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주군 쌍암면 죽학리 조계산(曹溪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사(仙巖寺)는 백제 성왕 7년(529)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를 거쳐 고려 선종 9년(1092) 대각국사(大覺國師·1055~1101) 의천(義天)이 3창(三創)한 이래 송광사와 더불어 남쪽의 가장 유명한 명찰로 이름이 높았다. 육우의 『다경』에서 “차는 남쪽에서 자란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선암사 주변에는 야생 차나무 군락이 즐비하여 옛부터 불가에 유명하였다.
우리가 선암사를 주목하게 된 까닭은 선암사의 3번째 중창주인 대각국사 의천의 부도 및 금란가사, 진영이 보존되어 있어 국사의 자취와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차문화협회 이귀례 회장과 일행은 고려의 차승으로 상석에 등장하는 의천의 차선일여의 경지를 살펴보고 ‘뇌원차(腦原茶)’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선암사 대각암을 찾았다.
송과의 차문화 교류에 영향 미친 의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문종의 4번째 왕자였다. 하루는 문종이 여러 왕자를 불러놓고 물어 보았다.
“너희들 중 누가 출가하여 도(道)를 닦겠는가.”
침묵이 흐른다.
“어째서 말이 없는가.”
이때 4번째 왕자인 후(煦)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소자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습니다. 오직 아바마마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문종은 놀랍고 기쁜 얼굴로 후를 바라보았다. 그때 의천의 나이 11살이었다. 의천은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의지하여 구족계를 받고 출가한다. 출가한 뒤 송나라로 들어가 지자탑원에서 서원을 세운 바와 같이 고려에 들어와 천태종을 개창하고 법안종을 흡수하여 5대 선원을 세우고 선교쌍수의 정신을 이어 나간다.
해동 천태종의 시조로만 알려져 있는 의천을 통해 송과의 활발한 차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각국사가 열반하자 비석이 모두 3곳에 세워진다. 고려 인종 3년(1125) 개성 영통사(靈通寺)에 대각국사비가 세워지고 고려 숙종 6년(1101)에 개성 흥왕사에 대각국사묘지명과 칠곡 선봉사(僊鳳寺)에도 대각국사비석이 세워진다. 최근 북한 정부는 개성 영통사 복원을 일본 대정(大正)대학에 의뢰하여 대대적인 발굴을 한 바 있다. 발굴 결과 대각국사 의천의 석함과 묘탑이 발견되었다. 또 개성 흥왕사에 세워졌던 대각국사묘지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기도 풍덕군 덕적산 흥왕사터에서 발견되어 조선 총독부 시절에 박물관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길이가 50센티가 채 안되는 이 묘비에는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는 대목이 있다.
요나라 천우황제(天佑皇帝)가 재차 경책과 다향(茶香) 금백(金帛) 등을 보내어 국사와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는다.
이 대목으로 보아 중국의 천우황제가 의천을 차의 스승으로 받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송황실에서는 의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왕실 어용차인 용봉단차를 선물하는 등 중국에 1년 7개월간 머무는 동안 극진한 예를 표했던 것만 보아도 범상한 일이 아니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송나라의 어용차 용봉단차
송나라 휘종의 『대관다론(大觀茶論)』에서도 용봉단차를 천하에 으뜸이라고 하였고 왕우칭(954~1001)의 「용봉차시」에도 용봉차의 귀중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樣標龍鳳號題新 용봉무늬 새겨 새롭게 이름지어
賜得還因作近臣 가까운 신하에게만 하사하셨네.
의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용봉단차를 주었으니 의천은 자연 차선일미의 정신에 젖었으리라 짐작된다. 의천이 남긴 3수의 차시 중 「승에게 차를 준 것에 대한 화답의 시(和人以茶贈僧)」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北苑移新焙 북쪽 동산에 새로 말린 차를
東林贈進僧 동림에 계신 스님에게 선물했네
預知閑煮日 한가로운 차 달일 날을 미리 알고
泉脈冷敲氷 찬 얼음 깨고 샘줄기 찾네.
의천이 입송중 누군가에게 차를 선물 받고 고마움의 시를 쓴 것 같다. 북쪽 동산은 복건성 건안현을 말하며 그곳에서 생산되던 용봉단차를 선물 받은 것으로 해석되고 동림은 정토종의 발상지인 혜원법사가 주석하던 동림사를 말한다.
의천이 주석했던 항주 고려사는 중국 차의 대명사로 떠오르는 용정차의 고향으로 자연히 의천은 차와 천태의 사상을 둘로 보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송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의천은 귀국한 뒤 천태산 지자탑원에서 발원한 대로 천태종를 개창하고 선과 교의 진리 속에 차선일미의 정신세계로 젖어 든다.
의천의 정신 살아 있는 대각암
의천을 통해 고려와 송은 활발한 차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송의 용봉단차가 고려로 수입되고 고려의 뇌원차가 송에 수출되는 등 의천이 차문화 교류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보여진다. 의천이 활동했던 고려시대에 차문화는 하나의 정신문화로 자리잡는다. 이때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 중에 차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의천은 왕실로부터 어차(御茶) 20각과 약 1은합을 하사받는다.
의천의 자취를 찾다보면 차와 만나게 되는 곳이 선암사 대각암이다. 대각암은 의천이 말년에 주석했던 곳으로 의천의 부도가 있는 곳이다. 차인들에게 대각암은 의천의 차향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다.
선암사에는 차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차유적이 남아 있다. 돌을 깎아 만든 찻물받이 상탕·중탕·하탕이 지금도 석간수를 흘러 내리고 있으며 석간수 위로 대각국사가 채다를 했었다는 차밭이 펼쳐져 있다. 그외에도 응진당 부엌에 조왕신을 모셨던 단이 있으며 차부뚜막은 6~7년 전까지 보존되다가 지금은 아쉽게도 사라지고 없다.
절문 안으로 들어서니 암주가 우리 일행을 반긴다. 암주인 묘각스님이 차 한 잔을 내어 놓자 이귀례 회장이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운동을 하는 사람들인데 의천스님에게 헌다하고자 왔습니다.”“대각국사 종제일도 아닌데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오셨습니까?”“의천의 법향이 숨쉬는 대각암의 부도전에서 차를 올리고 고려 차문화를 이끌어 온 뇌원차의 의미를 새기기 위해 왔습니다.”묘각스님은 반기듯 차를 권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스님에게 고려 뇌원차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대각암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여쭈었다.
“대각국사의 자취가 곳곳에 있지만 특히 이곳 대각암은 아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국사의 호를 따서 대각이라고 붙였는데 대각이란 깨달음을 뜻합니다.”묘각스님과 차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송종남 부회장은 어느새 한복을 갈아입고 헌다준비를 하고 있었다. 묘각스님의 인도로 송부회장이 대각국사 부도전에 헌다를 올렸다.
우리 일행은 대각국사의 차정신이 살아 있는 대각암에서 뇌원차의 의미를 되새겼다. 문득 의천의 차시(茶詩) 한 수가 떠오른다.
고려 제11대 문종(文宗,재위 1046-1083)의 넷째 아들이며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속장경 4,740여권을 간행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5)의 생애와 탄생지 그리고 차시와 차에 관련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대각국사 의천은 중국 송나라 황제와 황태후로부터 최고급 차를 하사받고 이에 사례하는 글을 지어 바쳤으며 음다 생활의 심오한 경지를 아름다운 시로 표현한 차인이었다. 그리고 여러 의식 행사(제사, 봉헌 등)에 다과(茶果)를 올린 기록이 남아 있다.
대각국사가 지은 차시와 글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황제께 차약을 내리신 것을 사례하는 표 / 성자(聖慈;황제)께서 특별히 차(茶)20각(角;도량형 단위)과 약, 은합(銀合)을 내려 주시며 의관을 단정히 하시고 대하시니 특별히 돌보아 주심에 위로되며 부드러운 싹과 신령스런 약으로 총애를 넉넉히 보여 주시니 공경히 받들어 돌아옴에 영화로움과 부끄러움이 함께 쌓였습니다.
●황태후께 사례함 / 용봉다(龍鳳茶)를 하사하는 것을 사례하는 표(대각국사 문집 6권)
●스님에게 차를 준 사람에게 화답함 / 북쪽 동산에서 새로 볶은 차를/ 동쪽 숲에 사는 스님께 보낸다/ 한가로히 차달일 날 미리 알고/ 찬 얼음 깨고 샘줄기를 찾는다.
●농서의 학사가 임천사를 생각하며 지은 시를 보이매 그 운을 따서 화답함 / 한 곳에 옛절이 있어 원람(鴛籃)이라 부르니 / 문으로 가는 길 깨끗하고 푸른 봉우리 마주하고 있네 / 빽빽한 숲에 잠긴 구름 전각을 둘러 싸고 / 엷은 장막 달과 함께 사자자리 호위하다 / 강(講)하고 솔난간 돌면서 시 읊은 마음 괴롭지만 / 차밭의 차볶는 향기 폐를 씻어 서늘하다 / 주장자 걸어둠은 불법을 배우려는 뜻이지만 / 고향산의 옛집을 꿈속에서 그려본다.
●사례로 주는 차에 화답함 / 이슬 동산 봄 봉우리 아래 무슨 일을 할것인가 / 꽃차 달이고 달빛 삶아 세상 근심 씻어낸다 / 가벼운 몸부림 당하지 않고 삼동(三洞)에노니 / 뼛골 속 으쓱하니 가을에 들어 온 듯 / 신선 같은 인품 종과 범패 소리가 적합하고 / 맑은 향기는 시주(詩酒)하기에 좋아라 / 영다(靈丹) 먹고 장생한 것을 누가 보았던가 /불문을 향해 그런 일 은 묻지를 마라.
●제문(祭文)
① 문종에 대한 제문(송나라에 들어 가서 지음); 신(臣)아무개는 삼가 다과(茶果) 등을 갖춰 선고 고려 국왕 영가에 재를 올리고 아뢰옵니다. 아, 슬픕니다! 생각하옵건대 아무개를 길러 주신 은혜 깊으나 낳으신 은덕을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하 생략)
② 경덕국사에 대한 제문 : 제자 아무개는 다과(茶果)와 제철 음식을 올리고 선사 경덕국사 영전에 경건히 제사 드립니다.
③ 선종에 대한 제문 : 신 아무개는 삼가 다과(茶果)와 깨끗한 제수를 갖추어 대행대왕 영가에 경건히 제사드옵니다.
④ 분황사 원효성사에 대한 제문 : 사문 아무개는 삼가 다과(茶果)와 제철 음식을 갖추어 해동의 교주이신 원효보살게 바치옵니다.
⑤ 금산사 적법사(寂法師)에 대한 제문 : 사문 아무개는 삼가 다과(茶果)를 올리고...
⑥ 용두사 우상(祐詳)대사에 대한 제문 : 삼가 시자 아무개를 보내어 다과(茶果) 등의 제수를 갖추어 고 용두사 유가 강주의 영전에 제를 올립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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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에서 2001년 11월의 문화인물로 지정한 사람은 위와 같이 훌륭한 차시와 글, 행적을 남긴 대각국사 의천이다.
우리 차인들은 국사의 차에 관한 업적과 사상 및 국사와 관련된 개성 영통사를 비롯 중국 산동반도의 판교진(청도), 밀주, 해주, 변경, 남경, 숙주, 양주, 진강, 가흥, 항주, 대주, 천태산, 명주, 정해 등과 우리나라의 순천 선암사 대각암, 송광사, 구미 금오산 선봉사, 영동 천태산 영국사, 합천 해인사 또 천태종 사찰인 단양 구인사, 서울 관문사, 부산 삼광사 등 유적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대각국사 탄생추정지에 비를 세우고 헌다의식 거행.
의천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김부식이 쓴 영통사 비명의 기록인 ‘을미년(1055)9월 28일,궁중에서 탄생했다’는 내용에 의거해 막연히 개성에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1933년, 인천부에서 편찬한 <인천부사>(仁川府史)에’고려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仁睿)왕후 이씨의 내향이기 때문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으며 대각국사가 배출된 때문이다. 대각국사는 인천(현 부천군 관교리)에서 탄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871년에 발간된 <인천부읍지>에 고려 순종,숙종 때 군(郡)객사 뒷편 대청을 어실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대각국사는 인천의 어실(별궁) 또는 부근에 위치한 외가에서 출생, 대각국사 비문의 기록인 ‘궁중에서 탄생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또 인천(인주) 이씨가 고려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게된 것은 이허겸(李許謙)때의 일이고 이자연때에 이르러서는 왕가의 외척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천을 7대어향(7代御鄕)이라 부르는 것은 고려 제11대 문종에서 제17대 인종에 이르는 7대, 80년간 왕의 외향(外鄕;외가)이거나 왕비의 내향(內鄕;친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御)자는 왕에게만 사용되는 글자로서 ‘어향’이란 ‘왕의 고향(뿌리)’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1452년 편찬한 <고려사절요>인종 4년 2월,신유(辛酉)조에 ‘왕(인종)이 외가에서 생장(生長;나서 자라람)하였으므로 그 은혜를 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당여가 조정에 가득하여...’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인종은 확실히 외가에서 낳고 자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사>열전 ‘명의태후 류씨’조에 ‘숙종 2년 궁주가 아들을 낳으니(生子) 왕은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었으며 같은 책’문경태후 이씨’조에 예종4년 사저(私邸)에서 원자(元子)를 낳으니 그가 바로 인종이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고 은그릇,능라 등 선물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공예태후 임씨도 1127년 의종을 낳았을 때,왕이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이는 왕의 비빈이 왕손을 친정에서출산하는 관례가 있었으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 축하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외가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기른다’는 풍속에 대해 <조선왕조실록>(태종조)권 29에 ‘예조에 아뢰기를 전조(고려)의 구속 혼인의 예는 남자는 여자집에 들어가 자식이나 손자를 낳고 기르므로 외친의 은덕은 중하여 외조부모,처부모의 복은30일로 한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고려 때 친정에서 출산하는 일은 당시 생활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외할아버지인 이자연은 당시 최고의 벼슬인 시중이었으며 당시 서울인 개성과 친정인 인천은 멀지않은 거리였으므로 대각국사는 외가인 인천에서 출생하였을 가능성과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가천문화재단을 비롯한 인천의 향토 문화관련 단체에서는 공동으로 학술답사, 조사연구, 토론회, 학술발표회 등을 거쳐 지난 해 9월 28일. 인천 남구 학익동 인주골 인주초등학교 교정에 ‘대각국사 의천탄생추정지’비를 세우고 헌다식을 거행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