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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이 없어도 정해진 시간에 깨는 편인데, 그래도 나의 잠을 완전히 깨우는 건 웹툰이다. 요일별로 보는 웹툰들이 있는데, 잠이 슬슬 깨기 시작하면 핸드폰을 집어 들고 해당 요일에 올라오는 웹툰을 스윽 훑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지난달 말에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웹툰으로 올라온 것을 보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뭐 하나 히트 치면 뼈까지 우려먹는 문화적 특성이 이런 걸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계산은 있었던 것 같다. 관심 순위는 높은데 별점은 높지 않은 이 웹툰은 드라마 <우영우>가 끝난 지금 오히려 시작하는 분위기이다. 아마도 즐겨보는 드라마가 종영된 후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게 아닐까 싶은데, 시즌2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 듯하니 우영우의 팬들은 그때까지 만화로 복습하며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소수자의 문제를 다루는 대중 드라마로 이 정도의 인기를 끌었으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성공한 드라마인 것은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고귀한 메시지는 대중성을 가질 수 없다는 암묵적 전제가 깨지기 시작했는데,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부터 ‘인디’ 스타일이 아닌 대중 드라마라는 형식을 택했으니 작가도 자기 나름대로 사명감만이 아닌 자신감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적중한 듯하다. 특별히 사회의식이 있다고 할 수 없는 평범한 노인인 일흔 중반의 나의 어머니도 즐겨 보셨다고 하니 말이다. 어떤 점이 그렇게 재미있었냐고 여쭈었더니, 기존의 한국 드라마와는 달라서 좋았다고 하신다. 기존의 한국 드라마라…. 공감하기 힘든 캐릭터와 억지 스토리에 질질 끌고 질질 짜고…, 그런 드라마와 달랐다는 말씀이신 것 같았다. 통상의 한국 드라마라면 태수미와 우영우의 만남 자체가 큰 사건이 되고 그야말로 온갖 장면들이 난무했겠지만, 아주 절제된 울음을 흘리는 짧은 장면으로 처리하고 넘어간 것만 보아도 기존 드라마와의 차별은 확실해 보인다. 나중에 태수미의 아들이 엄마의 핸드폰을 해킹할 정도로 엄마가 좀 이상했다는 말로 그의 감정의 혼란을 짐작할 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적 문법이 그렇게 다르게 처리될 수 있었던 장면들 모두가 사실은 우영우라는 캐릭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그런 면에서 우영우는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평상시에는 말하기 힘든 것들을 말하고 말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서 설정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통상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가진 딸이, 자기 엄마 앞에서 저렇게 침착하게 당신이 사실은 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당신 회사에 갈 수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언젠가는 말해야 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도 문화적인 문법과 제약 때문에 차마 말을 하지 못해서 숱한 고구마를 양산하는 현실과, 그것을 재현하는 드라마들 앞에서 우영우는 제법 시원한 사이다이다.
한국 사회의 기존 문법을 뒤집겠다는 작가의 의지는 곳곳에 보인다. 우선 대표적인 대형 로펌이라는 두 회사의 대표부터가 다 여자다. 궁금해서 좀 뒤져 보니 2022년 7월에 나온 기사 중에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처음으로 40대 여성이 10대 로펌 중 하나의 대표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윗자리로 올라갈수록 여성이 희소한 전형적 현상이 법조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말인데, 그러니 두 대표 로펌의 대표가 다 여성이라는 설정부터가 제법 판타지다. 여자가 자신이 키우지도 않을 아이를 남자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도 아니고 순전히 남자가 사정해서 낳아주고는 연을 끊었다고 하는 것도, 흔히 혼외 자식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성애와 부성애의 주장이 얽힌) 치정의 문법과 다르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여자들 집안이 다 남자들 집안보다 좋다. 우영우는 아버지가 지금은 김밥집 주인이지만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 인맥이 빵빵하고 어찌 되었건 생모가 태수미다. 그러나 이준호는 변호사도 아니고 평범한 중산층 출신으로 보이며, 최수연의 아버지는 판사이지만, 권민우는 집안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로 보인다. 만약에 시즌2가 나온다면, 이렇게 남자가 기우는 집안과 만났을 때 여자와 남자가 과연 개인 대 개인으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수 있을지, 결혼을 해도 제대로 유지가 될지, 그 또한 해결 과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예상의 흐름을 끊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는 웨딩드레스가 결혼식 도중 벗겨지는 에피소드일 텐데, 여자가 식장을 걸어 나가다가 잠시 시선이 머무는 사람이 옛 연인일 거라고는 다들 짐작하지만, 그 연인이 같은 여자일 거라고는 아마도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빨간 띠 두르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매우 인간적이고, 시를 사랑하며, 법정을 떠나서는 같이 붕어빵을 나눠 먹고 비빔밥 하나로 자매애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제법 판타지스럽다. 아동 성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날로 커지는 시대에 정말로 순수하게 아이들의 해방을 위하는 성인 남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판타지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강력한 소망 사항으로 읽힌다. 하지만, 장애와 비장애를 떠나 여전히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관철할 수 있는 여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사회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작가는 남자의 성에 대한 지나친 판타지는 경계하는 것 같다.
처음 하는 키스는 비단 우영우가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낯설고 서툰 일인데, 그것도 우영우라서 그 어색함이 어색하지 않게 말로 표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로등 밑의, 여느 연인과 다르지 않은 키스신 이후 우영우의 다름은 급격하게 사라져버렸다.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의 숨 고르기 동작, 뜬금없이 내뱉어 주변을 당황하게 하는 발언 방식, 자연스럽지 못한 걸음걸이와 다소 과장되고 어색한 몸짓, 살짝 허공을 보는 듯한 동그란 눈, 이 모든 것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우영우가 아니라 그냥 좀 별난 캐릭터 우영우의 특징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라는 게 분명히 보이는 게 마지막 두 에피소드이다.
낯선 공간으로 들어설 때는 자기도 어색하다며 우영우를 장애인이 아닌 솔직한 사람이라고 보는 게임 회사 대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영우와 같은 언어 습관이 있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정상적 범주라 할 수 있는 나이 지긋한 남성 판사의 등장은, 누구나 조금씩 이상한 습관이 있고, 말하지 않는 내면의 두려움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실, 제주도 가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우영우가 보인 반응도 내가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마다 속으로 하는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번 비행기를 탔지만, 나는 지금도 비행기가 뜰 때면 눈을 지그시 감고 ‘어, 어, 뜬다, 뜬다,’ 하면서 숨을 죽인다. 내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착륙할 때는 비행기 바퀴가 땅에 제대로 ‘탁’ 닿는 걸 느끼고 나서야 ‘살았다’라고 느끼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우영우가 말하듯, 자동차보다 안전하다는 비행기임에도, 한번 사고가 나면 그냥 몰살이라는 생각에 어쩐지 더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은 우영우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소수자의 다름에 대한 타자화의 문제를 풀려고 한 의도가 좀 과했던 것일까. 마지막 화에 등장한 ‘좋은 엄마’ 발언은 나에게는 제법 의외였다. 잘못한 것은 야단치며 자식을 바른길로, 바른 시민의 길로 인도하는 어머니상은 사실 유교의 전통적 어머니상에서 나오며,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런 어머니상을 고려하는 유교 페미니즘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일찍부터 주장했지만 별로 이해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주장이 이런 식으로 수용되다니, 어쩐지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수많은 고래를 띄우면서 더 높이 더 멀리 갈 줄 알았던 드라마가 결국은 가족 드라마가 되는 순간이라는 것도 제법 아이러니했다.
두 대형 로펌의 대표를 여자로 상정했던 것도, 자식의 잘못이 항간에 알려지며 신문 지상에 오르내려도 나 몰라라 꿋꿋하게 버티던 어느 남성 정치가와 대조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들의 경쟁은 적어도 이런 식의 도덕적 차이가 있고, 또 의리도 있다는 것을—태수미와 우영우의 관계의 비밀은 끝까지 지켜졌다—보여 주려 했던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 좋은 어머니라는 것을 끌어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법무부 장관 후보직을 내려놓겠다는 태수미가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자기 길을 포기하는 다른 어머니들과 어느 지점에서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어머니는 태수미가 아니어도 많은데, 단지 그가 금수저라는 점에서 그것을 그의 미덕으로 꼽았다면, 금수저는 다 나쁜 사람이라는 매우 단순한 도식 아닐까. 그 반대 논리는 흙수저는 다 착한 사람이라는 건데, 진보 사상의 세계관에는 부합하는 논리인지 몰라도,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어긋난 죄인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에는 맞지 않아 보인다.
사회 정의와 의뢰인의 이익을 끝까지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것도 아마 그러한 진보주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지 싶다. 법치 사회는 누구나 법적 절차를 통해서 정의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이며, 이 말은 사회 정의 구현의 주체와 법적 절차를 밟는 의뢰인 주체가 그렇게 언제나 명확하게 서로 구분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사회 정의를 외치는 사람도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할 때는 의뢰인이 되며, 법적 절차를 밟는 의뢰인 모두가 사회 정의와 무관하게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편견이 오히려 변호사로 일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평범하게 직장 생활하는 모든 사람을 분열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때 하나님의 소명과 일반적인 직업 생활을 구분하던 관습 때문에 분열을 느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사회 정의와 의뢰인의 이익을 구분해 놓고, 마지막에 우영우의 가장 큰 성취를 정규직으로 만들어버리니, 결국 사회 정의가 추구하는 것도 정규직이었나 하는 생각에 어쩐지 김이 샌다. 나 또한 비정규직 직장인으로서 정규직의 유익을 모르지 않지만, 컴퓨터 그래픽 작업 때문에 시간도 그렇게 많이 걸렸다던 수많은 고래를 띄우는 판타지를 그려놓고, 그 종착역이 하다못해 여성 해방도 아닌 정규직이라니. 이왕 장애인 캐릭터를 이용해서 판타지를 그릴 거면 좀 더 큰 꿈이 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결국 정규직 변호사 우영우의 출퇴근길 안전 지킴이로 전락한 고래가 일흔 넘은 노모에게는 재미있는 드라마였어도, 이십 대 아들은 그냥 뻔한 한국 드라마라서 보다 말았다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자식이 어쨌든 변호사 선생님이 된 것은 모든 부모의 꿈일지 몰라도, 아직은 혈기 왕성한 자식들이 꿈이라고 말하기에는 어쩐지 너무 세속적인 것이다.
지방에 다녀오는 기차의 스크린에서 우영우가 벌써 광고로 등장해서, 그 몸짓 그 눈빛 그대로 물건을 팔고 있는 걸 보았다. 그런데 고래야, 너는 어디로 갔니?
첫댓글 생각없이 그냥 재밌게 보기만 했던 드라마였는데...
글을 읽다보니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