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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정례법회] 청년법회
정산종사법어 경륜편
원기 106년 03월 06일
설교 : 전성욱 교무님
타이핑 : 박준성
정산종사님 법문 경륜편입니다. 다들 읽어오셨나요? 질문을 받은 세분은 확실히 읽으셨겠네요. 이경주, 심현승, 양도인 교우님은 읽은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읽어오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읽어오셨으면 이 시간이 은혜로울 것이고 안 읽으셨으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질문이 6개가 나왔습니다. 혹시 또 들으시다가 질문이 생기시면 질문해주시면 되겠습니다.
Q. 이경주 교우님
교단품, 경륜편, 회상편과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경륜편을 읽다 보면 교단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대종경 교단품에서도 전무 출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대산종사법어 회상편에서도 교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셋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A.
이 질문을 이해 못 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공부하는 경륜편은 2대 종법사님의 법문 중에 네 번째 편입니다. 교단품은 대종사님께서 언행록으로 만드신 대종경에 교단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교단품입니다. 그리고 3대 종법사님이신 대산 종사님께서 대산종사법어를 남기셨습니다. 그 가운데에 있는 법문 중에 하나, 회상편이 있습니다. 교단품, 경륜편, 회상편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을 했으니까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겠죠? 사실 질문의 범위가 조금 넓습니다. 다 읽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인데 간단히 답을 해보겠습니다. 원불교 교단 그랬습니다. 교단은 회상과 같은 말입니다. 회상이라는 것은 모인 것입니다. 교단도 모인 것이죠. 모여서 하나의 단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는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죠? 그것이 교단이고 회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불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모여있습니다. 경륜은 이 교단과 회상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죠. 순서대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교단품은 우리 교조이신 대종사님께서 원불교의 교단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또 전무 출신, 원불교에서 출가한 사람을 전무 출신이라고 합니다. 전무 출신으로서의 마음, 행동기준을 교단품에서 잡아주셨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경륜편은 2대 종법사이신 정산종사님께서 대종사님의 경륜을 이어서 어떻게 우리 원불교를 이끌어갈 것인가 그 본의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셨습니다. 3대 대산 종사님은 회상편에서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의 경륜을 더욱 확장하시고 더 세세하게,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밝혀주셨습니다. 그런데 세분이 살아오신 환경이 다르고 공부하신 바도 조금씩 다르셔서 표현이 조금씩 다르고, 중요하게 짚으신 내용도 다릅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표현 때문에 그런 것이지 들어가 보면 같은 표현이고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상충되는 것 같다면 어디에 맥을 두어야 할까요? 대종사님의 교단품에 맥을 두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뻗어 나오는 것이죠. 그다음 경륜편을 보고 회상편을 보면 됩니다. 사실은 같은 맥락이고 같은 지향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고 근본은 대종사님 말씀입니다. 대종사님 말씀을 근간으로 해서 정산종사님의 경륜편, 대산종사님의 회상편도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교과서와 참고서. 이렇게 표현하면 이해하시기 쉬우려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대종사님 법문만 공부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실 수도 있는데 우리가 생활 속에서 활용하는 측면에서는 경륜편과 회상편을 공부를 하면 더 활용하기가 좋고 의미가 깊게, 밝게, 넓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분은 한 분입니다. 한 곳을 바라보시고, 한 행동을 하신 분들입니다. 한 분으로 이해를 하시면 세 분의 법문이 같게 느껴지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답변을 들으셨으니까 교단품과 회상편도 읽어보면 좋겠죠? 그래서 원불교의 방향이 이렇구나,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구나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Q. 이경주 교우님
경륜편을 읽으면서 단체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처음에는 이런 단체들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다 제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을 생각해보니 제가 주로 지식 측면에서만 궁금증이 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법문을 읽으면서 지식과 관련된 질문이 아니라 수양을 하는데 적용하거나 생활하면서 적용할 수 있는 질문을 할 수 있을지 질문드립니다.
A.
질문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 질문했네요? 법문을 받아들일 때 지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본인의 성찰이죠? 이것을 지식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질문을 위한 질문을 벗어난 생활을 위한 실질적인 질문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요 하는 질문이죠? 우선 좋은 자각입니다. 지식을 위한 질문도 물론 필요하지만, 거기에 그친다면 아쉽습니다. 우리가 법문을 들을 때는 본의, 무엇을 하자는 말씀인지 파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것은 한 줄로 나올 수도 있고 두 줄로도 나올 수 있지만, 전반적인 것을 다 알아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해하는 데는 필요하겠죠? 그 본의를 아는 것. 뭐 하자는 말씀인가. 그것을 어떻게 내 생활과 마음과 연계시킬 것인가.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물론 법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도 필요합니다. 아까 단체도 궁금해하셨듯이, 그 활동을 알아야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죠. 그렇지만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 내 삶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오늘 경륜편을 공부하는데 정산종사님께서 밝히신 경륜은 어떠한가. 경륜이라는 것은 큰 어르신들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뜻을 세웠다고 해서 경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이 인정을 해줘야 경륜이 되는 것입니다. 경륜이라고 하려면 자격이 있어야겠죠. 경륜이라고 표현하지 않으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서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가 정산종사님의 경륜을 들으면서 나는 어떤 서원을 세울 것인가. 어떤 방향으로 머리를 둘 것인가. 이것을 대조해보면 경륜편 전체를 바라보는, 본의를 나의 삶과 대조해볼 수 있지 않을까. 경륜편을 읽어오신 분이라면 읽으시면서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본의와 생활에 대조한다면 읽으면서, 들으면서 바로 대조가 될 것 같습니다. 지식으로만 남게 되면 아하 하고 끝나는 것이죠. 좋은 질문이란 뭘까요? 은혜로운 것입니다. 은혜롭다. 유익이 된다. 그 질문을 통해서 본인에게, 듣는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 그 질문을 함으로써 내 생활이 나아지고 진리를 연마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이 좋은 질문이겠죠. 질문을 들으시면서 바로 내 생활, 마음하고 대조해보시면 됩니다. 물론 질문이 좋은 질문만 나올 수는 없습니다. 연마하고 하셔야 해요. 그렇다고 망설이진 마세요. 질문이 안 나오면 아예 은혜가 될지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질문을 하시면 좋겠고, 우리 경주 교우가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질문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는데, 들으면서 바로 나와 대조를 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안 되는 것들이 드러납니다. 이 법문에서 말씀해주신 것과 내 생활을 대조해보면 법문에서 이렇게 하세요, 이렇게 해봅시다. 하는데 똑같이 되나요? 안되죠? 안되니까 법문을 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럼 내 생활과 대조해보면 안 되는 것이 드러납니다. 해보면 안 되는 이유가 있거나, 이유를 모를 수도 있겠죠. 그때 질문하는 것이 좋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들도 비슷하게 안 되거든요. 듣는 사람들이 다 공감하고 자신하고 연결해볼 수 있는 질문이죠. 답은 앞에 드렸습니다. 이 법문을 들으면서 이것이 어떤 방향으로 가자고 하는 말씀인가 본의를 이해한다. 그 후에 마음과 생활에 대조한다. 그러면 되는 것 안되는 것이 드러나고 알고 모르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질문해보는 것이죠.
Q. 심현승 교우님
경륜편 17장을 보면 도치와 덕치에 대해서 나오는데 세전 치교의 도에서도 도로 다스리는 것과 덕으로 다스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도치와 덕치의 도, 덕이 대종경 인도품 1, 2장에 나오는 도와 덕이랑 다른 것인지 궁금합니다.
A.
이것도 질문이 좀 범위가 넓네요. 세전 치교의 도도 알아야 하고 오늘 배우는 경륜편 17장도 알아야 하고, 인도품 1, 2장도 읽어봐야 하네요. 이것을 다 아는 분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도와 덕 두 단어입니다. 다 같게 쓰였는지 묻습니다. 17장 간단히 보겠습니다.
정산종사법어 제4 경륜편 17 |
한 교무 사뢰기를 “저희가 지방 교화를 할 때 직접 이 세 가지로 다스리는 방법을 일러 주옵소서.” 정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도치의 교화는 곧 원리와 신앙으로 교화함이니, 자기 자신이 먼저 법신불의 원리와 대종사의 교법에 전일한 신심과 철저한 자각으로 앞장을 서서 일반 교도의 신앙과 수행을 이끌어 가며 모든 신심과 사업심을 근본에 집중시킴이요, 덕치의 교화는 곧 인정과 덕화로 교화함이니, 모든 인심을 잘 파악하여 개인 개인의 세정을 잘 보살펴 주며 촉(觸) 없는 마음으로 대중을 두루 포섭 교화함이요, 정치의 교화는 곧 규칙과 방편으로 교화함이니, 세상의 대세도 잘 알고 교도 일반의 동향도 잘 살펴서 경우에 맞고 규칙에 모순됨이 없도록 천만 방편으로 교화를 함이니라.” |
교화함에 있어서 세가지 다스리는 방법으로 도치 덕치 정치 세 가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도치의 교화는 원리와 신앙으로 교화하는 것이고 덕치의 교화는 인정과 덕화로 교화하는 것이고, 정치의 교화는 규칙과 방편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아울러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치교의 도에도 도치와 덕치가 나옵니다. 도로써 다스리는 교화, 덕으로써 다스리는 교화, 정으로써 다스리는 교화.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대종경에 나오는 도와 덕, 이것도 같은 것이냐고도 질문했습니다. 같을까요? 다를까요? 표현만 다를 뿐 맥락은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쓰인 한자도 같습니다. 도라는 것은 길도(道) 자를 씁니다. 마땅한 행할 바. 인도품 1, 2장에 보면 천도, 하늘이 행하는 도, 인도, 사람이 행하는 도, 사람이 행하는 도에는 부모 자녀 부부 등등 많은 도가 나옵니다. 그 관계 속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도가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 되는 도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도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많은 길이 있지만, 이 두 가지 길을 다 통한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고, 여러분들 본래 마음, 성품의 원리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이 도를 알면 다 통하게 된다. 그게 바로 저 일원상의 진리이고, 저 문을 알면 원리가 같으므로 모르는 것이 없게 다 알게 된다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도. 길을 알면 덕이 나타난다 했습니다. 사람 볼 때 덕이 있다 하죠. 어떤 사람을 덕이 있다고 하나요? 옆에 있으면 은혜가 나오는 사람입니다. 편안해지거나, 돈을 주거나, 가르침을 주거나, 은혜가 나오는 사람이죠. 그게 덕입니다. 인상만 좋다고 덕인이 아닙니다. 은혜가 나오는 사람이 덕인이에요. 도를 행하면, 마땅한 길을 행하면 은혜가 나온다. 그것이 도와 덕의 관계입니다. 세전에서는 이 맥락을 가지고 도치, 덕치로 표현하셨고 17장에서는 그것을 더욱 풀어서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도치 덕치 정치를 같이하라고 하셨습니다. 도로서 가르치고 덕으로서 가르치고 정으로서 가르치고 세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이 ‘교화’하면 가르칠 교(敎)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될 화(化) 부처님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교화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교화할 수도 있죠. 그런데 도치 덕치 정치가 다릅니다. 도치는 원리를 알려주면 이해하는 사람. 일원상의 진리, 사은 이야기하면 마음이 살아나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고, 덕치는 그것으로 안되고 정으로 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한번 해봅시다, 빵도 사주고,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도 주는, 인정으로서 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으로 교화가 됩니다. 때로는 하나 남은 정치, 규칙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원불교의 계문이 있습니다. 계문을 한번 지켜보자 해서 계문을 지키다 보니까 내 생활이 좋아짐을 느끼고, 행복함을 느끼고 알게 되면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화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게 맞는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원리로, 인정으로, 규칙 등을 통해서 교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화의 측면에서 도치 덕치 정치를 풀어주신 것이고 도와 덕의 관계는 이렇다는 것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은 어디서 나오나요? 규칙은? 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더욱 구체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와 덕은 인도품 1, 2장을 한 번 더 읽어보시면 의미가 더 분명히 드러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도, 덕과 같은 맥락이지만 더 넓고 깊은 의미라는 것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Q. 심현승 교우님
저도 경주 교우처럼 단체들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가 교단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현재에도 이러한 단체들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원불교 대사전에 검색하면 친절하게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 말씀해드리겠습니다. 금강단이 나옵니다. 금강이라는 것은 금강산 들어보셨죠? 똑같은 금강입니다. 금강단은 전무 출신 남녀 청년단체라고 되어있습니다. 옛날에 교무님들중에 젊은 남녀 교무들의 친목 단체로서 금강단을 만드셨습니다. 젊은 사람들끼리 뭉쳐서 교단일 해보라는 의미로 만드셨습니다. 지금은 금강단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고 금강회라고 하고 주로 남자 교무님들끼리 모여서 행사를 하거나, 축구 한 번씩 하기도 하고, 친목 단체로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 교무님들 오셔도 말리진 않는데 잘 오시진 않습니다. ^^ 여자 교무님들은 정화단이라는 단이 있습니다. 정화단에서 여자 교무님이 별개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남자 정화단도 있습니다. 그리고 유일학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리 교무님들이 졸업하는 학년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 제 학년을 유일학년이라고 했습니다. 유일학림은 지금 원광대학교 아시죠? 원광대학교의 시작입니다. 유일학림이 발전하고 발전해서 원광대학교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원불교 교육기관의 시초라고 보시면 됩니다. 원광 이런 표현도 나오는데 원불교 월간 잡지입니다. 현재도 나오고 있고요. 이 원광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들이 우리 교단에 많죠. 원광대학교, 원광보건대학교, 원광디지털대학교, 원광고등학교, 원광중학교, 원광어린이집. 많이 있습니다. 원광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학원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수위단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수위단회는 원불교의 최고 논의기관입니다. 원불교에 종법사님을 단장으로 하고 밑으로 남자 9분, 여자 9분 이렇게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남녀 수위단회를 구성하고 교단에 중요한 것들을 논의하고 중앙교의회라는 단체가 또 있습니다. 거기서 출재가 대표분들이 모여서 교단에 중요한 일들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교무님들끼리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같이 결정하게 되어있습니다. 중앙선원, 동산선원, 영산선원 이런 것들도 나오는데 훈련기관입니다. 이것이 발전되어서 전국에 각 도마다 훈련기관이 최소 2개씩은 다 있습니다. 그래서 훈련을 할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혹시 들어가고 싶으신 곳이 있으시면 안내를 해드릴 수도 있으니까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표현이 있는데 검색을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양도인 교우님
경륜편 8장을 보면 말과 행동을 원광으로써 하라고 하셨는데 사가 없이 하라는 것과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 스스로 생각했을 때에는 나라는 사가 없는 자리에 근본 하여서 하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어 질문드립니다.
A.
처음 오신 분들께는 질문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사가 없다, 공의 반대 개념입니다. 나, 개인을 넘어서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놓고 하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냐는 질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사 없는 생각, 말, 행동으로 표준을 잡아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법문을 보면 일원의 근본 자리에 바탕해서 일원과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래 마음, 성품 자리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원광으로서 하라는 말씀은 이 본래 마음자리를 떠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쓰라는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공부의 핵심입니다. 우리 본래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그 마음 그대로 쓰는 것이 원불교 마음공부입니다. 그러면 본래 마음이 뭔지 알아야겠죠? 그리고 그 마음이 유지되도록 지킬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킨 상태에서 그대로 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원불교 마음공부의 세 가지 힘, 삼대력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 본래 마음을 잘 알아서 잘 가지고 다니다가 그대로 잘 쓰는 것. 원광으로서 하라는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게 이야기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래 마음을 안다는 것도 쉽지 않고 지키는 것도 쉽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연습을 계속하는 것이죠. 본래 마음을 확인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본래의 마음을 지키고 쓸 것인가? 우리가 경계를 만난다면 우리가 처음으로 할 일이 뭘까요? 멈추는 것입니다. 생각을 멈추고, 행동을 멈춥니다. 보통 어떤 일을 만나면 생각을 마구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결정하고 행동하게 되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 생각이 본래 마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멈춰야 합니다. 생각이 굴러가는 것을 멈추고 내 마음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대부분이 큰 경계가 아니면 본래 마음이 회복됩니다. 해보세요! 거짓말이 아니고, 생각이 굴러가기 전에 아, 이 상황이 경계라는 것을 인식하고 마음을 멈출 시간이다 하고 그대로 생각 굴리는 것을 멈춰보세요. 그러면 내 안에 화남 원망 여러 가지 감정이 보입니다. 그대로 보고 있으면 없어집니다. 그런데 경계가 너무 크면 잘 안 없어집니다. 없앨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원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수양의 방법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염불이나 좌선이나 기도나 주문을 외우는 것을 통해 이것을 없앨 힘을 갖추는 것입니다. 보통은 멈추면 없어집니다. 그것이 잘되지 않을 때는 수양의 힘으로 일어나는 마음들을 바라봐서 녹여내고 다시 생각을 굴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제가 마음공부를 최대한 쉽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해가 되셨나 모르겠습니다. 이 법문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경계를 당해서 마음이 요란해지고 흔들리면 멈추라. 그것이 원불교 마음공부의 시작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정산종사법어 제4 경륜편 8 |
학인이 여쭙기를 “우리의 기관지와 우리가 세운 학교들의 이름을 ‘원광’이라 하셨사오니 그 뜻이 무엇이오니까?” 정산 종사 답하시기를 “일반적으로는 일원 대도를 빛내라는 뜻이나 원광 두 글자에 더욱 깊은 이치가 들어있나니, ‘원’은 곧 일원의 당체로서 만유와 만법의 근본 자리요, ‘광’은 곧 그 자리에서 만유와 만법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따라서 원은 체요 광은 용으로 모든 법이 여기에 다 포함되어 있나니, 이 뜻을 잊지 말고 잘 궁리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을 원광으로써 하라. 우리 회상의 발전은 그 가운데 있으리라.” |
Q. 양도인 교우님
복록의 유래라는 것이 정당한 일을 스스로 함으로서 결실이 있게 되는 인과의 이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머리로 대강 이해하는 것 같지만 명확히 설명하는 데에 확신이 없어 복록의 유래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A.
복은 복 복(福) 록은 복 록(祿)을 씁니다. 복록은 복 또는 복된 행동을 해서 받는 보상,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록의 유래에 대한 질문입니다. 정당한 일을 함으로써 그 결실이 맺게 되는 것. 이것이 인과의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복록의 유래를 풀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복은 어떻게 오는가? 이것은 도인 교우님이 질문해주신 것처럼 인과에 대한 말씀입니다. 인과라는 것은 지은 대로 받는다. 원인, 결과죠. 복을 지었으면, 죄를 지었으면, 그대로 받게 된다. 여러분 새해에 그런 이야기 많이 하셨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복 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과입니다. 복 받을 일을 하지 않았는데 복이 오지는 않습니다. 내가 지어야 옵니다. 유익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은혜가 될 일을 해야 합니다. 법문에서는 정관평 재방언 공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간석지 사업입니다. 간석지를 막으면 땅이 생기죠? 건물을 지을 수도 있고 농사를 지을 수도 있겠죠. 예전에는 주로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농사를 지으면 곡식이 나오죠? 그것을 통해서 돈이 벌리고 먹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것을 누가 먹고 쓰나요? 대중이 함께 쓰게 되겠죠? 대중을 위한 이익이 나옵니다. 그것을 팔아서 공부할 비용으로 쓸 수 있고 배고픔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일을 통해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인과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말로써 복을 지으면 복이 온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일을 하면서 스스로 열심히 힘들게 일을 했더니 거기서 곡식이 나와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었구나, 복이 왔구나! 스스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일을 통해서 인과를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질문 중에 정당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정당한 일을 해야만 복이 오나요? 정당하지 않은 일을 하면 복이 안 와요? 여러분들 도둑질 해보셨나요? 어렸을 적에 부모님 지갑에서 슬쩍 해보신 적 있으세요? 저는 있습니다. 그걸로 뭘 했을까요? 과자 사 먹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과자의 복이 제게 왔습니다. 부당한 일이죠? 복이 왔습니다. 그런데 뒤에 무엇이 따라 왔을까요? 회초리가 따라 왔습니다. 그러니 복도 왔고, 해도 왔습니다. 부당한 일을 해도 지금 당장의 복은 옵니다. 물론 해도 따라오죠. 훔치다 걸렸어요. 그러면 해만 올 수도 있겠죠? 그러니 상황 따라 다른 것입니다. 요즘 뉴스에 LH공사 나오죠? 지금 걸린 사람도 있고 안 걸리고 지나간 사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부당한 일을 했지만 이미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 사람들도 복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해가 갈까요? 안갈까요? 지금 땅 사놓은 사람들은 훔치다 걸린 거죠? 복을 받을 타이밍에 걸려서 회초리만 맞게 생겼습니다. 우리 법으로 그것이 명확하게 규명이 되고 제재가 가해진다면 좋겠죠? 모두가 다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라는 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이 법 믿을 것이 못 되네, 공정하지 못한 세상이구나’ 하고 원망을 할까요? 인과를 믿는다면, 지은 대로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부당한 일을 했기 때문에 뒤에 반드시 해가 온다는 것을 알 거예요. 그래서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제재하지 못하면 진리가 제재한다. 스스로 제재하지 못하면 누가 제재해요? 내가 훔치지 말아야지 하고 스스로 제지했으면 거기서 멈추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못해서 훔치려고 합니다. 그럼 누가 제재하나요? 엄마가 제재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을 넘어섰어요. 그러면 누가 제재할까요? 국가에서 제재를 하겠죠. 이것도 안 걸렸어요. 이러면 끝인가요? 진리가 제재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도 원인 결과로 매듭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LH공사 사태도 설사 공소시효가 지난 사람들은 못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만 진리가 반드시 제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당하지 못하게 한 것은 때로는 잠깐의 복, 이익을 볼 수도 있지만, 반드시 해가 돌아온다. 앞에 복이 있으면 더 큰 해가 돌아온다. 지금 복을 받지 않고 제재를 받으면, 엄마한테 혼나고 끝나지만 계속 훔쳐서 국가에 걸리면 징역을 살아야 하는 큰 해가 오는 거죠. 그것도 안 걸리면 나중에 발을 헛디뎌서 죽을 수도, 누구에게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리의 제제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인과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안 걸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걸리면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걸린 게 복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지금 걸려서 다행이다. 나중에 걸리면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업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인과를 믿고 사느냐, 안 믿고 사느냐는 우리의 삶 전반을 다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도 인과를 알려주는 것이 제일 급하다고 하셨습니다.
정산종사법어 제4 경륜편 13 |
정산 종사, 원기 41년 4월에 정관평 재방언 공사 착공식에서 치사하시기를 “대종사께서 우리 회상 창립 첫 사업으로 9인 단원과 함께 이 방언 대공사를 시작하신 것은 교단 건설의 경제 기초를 세우실 목적도 있었지마는 내면으로 그보다 더 깊은 뜻이 계셨던 것이니, 이제 재방언의 대역(大役)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번 사업도 그 의의와 가치에 있어서 첫 방언 사업과 둘이 아님을 알고, 9인 정신과 우리의 정신이 둘이 아닌 큰 정신을 발휘하여, 이번 일의 진행으로써 우리 동지들의 신심 정도를 알아보며, 우리 동지들의 사업 역량을 알아보며, 복록의 유래와 영육 쌍전의 표본을 이번 일을 인연으로 더욱 절실히 각성하자.” 하시니라. |
경륜편 정리를 하겠습니다. 경륜편 하면 원불교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살 것인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탈것 중에 가장 큰 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가장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는 것. 뭐가 제일 클까요? 원불교에서는 가장 큰 탈것으로 부처님의 법선을 이야기합니다. 법의 배를 탄다. 여러분들이 행복하게 살고 싶죠?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잘살면 좋은데 때로는 여러분들도 판단 못할 때도 있잖아요. 내가 잘 하고 있나? 이런 의구심이 들죠. 그것을 성자들께서 대종사님께서 법문을 통해서 밝혀주셨습니다. 그것을 공부하는 것이 원불교고, 다른 종교도 있죠? 그것이 법선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탈 수 있습니다. 인원 제한이 없습니다. 수억만의 사람들이 다 탈 수 있고, 어느 생령도 다 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경륜편은 이런 법선을 잘 운영하기 위한 원칙, 방향을 이야기해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오셨다는 것은 그 법선을 타겠다는 것이고, 탔다는 것이고, 내리지만 않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마음을 잘 닦아가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다. 저는 그것을 확신해서 출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출가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부를 하시면서 수시로 이것을 느끼시면서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여기서 내리지 않고 믿고 계속 가보겠다는 마음이 나셨으면 제가 좋은 게 아니라 여러분이 좋은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은혜롭습니다~^^*
감사합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준성교우님~!!
감사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