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청소년운동
1919년, 3.1운동이후 일본은 공창제도를 도입하면서 음주, 흡연이 청소년사회에 빠른 속도로 유입되었습니다. 1935년, 북강소년감옥에 수감된 102명 가운데 83%가 20세 이전에 이미 성관계 경험이 있었고 이들 대다수는 공창을 통하여 경험을 하였습니다. 구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는 시대, 교회지도자들은 청소년들이 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꿈과 이상을 바라볼수 있도록 "청소년운동"(Youth Movement)을 전개하였습니다.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YWCA(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 감리교의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 장로교의 “청년면려회”CES(Christian Endeavor Society), 성결교의 “신생청년회” 등 기독교 청소년운동은 기독인으로서의 건강한 리더와 사회적 볼런티어(봉사자)를 추구하였습니다.
(1)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1903년 10월28일, 서울 정동 유니온클럽에서 37명의 발기인이 참여한 가운데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를 조직하였습니다. 초대회장에는 헐버트(Hulbert, H. B.) 선교사가 선출되었으며, 오늘날 YMCA의 전신이었습니다. YMCA는 1844년, 런던에서 최초로 결성되어 1850년, 미국에서 크게 발전한 청년단체입니다. 한국YMCA는 언더우드(Underwood, H. G.)와 아펜젤러(Appen-zeller, H. G.)와 헐버트에 의해 1899년, 설립을 추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청년 150명의 진정서를 미국 기독교청년회 국제위원회에 제출하였으며, 그 결과 1900년 9월, 중국YMCA연합회 총무 라이언(Lyon, D. W.)의 국내조사가 이어졌고, 1901년 9월, 국제위원회에서 “질레트”(Gillett, P. L.)를 창설간사로 한국에 파송하였습니다. 질레트는 배재학당 학생중심으로 YMCA를 조직하였고 중국, 홍콩의 학생YMCA와 함께 “중국,한국,홍콩YMCA 전체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1902년, 세계학생기독교연맹에 한국학생YMCA가 가입하였습니다. 1903년 10월28일, 인사동 태화궁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결성되었으며, 이때 12명의 이사 중 여병현, 김필수 등 2명의 한국인이 등재되었습니다. 1904년, 이상재, 김정식, 이원긍 등 독립협회 임원들과 지식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황성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였습니다. 1904~1905년, 한국YMCA임원으로 게일 회장, 헐버트 부회장, 질레트 총무, 브로크만(Brockman, F. M.) 부총무, 김정식 한국인 총무, 최재학, 육정수, 이교승이 간사로 선출되었고, 윤치호와 김규식이 이사로 선임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YMCA를 설립한 목적은 선교중심의 청년회조직이었으나 황성기독교청년회는 교육, 계몽, 선교에 목적을 두고 연설회와 토론회를 운영하였습니다. 1906년, “황성기독교청년학관”을 설치하여 운동회와 사경회와 환등회사업으로 확장하였습니다. 1907~1908년에는 중학과 3년과정, 일어과 1년과정, 영어과 2년과정, 목공과 등 주간교육과정과 일어과, 영어과, 부기과(簿記課) 등 야간교육과정을 개설하여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확대하였습니다. 1908년 회원 1,160명, 학관학생 222명, 기독교집회 참가자 연 2만명, 강연회 등 프로그램 참가자 연 5만명에 이르는 등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활동은 청년집단 가운데 가장 영향력있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1907년, 미국인 실업가 워너메이커(Wanamaker, J.)의 거액기부금과 현흥택의 토지 기증으로 종로에 연건평 1,000평에 달하는 3층 규모의 회관을 건립하였습니다. 그후 사사부(司事部,이사회)와 의사부(議事部), 재정부, 종교부, 교육부, 친접부(親接部), 운동부, 교사부 등 각종위원회가 신설되었습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에는 게일, 헐버트, 질레트, 브로크만, 브라운(Brown, G. M.), 터너(Turner, A. B.), 언더우드, 밀러Miller, E. H.), 벙커(Bunker, D. A.), 에비슨(Avison, O. R.), 그레그(Greig, G. A.), 다카기(高木正義) 등과 같이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참여하였고 이상재, 여병현, 김필수, 윤치호, 김규식, 최재학, 김린, 서상륜, 유성준, 이원긍, 이익채, 조남복, 홍석우, 홍재기, 민준호, 전덕기, 김명준, 고찬익, 김원선, 최병헌, 육정수, 이교승, 김종상 등 한국 기독 지식인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1906년, 일본 동경에서 조만식 주도로 결성된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에 김정식을 총무로 파송하였으며, 1907년 4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세계학생기독교연맹 세계대회”에 윤치호, 김정식, 김규식을 파견하였습니다. 1910년, “학생하령회”(學生夏令會)를 개최하고 1911년말 학교YMCA가 6개교에 설립되었습니다. 학생하령회는 “하계컨퍼런스”(Summer Conference)로 강연, 강의, 음악, 체육, 레크리에이션 등과 같은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진행되어서 성경중심의 사경회와 달리 청년층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1910년 12월, 이승만이 학생부 간사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은 본격화 하였습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일본제국으로부터 직접 탄압을 받게 되었고, 1911년, 데라우치총독암살미수사건(寺內正毅總督暗殺未遂事件)을 조작하여 YMCA의 중심인물인 윤치호가 체포되었고, 질레트 선교사를 추방하였습니다. 1913년, 김린, 사일환, 유일선 등 친일기독교인들을 매수하여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일본YMCA에 복속시키려 하였습니다. 1914년, “靑年“(청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세계관과 사회관을 심어주려 노력하였습니다. 1920년, 윤치호 회장, 신흥후 총무 등 조직개편을 이루며 YMCA는 새로운 도약을 향하였습니다.
(2) YWCA(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
1922년 4월20일,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大韓女子基督敎靑年會聯合會)는 김활란, 김필례, 유각경을 중심으로 조직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외국선교사의 지원없이 독자적으로 중학교와 여자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며 6월13일, “전국여자하령회”를 개최하면서 구체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YWCA는 예수의 가르침을 생활속에서 실천하고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가 보존되는 세상을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계몽, 교육, 생활개선, 여권신장, 민족운동, 조혼과 공창폐지운동, 축첩제반대 등 여성인권과 여성권익에 대하여 최초로 공식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23년 8월18일, 34개지방 YWCA대표들이 서울 협성여자성경학교에서 “제2회 전국여자하령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하령회 중 “YWCA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유각경 회장, 김함라 부회장, 신의경 서기, 김성실 부서기, 김영순 회계, 한복순 부회계, 명예총무 마리시 등이 선출되었습니다.(기독신보,1923년9월10일) 11월, YWCA는 전국적으로 2천명의 회원을 가진 여성최고의 청년조직이 되었습니다.
(3) 엡웟청년회(의법청년회,Epworth League)
1897년 5월5일, “엡웟청년회”는 제13회 미국감리회 한국선교연회(1897.5.5.~10)에서 조이스(I. W. Joyce) 감독의 제안과 결의로 존스(Gh. H. Jones,조원시), 노블(W. A. Noble), 페인(J. O. Paine), 노병선, 김기범, 이은성이 위원으로 연합회 중앙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인천 내리교회 “나인데청년회”를 시작으로 9월5일, 상동교회 “말랄류청년회”, 9월22일, 평양 남산현교회 “굿셀청년회”, 10월28일, 정동교회 “워렌청년회”(남자)와 “조이스청년회”(여자)가 조직되었습니다. 1898년3월, 인천, 서울, 평양에 5개의 청년지회가 결성되었고 150명의 회원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02년, 남감리회 선교거점인 개성에서도 엡웟청년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엡웟청년회는 감리교인으로 15~35세(평앙남산현교회는 40세까지)로 한정하며 조직으로는 회장, 부회장, 서기의 임원과 임원국(협의), 전도국(선교), 인제국(봉사), 학문국(교육), 다정국(친교), 통신국(서기), 회계국(재정) 등의 부서를 두었습니다. 상동교회 청년회가 설립한 “상동청년학원”은 엡웟청년회 활동의 가장 대표적인 활동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엡웟청년회는 독립협회 지도자 서재필과 윤치호가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청년들에게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전덕기, 정순만 등 상동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조약무효상소와 을사오적 척결모의등에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하였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1906년, 한국선교연회는 친일파 선교사 해리스(M. C. Harris)가 주도하여 엡웟청년회 해산결정을 내렸습니다. 1908년, 제물포교회의 요청으로 존스 선교사가 재조직을 건의하였으나 선교연회는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 1916년, 조선연회에서 이익모, 이하영, 손정도, 김유순 등 한국연회원의 청원으로 엡웟청년회는 재조직되었습니다. 1917년 6월, 엡웟청년회는 “교회내외를 무론하고 청년 영성을 배양하고 신앙을 증진케”하는 것을 영구적인 목적으로 절대개정 불가능하도록 명문화 하였습니다. 재조직된 엡웟청년회는 선교중심의 교육활동을 지향하였으며 각 교회청년회는 유치원, 야학, 주일학교 등을 통하여 문맹퇴치운동, 한글교육, 체육대회, 연극공연 등 다양한 사회교육선교를 하였습니다.
1920년, 북감리교 엡웟청년회가 결성되었고, 1925년에는 남감리교 엡웟청년회가 전국연합회로 확대 조직되었습니다. 남감리교 엡웟청년회는 농업사업, 금주금연운동, 쳥년수양회, 토론회, 전도회를 중심으로 3.1운동 이후의 한국 청년운동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특별히 심훈작 “상록수”에 등장하는 “최용신”은 실제 주인공으로 엡웟청년회의 활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농촌계몽운동가였습니다. 미감리회 엡웟청년회는 전국 13개지역에 2,000명의 회원조직이 있었으며, 남감리회 엡웟청년회도 전국 72개 청년회조직에 2,000명의 회원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929년, 엡웟청년회는 “종교교육회보”와 “신생”(新生,류형기주간)을 출판하여 청소년 대상으로 교회와 사회봉사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현,기독교대한감리회)가 새롭게 조직되었습니다. 엡웟청년회는 총리원 교육국의 지도를 받으며 1931년 7월, “조선엡웟청년회연합회”를 창립하였습니다. 홍병선 회장, 최영래, 노진복 서기, 김기연 총무, 정일용, 이문혁 회계가 선출되고 이광순, 정길현, 장종식, 최창순, 홍기주, 김영호, 김봉준, 이요한, 정영헌, 변성옥, 김응집, 박산우, 송정근 등이 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통합된 엡웟청년회연합회는 1933년까지 26개지역 177개 청년회로 확대되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후 1938년, 총회 교육부는 조선감리회보(1938.11.1.)를 통하여 “비상시국으로 인하여 제3회 총회에서 엡웟청년회 조직을 해산하고 교회내 청소년의 전신수양은 주일학교 청소년부로 이관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일제말기 기독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폐합되었고 해방이후 1949년 4월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재건되었습니다. 10월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청년회 전국연합회”가 창립되어 오늘에 이르지만 이전의 엡웟청년회의 활동만큼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습니다.
(4) 청년면려회(靑年勉勵會,면려청년회,CES(Christian Endeavor Society)
1881년, “기독청년층의 신앙과 사회활동의 증진”을 목적으로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 회중교회 “클라크”(Francis Edward Clark) 목사에 의해 “기독면려회”CES(Christian Endeavor Society)가 창설되었습니다. “회원 상호간에 진실한 기독교적 삶을 장려하고 회원 교제를 확대하며 교회활동을 위해 회원 훈련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이웃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모든 면에서 그들이 유용하게 쓰일수 있게 하는 것”으로 구체화하며 캐나다, 멕시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미주지역과 유럽을 중심으로 “국제기독면려회”(International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가 조직되었습니다. 1892년, 중국 푸저우 선교사 헐버트가 클라크 목사와 만난후 중국 푸저우와 일본의 도쿄, 고베지역에 기독면려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청년면려회”는 “면려청년회”, “기독청년면려회”, “기독면려회” 등으로 불리워 졌으며 1917년, 장로교에서 설립된 청년회 단체였습니다. 1913년, 새문안교회에 기독면려회의 전신인 청년조직이 설립되었고 1916년, 승동교회, 선천북교회를 중심으로 사리원, 풍산, 함흥, 북청에서 설립되는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21년 6월7일, 경북 안동교회에서 미국 북장로교 “앤더슨”(W. Anderson,안대선) 선교사가 주도하여 “기독면려회”를 조직하였고 “경북지방면려청년연합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21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 “기독면려회”(C.E)조직을 가결하였습니다. 1923년, 기독면려회는 황해도 전역과 전주, 평양, 안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확산되는 등 전국 200개 지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924년 12월2일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가 서울 피어슨성경신학원에서 개최되었으며, 1925년에는 기관지 “진생”(眞生)을 창간하였습니다. 192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8회 총회(차재명 총회장)에서 매년 2월 첫째주일을 “청년면려주일”로 제정하여 장로교단 청년조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930년, 40개국 6천명의 대표가 참석하는 “제8차 베를린 세계기독교청년면려회 대회”에 “조휘염”을 한국대표로 파송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청년면려회는 금연, 금주운동을 전개하며 14,000장의 포스터와 350,000부의 문서를 인쇄하여 전국적으로 배포하였습니다. 1932년,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산하에 면려부를 설치하고 윤산온부장을 중심으로 청년사업을 전개하며 1934년, 회원이 30,000명을 넘었습니다. 청년면려회는 헌신예배, 성경연구, 교회봉사, 전도사업을 중심으로 금주, 금연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운동, 농촌사업으로 확대하였습니다. 또한 소년면려회, 중등면려회, 학생면려회, 중간면려회 등으로 확대하여 청소년계층 세분화 운동으로 확대발전하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후 일본제국은 6월, 제8회 전국조선면려회 금주운동 전단지 내용을 빌미로 이대위, 이용설, 정인과 등 핵심인물을 무차별적으로 검거하고 1938년 장로교 제27회 총회((홍택기 총회장, 신사참배가결)에서 조선청년연합회의 해체를 가결하였습니다. 해방후 1947년 10월, 새문안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청년회 전국연합회” 창립총회를 통하여 조직정비를 구축하고 1953년, “기독청년면려회 전국연합회“로 복원하였습니다. 1957년, 기독면려회(C.E)조직은 고등CE(12~17세), 청년CE(18~27세), 장년CE(28~45세)로 세분화하였고 이후 장로교 교단의 분립에 따라 분열을 거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