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을 감기세요
내 눈빛을 가려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걷지 않고서도 당신에게 갈수 있고
입 없이도 당신에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당신 손으로 꺾어 주십시오
그래도 내 가슴으로
당신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내 심장을 도려내 주십시오
그래도 내 뇌는 당신을 향해 뛰놉니다
당신이 내 뇌 속에 불을 놓으신다면
내 핏속으로 당신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
이 처절한 시는 천재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가 지은 〈내 눈을 감기세요〉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릴케가 애절하게 찾는 '당신'이 바로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 1861~1937)이다. 루 살로메는 작가이자 평론가였으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저술이나 학문적인 업적보다는 니체와 릴케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여인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릴케의 원래 이름은 르네(Rene) 마리아 릴케였다. 그런데 릴케의 이름을 바꾸게 한 사람은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라는 한 여성이었다. 스물한 살의 무명 시인이었던 릴케는 살로메를 만나자마자 한눈에 반한다. 서로 친해질 무렵 살로메는 ‘르네’라는 이름이 프랑스풍이고 여성적이니 남성적인 독일풍 '라이너'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릴케는 두말 않고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뿐만 아니다. 릴케는 살로메의 글씨를 닮으려고 자신의 서체까지 바꿔버린다. 그녀가 릴케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이다. 비평가들은 릴케의 문학 세계를 구분할 때 살로메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눈다.
루 살로메는 1861년 2월 12일 프랑스계 위그노 교도인 러시아 고급장교 구스타프 살로메와 북독일-덴마크계 상인의 딸인 루이스 윌리엄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 등장하는 남성은 네덜란드 출신의 루터교 목사인 길로트(Heinrich Gillot)였다. 그녀를 '루이자'라는 이름 대신 '루'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다. 루는 열일곱 살 때 무려 스물다섯 살이나 연상인 길로트 목사를 만났다. 그녀가 길로트를 찾아간 것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 루는 종교에 대한 교육을 받으러 그를 매일 방문한 것이지만, 그녀는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어느 날 길로트는 루에게 진한 키스를 했다. 그녀는 대단히 혼란스러워했다. 그날 이후 루는 단호하게 결별을 선언했다. "나는 영원히 당신의 아이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루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스위스에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스위스의 취리히 대학은 여자에게 입학을 허용하는 몇 개 되지 않는 대학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 대학 철학부에 입학했다. 그런데 루가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기침을 심하게 하다가 피를 토하고 만 것이다. 루는 건강 문제로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니체와 만나게 된다. 루는 니체와 파울 레, 세 사람과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니체는 파울 레보다는 다섯 살 위였고, 루보다는 열여섯 살 위였다. 이 세 사람은 루의 어머니와 함께 여러 달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했다.
니체는 루에게 완전히 빠져 그녀에게 매달렸으나, 루는 육체적으로 남자와 사랑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루는 니체의 절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울 레와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해 기묘한 동거를 계속했다. 루가 니체와 레, 두 사람과 함께 기묘한 삼각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그녀의 이름도 점차 지성인들의 사회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루와 이별한 상처를 안은 채 절망 속에서 니체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1부를 불과 열흘 만에 완성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얼마 후에는 제2부도 비슷한 속도로 썼다. 이러한 와중에 루는 결혼이라는 의외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루의 남편 안드레아스(Carl Friedrich Andreas)는 페르시아 문화에 정통한 베 르린대학 언어학과 교수였다. 루가 안드레아스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루에게 청혼했고 그녀가 거절하자 그 자리에서 칼을 꺼내 자신의 가슴을 찌른 것이었다. 그의 자살 시도에 놀랐던지 그녀는 '독신결혼'이라는 조건으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섹스를 하지 않고 루와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도 용인한다는 조건이었다. 안드레아스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는 루가 육체적으로 미성숙 상태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녀가 제시한 조건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루가 잠들었을 때 안드레아스가 그녀와 육체관계를 시도하자 루가 그를 거의 죽일 뻔했던 사건이 발생하면서 루가 제시한 조건이 무척 진지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사건 이후 두 사람의 기묘한 결혼 생활은 무려 43년 동안이나 처음의 조건 그대로 유지되었다. 안드레아스와 루의 결혼으로 파울 레와 루의 관계는 끝장이 났다. 파울 레 역시 니체와 마찬가지로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루는 작고 볼품없는 몸매에 쉽게 부러질 것 같은 아주 가느다란 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자들을 열광하게 하는 강한 마력도 있었다. 릴케 역시 그녀의 덫에 걸려들었다. 루가 릴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여섯 살이었고 릴케는 열네 살 아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루에게는 아주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동안 소녀의 몸에 갇혀 있던 루의 육체가 눈을 떠서 비로소 진정한 여인이 된 것이다. “그 길은 어떤 사람도 나보다는 먼저 밟지 못했으리. 나는 그대 안에 있노라.” 서른여섯 살의 숫처녀. 감격한 릴케는 정열적인 시 수십 편을 써서 루에게 보냈다. 이 시들은 후일 릴케의 시집에 고스란히 실렸다. 루와 릴케의 관계는 3년 정도 지속되었다.
루와 릴케의 관계는 후일 《닥터 지바고》를 쓰게 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의 아버지이자 화가인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와 어머니인 피아니스트 로자를 만났던 두 번째 러시아 여행에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릴케는 뛰어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작품을 통해서 본다면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아주 심약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의 사소한 소리나 냄새에도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신적인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위험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루는 릴케의 이러한 면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당신의 아내였던 이유는 나에게는 당신이야말로 유일하게 실존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단호한 이별 통보를 릴케는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곧바로 젊은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Clara Westhoff)와 결혼했으며, 외동딸 루스(Ruth)를 낳았다. 릴케가 가정을 가지면서 안정되자 루와 릴케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그 이후 평생 동안 절친한 친구로 지내게 된다. 릴케는 간간이 정신착란 증상을 보이다 1926년 스위스에서 만성 백혈병과 종양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 그는 루에게 편지를 보내어 애절하게 그녀의 방문을 청했다. 루는 답장을 보냈지만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신분석 의사로서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병이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루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뼈저린 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2년 후에 그를 회고하는 짧은 책을 출판했다. 한국에서는 《하얀 길 위의 릴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원래 루가 붙인 제목은 무미건조하게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