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흥사는 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574번지 용구산에 소재하며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전 백제 침류왕 1년(서기 384년) 인도승 마라타 존자가 초암을 지어 개산한 이래 5차에 중창과 복원을 하였으며 임진왜란시 전소된 것을 일옥 진묵대사의 발원으로 응준, 쌍인, 혜증대사가 20년간의 대역사로 48동을 중창하고 산내에 암자를 창건하여 호남 제일 대가람으로 만들었다. 한편 이조시대에는 진묵, 쌍인, 백송, 환영 등 수많은 스님들이 선풍을 휘날렸고 그 후 큰스님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었던 곳이다. 또한 영조 대왕의 생모 최숙빈 대비가 한 때는 이곳에서 기도하여 영조 대왕이 탄생하였고 영조께서 등위한 후 여섯 명의 상궁을 모실 육상궁을 지어주고 일체의 세금을 면세토록 하는 특혜를 주었으며 본래 사명 몽성사를 국왕과 나라를 위한 뜻에서 용흥사라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서기 1907년 한일합방 직전 48동이 거의 전소된 것을 모정선사 서기 1930년부터 10년에 걸쳐 11동을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 동란으로 1950년 12.29일에 작전상 아군의 손에 불행하게도 한 채도 남기지 않고 모두 전소하였다. 그 후 어느 스님이 요사채 2동을 지어 명맥만 이어오다가 1970년 호월 스님이 15평 가량의 임시 법당을 지어 관리해오고 있으며 1988년 10월 15일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현대의 모습으로 변모시킨 이는 현 주지 진우 스님이시다. 진우 스님은 2000년 주지 소임을 맡아 10여년간 불사를 계속 해오고 있다. 스님 부임 당시 용흥사에는 전각이라고는 기둥이 썩어 비가 줄줄 새는 법당 한 채와 임시 거처가 전부였다. 도량은 잡풀이 무성한 폐허나 다름없는 곳이였다고 한다. 조립식 건물을 지어 생활하며 불사를 시작했다. 부임 첫 해 축대를 쌓고 1칸짜리 산신각을 지었다. 2003년에는 주법당인 대웅전을 2000년에는 요사채인 중화당과 회성당을 건립했다. 2007년에는 비가 새던 법당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미타전을 짓고 선원인 적묵당을 세웠다. 그리고 2008년 누각인 보제루를 건립, 1층은 종무소로 활용하고 있다.
§지혜롭게 사는 길§
오늘 내가 빈천하거든 전생에 베풀지 않았음을 알 것이며 자식이 나를 돌보지 않거든 내 부모를 내가 편히 모시지 않았음을 알라. 남의 고통 외면하고 악착스레 재물을 모아 자식을 줄려 하였거든 일시에 거지되어 허망할 때가 있을 것을 각오하라.
상대는 내 거울이니 그를 통해 나를 봐라. 빈천한 자를 만났거든 베풀어야 그 같이 될것을 알라 가진 자 보고 질투하지 마라. 베풀어서 그렇고 없는 자 비웃지 말라, 베풀지 않으면 너 또한 그러리라. 현세의 고통은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이니 복밭의 씨앗들 뿌리지 않고 어찌 거둘 수 있으리오.
뿌리는 부모요, 줄기는 부부이며 열매는 자식이라. 부모에 거름하면 부부자식 절로 되고 뿌리가 썩어지면 부부 자식 함께 없어진다. 단촐하다고 좋다마라, 다음생에 어디가나? 첩첩산골 외딴 곳에 외로워서 어찌 살 것이며 오손도손 화목한 집은 서로 도와 만났느니라. 오래 살고 고통하는 것을 보면 부모 천대한 것이 원인이고 불구 자식 안았거든 부모에게 불효한 과보니라.
내 몸이다, 내 입이다, 네 마음대로 하였느냐? 네 몸이 도끼되고 네 말이 비수되어 한 맺고 원수 맺어 죽어 다시 만난 곳이 이 세상 너의 부부 너의 자식된 것 알겠느냐?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지은 자도 너였었고 받을 자도 너이니라. 오는 고통 달게 받고, 좋은 종자 다시 심어 이 몸 받았을 때 즐겁게 가꾸어라. 짜증내고 원망하면 그게 바로 지옥이고 감사하게 받아 살면 서방정토 여기 있으니 마음 두고 어디 가서 무얼 찾아 헤매는가? 이 일을 깨쳐 열심히 정진하여 우리 모두 성불하세.
용흥사주지 진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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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에고향 원문보기 글쓴이: 옛날에금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