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28> 이완 장군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숙부 충무공 유언 받들어 노량해전 독전하여 대승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조카, 1627년 정묘호란때 순절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706년 아산 현충사에 배향
|
● 호국충정 똘똘 뭉친 충무공 가문
임진왜란 때의 구국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집안은 호국 충정으로 똘똘 뭉친 가문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은 충무공께서 생애 최후를 맞는 전쟁이 벌어진 날이다.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5000명이었다. 충무공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함께 이날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충무공과 명나라 진린이 이끄는 조명(朝明) 연합함대는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던 왜군 500여 척을 상대로 싸워 하룻밤 새 그 절반가량을 격파했다.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남은 배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나, 연합함대는 정오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계속 추격했다. 충무공은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다가 적의 탄환을 맞았는데 치명상이었다. 그는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53세의 삶을 마치게 된다.
이때 충무공의 조카 이완(李莞·1579~1627)이 숙부의 전사를 알리지 않고 앞장서서 독전해 대승을 거두었다.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과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충무공과 함께 전사했다. 당시 도주하던 150여 척의 왜군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해전’이다.
이완의 자는 열보(悅甫)인데 이순신의 휘하에서 종군할 때 나이가 겨우 20세였다. 이후 이완은 1599년 무과에 급제하며 광해군 때 평양중군과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인조반정 후 이괄(李适)의 반란군을 평정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1627년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후금(後金·나중에 청나라로 개칭)이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이완 장군은 3000의 병력으로 후금군에 대비했다. 1월 13일 후금군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으나 이완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후금군은 이날 낮부터 해질 때까지 공격해 성을 압박했고, 밤이 깊어지면서 조선군은 사기가 떨어져 성을 이탈하는 자가 속출했다.
후금군은 이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 성안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알아내 잠입에 성공했다. 이들은 곧 민가와 무기고에 불을 질렀고, 이 틈을 이용해 후금군은 일제히 성을 공격했다. 이완은 이들을 맞아 장대에 올라 지휘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자 병기고에 불을 지르고 사촌 동생 개(蓋)와 함께 뛰어들어 순절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706년 아산 현충사에 배향됐다.
충무공의 맏아들인 이회 역시 조선의 무신으로 자는 무백(茂白)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분연히 부친을 따라 한산도 해전 등에 참전했다. 이후 아버지 이순신의 음보(蔭補·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훈이나 음덕에 의해 특별한 대우를 받아 관직을 얻거나 벼슬에 보임되는 것)로 임실현감(任實縣監), 통훈대부를 거쳐 첨정(僉正·각 관아에 속한 종4품 벼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됐다.
충무공의 셋째 아들인 이면은 정유재란 당시 고향 아산에서 왜군이 이순신에 대한 보복 습격을 한 데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그는 영리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한다. 부친 이순신은 이면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애통해했다. 묘는 현충사에 있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하면 충무공의 혁혁한 무공만 생각하고, 충무공 가문 전체의 업적을 간과(看過)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인 조명과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추억의 영화 음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