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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9:1-43
▣ 사울의 회심-사도행전 9장-
바울의 회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심에 있어 일대 전환점을 이룬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은 이 비범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려면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사역을 대표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의 대조점들을 눈여겨 보자.
베드로 바울
12사도에 속함 한 몸(교회)에 속함
왕국복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예루살렘에 중심을 둠 안디옥에 중심을 둠
이스라엘을 우선으로 사역함 이방인에게 사역함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계실 때 하늘로부터 부르심을 받음
부르심을 받음
왕국의 모형인 땅에서 그리스도의 영화롭게 된 교회인 하늘에서
영광을 봄 그리스도의 영광을 봄
“바울에게서 빼앗아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들은 이 두 사역자를 혼동하여 “왕국의 진리“와 “교회 진리“를 혼합하여 섞어서 지교회를 어지럽힌다. 바울은 지교회에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이었으며, 베드로조차도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벧후 3:15-16).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지역 총회가 실천한 사항들을 따르면서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신 교훈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잃는 것이다. 베드로도 역시 바울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더 많이 배워야만 했다(갈 2장).
1. 바울과 주님(9:1-9)
바울의 회심은 순전한 은혜였다. 하나님은 바울이 살기 등등하여 신자들에게 가는 도중에 갑자기 개입하셔서, 은혜로써 그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셨다. 교회가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한 몸인 것같이, 바울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한 몸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출신은 유대인이었으나 호적으로는 이방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교회에 관한 멧세지를 전하게 하신 종이었다(15절). 이 교회에 관한 멧세지는 과거의 시대에는 비밀로 되어 있던 신비였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에 연관되어 헬라 철학이나 로마법과 아울러 구약 성경의 훈련을 받았으므로 바울은 “아무 차별이 없다“는 이 새로운 멧세지를 전하기에는 안성마춤의 사람이었다.
바울의 회심은 다음 진술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한 빛을 보았다.
-음성을 들었다.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모든 죄인은 복음의 빛이 그에게 비치기까지는 어두움 가운데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들었지만,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구주의 음성을 듣는다(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몰랐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얼마나 겸손하게 만드셨던가! 그는 엎드러졌는데, 몸만 엎드러진 것이 아니라 마음도 엎드러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겸손하게 엎드러지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4절은 그리스도의 몸이 실존하고 있다는 또하나의 증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박해할 수 있는가? 바울이 신자들에게 손을 뻗친 것은 주님의 몸된 지체에 손을 댄 것이며, 이것은 그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행 9:10-19
2. 바울과 아나니아(9:10-19)
바울은 환상을 통하여 아나니아가 그를 방문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줄의 양쪽 끝“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돕도록 베드로나 요한을 보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특별한 사역은 이제 제쳐지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의 두려움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특별한 사역을 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되었다. 이 말씀이 충성된 유대인 신자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임은 분명했다(행 22:12-13). 바울의 사역은 이방인을 향한 것이었다(행 13:46-47/행 18:6/행 22:21 참조).
바울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형제 사울아“라는 아나니아의 인사에서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 22장 16절에 기록된 바울의 세례(침례)경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8-12장은 물세례(침례)와 성령을 받는 일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전환기라는 점을 명심하라.하나님께서 바울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고 계시지만,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0장에 이르면 오늘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즉 말씀을 듣고, 믿고, 성령을 받으며, 세례(침례)를 받는 것을 보게 된다."
행 9:20-31
3. 바울과 유대인들(9:20-31)
바울이 회심한 데에는 두 가지 뚜렷한 증거가 있다. 그는 기도하고(9:11), 전파했다(9:20).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회심했다는 좋은 증거이다. 바울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또하나의 좋은 방침이다.
그가 회심한 것은 37세 때인 듯하다. 그는 다메섹에서 전도하며 시간을 보내고, 다음으로는 아라비아로 갔다가(갈 1:15-18), “여러 날이 지나“ 다메섹으로 돌아왔다(행 9:23). 이 기간은 아마도 3년은 되었을 것이고 이 기간동안에 바울은 “교회의 비밀“(mystery)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배웠을 것이다. 다메섹으로 돌아오자 유대인들이 그를 공격하였으므로 밤에 창문을 통하여 떠나야만 했다(고전 11:32-33/행 9:23-26). 이 시기는 주후 37년-39년경이며 이 때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본다(행 9:26-29/행 22:15-21/갈 1:17-20). 사도들은 바울을 두려워하였으며, 이 때 바울을 그 그룹에 소개한 사람이 바나바였다(“위로의 아들“-행 4:36).
바울이 사도들에게 낯선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 사실은 바울이 은혜의 멧세지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지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갈 1:15-18 참조). 하나님은 바울의 사역과 열 두사도의 사역을 분리시키려고 미리 조처를 취해 오셨던 것이다. 오늘날 이들 사역을 서로 혼동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바울은 베드로와 15일간 함께 머물렀으며(갈 1:18), 바울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방문했는데(갈 1:19), 그는 나중에 베드로를 대신해서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되었다(행 15장).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사역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떠날 것을 그에게 명령하셨다(행 22:17-21). 예루살렘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계획은 이제 끝나고 있었으며 바울이 그 대신 새로운 계획을 개시하였다.
박해가 심해져 바울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고향인 다소로 돌아왔다. 갈라디아서 1장 21절은 그 지역에서 말씀을 전파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15장 23절은 그 지역에 교회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울이 그 4, 5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방 교회를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사역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이방 도시인 안디옥으로 옮겨졌을 때(행 11:19-30), 바나바가 바울을 찾아가 함께 사역을 하도록 데리고 왔다."
행 9:32-43
4. 베드로와 성도들(9:32-43)
눈가는 왜 이 시점에서 베드로를 무대에 올려 놓는 것인가? 그 대답은 그가 언급하는 성읍인 욥바에 있을 것이다(36, 43절). 이 성읍은 요나 선지자가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갔던 일을 상기시킨다(욘 1:1-3).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 이방인들에게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똑같은 일을 하도록 베드로를 부르시는 것이다(10장).
베드로는 제혁업자인 시몬과 함께 욥바에 살았는데, 이는 오랜 유대인들의 실천 사항 중에서 더러는 제외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관련된 한에 있어서 제혁이란 “부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것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음을 발견하려는 찰라에 있다."
행 10:1-48
▣ 고넬료의 회심-사도행전 10장-
본 장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이 열리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사용하여 유대인들에게(행 2장),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에게(행 8:14-) 믿음의 문을 열어 놓았다.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문을 열어 놓음으로써(행 15:6-11 참조) 이 변화의 시대 동안에 이루어진 특별한 사역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이 기념할 만한 사건에서 베드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기 위해 사도행전 11장 1-18절을 읽도록 하자.
우리는 사도행전 8장에서 하나님은 일하고자 하실 때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며, 하나님의 영으로 능력을 입히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하심을 살펴보았다. 본 장에 나오는 활동에서도 똑같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것을 본다.
1. 성령께서 준비시키심(10:1-22).
고넬료를 준비시킴(1-8절)-가이사랴는 로마의 도시로서, 팔레스틴 지역의 로마 수도였다. 고넬료는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앙심이 깊었고, 정직하였으며, 관대하고 성실하였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다. 신앙심이 깊지만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을 수도 있음을 보라 ! 하나님께서 은혜로 고넬료에게 말씀하신 일이 없다면 그는 신자가 될 수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복음 7장 17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본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진리를 알리라.“
한 천사가 그에게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말해 주었다. 천사들이 고넬료에게 직접 멧세지를 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의 사역을 천사들에게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우리가 가지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천사들이 가질 수 없는 특권이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30마일 떨어져 있었는데, 고넬료는 군인다운 순종으로 두 종과 한 경호인을 불러 이 중대한 사명을 위해 파송했다. 이 모든 일에 성령께서 인도하고 계셨다(19-20절).
베드로를 준비시킴(9-22절)-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줄의 양쪽 끝“에서 인도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일에 적합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베드로는 정하고 부정한(의식상의 용어/ 레 11장 참조) 온갖 피조물들을 보았고, 죽여서 먹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그의 말은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 그리스도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말라고 했던 그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참으로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베드로가 세 번 일어났던 이 환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직접 그에게 말씀하셔서 “일어나 가라“고 지시하셨다. 베드로는 그 환상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로 간 것이 아니라 “가라“고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11:11-16 참조). 후에 그는 환상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는데, 이 환상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모든 구분을 폐하셨음을 나타낸다."
행 10:23-33
2.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10:23-33)
이 때까지는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사마리아 사람들도(행 8장) 구약 율법을 존중하는 “반(半)혈통“의 유대인이었다. 베드로는 “지상 명령을 순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로 간 것은 아니었으며, 성령께서 가라고 특정하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갔다. 사실 그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의도로 나를 불렀느뇨?“ 라고 물었다(10:29). 그가 말씀을 전파할 때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개입하셔야만 했다(10:44/11:15-16).
다른 사도들처럼 베드로는 여전히 왕국의 멧세지에 매달려 있었으며,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영접하여 주님이 그의 왕국을 세우시기까지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의 협력자들은 마가복음 16장 15-18절, 누가복음 24장 44-49절,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절의 사명 아래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말은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도들이 큰 박해가 있던 동안에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8:1).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프로그램, 즉 왕국이 아니라 교회를 소개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배우려 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억측하지 않기 바란다. 사실상, 바울은 베드로의 모순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를 꾸짖어야 했다(갈 2장). 이 변화의 기간 동안에(행 8-12장) 베드로는 무대에서 사라지며, 그와 더불어 이스라엘에 대한 왕국의 멧세지도 사라진다."
행 10:34-48
3.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함(10:34-48)
준비된 전도자와 준비된 회중은 놀라운 팀(team)을 이룬다(35절/ 히 11:6 참조). 베드로는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멧세지로 시작하며 세례(침례)요한의 사역부터 말한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이 그리스도의 기적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소식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이스라엘과 연관된 것이었다. 42절에서 그는 “백성(유대인들을 의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셨다“는 말을 하는데, 그 당시까지 그들은 이 일을 수행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간단히 줄인다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을 두지 않으심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43절에서 그는 핵심 진리에 도달한다.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이 지점에서 성령은 베드로에게 개입하셔서 그 이방인들의 마음 속에 기적을 행하셨다. 그들은 말씀을 믿었다. 그들이 믿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 증거로써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갈 3:2 참조).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에 깜짝 놀랐다.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들에게 세례(침례)를 받도록 명한다. 11장 3절은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이 이 새로운 신자들과 머물며 그들과 더불어 식사하였음을 시사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과 세례(침례)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복습하기로 하자.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들은 성령을 받기 위하여 믿고 세례(침례)를 받아야 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믿고, 세례(침례)를 받았으나, 사도가 안수함으로써 성령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참된 “교회의 터전“이 나온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말씀 듣고, 믿고, 성령을 받고, 세례(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 38절과 사도행전 8장 14-17절을 오늘날에 적용해서는 안된다(엡 2:13-14 참조).
성령의 강림 자체가 사실상 세례(침례)였으며, 베드로도 사도행전 11장 15-16절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과 관련하여 세례(침례)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성령이 믿는 유대인들에게 임했을 때와(행 2장) 믿는 이방인들에게 임했을 때(행 10장)의 두 번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이 성취되었다. 이 “한 몸“이란 교회이다(엡 2:11-22). 사실상 11장 15절에서 베드로는 이 세례(침례)가 오순절 때의 세례(침례)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오늘날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이 그의 몸에 오셔서, 그리스도와 연합되도록 세례(침례)를 받게 된다.
사도행전 11장과 15장에서 볼 것이지만, 이방인들과의 대화는 유대 신자들에게 큰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이 “종족에 대한 선입관“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비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엡 3장). 이들은 이스라엘이왕국으로 세워짐을 통해서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인의 구원이 되었다고 하셨다(롬 11:11-25).
구약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어진 왕국의 멧세지는(행 18-26) 바울을 통해서 온전히 계시되는(행 13:38-43) 하나님의 은혜의 멧세지로 대치되었다.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제쳐졌고, 교회가 휴거하기까지 지상의 하나님의 프로그램에서 다시는 두드러지지 못할 것이다(행 15:13-18 참조). 왕국 진리와 교회의 진리를 뒤섞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동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말씀이다. 우리는 제자를 삼아야 하는데 이는 복음 전파를 뜻한다. 우리가 세례(침례)를 주어야 하는 것은 지교회에서의 교제를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성령께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깨우치는 데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의 씨를 뿌리고, 우리의 기도와 눈물로써 물을 주며(시 126:5-6/행 10:19) 인내로써 구주를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