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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위한 성경적인 가르침(잠23:13-18)-2019.5.5(어린이주일)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요, 이번주간에는 어버이날이 들어 있고(8일), 이달에는 스승의 날(15일)과 성년의 날(20일)과 부부의 날(21일)이 있습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성도의 심령이 평안하며, 교회도 평안합니다. 교회와 가정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이라기보다는 자녀주일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는지 모릅니다. 왜냐면 모든 어린이는 자녀에 포함되지만 모든 자녀가 어린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자식들이 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던가요? 그중에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는 자녀들도 많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잘 자라주는 자녀들도 많습니다. 자녀라고 할지라도 자녀들만의 고유한 인격이 있고 개성이 있으며 삶의 목표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부모들이 기대하는 소망은 부모들의 욕심일는지 모릅니다. 때문에 자녀들의 개성이나 적성을 무시한 채 부모들이 원하는 대로 자라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불행한 삶을 강요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피에로가 아닙니다. 더 이상 부모의 소원을 대신 풀어주는 수단으로 자녀를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자녀들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고유한 인격을 부여받은 소중한 인격체입니다. 사실 예전에는 많은 부모들이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은근한 압박을 해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치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리만족시켜주는 방편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절대 그러면 안됩니다.
지금은 고도로 분업화된 세상입니다. 다원화된 세상에서 우리 자녀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적성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존중해주고, 배려해주며, 용기와 소망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믿는 자는 자녀들이 분명한 소신을 갖고 삶의 질을 높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는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자녀교육은 없습니다. 자녀들의 행복은 부모의 행복이기도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자녀들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충분히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행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가정의 자녀들이 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믿는 자에게 본이 되며, 불신자에게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성도들은 자녀교육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면 잘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교육이 무너지면 인간성이 파괴되고 심각한 사회문제가 야기됩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합니다. 가정교육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내가 속한 우리 사회의 행복이며, 국가 전체의 행복입니다. 불신자는 몰라도 믿는 자의 가정은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성경적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을 예로 들어보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국가입니다. 그들은 공립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미국의 꿈을 이룬 케네디에 의해 성경이 홀대를 당합니다. 1961년도에 대통령이 된 케네디가 이듬해인 1962년에 모든 공립학교에서 성경교육을 폐지하고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말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케네디는 1963년도에 달라스에서 암살자의 총탄에 저격을 당하고 죽습니다. 그로부터 케네디가의 저주가 시작됩니다.
미국인들은 40년 동안 학교에서 성경 없는 교육을 경험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미국인들의 종교적인 문맹은 극에 달했습니다. 미국사회의 혼돈과 무질서와 인간성 마비와 사회문제는 심각했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고도의 문명사회를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사회적인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아 인간성이 상실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병리현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회는 다시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결국 2천 년대 들어서 성경의 공교육화운동이 시작되고 무려 37개 주에서 성경교사를 확보하여 성경교육을 부활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켄터키주에서 성경을 정식교과목으로 채택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는데 무려 34:4의 찬성으로 통과된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법안을 발의한 그들의 이유는 성경이야 말로 사회와 문화뿐 아니라 문학과 법률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에 성경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세익스피어 작품만 보더라도 성경이 무려 1300여회가 인용되었다합니다. 그러니 성경을 모르고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합니다(딤후3:16-17절).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히4:12). 세상에 성경보다 더 좋은 자녀교육 지침서는 없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녀교육에 대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가르침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교육해야 할까요?
(1) 부모와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13-14절)
세상의 모든 자녀들은 예외없이 가장 먼저 자기 부모와 만납니다. 그리고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양육과 교육을 받게 됩니다. 최소한 스스로 독립하기까지 일정기간 동안 부모와의 만남이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부모님의 양육방법이나 교육철학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때문에 자녀교육을 가장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계속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가정이고, 교육자는 부모님인 셈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기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가장 책임 있는 당사자라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걸음걸이를 보고 배웁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교육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비전을 가져야합니다. 책임의식을 가져야합니다. 특히 믿는 자의 부모는 더욱 그러합니다. 무엇보다 부모자식간의 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소통은 대화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에서 부모자식간의 대화가 없습니다. 대화가 없으니 소통이 안되는 것은 자명합니다. 솔직히 내 자녀가 가정에서 부모와 소통이 안되는 데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 원만할 수 있겠습니까? 가정에서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정에서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정에서 도덕과 질서를 배워야 합니다.
가정은 우리 자녀들의 인성과 덕성이 형성되는 최고의 교육장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서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그들만의 인격을 형성해 나갑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비행자식들이 많아지는 가장 큰 이유는 가정에서 인격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자녀와의 소통이 안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자녀와의 소통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다른 곳에서 잘못된 소통을 하고 다닙니다. 사랑이 없는 소통은 탈선과 비행을 생산해 낼 뿐입니다.
본문은 부모들에게 자기 자녀들과의 바람직하게 소통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자녀교육 방법입니다. 13절과 14절을 읽어 보십시다. 13절 말씀은 복잡한 말씀이 아닙니다. 쉬운 말로 자기 자녀를 훈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한 부정 어법을 통해서 강한 긍정을 유도해 주고 있습니다. 자녀의 잘못을 따끔하게 나무래 주라는 것입니다. 훈계가 통하지 않으면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채찍이라는 말을 하니까 겁이 나지요? 요즘 우리가 인권에 대해 아주 민감한 시대를 살고 있기에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체벌문제는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육을 위한 적당한 체벌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기는 곤란할 터이지만 말입니다. 다만 저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씀드리기 때문에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맡기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율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물론 자율이라는 말이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든 것에 자율이 통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인간은 적당한 통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율은 죄악을 생산해내는 굴레에 불과할 뿐입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 사람들의 인간성이 상실되는 것일까요? 왜 윤리와 도덕적인 해이가 극심한 것일까요? 지나친 자유와 자율이라는 제도 때문은 아닐까요? 통제되지 않는 자유와 자율은 일종의 방종입니다. 지나친 자율로 인하여 수상수하도 없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자녀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 때문에 윤리와 도덕이 무시당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부모는 본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자기자녀를 훈계와 채찍으로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훈계와 채찍은 사랑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훈계는 잔소리요, 사랑 없는 채찍은 폭력입니다. 사랑 없는 훈계와 채찍은 부모에 대한 노여움을 증폭시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때문에 항상 사랑으로 훈계하고 사랑으로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이 자녀교육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훈계하고 사랑으로 채찍하면 자녀는 결코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녀와의 소통이 바르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즘 사랑으로 훈계하지 않고 자기감정으로 자녀들에게 화풀이하고 채찍을 들기 때문에 자녀들이 삐뚤어지는 것입니다.
절대 부모의 감정으로 자녀를 양육하거나 교육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자녀를 폭군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녀에게 아무 훈계도 못하고 채찍을 들지 못하는 부모가 더 큰 문제입니다. 한번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보십시오(삼상2:24). 잠언서 13장 24절입니다. “초달을 차마 하지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니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초달을 하지 못하기에 버릇없는 자식이 됩니다. 사랑의 매는 자녀교육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선생입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2)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15-16절)
가정에서 부모와 소통하는 법을 배운 자녀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소통할 줄 압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조화롭게 소통하며 사는 것이 모든 부모의 소망이지요. 가정에서는 소통이 잘 되는데 세상에서 소통하지 못하는 자녀가 있다면 부모는 억장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특별히 믿는 자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보다 소통을 잘해야 합니다. 소통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잘 소통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지혜가 필요합니다(15절). 지혜로운 사람은 소통을 잘합니다. 소통이 잘 되면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상에서 소통을 잘하면 부모의 마음도 즐겁습니다.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형통하면 부모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소통을 잘하며 살아가는 또 다른 꿀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정직입니다(16절).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세상에 정직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정직하면 살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맞는 말일 것입니다. 솔직히 정직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부정직이 정직을 다스리는 것 같은 세상입니다. 부정직이 세상을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정직이 이깁니다. 최종적으로는 정직이 인정을 받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정직은 반드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정직이 통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만 통합니다. 아니 세상도 결국에는 정직이 승리함을 보여 줄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정직하지 못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녀들이 정직하게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정직하다보면 반드시 세상에서도 통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정직하면 우리 마음이 유쾌해집니다. 그러면 마땅히 부모의 마음도 유쾌해집니다. 혹시 부모된 자로서 우리 자녀가 불법을 행해서라도, 아니면 부정직해서라도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습니까? 절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소통하고 형통하여 즐겁고 기쁘게 살기를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먼저 지혜를 가르쳐야합니다. 그리고 정직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기쁘고 즐겁게 모든 이와 더불어 소통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자녀주일에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3) 하나님과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17-18절)
우리 자녀들이 가정에서 소통하고 세상에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소통은 하나님과 소통입니다. 아무리 다른 것이 잘 소통될지라도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이 막히면 모든 것은 헛것입니다. 가정에서 소통도 하나님을 믿는 자의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소통 역시 믿음을 전제한 소통이어야 합니다. 지구상에서 자녀 교육을 가장 잘하기로 소문난 민족은 유대인입니다. 그들의 자녀교육이 유명한 것은 성경을 통한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쉐마교육입니다.
쉐마는 신명기6장4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스라엘아 들으라(히, 쉐마 이스라엘)고 말씀하십니다. 쉐마는 이스라엘이 듣고 행해야 할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하나님에 관한 절대적인 진리가 쉐마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쉐마의 핵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것입니다. 그분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쉐마의 핵심입니다. 홀로 이스라엘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쉐마는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고, 가장 늦게까지 사용하는 말입니다. 쉐마는 이스라엘 신앙의 근거요 신앙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무려 3500년 동안 외세의 숱한 침략과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쉐마입니다. 쉐마는 그들 교육의 모체와 같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16-17절을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 한 구절만 보더라도 성경적인 자녀교육의 위대함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면 자녀 교육의 목적과 목표가 분명해집니다. 때문에 자녀를 성경적으로 양육시키고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성경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성경을 모르는데 어떻게 자녀를 성경적으로 교육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성경적으로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녀를 성경적으로 교육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내 자녀와 내가 진심으로 소통하려면 부모 된 내가 먼저 성경적인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소통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전제되지 않는 소통은 모두 다 헛된 것입니다. 모든 소통이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하나님 없는 가정의 소통을 꿈꾸고, 하나님 없는 세상과의 소통을 꿈꾸고 살아갑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 입술로는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크리스챤 부모들이 자녀의 영혼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갖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냥 세상에서 건강하고,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곳에 취직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살아가는 이방 사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영혼에 대한 어떤 책임의식도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에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입으로는 천국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자녀들의 천국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위기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영적인 일에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 많은 크리스챤들이 기도한다고만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대로라면 언젠가 때가되어 하나님이 부르실거라는 막연한 말만 되풀이 합니다. 얼핏 듣기에는 굉장한 믿음을 가진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자녀의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 사랑하는 자녀가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당장에 응급차를 불러서라도 병원에 가지 않겠습니까? 배가 더부룩하여 가스가 찬다고 말하면 병원에 당장 가서 진찰을 받으라고 주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자녀의 영혼이 세상의 더러운 죄악에 빠져서 지옥을 간다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있나요? 그러고도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부모된 자로서 자녀들의 육신은 누구보다 사랑할는지 모르지만 영혼에 대한 사랑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잘못된 사랑입니다.
혹시 믿지 않는 내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혼문제에 대해 금식하며 작정하며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몸부림을 치면서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보신 적이 얼마나 되십니까? 그만큼 자녀들의 영혼에 대한 갈급함이나 목마름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본문은 우리 자녀들의 영혼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경고합니다. 자녀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선언입니다. 물론 부모 된 당신의 영혼이 먼저 여호와를 경외해야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중한 우리 자녀들의 영혼이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해주시는 것이 최고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 자녀를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당신들의 영향력을 통해 자녀의 영혼을 망치게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의 영혼을 죽입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의 영혼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당신은 천국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당신의 자녀들은 공부하라고 주일예배에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당신은 천국을 말하면서도 당신의 자녀들이 등산이나 친구들과 함께 세상으로 놀러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중적인 신자들인지 모릅니다. 종교적인 위선자들인지 모릅니다.
정말 진지하게 자녀들의 영혼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자녀들과 함께 영혼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권면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솔직히 우리는 우리 자녀의 영혼문제에 대해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분문 18절을 보십시오. 우리 자녀들이 여호와를 경외해야만 장래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진짜 우리 자녀들의 장래가 보장되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알려주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권면해주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이끌어주십시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 부모와 바르게 소통하도록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와 바르게 소통하는 방법은 훈계와 채찍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사랑이 전제됨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세상과 바르게 소통하는 방법은 지혜와 정직입니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소통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나님과의 소통은 오직 믿음과 소망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그 길만이 우리 자녀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와 바르게 소통하고, 세상과도 바르게 소통하며, 하나님과 바르게 소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안내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자녀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주안에서 사는 복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복음이신 주님께서 자녀들의 마음을 만지고 만져서 주님 안에서 살아가도록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복음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복된 선물을 우리 자녀들에게 반드시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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