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을 전후해 노벨상 수상 소식과 함께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뉴스가 있다. 새로운 미슐랭 레드 가이드북 출간 소식이다. 프랑스 기업인 ‘미슐랭’이 지정한 ‘원스타·투스타·스리스타 레스토랑’에 관한 뉴스라 할 수 있다. 호텔도 미슐랭 평가 범주에 들어가지만 미슐랭에 쏟아지는 관심의 대부분은 음식에 집중된다. 국가적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는 노벨상이나 올림픽 금메달도 좋지만, 배를 불리고 맛을 음미하는 미슐랭 레스토랑 뉴스에 누구든지 솔깃해지기 마련이다.
미슐랭 레스토랑 평가서는 가을을 기점으로 세계 곳곳에서 연속적으로 이듬해 판이 발간된다. 매년 11월 중순에 발간되는 뉴욕 레스토랑 평가서는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미슐랭 글로벌 이벤트 중 하나다. 11월 16일 발간될 미슐랭 2017년 뉴욕판은 맛과 멋에 민감한 뉴요커들의 필수 관심사 중 하나다. 이어 신년판 미슐랭은 유럽으로 넘어간다. 1월 이탈리아, 3월 독일, 4월 프랑스, 5월 벨기에 순으로 새로운 판이 발간된다. 뒤늦게 출발한 일본과 홍콩의 미슐랭 신년판은 매년 1월에 발간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슐랭의 모기업은 타이어 제조회사다. 자동차가 탄생한 직후인 1900년, 파리 교외로 놀러가는 사람들을 위한 숙박·음식 안내서가 미슐랭의 기원(起源)이다.
성경 제외 최고의 히트 시리즈
무엇이든지 꾸준히 한 우물을 파면 결국에는 좋은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올해로 117년 역사를 가진 미슐랭 평가서는 전 세계 미식가 대부분이 인정하는, 레스토랑 관련 최고(最高)·최고(最古)의 바이블이다. 한국이 그 같은 명품을 무시할 리가 없다. ‘마침내’ 오는 11월 7일, 미슐랭 2017년 서울판이 등장한다. 세계적으로 보면 25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중국·싱가포르에 이어 네 번째 입성이다.
미슐랭은 현재 전 세계 24개 나라를 평가 대상으로 삼고 있다. 프랑스어·영어·독일어·일본어·중국어판을 비롯해 전 세계 90개 나라에서 매년 새롭게 출간된다. 올 들어서는 9월 상하이(上海)에 이어 10월 중순 워싱턴DC가 미슐랭의 새로운 평가 대상으로 등장했다. 미슐랭 평가서 가격은 대략 30달러 내외다. 글로벌 연간 판매량은 1000만부 선으로 알려져 있다. ‘해리 포터’ 같은 연작 베스트셀러도 있지만 바이블을 제외할 경우 ‘인류 최대 최장 글로벌 히트 시리즈’라 볼 수 있다.
서울판 미슐랭 출간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나타나는 듯하다. 반(反)미슐랭과 친(親)미슐랭 논리다. 먼저 반미슐랭 시각이다. 고향의 맛에서부터 어머니, 할머니, 이모, 고모와 같은 가족의 손맛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의 심정이다. 결코 싸지도 않을, 서양 요리에 주목하는 미식가 웰빙족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다. 밥 한 끼 먹으면서 유럽의 평가서까지 들먹거리느냐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듯하다. 한국인만큼 한국 음식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인데, 왜 프랑스 평론가들이 나서서 왈가왈부하느냐는 논리일 수도 있다.
반미슐랭 논리는 비빔밥을 내세우는 한류 지지자들로부터도 재확인해 볼 수 있다. 미슐랭을 논하고 받아들이기 전에 전 세계에 한류 비빔밥부터 알리자고 주장한다. 기억에도 새롭지만, 비빔밥 이벤트는 뉴욕과 파리 일류 호텔에서 벌어지던 한류 관련 이벤트 중 하나였다. 소리 소문 없이 한순간 사라졌지만, 그래도 미슐랭보다는 ‘비빔밥 최고’를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럼 미슐랭 지지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먹기 위한 것이 아닌 즐기기 위한 문화로서의 음식’이라는 논리가 중심에 서 있다. 고향의 맛, 어머니의 손끝 맛, 한류 비빔밥도 좋지만 뭔가 색다른 시각의 ‘문화’를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다. 맛보다 멋으로서의 식사에 주목하는 것이다. 밥 한 끼보다 커피 한 잔 가격에 더 큰 비중을 둘 수 있다는 사고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넘치고 넘치는 토종 미식 평가서를 왜 멀리하느냐는 반미슐랭 논리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도 갖고 있다. “골목 거리 빌딩 어디를 가도 신문, 방송, 잡지 어딘가에서 특별히 다뤘다는 자랑이나 광고가 늘어서 있다. 제대로 된 평가가 아니라 백화점식 선전문구에 불과하다. 음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나 기관에 의한 객관적 평가서가 아쉽다.”
한 달 뒤쯤 미슐랭 서울판이 나온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슐랭 조사관들에 의한 국내 레스토랑 평가는 9월 중에 이미 끝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지금쯤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윤전기로 ‘서울 데뷔 작품’을 열심히 찍어내고 있을 듯하다. 미슐랭 평가를 둘러싼 궁금증 중 하나로 특유의 비밀스러운 조사 과정을 빼놓지 않을 수 없다. 미슐랭 조사관이라 밝히면서 시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 가장해 하나씩 테스트한 뒤 그 결과를 본사에 제출한다. 비밀 방문 대상은 원스타·투스타·스리스타로 이뤄진 메이저급 레스토랑만이 아니라 적당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가성비가 좋은 음식점, 이른바 비브 그루망(Bib Gourmand)과 같은 마이너급 레스토랑에도 적용된다. 미슐랭 탄생 이후 계속된 전통인 동시에 평가서에 대한 객관적 신뢰를 구축하는 노하우인 셈이다.
그들은 어떻게 평가하나
필자는 2004년 겨울 미슐랭에서 일한 전직 조사관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프랑스인 파스칼 레미(Pascal Remy)로 ‘조사관 식탁에 앉다(L’Inspecteur se met a table)’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파스칼 레미는 미슐랭 정보에 밝거나 미식가를 자처하는 유럽인이라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알고 있는 유명인이다. 그의 행적에 유럽 미식계 전체가 출렁거린다. 2003년 파스칼은 조사관으로 일한 경험을 책으로 내겠다고 미슐랭 본사에 알린다. 그러나 본사는 책 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조사 과정의 비밀엄수는 조사관으로서의 기본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가 “미슐랭 조사관의 평가가 허술하게 이뤄지는 것은 물론 일부 스리스타 레스토랑의 경우 셰프의 강력한 영향력에 의한 결과”라고 책에 고백한 부분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레스토랑을 전부 찾아가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략 귀동냥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고 증언한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미식 바이블의 ‘민낯’이 파스칼에 의해 전 세계에 드러난 것이다.
미슐랭 측은 갖가지 방법으로 회유하지만 파스칼은 책 출간을 강행했다. 그러나 책을 받아주는 출판사가 하나도 없었다. 미슐랭 측의 보이지 않는 압력 때문에 모두가 파스칼을 멀리한 것이다. 무명의 신예 출판사를 통해 겨우 책을 냈지만 이번에는 서점에서 책 반입을 거부했다. “프랑스의 미식 바이블을 망치는 야만인”으로 비난받았다. 파스칼의 책은 얼떨결에 금서(禁書)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푸대접과 달리 유럽 내 다른 국가와 미국에서는 파스칼 레미를 내부 고발자(whistle blower)로 추앙하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필자의 인터뷰는 바로 그 같은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당시 필자가 주목한 것은 미슐랭의 어두운 부분이 아니라 미슐랭만이 갖고 있는 특별함에 있었다. 삼라만상이 그러하듯 어디든지 문제는 있을 수 있다. 책 하나로 100년 이상의 전통을 쌓고 이어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조사관은 어떤 기준으로 어떤 면을 보면서 레스토랑의 수준을 평가하는가? 파스칼은 친절하게도 필자의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해줬다. 크게 볼 때 평가 기준은 네 가지로 압축된다.
△음식의 맛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대략 5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같은 음식이라도 얼마나 창조적으로 재구성해 선보이는지가 중요하다.
△레스토랑이란 공간을 구성하는 환경과 분위기도 중요하다. 식탁과 주변의 구성 요소인 메뉴판·테이블·포크·나이프·접시·그림·의자·조명·카펫 청결도 중요하다.
△스태프들의 서비스 수준이나 친절도 중요하다. 와인잔을 비우면 신속하게 다시 따라주느냐 같은 것들이다. 일부러 냅킨을 떨어뜨려 웨이터들의 반응을 살펴보기도 한다.
△음식과 더불어 와인의 수준도 중요하다. 얼마나 비싼 와인이냐가 아니라, 음식에 맞는 와인을 얼마나 적절하게 준비하는가가 한층 더 중요하다.
파스칼에 따르면 미슐랭 레드북은 맛이 아니라 총체적 예술 작품 평가서로 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그가 내부 고발자로 나선 이유는 바로 그 같은 종합예술 평가서로서의 의무와 자세가 흐트러진 데 대한 항명인 듯 느껴졌다.
‘프랑스산’이 몰려온다
단순한 '밥집' 아닌 미슐랭 레스토랑 음식을 주제로 하는 고급 문화 심포지엄이 벌어지는 현장에 가까워
11월에 등장할 미슐랭 서울판은 종합예술 평가서로서만이 아닌, 프랑스 소프트파워의 핵심이자 총결산이란 의미도 갖고 있다. 음식 평가서로서만이 아니라 스타 레스토랑을 구성하는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요소들이 미슐랭 서울판을 발판으로 진출할 것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미슐랭 레스토랑은 ‘밥집’이 아니다. 음식을 주제로 한 고급 문화 심포지엄이 벌어지는 현장쯤에 해당한다. 글로벌 시대의 문화는 공짜가 아니다. 특히 상급문화의 경우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뛴다. 출시 즉시 품절되는 수천만원짜리 에르메스(HERMES) 제품은 물건을 넣는 가방이 아니라 21세기 최고급 문화의 상징쯤으로 받아들여진다. 스타 레스토랑은 모두의 기대에 걸맞은 작품과 분위기를 연출해내야 한다. 보르도 와인과 샴페인에서부터 치즈·고기·소스와 같은 음식 재료뿐 아니라 와인잔·그릇·칼 같은 주방기기를 포함하는, ‘메이드 인 프랑스’ 제품들이 미슐랭을 통해 확산되는 게 당연하다. 스리스타 프랑스인 셰프가 만드는 프로방스 직수입 트러플 요리나, 프랑스 최우수 장인(MOF)이 만드는 디저트, 부르고뉴산 화이트와인 시음식과 같은 이벤트들도 미슐랭 서울판 등장 이후 한국 내에서 빈번하게 이뤄질 것이다.
간과하기 쉬운데 미슐랭은 한식을 평가하기 위해 서울에 들르는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맛볼 수 있는 전 세계 요리를 평가하기 위해 한국에 올 뿐이다. 스리스타 최고급 레스토랑은 한국인이 아닌 프랑스인이 납득할 수 있는 기준과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비빔밥·궁중요리·삼계탕 그 어떤 것을 준비한다 해도 프랑스인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미슐랭의 범주 밖에 머물 뿐이다.
미식 대국 이탈리아조차 미슐랭이 보면 ‘2류 밥집’에 불과하다. 맛보기로 원스타 정도는 주겠지만, 프랑스 요리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느냐 여부가 한국 최고급 레스토랑의 조건이다. 한국에서 프랑스 스타일 요리를 얼마나 맛볼 수 있을까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르 코르동 블루(Le Cordon Bleu)’는 그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다. 프랑스 미식 소프트파워의 ‘반도체’ 같은 요리 교육기관으로, 미슐랭이 탄생하기 5년 전인 1895년 건립됐다. 현재 전 세계에 50개 학원이 진출해 있다. 매년 2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글로벌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2002년부터 진출해 있다. 미슐랭이 진입하기 15년 전부터 ‘메이드 인 프랑스’의 그림자가 한국에 드리워져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