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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2-영성과 혁명, 해월과 전봉준
학산 박윤철 교수 교무
초벌: 차명섭
지난주는 마이크를 세 개를 차다보니까 긴장이 되어가지고 강의내용을 좀 오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은 좀 차분하게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지난 시간에 동학에 등장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동의 의미가 서에 대립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동학의 핵심 사상, 모실 시자에 대해서 좀 설명을 드렸죠? 모실 시자에 동학을 만드신 수운 최제우 선생님이, 모심이란, 내유신령, 외유기화 밖으로 기화가 있다.
이런 이제 설명을 드렸는데 어려우시죠? 저도 삼십 몇 년 공부했으니까, 여러분들은 천재라 삼년만 하시면 도통 하실 겁니다. 우리 원불교나 불교 용어로 표현해본다면 나에 갊아 있는 최고의 경지로 올라가게 되면, 나안에 갊아 있는 성품, 불성을 백 프로 실현하는 경지가 되죠. 그것과 의미가 같은 것이에요. 내가 가능성으로 부여받고 있는 이 본래마음, 성품 불성을 아무런 장해나 기울어짐이나 막힘이나 치우쳐짐이나 어리석음이나 없이 백 프로 온전하게 발휘하는 상태, 내유신령이다. 그걸 이제 좀 현대에 갖다가 우리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는 말로 하면 영성이다. 시는 영성이다. 하나, 그 다음 두 번째의 시의 의미는 외유기화인데, 나에게 갊아 있는 백 프로의 가능성을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고, 그것을 발휘는 하는 경지를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세상과 함께 세상과 함께 하는 것이죠. 신령의 사회화 영성의 사회화를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일반적인 객관적인 용어로 하면 혁명이다. 동학의 핵심사상은 동경대전에 있고, 동경대전의 핵심은 21절 주문해설에 있고 그것을 한자로 하면 모실 시로 하고 내유신령 외유기화이다. 영성과 혁명, 동학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곳은 영성과 혁명의 통일이다. 바로 그 관점에서 동학을 다시 바라봐야하고, 역사를 다시 봐야하는데, 지금까지 연구나 방향이나 관점이 한쪽으로 치우쳐져있다. 지금 현재도 역사 교과서에 해워로가 전봉준은 혁명 당시 대립했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있는데, 십수년 전부터 제가 30년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판을 했는데 학술상도 받고 했는데, 주류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런지 아나, 자기들이 구축한 기존의 체계가 이것으로 인해 무너질 것 같으니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영성을 추구하는 해월과 혁명을 추구하는 전봉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근데 그것에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들이대면, 양심적인 학자는 반론을 해야 되는데 학계에서 반론이 없어요. 어찌됐든, 영성과 혁명이라는 측면이 전혀 동학사상속에서나 혁명의 역사 속에서 대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였고, 하나의 방향을 동학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해월 최시형 선생과 동학혁명의 전봉준 선생이 같은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이 사람의 대립이 사실이 아니다. 이것을 토대로 설명을 좀 더 새롭게 해보는 강의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여러분들께서는 혁명이라는 것은 어떤 이미지인가 - 물리적인 폭력, 과격성, 혼란 조금 더 들어가면 희생 죽음, 그런 것이 있는데 정말로 그런건가. 끊임없이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의미를 추구하다가 집중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교토 대학에 1년 정도 연구년을 얻어서, 뿌리를 축약을 해보니, 혁은 바꾼다. 명은 천명이다. 천명을 바꾸는 것이다. 그 이 천명사상의 내용이 주로 어디에 강구되고 있냐면 사서삼경이라 그럴 때 삼경이 있다. 시경 역경 서경, 서전 속에서 혁명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 혁명이라는 용어를 구체적으로 추적을 해보니 명을 바꾸는 것이 혁명인데 이 명은 천명을 바꾸는 거다. 천명은 무어냐, 고대 동양에서부터 지금까지는 동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명은, 하늘의 뜻을 대신 해서 실현하는 최고 지도자에게 주는 명령이다. 이게 천명이다. 하늘의 뜻의 대신에서 이 지상에서 명을 실현할 최고 지도자에게 주는 명이 천명이다. 중국에서는 천자이다. 그 명령의 핵심이 보니까 뭐니 보니 안민-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동양 최고 지도자의 궁극적 사명은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최고 지도자가 하늘의 명을 거역하고 백성들을 학대하면, 세금을 가혹하게, 형벌을 가혹하게 한다면. 그다음에 백성들이 인간답게 삶을 살아가려면 의식주가 보장이 되어야하는데, 오늘날로 하면 생명을 유지하고 생활을 잘하고 생업을 잘 해나갈 수 있어야하는데, 이런 것들을 돌보지 않아버려, 백성들을 포기하는 것을 기민 이라한다. 이 하늘의 명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혹민, 기민을 할 경우에는 그 천자의 명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 그 역할을 못하는 지도자를, 지배시스템을 확 바꾸어버리는 것이 동양에서 혁명이다. 동양에서의 혁명이 지양하는 것은, 백성들을 살리는데 있다. 안민은 다른 말로 활민이다. 살림의 사상이다. 혁명이라는 것은. 혁명은 폭력을 가지고 들고 일어나서 소란을 피우고 과격하게 뭘 때려 부수고 이것을 혁명이 아니고, 이것을 서경에서 역사적으로 동양에서 강조되었던 혁명은 백성을 잘 돌보지 않는 지배시스템, 지도자를 바꾸어 거기서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해내고 살려나는 일을 혁명이라 한다. 그럼 혁명을 해야 한다. 그 혁명을 전봉준 장군이 한 것이다. 서양식의 혁명이 아니다. 레볼루션의 번역으로서의 혁명이 아니라 동양적 전통의 혁명사상에 입각해서 동학이 등장한 배경, 민란이 엄청 일어났는데 임술년에 60개의 민란이 일어났다. 왜 일어났나, 단 하루도 백성들이 살지 못했다. 세금, 서양의 위협, 먹고 살기 어려움, 홍수, 가뭄, 전염병, 민무사시평, 죽어가는 시대였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현실을 누가 인제 동학을 만든 수운 최제우 선생이 그들을 살리기 위해, 보국안민이라 했는데, 동학사상 속에 혁명적 요소가 있느냐, 너무나 많다. 동학이 결국 안민을 위해서, 진정한 동학을 위해서 그 당시에 많은 기록에 의하면 수운 선생이 새로운 사상을 펴니까 철학을 펴니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세력의 움직임을 조정에서는 불안하게 본 것이다. 한양에서 고종의 명을 받아서 대구를 거쳐 경주로 가는데, 문경새재를 건너 경주까지 400인데 골짜기 마다 동학 주문이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불과 1년 2년 만에 동학의 불길이 경상도 일대를 휩쓸었다. 왜 그런가, 기민과 한민의 시대에 안민과 활민을 들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불씨를 가지고 부활한 거다. 조정에 의해서 1864년 음력 12월에 수운 최제우 선생이 체포되어 대구 감형에서 처형을 당한다. 공적인 활동은 3년만, 조정에서는 창시자 교조를 처형했으니 끝난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 창시자보다 더 질기고, 염원이 큰, 아무튼 이 한국의 역사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보다 생명력이 강한분이 있을까 할 정도로 이 대단한 분이 뒤를 이어서 나오는데 친척은 아닌 것 같고, 본관은 같다. 경주 최씨이다. 친인척 같은 직접적으로 가까운 건 아니고 같은 집안이긴 하다. 이분이 뒤를 잇게 되는데 전해오는 여러 이야기를 들으면 옥바라지를 하는데, 대구로 간 스승님의 음식이나 옷도 갖다 드리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수운 선생이 혹독한 심문 4차례 받고 하는데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끌려가면 많이 맞지 말고 빨리 불으세요. 그건 죄가 아니다. 혹독하게 4회의 고문을 당하면서 취조를 당하니 친구관계든지 다 나오니 해월 선생의 이름이 나오고 하였다. 그러고 하였더니 몰래 너 이름을 내가 댔다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고 너는 위험하니 빨리 도망가라. 그러면서 담뱃대에 높을 고자, 날아갈 비자, 멀리 원자 해서 고비원해서 적어줬다. 어쨌든 옥바라지를 하다가 자기도 위험에 처해서 우리나라에서 기가 센 산이 몇 개 잇는데 모악산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지금 증산도가 거기서 퍼져 나오고 단학 기공이 거기서 나오고 있는데, 경상도 쪽에 기가 센 일원산이라고 있는데 무당들의 조직체 총본부가 들어서있다. 거기 가야 굿을, 무당 행세를 할 수 있는 그것이 있다. 그게 1864년이죠. 돌아가실 때까지 34년을, 도망 다니면서 동학을 일궈낸 거예요. 34년 동안이 사실은 수배자에요.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국가 정보원에 리스트에 올라있는 사람이다. 34년을, 수배자의 신분으로 전국을 돌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퍼트리고 제자를 기르고 조직화를 한 것이다. 동학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운 선생보다도 해월 최시형 선생이 더 대단한 분이다. 그 부지런함 성실함 인내력 끈기 오기 깡, 신념, 누구도 하나 대한민국에 살던 선조들 중에서 해월 선생 따라갈 사람이 없지 않나. 이분의 업적을 소개하면,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조실부모, 인간이 살아가는데 어릴 때 부모를 잃는 게 인생의 최고의 스트레스일거다. 정상적인 성장이 어려워지니, 해월 선생의 일생에 있어서는 인생의 큰 고비였을 것이다. 생활이 어려우니까 아마 10대 소년 시절에 남의 집 머슴이라고 하면, 노비라고 할 정도로 머슴살이를 10대 때부터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경상도 일대의 경주나 포항의 19세기 말의 종이 공장이 많았는데 조지소에 노동자로서 생활도 하고 그렇게 젊은 시절을 생활을 합니다. 기본 기초 학문도 없었어요. 일자무식이라는 일설도 있는데 나중에 보면 글을 써서 남긴 것도 있는데 수운 선생도 있는 게 퇴계학의 정통 계승 아버지가 주자학을 공부했지만 해월선생은 그런 학문적 이력이나 경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은 매번 성실한데, 34세 때 경상도 경주 용담에 이인이 났다는, 메시아 한분이 났다는 소문이 나서 그 소문이 들어가지고 동학에 입도를 하게 된다. 그게 1861년 34세이다. 해월 선생님이 당시 동학에 뛰어들었을 때는 어떤 동기로 뛰어들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우선 생각을 해보면 우선 신분적으로 대단이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했는데, 임금으로부터의 덕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회 소외계층인데 이런 사람이 종교에 뛰어들 때는, 자기가 당하는 이 소외를 종교를 통해서 뛰어넘는, 기도, 꿈 아니겠는가. 가난하고 신분이 차별받고 이런 수준에다가 이런 수준에 나중에 동학에서 큰 지도자가 되셔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핵심 이야기가 기록에 남아있는데, 그 소년시절에 10대 일 때 머슴살이 하고 제지공으로 일할 때 머슴놈, 머슴놈하는 이야기에 한이 맺혔다. 사람이 하늘인데 그렇게 차별할 수 잇느냐. 그러니 너희들은 인즉 천이니 사인여천하라는 배경이 10대 때 겪었던 차별이 있다. 그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그런 차별 없는 세상, 그런 소망 때문에 동학에 돌아온 것이다. 들어오셔서, 동학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있는데 21절 주문수련을 하게 되어 우주의 기운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할 수 있는데, 제가 한 25년 정도 글로 책으로만 동학을 연구하다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재미있게 감동을 줄 수 있게 하려면 나도 한번 그런 체험을 해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2006년도에 경기도 가평에 가면 황학산 천도교 수도원이 있어서 동학의 후예가 천도교인데 입도를 해야 되는데 입도식에 스승님이 되는 분으로부터, 접주로부터 수련을 위한 주문을 받아야한다. 그런 받는 주문을 제자 주문이라 한다.
입도 서약을 해야 되는데 원불교 교무가 입도 서약을 평신도도 아니고 일반 교도도 아니고 교무가 가서 입도를 했다고 하면 겁이 덜컥 났죠. 아이고, 입도는 못하겠네요, 하니까 저 혼자 간 게 아니라 15명 정도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하고 같이 갔는데 그분들도 수련을 해보고 싶다 했는데, 여러분들은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분들이니 입도를 안 해도 주문을 주겠다. 그래서 일주일간 주문수련을 했어요. 그게 빨리 할 때도 있고 소리 내서 할 때도 있고 침묵할 때도 있고, 현송, 묵송을 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것만 하는 겁니다.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아침에 일어나서 정좌를 해가지고 한 이틀쯤 하니 온몸이 쑤셔오고 주문보다는 몸이 아픈 마음, 그것이 수련인데 삼일 째 되니 그 고통이 사라지고 집중이 되니, 나흘째 되니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는데 떠오른다니까요. 나중에 가서 찍어봅시다.
그런 체험을 하게되어있어요. 그러다 보니 초기부터 그런 것이 굉장히 기록에 많이 나오는데 해월 선생이 아무리 수련을 해도 그런 것이 안 되는 거라. 강령, 신비체험이 안 되어 정성이 부족한가보다 해서 겨울에 집 앞 연못을 깨고 목욕을 하고 정진 수련을 하는데 조금 수련을 며칠 하다보니까 갑자기 공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이다.
찬물에 갑자기 뛰어드는 것은 따뜻한 몸에 해롭다. 그 메시지가 있었는데, 그 메시지를 올 때 용담에서는 수운 최제우 선생이 그런 문구가 들어있는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너지가 통한 것이다.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경지 도달의 위해 엄청난 정진을 한다. 그것이 해월 선생이다. 수련을 하던 분인데 선생이 돌아가시니 자기 이름이 나오니 도망가라고 하는데 일월산으로 도망가서 새끼를 꼬며 준비를 하는데 수운 선생에 대한 세상의 희망 이런 것들이 엄청났던 것 같다. 메시아 같은 식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많았는데 경상도 일대가 동학이 널리 퍼졌는데 하루아침에 도당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는 명목으로 처형되니 그냥 실망해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왜 우리 스승님을 처형 하냐, 실력 행사로 풀자, 억울함을 풀자하는 신자 제자들도 막 나왔다. 여러분들도 막 나왔다. 지금 중국에 가시면 파륜궁 이런 것 보셨죠? 파륜궁을 중국 정부가 탄압을 해서 지금 희생된 수련자들이 3000명이 넘는데 80프로 이상이 여성들이다. 시청가면 맨날 홍보하고 하는데 새로운 사상 철학 종교는 탄압을 하면 더욱 결속이 되고 강화되는 측면이 있는데 이 스승님의 한을 풀자 이런 것이 움직임이 있었다. 7년 동안 해월 선생이 겨우 하는 동안 1871년에 이필제라는 사람이 나와요. 저는 이 사람을 교도로 보는데 (동학) 지금처럼 교단이 있고 조직이 있고 경전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니니까 제가 수운의 제자다 하면 제자인 것이다. 이필제라는 사람이 일어나자, 한을 갚아야한다. 이래서 해월선생이 때가 아닌데, 이건 우리 스승님의 뜻이 아닌데 굉장히 고민을 하다가 굉장히 고민을 하였는데 해월 선생 빼고는 다 일어나는 분위기어서 해월 선생도 같이 운동을 일으킵니다. 그게 경상도 영덕군 영해면인데 그때 영해부라고 해서 굉장히 큰 고을인데 이필제의 난 등으로 유명한 태백산 호랑이라는 의병장 신돌석 등이 나오고 하니 이 고을을 해체를 합니다. 그때 난을 일으켰는데 실패를 한다. 양아들이 있었는데 양아들도 참석했다 희생당한다. 부인은 행방불명이 되고 이런 수난은 받고 강원도로 도망을 간다. 1870년대에는 강원도에서 동학 재건 운동을 한다. 동학은 경상도에서 퍼졌다가 영해의 이필제랑 사람들이 무너지고 나서 재건의 무대는 강원도다 여기서 동경대전을 편찬하고 동학혁명을 주도할 제자들을 완성하고 조직들을 복원하고 하는 것이 최시형 선생이다. 현재 충청북도에서 발굴이 되어 복원 성지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여기가 단양군에 있다. 어찌 되었든 거기에서 강원도 바로 옆이어서 그런지 있으면서 동학을 재건을 하고 그다음에 1880년대 쯤 되면 동학이 충청도로 넘어옵니다. 1860년대에는 경상도에 있다가. 그 다음에 1890년대쯤 되면 어디로 무대를 옮기냐면 전라도 쪽으로 무대를 옮긴다. 강원도로 옮긴다.
그리고 인제 전라도에 가면 전라도 사람들이 조금 문제가 있는데 동학이 전국적으로 나오는데 전라도에서 지역이기주의로 나온 것이 있는데 전국에 퍼져있는 동학의 유적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 그것이 해결되니 그것을 하라.. 무튼 이 일을 누가 맡았느냐 해월 최시형 선생이 한 거다. 모든 토대를 닦아놓은 분이 해월 선생이다. 근데 너무 모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렇게 동학을 일궈냈을까. 사람이 하늘이니까 평등사상과 관련되어 말씀을 드렸는데 이 평등사상 때문에 본인의 인생이 바뀐 몇분의 생생한 증언이 있는데 김구 선생이 황해도에서 과거에 떨어지고 낙망을 해가지고 뭔가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 안보이니까 명리학이나 사주관상이라 해서 그럭저럭 살까하다가 동학의 소문을 듣고 접주에게 갔는데 젊은 양반 접주가 맞절을 하니 그때 접주의 말씀이 우리 스승님의 가르침에는 사람의 차별이 없다. 백범 선생도 본인의 동학의 접주가 된 게 시천주라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동학의 평등사상, 인즉천, 사인여천, 손병희 선생님도 사회 신분을 조사해보면 천도교 분들은 꺼림칙할지 모르겠으나 충청도에 청주에 병영에 하급 관리의 첩의 아들인데 손병희 선생은, 그럼 이 첩의 아들은 기본적으로 과거를 볼 수 없고 무과를 볼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손 선생의 젊은 나날을 찾아보면 요새로 하면 건달생활을 오래했다. 마음을 못 잡으니, 홍길동 소설을 보면 잘 알겠지만 호부를 못했다. 그런 차별이 평생을 간다. 손병희 선생도 마음을 못 잡고 나이들 때까지 방황하고 그런 세월인데 나이 많은 조카가 먼저 동학에 뛰어 들고 나이가 젊은 삼촌한테 이것이 참 좋다 는 것을 해서 1982년에 손병희 선생이 동학에 뛰어든다. 그 역할을 해서 동학을 중심으로 신분제 해체를 갈망하고 양반 상놈 대접 없는 그런 평등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해월선생 덕분에 동학으로 조직화가 된 것이다. 그 다음에 해월선생이 무슨 일을 했냐면 1988년에 무자년인데, 이 무자년이 무슨 해냐면 실록에 나오는데 전국에 가뭄이 휩쓸었다. 전라북도 쪽 당시 기록을 보면 전라북도 일대가 전부 붉은 색으로 변했다. 다 말라버려서 식량 구하러 유민들이 떠돌고 그랬는데 당연히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다. 그 무자년에 해월 최시형 선생이 무슨 일을 했나 보면 전라북도 부안에 보면 천도교 수도원 호암수도원이 있는데 거기 92년에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시리즈 기사를 전북일보에 게재하기 위해서 한 달에 한번 답사를 하고 세미나를 하면서 호암수도원을 가보니 등잔 밑이 참 어두운 것이 학자들 가운데 아무도 있는 줄도 모르고 해월문집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거기 있었다. 무자통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자년에 전국에 있는 접주들과 도인들에게 보낸 공문이 있는데 거기서 발견을 했는데 거기 내용에 가뭄이 든 것과 관련해서 지금 올해 이 상황은 동생은 배불리 밥을 먹고 형은 굶고 있는 형국이다. 그럴 수 있나 , 그런데 형은 옷을 못 입고 떨고 있는데, 동생은 따뜻하다 말이 되느냐. 그러니 너희들 가운데 형편이 되는 사람은 추위에 떨고 굶주린 사람들을 구해라는 통문을 보냈더라구요. 그게 아주 동학의 유명한 사자성어에요 유무 상자(有無相資)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와라, 근데 해석을 할 때 보면 돈뿐만 아니라, 돈 유무가 아니라 지식 유무, 사회적 경험 유무, 몸 노동에 익숙한 사람 몸 노동 못하는 사람, 이 유무는 경우 다 다른데, 이 유무 상자에는 어떤 사람은 계속 받기만 하고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데 그런 것을 강조를 하셨다. 일방으로 하는 게 아니라 쌍방으로 하는 것이다. 이게 동학이 처음 생겼을 때 동학 혁명이 끝날 때까지 동학의 공동체 안에서는 이것을 실현을 했다. 충청남도 서산에 동학농민 혁명때 동학 접주 홍종식이라는 사람이 천신만고로 살아남았는데 증언을 듣는데 그 증언이 남아있다. 후배들이 가서 묻는데 선배가 어찌 동학에 뛰어들었나, 상황이 어땠나 하는데 동학에 하루 먼저 들어가면 하루 먼저 들어가면 양반이 되고 , 늦게 들어가면 노비가 되는 느낌이었다. 동학에 뛰어들면 굶는 사람이 없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서로의 공동체에 관한 것인데 갑오년에 최소 이백 오십 삼백만 명이 동학군이 되어서 희생되었던 장엄한 역사가 사람이 하늘이다, 라는 평등사상 + 이 굶는 사람이 없다는 공동체적인 끈끈함이 동학을 이루었고 이걸 이끈 사람이 해월 최시형이다. 이분이 청주를 지나시면서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34년을 떠돌아다니면서 어느 날 하룻밤 자고 새벽에 떠나는 날도 있고, 신변 안정시 수개월 있었는데 천도교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곳이 250곳 정도 된다. 청주에 서택순이라는 제자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는데 서택순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가다보니 베를 짜는 소리가 들려, 제자에게 저기 건넌방에서 들리는 소리가 뭐냐라고 물어보니 - 스승님들이 물어볼 때는 생각을 좀 해야 되는데 - 이때 천주직포의 법설,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게 아니라 하늘님이 베를 짠다.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이 땅의 여성들은 어떤 존재인가 보면 가부장적 시스템에 의해서, 이런 질서 속에서 과부는 개가를 할 수 없는 합법화된 억압적 질서가 온통 죄이고 있던 시대였다. 저는 어려서 목격을 했는데, 어머니가 아침저녁에 식사를 할 때 상에 못 오셨습니다. 누룽지 긁어서 한 국자 퍼서 부엌에서 그냥 드시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아니면 남긴 가족들, 그다음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나 보니, 갈치를 한 마리 굽는다. 제일 노른자위는 늘 할아버지, 그다음 할머니, 그다음 아버지, 그다음 애기, 그다음 엄마는 존재가 없다. 1950년 60년만 해도 엄마의 존재는 거의 치다꺼리하는 존재이다. 그 전에는 더했죠. 그런 시대에 해월 선생님이 저 며느리가 며느리는 아니고 하늘님이다, 하고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 조금 뒤에 경상북도김천 벽호동이라는 곳에서 앞으로 오는 시대는 여자들 중에 도통한 사람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공부하시고 적공하셔야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수도 규칙을 선포한다. 해월선생님이. 김천의 국회의원이 조금 보수적인 국회의원인데, 그분도 세상에 동학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없이 후원을 하셔가지고 가보면 기념비도 있고 그렇습니다. 사실은 원불교에 증산교에 또 보면 양성 평등사상이 있는데 이것의 원형 뿌리는 동학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적 양성 평등사상의 시초는 해월 최시형 선생이다. 현재 교과서에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그런데 교과서에는 잘못되어있다. 네 번째로 해월 선생은 어떤 사람인가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이 선생의 제자들을 조사를 해보니, 손병희 선생, 김계남 장군, 김제의 대접주였던 김덕명, 충청도에서 활약하는 서인주, 서정학, 박인호 이런 분들 해월선생의 제자이다. 이 제자들을 어떻게 양성을 했는가, 봤더니 당신이 싹수가 있겠다 싶은 제자들은 반드시 49일 수련을 시켰다고 한다. 지금도 천도교에 49일 수련제도가 있는데 이 수련원의 성지가 어디냐면 강원도 정선군 고환읍 정암사에 있다 접주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서 집터만 남아있는데 거기에가 센터가 되어가지고, 동학 혁명의 지도자들은 전부 거기서 수련을 시킨다. 이 수련이 어느 정도냐면, 제2차봉기가 일어날 때도 옥천에서 공부를 시킨다. 전쟁 중에도 공부하는 선배들이 우리 동학군 선배들이다. 전쟁 중에도 공부하고 수련한 게, 대종교에 지도자들도 그랬다. 전투와 수행은 하나다 이렇게 표방했다. 동학군도 그랬다. 해월 선생도 그 와중에 그랬다. 아. 이게 인제 혁명의 와중에서도 성공은 영성이 있어야만 한다. 제 그릇을 할 제자들은 전부 보냈다. 지금까지 전부 보냈는데, 49 전부 다했는데 전봉준 장군은 아직 자료가 안 나왔다.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 중에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익산 사좌암에 데려가서 구정선사 이야기가 있는데 손병희 선생님한테 그런 것과 비슷한 수련을 했다합니다. 전쟁 와중에 수련을 했을 정도로 이 영성의 문제에 악센트를 줬다는 것을 우리가, 해월 선생을 보면 리더십 같은 게 보이잖아요. 그다음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해월 선생이 체포되어 가지고 동학혁명이 끝나고 체포돼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이 때 교과서에 배운 대로 대한제국시대인데, 이 때는 법이 전통법에서 근대법으로 바뀌었는데 근대법에서는 목을 졸라서 교수형으로 해서 죽었다. 이렇게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때 묻는다. 조병갑이 판사로 해서 갑오년의 일을 아느냐, 전봉준을 아느냐, 해월 최시형 선생이다. 갑오년의 일은 다 내가 시켜서 한 일이다. 이때 해월 선생의 나이가 72세, 72세 노인을 교수형에 처하는 당시 시대가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스승의 뒤를 따라 이 해월 선생도 순교를 한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그 동안의 해월 선생의 전봉준의 일에 대해서 결사반대를 했다고 알았는데,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보니 그 생각을 했는데, 나이를 보는데 굉장한 차이가 나는데 아버지뻘이다(전봉준과). 스승과 제자의 사이인데, 근데 반대를 했다 이렇게 많이들 아시는데, 정말 그럴까, 특히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해가면서까지 경복궁을 점령해가면서, 했는데 그전에 이미 경복궁이 일본놈들에 의해서 불법으로 점령을 당하는데 경복궁 쿠데타라 하기도 하고 조일전쟁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런 시기에 과연 해월 선생이 전봉준의 생각에 끝까지 반대를 했을까 하는 것이 제가 박사논문을 쓸 때 고민, 화두였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래서 형제가 둘이 있는데 서로 사이가 안 맞는데 강도가 들어와서 형 동생을 죽이겠다하는데 그 강도 앞에서 형 동생이 싸울까? 그렇진 않을거다. 그 난리 중에 해월선생이 때는 아닐 거라 우겼을까, 그것은 아닐 거다. 그래서 자료를 찾은 것이 백범 선생의 자서전을 찾았는데 백범일지인데, 전라도에서 전봉준이 병사들을 일으켰는데 많은 도인들이 사살당하고 있다 어찌할까 보고를 받으시고, 호랑이가 집에 쳐들어와서 물어죽이고 있는데 앉아서 죽을 수 있나, 그럴 때는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워야지. 그럼 남북접 대립이라는 것과 안 맞다. 그럼 내추측이 맞다. 100년 동안의 정설의 자료 하나로 뒤집어? 그것은 위험하다. 다 반대하다. 한분만 반대를 안 하는데 그것을 빼지 말고 주로 넣었다가 나중에 보완하라. 그 때 박사 논문이 박사 논문을 낼 때는 인정을 못 받았는데 그게, 홋카이도에서 동학 출신 유골이 발견되는데 박사 논문 통과시켜놓고, 진상조사를 좀 해보니까 1997년에 일본을 가서 4년을 있으면서 한국학자들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동학의 원자료를 찾아냈다. 문서가 있는데, 외교성 산하에서 찾아냈다. 갑오년 3월에 전라도 무장으로 보내는 편지가 기록되어있는데 여기에 전봉준이 있었다. 그 문서에 비밀 연락루트가 있었다. 나중에 일본으로 온 것을 다 마치고, 제가 고민했던 것을 지지해준 스승님이 있었는데, 그때 그 때 해월선생 무덤을 찾아가서 펑펑 울었다. 그래서 100년도 지난 지금에서야 이 진실을 밝혀낸 것을 용서해달라고 펑펑 울었다.
그것을 온몸으로 실천한 전봉준 장군 이야기를 할 텐데, 학자들은 그런 게 있는데 학자들은 하나 찾아냈다고 해서 전부 다 틀렸다 할 수 없고, 국내가 똑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앉아 죽을 수 없으니 다 모여라, 백범, 일본, 우리나라 기록이 다 맞다. 1894년 양력 4월에 도쿄 아사이 신문에도 똑같은 기사가 나온다. 그것도 부족해서 또 조사를 해봤는데, 동학혁명 때 중앙지 200쪽이 나왔는데 동경대학 법학부에 보면 명치 신문 잡지 문고 보면 동학 현명 전후한 시기에 일본에 간행되었던 모든 잡지 신문이 보관되어있는데, 미아꼬 - 수도라는 뜻인데 거기도 똑같이 나온다. 거기서 주의해야할 것 중 하나가 동학 혁명이 충청북도 보은에서 대 집회가 잇을 때 어윤중이라는 관리의 직행이 양호도어사 인데, 호남과 호서가 양호인데, 전라도 집회도 있고 충청도 집회도 있는데 1차 혁명일 때 그것을 진압하러 내려가는 초토사가 홍계훈의 앞에도 양호가 붙는다. 미야꼬 신문에 보니 4월에 충청도부 전라도부해서 기사가 나오는데 지금까지 100년이 넘게 알려온 이유는 패배한 혁명이고 패배로 인해 36년간 신민사학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너네 조선은 일본의 고대 사회 정도였다, 정체성론, 당파성론, 지정학적인 사대주의 등을 세뇌하기 위해 그것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었던 한국의 역사에 최초로 연구했던 선배들이 동화해버린 것이 식민사학의 뿌리라는 것이다. 나라를 뺏긴 상처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사상 정신 얼 문화 전통은 회복이 안 된다. 세계의 식민지 연구를 하는 사람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기를 1년의 식민지를 걷어내려면 1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뒤의 자료가 좀 있는데, 전봉준이 동학교도이냐는 시비할 필요가 없고, 왜 뛰어들었는지는 2년 전에 대학원생들과 같이 혁명가 사상가 지식인, 이렇게 바라볼 수 없을까, 규장각 서울대에 국한본으로 되어있는 전봉준 마지막 이야기를 동학의 입도한 이야기 좋아한 이야기 해월 선생으로부터 임명받았던 이야기, 너는 동학을 왜 좋아 했냐, 혹호. 동학을 그냥 좋아한 게 아니라 한자로 혹은 영어로 하자면 최상으로 좋아했다. 박윤철식 해석은 동학에 목숨을 걸었다. 이렇게 동학에 목숨을 왜 걸었냐, 혹했냐. 동학은 수심경천하고 보국안민하는 동학이기 때문이다. 수심경천은 영성이고 천일 합일, 내 안의 성품을 밖으로 실현하는 것인데 하늘이 나에게 주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고 보국안민하는 사상인데 그것이 뭐냐 외유기화하고 또 같은 말이다. 이 세상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최고의 가능성을, 대각여래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 두 개의 길을 다 걷고 있는 수심경천과 보국안민이라는 것이고, 동학이라는 것을 흑호한 것이 이 이유다. 전봉준 장군이 동학수련을 엄청나게 했을 것이다. 어딘가에 수련한 기록이 있을지 모른다. 낮에는 진법을 수련하고 저녁에는 경문을 독송한다. 전봉준 공초를 읽어보면 싸운 이유, 일어난 이유를 하도 가혹한 세금, 열두 가지 못할 짓을 하는데, 부모자식 간에 의견차이가 안 맞으면 딸이나 아들이나 꽥 소리 지르면 불효죄로 잡혀가서 곤장치고, 농기구를 예전에 두레식으로 했는데 옆에꺼 빌려왔는데 제대로 말 못하고 농기구 가졌느냐 이러다가 서로 톤이 올라가면 화목하지 못한 죄로 곤장을 치고,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너는 피해를 받았냐. 너는 피해를 받은 것도 없는데 일어낫는데, 제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너무 고통 받는 것을 차마 눈뜨고 일어날 수 없어서,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일어났다. 공부가 깊어지면, 수련이 깊어지면, 눈이 열리면, 나가 확대되어 가는데, 철이 들면 내가 확대되어 가는데 진짜 철이 들면 작은 나는 없고 큰 나만 있다. 큰 나가 되어버리면, 북한 동포가 굶어죽는 게 내 아픔이고, 왜 그러면 서울에 군대랑 싸우면 군대의 대포가 수 백명이 쓰러져 죽는데 그냥 잇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싸웠다. 동학군의 전술은 사람을 죽이는 전술이 아니라 몰려가지고 주장외치고 하는 것이다.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군과 싸운 것은 우리를 알린 것도 없이 새벽에 8000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고종을 포위하고 군대를 해산시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압하였는데 너네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일어났다. 그것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전봉준과 같은 한민족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40살 밖에 안 된 무명의 선비가 국제법에 어긋난 생각이 없었다. 이것을 일본에 가서 이야기하니 난리가 났다. 엄청난 박수를 일본에서 받았다. 눈을 떠가지고 매년 20년 25명씩 와서 한국사람과 교류하고 참회 반성한다. 전봉준 장군이 어떤 분인가. 연합뉴스하고 한국일보하고 인터뷰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억압 소외된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없었다. 만 40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데, 내 이 피를 종로 네거리에 뿌려서 그걸 조선 사람들이 다 밟고 지나가게 해달라. 전봉준에 사형언도를 내리는 장박이라는 개화파 관리가, 그 이야기를 남겨 놨다. 우리나라에 정치범 제도가 없어서 당신을 구제해주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그때는 일본 정부 장악이라 개화파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개혁이 일어날 수 없으니 편히 눈 감고 가시라. 이 내용이 동경 아사히 신문에 나와있다. 전봉준 장군이 돌아가실 때 참 외롭지 않았구나, 우리가 알았던 전봉준 장군의 이미지가 얼마나 한편으로 치우쳐져있었나.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뉴라이트라든지 보수에서 공격하는 게 진짜 턱없는 것인데, 진보의 최고의 가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사랑, 이것은 좌우 진보 보수도 없는 것인데, 이것은 전봉준 장군이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인데, 해월 최시형 선생님과 하나였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 앞으로 기회가 되시면 전봉준 장군에 대해서 좀 알아보시고 해월 선생에 대해서도 알아보시면 좋겠다. 오늘 준비한 자료는 지난 5월 12일에 성공회 대학에 특강을 갔는데 거기서 특강을 한 것인데 들은 학생이 정리를 한 건데, 매우 현대적인 쉬운 말로 잘 풀어놨다. 정리한 김여진이라는 친구가 아주 잘 정리를 해서 읽어보시라고 가지고 왔다. 오늘 시간에는 덜 흥분한 것 같다. 오늘 10분 정도는 지난 주 강의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궁금한 점, 의문 나는 점 남겼다 하시면 질문해주세요.
문1)동양의 혁명과 서양의 레볼루션의 차이?
레볼루션은 근대 학문의 용어인데 낡은 체제나 제도를 일시적인 폭력이나 무력으로 타파해서,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운동이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는데 낡은 체제, 무너뜨려야 될 것인데, 대표적으로 프랑스혁명인데, 폭력을 통해서 타파해서 새로운 체제로 만드는 것이 서양의 레볼루션과 이 번역어가 한국에 퍼져있는데 횡행, 서양의 세력과 압력, 압도당해서 근대국가가 생기다보니 모든 한국에 있어서 개념 용어라든지 서양식으로 바뀌어져 들어왔다. 동양의 종교의 진리는, 종은 마루의 종교는 가르침, 진리의 교, 으뜸인 가르침인데, 릴리젼의 번역으로 종교로 쓰니,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라는 것인데 모든 용어가 서양화 되어있는데 어쩔 수 없이 이것을 쓰고 있는데 이것에서 없어졌던 원래된 뜻을 찾을 필요가 있다.
문2)동학이 어두웠던 시대를 밝히는 시민운동 사회운동과 연관이 있는데, 원불교에서 교무님이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게 있는지, 그런 분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일본이 안 바뀌는 것 자체가 희망이 있다고 했는데, 희망이 왜 희망이라고 하는지 궁금하다.
답2)동학이 사람을 살리자는 생명을 살리자는 것이 중요한 핵심 정신인데, 생명사상으로 생각을 해서 ‘한살림’이 있는데 유기농이 있고 시민운동으로서 ‘한살림’이 있는데 모심과 살림이라는 시민운동연구소가 있다. 지금 환경운동이나 탈핵운동이나 여러 측면에서 동학에서 생명과 사람을 살리자는 근본정신이 있기 때문에 여러 운동들에 한국적인 토대 뿌리가 시민 사회에서는 붐이 일어나서 특히 2014년을 전후해서 공부동아리가 50개 생겼다. 동경대전 읽는 곳. 답사 다니는 곳 있고, 지난 2년 동안 가장 놀라운 변화가 여성동지들이 들고 일어나서 2년 동안 공부를 하며 소설을 써서 15권이 나왔다. 어제 또 연락이 왔는데 그게 퍼져 나가서 제2동학소설 그룹도 생겼다.
문)실패에 대해서, 역사를 공부를 했을 때, 방법론적으로 우선순위가 나뉘다보니 갈등과 정치적 미묘한 입장차가 있었을 텐데, 동학이 종교로까지 발전을 못했고, 4대종교로 발전하진 못했고, 교무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기본 뿌리나 바탕은 되었지만 동학이라는 이름을 걸치지 못하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아봤는데 실패의 요인이 뭘까?
답)현재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고 사는 이런 시스템 제도 문물은 전부 근대의 산물인데, 근대란 시대의 산물인데 근대는 서양이 만들었고 적어도 17~19세기에는 이것이 전 세계를 휩쓸고, 이것이 휩쓸 때 전통문화라든지 모든 동양의 것을 깡그리 뭉개면서 오는데, 서세동점 등 이런 것이 오는데 중국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동양이 당했다고 본다. 거기에 큰 원인이 있는데 그 당한 과정에서 그래도 일본은 재빠르게 서양편에 붙고, 서양의 첨병적 역할을 했다. 모방쟁이를 했다. 중국은 워낙 대륙이 컸고 역사도 길고 하니 반반 정도, 우리는 완전히 당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경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왜 서양에 붙었을까, 하는 것도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중국이 청나라가 등장하면서 중국의 가장 핵심이 되는 문화는 망해버렸다. 그 문화를 우리가 갖고 있다. 우리는 소중화주의를 표방해가지고 우리는 중국에서 없어진 유교 알맹이를 끝까지 지키다가 서양에 대해 거부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주체성 전통을 지키려는 게 우리가 더 강했다. 근데 제국주의 앞에서 무력했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 근대가 그런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 그게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이라고 봐지고, 거기서 세부적인 실패를 따지면 된다. 그런데 자질구레한 것만 보면 거시적인 안목이 열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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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썼네~ 착하네 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