련의 덕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후학들에게 사생결단,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을 강조하신 선생의 유지가 이를 웅변한다 할 것입니다. 이는 곧, 수많은 강호의 술사와 학인들에게 있어 대망의 성취욕과 무한정진의 자세를 가르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으로 허튼 소리로 혹세무민의 우를 범하지 말라 당부하시고 오직 공부와 수행에 지극정성을 다하여 법을 온전히 보라 하시던 경구를 되새기며 선생의 소개를 가름코자 합니다.
-霽山 門下 丁巖門衆 學人 書-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인물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는 믿음이다. 하다못해 시골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제산과 같이 100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은 반드시 지령과 관계 있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제산의 고향은 함양군 서상면 극락산 밑의 산동네다. 무주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서상 인터체인지가 나오는데 이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바로 우측에 자리잡은 동네다. 이 동네는 지리적으로 영·호남의 길목이었다. 경상도 거창·함양에서 전라도의 장계·장수 쪽으로 가려면 이 동네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영·호남을 오가는 많은 과객들이 이 동네를 지나갔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제산 집안에서는 지나가는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과객 가운데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 중 특히 풍수와 사주에 밝은 과객들도 있었는데,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제산의 집안에서는 이러한 술객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들이 사랑채에서 몇 달이고 무전취식을 하여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제산의 집은 영·호남의 문화가 활발하게 오갔던 지리산 실크로드의 중요한 베이스 캠프에 해당되었다. 그 과객들 중 풍수에 밝은 이가 명당자리를 하나 알려 주었다. 이른바 '을해(乙亥)명당'이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서 을해(乙亥)년에 태어난 손자가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을해년에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 집안은 망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산의 7대조는 그 을해명당에 묻히게 되었다. 그 후 이 집안에는 60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을해년에 과연 어떤 자손이 태어나는가 하고 유심히 지켜보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 명당의 이름을 하필 을해라고 붙인 데는 까닭이 있다. 그 명당자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지맥의 형태가 을자(乙字)의 형태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영어의 S자 형태와 같다. 을자의 끝에는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저수지는 물이다. 십간십이지에서 해(亥)는 물을 상징한다. 육십갑자를 순서대로 짚어볼 때 을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물은 해(亥)다. 그래서 을해(乙亥)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을자 모양으로 내려간 산줄기 밑에 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라서 이를 을해(乙亥)로 상징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인 1935년이 을해년이었다. 을해년을 맞이해 극락산자락의 박씨 집안에서는 인물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출렁거렸다. 5월에 첫 손자가 태어났다. 첫 손자는 장남이 아니라 3남에게서 나왔다. 집안의 분위기는 5월에 태어난 3남의 아들이 인물인가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아 문 앞에 금줄을 걸어 놓았는데, 아침에 보니 구렁이가 그 새*줄을 타고 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구렁이가 금줄을 타고 간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래서 이 손자는 '인물이 아니다'라고 판정되었다. 바로 이어서 손자가 또 태어났다. 이 손자는 둘째 아들이 낳은 자식이었다. 이 손자는 둘째 아들이 처가살이를 했던 덕분에 서상에 살지 않고 처가 동네인 서하에서 출생하였다. 외가인 서하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 손자는 관심권에서 밀려났다. 을해년이 다 지나갈 무렵인 동짓달 22일 장남에게서 손자가 하나 태어났다. 그 손자가 바로 제산이다. 제산을 낳을 무렵 제산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 딸을 다섯이나 둔 상태였다. 큰아들 하나에 그 밑으로 줄줄이 딸을 넷이나 낳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딸을 낳을 줄 알았다고 한다. 더구나 제산의 어머니는 당시 40세가 넘어 생리도 드문드문했는데 임신이 되어 창피한 데다 딸을 많이 낳아서 제산이 임신되자 또 딸인 줄 알고 낙태시키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하였다. 간장을 바가지로 퍼먹거나 쓴 약초를 먹는가 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해명당의 효력이 작동했는지 제산은 마침내 을해년 동짓달에 태어나고야 말았다. 낳아놓고 보니 얼굴은 시커멓고 볼품 없이 조그마한데 눈만 반짝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조부는 과연 이 아이가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아이란 말인가! 하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성장해 가면서 제산의 총기는 빛을 발하였다.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한번 글자를 보면 단번에 외워 버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상동에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함양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바야흐로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이렇다. 제산은 20대시절, 춥고 배고팠던 수련시절에 남원 운봉에 자주 들렀다. 운봉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노개식(盧价植)씨가 살고 있었다. 운봉은 지리산 일대의 명당이다. 해발 400미터의 고지대라서 여름에는 기온이 30도가 넘지 않는다. 풍수적으로 지세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땅기운도 좋아서 예로부터 기인달사들이 이곳에 많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그의 집안도 그런 집안의 하나였다. 노씨는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유년시절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유교경전을 단련 받아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한약방을 운영하니까 생활에 어려움이 없어서 친구인 제산이 찾아오면 항상 차비라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었고, 고전에 식견이 있어서 호학하는 성품이었던 제산과 잘 어울렸다. 어느 날이었다. 제산과 운봉의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제산이 이렇게 말하였다. "어이 오늘 한약방에 오는 첫 손님은 남자일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은 성씨가 황(黃)씨 일거야. 그리고 이름은 하수(河洙)이고, 아마도 그 사람은 대나무 울타리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과연 그럴까 하고 지켜보았다. 10시쯤 되어서 한약을 지으러 첫 손님이 왔는데, 이 사람 성씨를 물어보니 황씨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니 '하수(河洙)'라고 하지 않는가. 속으로 깜짝 놀란 그는 그 손님의 집까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대나무 숲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제산이라는 친구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아 맞추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의심이든 친구는 제산에게 다그쳤다."자네 이보(耳報)로 안 것이지?" 이보(이보)라는 말은 '귀에다 귀신이 보고를 해준다'는 뜻이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통령(耳報通靈)'이라고 부르는데, 줄여서 통상 '이보'라고 부른다.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접신(接神)이 되는 수가 있다. 접신이 되면 귀신이 접신된 사람의 귀에다 대고 정보를 알려준다. 이보가 된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마치 귀에다 리시버를 꽂은 상태로 말하는 것과같아서 두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귀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고 귀를 쫑긋한 상태에서 상대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이보통령한 사람과 이야기 하다 보면 헷갈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친구로부터 이보(귀신이 들려 말하는 것)로 알게 된 것이지,라고 추궁을 받은 제산은 "아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해서 안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서 알았다는 말이다. 귀신이 알려주어서 안 것이 아니고, 내가 이성적으로 이치를 분석해서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격물치지의 근거를 말해봐라" 하니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아침햇살이 장판을 비추는데 장판의 색깔이 노랗게 보이더라. 그래서 황(黃)씨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맡에 목마르면 먹으려고 흰 대접에 물을 떠놓았는데, 그 대접에 담겨있는 물이 아주 맑게 보이더라. 하수(河洙)는 그래서 알았다. 대접 위로 가로로 놓여있는 대뿌리 회초리를 보고 오늘 오는 사람이 대나무 울타리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듣고 보니 전부 이치에 맞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전쯤 어느날 제산이 남원 운봉에 있는 친구의 한약방에서 나눈 대화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운봉에서 원제당한약방을 운영하는 노개식씨로부터 듣고 제산의 천재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부산군수 기지 사령관 시절에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 대통령은 1970년대 초반 10월 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유신(維新)을 하려고 하는데 유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때 박 대통령의 메신저로서 제산을 찾아온 사람이 청와대의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유신(維新)의 앞날에 대해서 점괘를 물어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다가 유신(幽神)이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유신(維新)이 유신(幽神)으로 변한다는 예언이었다. '유신(幽神)의 뜻이 무엇인가? 자승 유(幽)자에 귀신 신(神)자가 아닌가. 만약 유신(維新)을 하면 그 결과는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의미의 예언이었다. 그러자 S비서관은 제산이 유신(幽神)이라고 끄적거린 담뱃갑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S비서관의 이 모습을 무심히 보고 있던 제산은 순간적으로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고 한다. 제산은 비서관에게 그 담뱃갑을 가져가지 말고 그냥 두고 가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S비서관은 "설마 제가 박 대통령에게 보이기야 하겠습니까?"하면서 주머니에 챙겨서 집을 나갔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있다가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유신(幽神)' 소리를 비서관으로부터 전해들은 박 대통령이 격노했던 것이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맞았다. 기관원들이 팔을 뒤로 묶어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1970년대는 민주투사만 남산지하실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솔바람이 키워냈던 박 도사도 남산 지하실에 초대받아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제산의 일생을 놓고 볼 때 지리산 시대 다음에는 가야산의 해인사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를 마치고 지리산에서 공부하던 제산은 집안의 강권에 의하여 결혼을 해야만 했다. 장손이라 씨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31세 때 결혼을 하였다. 신혼살림을 몇 달 한 후에 다시 산으로 간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신부에게 '나는 산으로 간다. 미처 끝내지 못한 공부를 해야하니 나를 놓아주어라'라고 하고 해인사로 들어간다. 함양에서 해인사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해인사가 어떤 절인가. 한국의 삼보사찰이 아니던가. 순천 송광사는 국사가 많이 배출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면, 양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佛寶寺刹), 그리고 합천 해인사는 불법의 총체인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다. 삼보사찰 가운데서도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기강이 가장 엄하기도 유명하다. 예비스님 과정인 행자생활에 있어서도 해인사에서 행자생활 했다고 하면 제대로 한 것으로 친다. 해인사 행자생활이 다른 절의 행자생활보다 배는 힘들다고 한다. 행자뿐만 아니라 주지도 해인사에서 주지노릇 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소문나 있다. 그만큼 원리원칙과 법대로 하는 가풍이 해인사 가풍이다. 그래서 일반 스님들도 해인사에 가면 바짝 긴장을 한다. 머리 깎은 스님들도 그런데 하물며 머리 길은 유발처사(有髮處士)는 어떠하겠는가. 사실 머리 긴 처사들은 해인사에서 잘 받아주지 않는다. 출가수행자의 청정 공부 도량에 유발처사들이 머무르면 엄격한 가풍이 흐려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명리를 연구하던 제산의 노선은 불가의 입장에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외도에 해당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산은 해인사에 허락을 받아 장기간 머무를 수 있었다. 물론 하숙비를 지불하지 않는 무전취식의 형태였지 않나 싶다. 유발처사가 한국에서 가장 규율이 엄한 사찰인 해인사에 장기간 머무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천대를 받았다. 그렇게 어정쩡한 신분으로 머무르는 과정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살인사건이었다. 참고로 제산은 31세이던 1965년에서 36세이던 1971년까지 해인사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살인사건도 아마 이 기간에 일어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살인사건이란 바로 20대 중반의 처녀가 해인사 경내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늦가을 이른 아침 장경각 밑에서 낙엽을 청소하다 보니 낙엽밑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사찰 경내에 처녀 시체가 발견됨으로 해서 해인사는 발칵 뒤집혔다. 관할 합천 경찰서에서는 매일 해인사 스님들을 한 명씩 경찰서로 호출하여 알리바이를 심문하였다. 이런 상황이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계속해서 스님들을 취조할 수밖에. 이러다 보니 해인사의 청정한 수행가풍이 잘못하면 망가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애가 타는 상황에서 홀연히 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자청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산이었다. 뒷방 요사체에서 밥이나 축내고 있던 처사가 이 사건을 해결해주겠다고 자청해서 나섰다. "'이 사건은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제산은 으름장을 놓았다. 그 동안 축적되어 있던 냉대의 설움을 한 순건에 만회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있는 선언이었다. "내가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단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아무개 총무스님이 가사장삼을 입고 와서 공손하게 큰 절을 3반 하여야 한다. 삼배를 하고 난 후 총무스님이 지필묵을 준비해와서 나에게 바치면 그 붓으로 사건의 해결책을 써줄 것이다"고 큰소리를 쳤다. 총무스님의 삼배를 요구한 배경에는 당시 해인사 총무를 맡았던 아무개 스님이 평소 제산을 천대했기 때문이다. 해인사 측에서 달리 해결방도가 없었으므로 오만방자한 이 처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살인범은 '일목탱천 목자지행(一木撑天 木子之行)'이라! 그때 제산이 총무스님의 삼배를 정식으로 받고 난 후 붓으로 써준 글씨는 다음과 같다. '일목탱천 목자지행(一木撑天 木子之行).' 탱(撑)자는 '버팀목 탱' 자이다. 해석하면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하는데, 목자(木子)즉 이(李)씨의 소행이다'는 뜻이다.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한다는 의미는 바로 목수를 지칭한다. 목수는 나무기둥을 세워 천장을 지탱하는 업종에 해당한다. 그 목수 중에서도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범인이라는 뜻이었다. 목수를 찾아보니 사건 1달 전에 대웅전 보수공사를 하느라고 목수들이 해인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공사가 끝난 후 목수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그 목수들 가운데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수소문해본 결과 한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합천 경찰서에서는 즉시 형사대를 서울에 급파하여 그 이씨 성을 가진 목수를 체포해서 심문을 하였다.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씨 성을 가진 젊은 목수는 살인을 자백하였다. 죽은 처녀는 목수와 사귀던 여자였고, 변심할 기미가 보이는 애인이 해인사를 찾아오자 그만 충동적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이 일로 해서 제산의 명성은 경상도 일대로 퍼졌다. '해인사에 천출귀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제산을 만나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해인사로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