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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4월7일(목)맑음
As we know, the earth is not a dead rock floating in space. It is a living system, in itself as a whole and in each and every part. I do not see the earth as an inanimate object-a lump of stone. I think of it as being alive. Sitting on the earth, I feel that everything exists. In this way, we could easily think of the earth as a goddess-a living, breathing, and constantly giving goddess. -17th Karmapa
우리가 알고 있듯 지구란 허공에 떠 있는 하나의 죽은 돌덩이가 아닙니다. 그건 전체적으로 또 모든 부분에서도 살아있는 시스템입니다. 나는 지구를 한 개의 돌멩이와 같은 무정물로 보지 않습니다. 지구는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에 앉은 나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걸 느낍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지구를 살아서 숨 쉬는 여신으로, 끝없이 주는 여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7대 카르마파 존자
<비자발적 기억과 자발적 기억>
비자발적 기억이란 마들렌 한 조각을 커피에 적셔 입 안에 넣었을 때 갑작스레 떠오르는 어릴 때의 장소와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기억은 잠잘 때 꾸는 꿈과 같고 백일몽과 같이 아련하여 달콤하기까지 하다. 한편 자발적 기억이란 현실 상황적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회상해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의 기억이란 불가능하며 언제나 현 상황에 유리하도록 기억은 날조되기 마련이다. 자발적 기억은 날조된다. 나아가 기억을 장악하는 놈이 세상을 지배한다. 집단의 의식까지 지배하려는 세력은 제도화한 교육과 언론을 통하여 집단의 기억을 날조함으로써 세상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집단의 날조된 과거와 미래는 현 지배세력의 입지를 정당화하는데 동원된다. 한 집단이 공유하는 기억이 ‘있는 그대로’ 원형적 사실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허구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현재를 장악한 힘 가진 세력은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설계한다. 현대사를 어떤 맥락에서 보느냐의 관점이 과거와 미래를 구성하게 만든다.
<민중의 자발적 혁명완수가 아닌 누군가의 힘을 빌리면 반드시 배신당하게 된다>
억압받는 당사자들이 억압구조를 깨뜨리지 못하고 타자의 손을 빌리게 되면, 그 타자에 의해 다시 억압당하게 된다. 이것이 68혁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억압받는 민중의 힘을 모으고 이끌어 혁명을 이루고 나면 그 혁명을 지도한 세력이 권력자로 등장하여 다시금 새로운 억압을 행사한다. 소위 ‘혁명의 대의를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독재’를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행사하여 민중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시작한다.
80년대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 한나라당에 들어간 동기는 자기네들이 민중을 지도한다는 선민의식이다. 민주화투쟁에 나섰던 586세대 학생 대표들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일관된 것은 ‘나는 민중보다 먼저 깨어났다. 내가 앞서면 민중은 따른다. 나는 민중에 앞선다. 나 먼저 민중은 뒤, 나는 위 민중은 아래.’라는 관념이다. 결국 그는 출세주의자(입신영달)이며, 계몽주의자(민중을 깨우쳐 이끈다는 지식인이란 입장)이며, 스탈린주의자(일단 일당독재로 노동을 집중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난 뒤에 분배하자)이며, 또 다른 박정희(그의 경제개발계획은 자본생산에 집중하여 파이를 키운 뒤에 분배하자, 결국 스탈린주의와 유사하다)에 불과하다. 김대중부터 노무현까지 그들이 지향했던 민족자주, 중도실용주의는 정치경제적으로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적이며, 신자본주의적이었으며 이념적으로는 국가사회주의적이었다. 김대중에서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세력은 지나간 것을 되짚어보고 다가올 것을 예비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들은 민중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 어디에 자신을 위치시켜 어떻게 혁명의 대의에 기여할 것인가? 그들이 향하는 눈과 내딛는 발, 그들의 말과 실행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물론 민중을 실은 배가 민중이란 바다에 떠 있기에 배와 민중은 相互拮抗하면서 상의상보적이지만 말이다.
68혁명과 촛불 혁명이 어떻게 배신당했는지 기억하라.
사회민주주의자들, 프랑스 공산당은 68혁명을 배신했다. 사회민주주의, 수정주의는 결국 자본가의 선의에 의존하기에 태생적으로 자본-기생적이며 기회주의적이다.
민주당은 촛불 혁명을 이용하여 집권에 성공했으나 혁명의 대의를 실현하기에는 무능했고 무지했다. 2022년 대통령 선거에 패배하였으나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는 민주당은 촛불 혁명의 대의와 열정을 과연 재충전할 수 있는가? 그런데 민주당은 아직 사회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조차 힘들어하며 겨우 중도우파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도대체 꼬뮈니즘(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으로 전진해감에 희망을 걸 수 있을까?
임억령(林億齡, 1496~1568,호 石川, 조선 중기 문인)
示友人(시우인): 벗에게 주다
古寺門前又送春, 고사문전우송춘
殘花隨雨點衣頻; 잔화수우점의빈
歸來滿袖淸香在, 귀래만수청향재
無數山蜂遠趁人. 무수산봉원진인
옛 절 문 앞에서 또 봄을 보내나니
지는 꽃잎 비에 날려 옷에 점을 찍네
돌아가는 길 소매 가득 맑은 향 배어나
벌들이 떼지어 멀리까지 따라오네
오후에 산책하며 한 수 얻다. 午後散步遇得一首
風吹綾絲花飛瀑, 풍취능사화비폭
落紅霏霏逕迷景; 낙홍비비경미경
一回一境更無盡, 일회일경갱무진
天山石湖生無生. 천산석호생무생
바람에 휘날리는 능수 벚꽃이여
꽃의 폭포가 쏟아지는 듯
붉은 꽃잎 비슬비슬 내리니
갈 길은 어지러워 아득한 데
한 구비 돌아드니 또 하나의 경치
다시 새로 나타나길 다함이 없네
하늘과 산, 바위와 못이여
낱낱이 생생하여 언어를 벗어났네
일진선사가 권하여 무문관 제일칙에 대해 수필을 쓰다.
<무문관 제1칙 조주의 구자무불성>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개같이 보이는 저 동물도 깨달을 수 있습니까? 개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나’가 문제이다. 이 개 같은 처지에 있는 나도 깨달을 수 있습니까? 깨달음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왜 내 손에 잡히지도 않고 내 눈에 띄지도 않느냐고 불평한다. 그래서 자꾸 묻는다. 불성이 있냐고, 있다면 어디에 있냐고. 내게는 왜 없냐고. 이런 식으로 생각의 바퀴가 굴러가는 동안은 젓가락만 씹을 뿐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으리라. 그러면 궁금증이 꽉 차서 묻는 마음이 치성한 제자는 어떻게 해야 그 마음의 불길을 끌 수 있을까? 사실 어떤 진리랄까, 궁극적 해답 같은 것에 대한 마음이 간질간질하여 끊을 수 없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야 마지막 문턱을 넘게 된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를 일부러 그 지경까지 잡아끌기도 한다. 이런 일은 스승과의 인연이 있어야 가능하다.
과연 불성이 무엇인가? 부처 Buddha(佛 불)가 될 가능성, 잠재력(性 성) 그래서 부처의 성품이니 불성 佛性 Buddh-nature, Buddha-hood이다. 그리고 그것은 ‘깨닫는다 budh’는 동사의 명사형 buddha붓다이니, 붓다의 성품, 즉 불성이란 깨달을 수 있는 성품, 깨어날 수 있는 잠재력이다. 무엇을 깨닫는다는 걸까? 공성(空性, 에고 개아 없음, 텅 빔)과 연기(緣起, 상호관계의 무한중첩)의 둘-아님을 깨닫는다. 공성과 연기가 둘 아니라는 것은 생명전체가 생생히 살아서 함께 약동함으로 고정불변하는 특성을 지닌 에고란 허구이며, 에고가 허구임을 아는 즉시 에고가 벌이는 비극이나 희극의 에피소드를 끝난다. 그리고 전체 생명의 대하드라마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활발발하게 유희자재 한다. 이미 벌써 그렇게 되어있음을 몸소 확인한다. 깨달음을 몸으로 확증한다.
무! 지금 당신 눈앞에서 우주가 온 정성을 다하여 그토록 친절하게 소식을 전해 준다.
무! 봄빛이 누리에 가득하다.
무! 눈을 뜨라.
무! 잠든 네 머리를 때려 박살을 내버린다. 브라흐만도 하나님도 무!의 방망이를 맞아 피를 흘리며 죽었다.
보라, 봄들녁에 가득 피어난 복사꽃과 산벚꽃, 산목련과 개나리가 무!를 노래한다.
조주도무파천황, 趙州道無破天荒,
무단무자소선장; 無端無字燒禪藏;
농래농거유무중, 弄來弄去有無中,
수풍화우장생령. 隨風化雨長生靈.
조주스님의 무!여, 일찍이 없던 새로운 일이라
뜬금없는 무!자가 선어록을 불태우고
有와 無를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사이
바람을 따르고 비가 되면서 뭇 생명을 길러주네
笑山圓潭 口臭漏
소산원담 입냄새를 피우다
[참고]buddha의 동사형
①√बुध् budh waking up, knowing, understanding
범어 동사형 깨어나다 覺, 알다 知, 알아듣다 解
②천지가 아직 열리지 않은 혼돈된 상태인 천황(天荒)을 깨트리고(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뜻. 아무도 한 적이 없는 큰일을 제일 먼저 한 것을 비유해서 쓰는 말. 동의어로는 미증유(未曾有), 전대미문(前代未聞)
2022년4월8일(금)맑음
북촌에서 점심 공양하고, 강변 길 걸음. 울 옆 해당화 방긋 웃음. 대나무는 푸른 어깨 흔들며 옆으로 몸을 기대고, 조팝나무 쪼그려 앉아 팝콘을 튀긴다. 물 건너 바위벽에 물그림자 어리고 흰 구름 흘러가며 손을 뻗어. 투명한 구름 손길 눈에 띄지 않게 수면에 뜬 물오리 머리를 만지고. 물 흐르듯 길도 흘러 예까지 왔나. 가던 길 멈추면 문득 만상이 텅 빔으로 확 빨려들고. 순간, 다시 한 발을 내디디면 여전히 그대로 연두빛은 연두빛, 제비꽃은 제비꽃. 거리에도 벚꽃 집에도 벚꽃, 온갖 곳에 벚꽃 잔치. 천지가 한바탕 잔치이거니 누가 울고 누가 웃나? 한 집 세상에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 텅 빈 중심에서 빛의 분수 뿜어져 나와 시방삼세를 펼치네. 걸어 다니는 빛의 분수여, 사람을 만나 서로 웃으며 빛으로 연결된다. 빛나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입에서 귀로, 귀에서 귀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퍼져가네, 여울져 가네. 그리고 빛은 어둠의 품에 안겨 달걀처럼 쉰다.
발터 벤야민, 칼 슈미트, 조르조 아감벤, 마르셀 프루스트, 죄르지 루카치, 프란쯔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를 알아보다. 강신주 강의를 듣다.
2022년4월9일(토)맑음
노예는 자유인을 질투한다.
대다수 인간은 노예로 살아간다.
불교는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인으로 살게 하려 한다.
우리를 노예로 살아가게 강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지, 습관, 고정관념, 사회적 관습, 도덕, 가족중심주의, 집단중심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제도화된 종교, 제도화된 교육제도, 자본주의, 자국가중심주의, 자민족중심주의, 군국주의, 전체주의
마음은 깊이가 없기에 깊은 듯이 보인다.
마음속으로 들어가려 하지도 말고, 마음 밖으로 나가려 하지도 말라. 마음엔 안팎이 없다.
마음이랄 것도 없다.
倦讀緩步園, 권독완보원
笑月竊窺筠; 소월절규균
常聞苦海濁, 상문고해탁
願灑甘露淳. 원쇄감로순
책 읽기 피곤하여
천천히 정원을 거니노라니
대나무 사이로 엿보며 달이 미소 짓네
늘상 들리나니 고해의 탁류 소리
감로를 뿌려 맑히고 싶어라.
일진선사가 무문관 서문을 쓰시고 수정해줄 것을 청해서 그렇게 하다.
<무문관> 서문
세상은 본래 아름답고 완전합니다.
단지 그대의 생각이 불행을 지어낼 뿐입니다.
당신의 불행이란 ‘불행하다는 생각'이 투사해낸 현실이니, 그 '생각으로 만들어낸 경험'에 갇혀서 괴로워합니다. 그 '생각'의 껍질이 벗겨지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워집니다. 삶이 걸림 없이 빛나면 복이 가득한 세상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이미 늘 완성되어 '지금 여기'에 완전합니다.
그대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평화'와 아무 이유 없는 편안함을 이미 누리고 있습니다. 깨달음에 새로운 무엇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텅 비어 괴로움이 붙을 수 없을 뿐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텅 빔을 깨친다는 것은 일생을 따라다니던 불안과 강박, 의문과 초조가 완전히 해소된다는 의미에서 ‘공부를 마쳤다’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지식을 쌓아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자신과 세계를 규정하고 있는 관념의 틀, 즉 '나와 나의 것'이 해체될 때 순수한 본성, 즉 본래면목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책이나 블로그에 실린 글들은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의 필터를 통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깨닫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들은 정보는 많은데 깨침이 없기에 헤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부가 어려운 것은?
‘내(에고)가 마음을 갈고 닦아 참나를 본다(修心見性)’라는 고정관념 혹은 오해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기와(생각)를 갈아서 거울(무심)을 만들려는 격입니다. 이 착각이 깨지면 저절로 공부가 됩니다. 정말로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눈 뜬 선각자와 탁마를 통해서 이 공부를 짧은 시간 내에 명백하게 끝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마음’ 들여다본다든가, '나'를 갈고 닦음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혼자서 공부를 지어간다면 이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오히려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이 제도권 불교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조계종 제방 선원에서 이뤄지는 관행적인 수행으로 견성오도한 사례는 50년 동안 거의 전무한 실정이며, 설상가상으로 제도권 선원은 스스로 산속에 고립시킴으로써 사회와 소통하는 방편시설에 무능함을 드러냅니다. 반면 요즘 서양에서는 깨달은 분들이 곳곳에서 활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이 번역되어 역수입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절집의 간화선이 화석화되자 90년대부터 제도권 밖의 젊은 스님들, 재가자들에 의해서 조사선이 다시 일어나는 조짐이 보입니다.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불법이 시대를 아우르며 펄펄 살아 있지 못하면 세상 밖으로 밀려납니다.
현재 조계선종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지경이 된 것은 지극히 안타깝습니다. 역사적으로 제도권 불교는 자체적으로 정화되기보다는 제도권 밖에서 눈 뜬 자, 소수의 깨달은 분들에 의해 개혁되고 중흥됐습니다. 전등의 역사가 말해줍니다. 깨달음의 씨앗 한 알이 땅에 뿌려져 썩지 아니하고 마침내 보리수 숲을 이루듯, 하나의 등불이 천 개 만 개의 등불로 전해지면서 불교가 중흥될 것입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깨달음의 정보가 집단적으로 공유됨으로써 깨달음의 장이 혁명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세계를 주름잡던 서양철학이 해체되어 서양의 지성은 무아와 연기론에 공명하고, 양자론적 세계관과 생태주의적 관점 역시 공성과 화엄연기에 접속됩니다. 바야흐로 불교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올라타 시대정신을 이끄는 불교적 집단지성과 불교 지도자들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인터넷와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인류의 집단지성과 소통하는 지혜와 자비가 본지풍광을 드날릴 것입니다. 특히 선어록을 혁신적으로 해석하여 세계의 청년들에게 주인으로 사는 지혜를 선물하는 일은 최고로 필요한 법보시가 될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모여 물줄기를 만들고, 그 물줄기가 강이 되어 바다에 이릅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부정당하지 않는 이!것! 여기 눈앞에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2022년4월11일(월)맑음
명섭스님 오셔서 점심 공양 함께 하다.
능엄경의 말씀:
一人이 發眞歸原히면 十方虛空이 悉皆消殞이라.
한 사람이 참다운 마음을 일으켜 근본 자리로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모두 녹아내린다.
2022년4월12일(화)흐림
내가 부처를 보는 그 눈을 통하여 부처가 나를 봅니다.
내가 대상을 보는 그 눈을 통하여 대상이 나를 봅니다.
내가 세상을 보는 그 눈을 통하여 세상이 나를 봅니다.
내가 꽃을 보는 그 눈을 통하여 꽃이 나를 봅니다.
눈은 나와 꽃을 동시 발생시키는 門이면서 투명한 상호관계입니다.
눈은 봄입니다.
눈은 주관에서 객관으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바뀌는 뫼비우스 띠의 노드(node, 交點)입니다.
봄은 주객동시발생, 주객불이, 佛의 妙用입니다.
<내가 당신을 보는 그 눈을 통하여 당신이 나를 봅니다>
내가 당신을 보는 그 눈을 통하여 당신이 나를 봅니다.
내 눈에 비친 당신의 눈이 당신의 눈에 비친 나를 봅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기에
당신에게 나타난 나는
나에게 나타난 당신입니다.
나에게 나타난 당신은
당신에게 나타난 나입니다.
나와 당신이 서로 ‘본다’는 것은
내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본다’에는 나도 없고 당신도 없지만,
나에게 당신이 나타나고
당신에게 내가 나타나는 사건이며 신비이며 은혜로움입니다.
한 번의 ‘본다’는 전무후무하고 유일무이한 우주적 사건이어서
머물지 않아 붙잡지 못하기에 자유롭습니다.
또한 텅 비지 않아 온유한 전율이기에 환희롭습니다.
<왕지환의 등관작루을 공안 삼아 묻는다>
登鸛雀樓(등관작루)-王之渙(왕지환)
白日依山盡, 백일의산진
黃河入海流; 황하입해류
欲窮千里目, 욕궁천리목
更上一層樓. 갱상일층루
<관작루에 올라> - 왕지환
해는 산에 기대어 지려 하고
황하는 바다로 흘러든다,
천 리 바깥 멀리 바라보고자
다시 누각 한 층을 더 오른다.
*왕지환(688-742, 당나라)의 대표작 <등관작루>. 관작루는 중국 산시성 윈청(運城)에 있다. 북주(北周) 시기에 세워진 중국에서 유명한 4대 누각 중 하나. 황학루(黃鶴樓), 악양루(岳陽樓), 등왕각(滕王閣).
문제 1. 어떤 것이 천리목(천리 바깥을 바라보는 눈)인가?
답: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눈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눈!
문제 2. 어떻게 해야 누각 한 층을 더 올라갈 수 있는가?
답: 발밑을 밟아라. 踏着足下. 답착족하
<무문관 44칙 파초주장자에 대해>
*본문: 파초선사가 말씀했다. 너희 수행자들이여,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으면 내가 주장자를 줄 것이요,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의문점: 너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내가 그것을 빼앗겠다 하고
네게 주장자가 없다면 내가 주겠다 하는 것이 세상의 일반적인 대화일 텐데,
어찌하여 있는데 준다고 하고, 없는데 빼앗는다고 하는가? 도대체 파초선사의 말씀은 비논리적이지 않은가?
*추측: 주장자가 손으로 쥐고 만질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라면 분명 있으면 빼앗고 없으면 주겠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 반대로 있으면 주겠다 하고 없으면 빼앗겠다고 하니, ‘주장자’란 것이 분명 나무로 된 지팡이는 아닐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선문답에 나오는 주장자가 물건을 가리키는 건 아닐 테고, 무슨 법이니 깨달음과 같은 수행자가 기대하는 최종경지를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 본문을 다시 써보자. 너희 수행자들이여, 너희에게 법(깨달음)이 있으면 내가 법(깨달음)을 주고, 너희에게 법(깨달음)이 없으면 내가 너희에게서 법(깨달음)을 빼앗을 것이다.
역시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주장자를 지팡이로 보거나 법(깨달음)을 상징하는 의미로 보거나 간에 파초선사의 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론은 세상에서 통하는 말이나 논리로는 파초선사의 말씀은 절대 이해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말과 논리는 절망해야 한다. 그래서 妙悟要窮心路絶묘오요궁심로절, 묘한 깨달음은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무문선사가 약간의 힌트를 준다.
다리 끊어진 물을 이것에 의지하여 건너,
달도 없는 캄캄한 마을에 이것과 함께 돌아온다.
만약 이것을 주장자로 부른다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이것이 무엇인가? 수행자는 여기에서 말길과 마음길이 차단당하여 參究참구하게 만든다. 참구, 진리의 세계에 몸소 뛰어들어,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깨어남의 불(靈焰,영염)이 확 붙어야 한다. 빛이 자기 스스로를 비추는 빛의 근원으로 갈무리되는 일이다. 영어로 brainstorm브레인스톰이나 mindblow마인드블로우가 이 과정과 비슷하다. 요는 관점이 혁명적으로 일대 전환해야한다. 그래서 大死一番天地新 대사일번천지신, 크게 한번 죽어야만 천지를 새롭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笑山의 견처는 어떠한가?
본래 있으니 남이 더해 줄 수 없고, 본래 없으니 남이 빼앗아 갈 수 없다.
本有兮, 不可被贈; 本無兮, 不可被奪. 본유혜, 불가피증; 본무혜, 불가피탈.
→일진선사가 경책하기를 교학적 자취가 남아 있는 답이라 아쉬워하다.
일진선사 대신 답하길, 푸른 하늘에 뭘 더하고 뺄 수 있단 말인가?
晴天碧落 何增何減? 청천벽락 하증하감?
*무심선원장의 군소리
옷 입은 사람에게 또 옷을 입히고
헐벗은 사람에게서 옷을 벗겨라.
파초는 잘 속였다고 좋아하겠지만
비웃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야 하리.
→일진선사 평: 김선생 참 멋지다!
*笑山의 군소리
파초선사여, 파초 껍질을 다 까버리면 중심이 없는데, 무엇으로 주장자를 삼으시렵니까?
*일진선사의 군소리
주장자를 붙잡고 -확- 밀치면서 “이것이 무슨 뚱딴지같은 물건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