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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가온해
자강운동 ( 自强運動 )
이 운동은 1905년 부터 1910년 경 까지 교육 , 문화 , 경제적 으로
실력양성 에 의한 국권회복 을 위해 각계의 다양한 인물들이 표방했던 운동이나 ,
각기 주장이 엇갈려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 당시 실력양성 이란 의미로
식산운동 (食産運動) 을 내세워 민족의식 (民族意識) 고취 를
목적으로 애국계몽운동 (愛國啓蒙運動)보다 폭넓게
현실 인식과 미래지향적 사고로 낙후된 교육 현실과
문화 경제 를 강하게 육성 하려던 운동 이 었다 .
첫째 ,
헌정연구회 (憲政硏究會) 계열의 윤효정 , 권동진 , 오세창 , 등
천도교 (天道敎)계 정운복 , 최석하 등 서북학회(西北學會) 계 를 포괄하는
대한협회 (大韓協會) 계열 인데 , 이들은 일본 의 보호정치 를 한국의 문명개화 를
위한 선진문명의 지도자 라고 인식하고 한국 이 부강 해지면 일본 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며 , 선 실력양성 , 후 독립론 (先 實力養成後 獨立論) 을 내 세웠다 .
오늘날 일본의 침략 은 우리민족 의 축복 이라고 망발 을 내뱉는 자들과 같은
맥락 이다 . 이때는 은근히 일본 과 줄을 대기위해 기회 를 노린자 들이
많았고 , 이미 줄을잡고 곡예를 하는자 들도 많았다 .
둘째 ,
장지연 , 박은식 , 남궁억 등은 황성신문 계열 이다 . 이들은 일본의 침략성 보다는 ,
우리자신의 실력부족 에서 원인 을 찾고 , 국권회복 의 방법으로 교육 과 식산흥업 ,
조국정신 과 국가사상 의 고취 등을 제시 했다 .
그러나 이들도 선 실력 양성 , 후 독립론 의 입장을 비췄으며 ,
문명개화 노선 을 추구하는데 유림 (儒林)을 문명개화 의 잠재적
힘이라고 보고 유교 (儒敎)를 근대적 종교 로 개혁하려 했던것 과 맞 물린다 .
셋째 ,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新報)의 양기탁 , 신채호 , 상동청년학원 의 전덕기 , 이동녕 ,
이회영 , 무관출신 의 이동휘 ,등 은 신민회 (新民會) 내의 급진파 계열이다 .
이들은 일본의 보호국 화 와 통감정치를 정복자 의 정치 라고 비판 했다 .
그러나 이들도 1908년 까지는 선 실력양성 , 후 독립론 을 견지 했으나 ,
1909년 경에 입장을 바꿔 선 독립론 을 제기 했다 .
1910년 에 이르러 이들은 실력양성 을 포기하고 국외에
근거지를 둔 무장투쟁을 계획 했다 .
안창호 (安昌浩) 는 국권회복운동 에서 국민 과 지도자 들의 단결엔
수양 (修養)이 필요하다고 강조 하며 , 민족전체 가 근대적 국민으로 자격 을
갖춰 민족갱생 사업 (民族更生事業)이 완수되면 독립운동 은 성공할 것이다 .
라는 그의 믿음은 1910년 대에 흥사단 , 1920년대
수양동우회 (修養同友會)를 설립 하였고 ,
이광수 (李光洙) 가 민족개조론 (民族改造論) 을 멋대로 해석 ,
외곡된 행위로 개조론 을 외쳤으나 ,
정작 개조 (改造)된것은 친일파 (親日派)로 둔갑 한
이광수 자신 뿐이 었다 .
한편 신민회 내의 급진파 (急進派) 는 1910년 이후 만주에서
무장투쟁론 (武裝鬪爭論)과 국수보존론 (國守保存論)에 입각한
근대민족주의 (近代民族主義)를 정립해 나갔다 . 천도교 계와
청년학우회 (靑年學友會) 와 일본 유학파 중심으로 한 지식층들은
1910년 이후에도 선 실력양성론 을 움켜쥐고 1920년대 에 신문화운동
(新文化運動) , 물산장려운동 , 민족성개조운동등의 민족개량주의운동
(民族改量主義運動)을 펴 나갔다 .
어떻게 보면 자강운동 과 민족개량주의 운동은 눈먼아이 의 형태로
논쟁의 불씨만 흔들면서 공존 하고 있었다고 볼수있다 . 그러나 이들
대부분 이 친일파 로 둔갑하면서 더욱 목청을 높였다 .
자강회 (自强會) 기관지 표지 (表紙) ) ( 젊은날 의 도산 (島山) 안창호 (安昌浩)선생 )
도산 ( 島山) 안창호 (安 昌 浩 )
호는 도산 (島山)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 (江西)에서 출생 ,
한학 (漢學)을 배우다 , 청일전쟁 을 겪고 깨달은바 1895년 18세때 상경 ,
구세학당 (救世學堂)에 들어가 그리스도 인 이 되었다 .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의 (萬民共同會議)를 쾌재정 (快哉亭)에서 개최 ,
약관 (弱冠) 의 나이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다 .
훗날 종교 , 교육, 민족지도자 인 이승훈 (李昇薰)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 의 의지 를 굳혔다고 술회했다 .
1899년 , 고향 강서 에서 한국최초
남녀공학 점진학교 (漸進學校)를 세우고 ,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에 가서 노동을 하며
초등과정 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
이듬해 에는 교포 들의 권익보호 와 생활향상 을 위해
한인공동협회 (韓人共同協會) 를 만들어
공립신보 (共立新報)를 발행 하였다 .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 1906년 귀국 ,
1907년 , 이갑 (李甲), 양기탁 (梁起鐸), 신채호 (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抗日秘密決死)신민회 (新民會)를 조직 , 대한매일신보 를 기관지로 활동을 시작 ,
대구에 태극서관 (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 을 하며 , 평양 에
도자기 회사 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 에 힘쓰는 한편 , 평양에 대성학교 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 (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 의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
1909년 , 안중근 (安重根)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를 중국 하얼삔 에서
암살하자 , 1910년 , <신민회>간부들과 개성헌병대 에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
혐의는 암살사건 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 그후 안창호는
시베리아 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
1912년 ,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 를 조직하여
초대회장 에 취임 하고 신한민보 (新韓民報)를 창간 하였다 .
105인 사건 으로 청년학우회 가 해체되자 ,
1913년 흥사단 (興士團)을 조직하고 , 3.1운동 직후
샹하이 (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臨時政府)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 ,
국무총리 대리 , 노동총장 , 등을 역임 , 독립신문 을 창간 하였다 .
1921년 임시정부 내분으로 사퇴 ,
1923년 , 샹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 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 하였다 .
1926년 , 샹하이 로 다시 돌아온 안창호는 흩어진 독립운동단체 를
통합 하려 진력 하며 ,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상촌 (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었으나 , 일본이 중국공격 을 본격화 하면서 실패하고 ,
1932년 , 윤봉길 (尹奉吉)의사의 홍커우 공원 (虹口公園) 폭탄사건 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된후 , 2년 6개월 복역한뒤 가출옥 하여
휴양중 , 동우회 (同友會) 사건으로 재투옥 되고 보석되어 휴양중
1938년 3월 10일 61세 로 별세 하셨다 .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 으로 무실역행 (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
그의 흥사단 정신은 민중에게 큰 영향을 줬다 .
(노년 (老年) 에 투옥된 안창호 (安昌浩) 선생 ) ( 홍커우공원 거사전 김구(金九)와 윤봉길 (尹奉吉)의사 )
신민회 ( 新 民 會 ) 비밀정치 결사 (秘密政治決死)
1907년 <고종>퇴위 를 전후 해서 일본 은 민심동요 와 통치 부작용을
막기위해 보안법 , 신문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반일세력 과 사회운동 등을
본격적으로 탄압하자 안창호 는 국민 계몽운동 과 국권회복 운동 등 ,
많은 사회운동 을 위해 발기한조직이 신민회 비밀정치 결사 다 .
이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1896년 활동하다 와해 된 독립협회 회원들이 었다 .
중심인물 로는 회장 윤치호 (尹致昊) 부회장 안창호 ,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 (張志淵) ,
신채호 (申菜浩) , 박은식 (朴殷植) , 청년장교 출신 의 이동휘 (李東輝), 이갑 (李甲),
평양지방 의 자산가 인 이종호 (李鐘浩) , 이승훈 (李昇薰) , 그리고 안태국 (安泰國) ,
이동녕 (李東寧) , 당시 조선 4대 갑부 이회영 (李會榮) 등이 었다 .
신민회 는 국권회복 을 목표로 실력양성 과 국민이 새로워 져야 한다는
신민 (新民)은 " 자기 스스로 의 힘으로 신사상 , 신윤리 , 신학술 , 신모범 , 신개혁 ,
하에 자유독립국 을 세우고 그 정체 (政體)는 공화정체 (共和政體) 를 선택함 으로
입헌군주제 (立憲君主制) 를 탈피 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다 .
비밀정치결사 의 회원 심사는 엄격했다 . 당사자 2명 이상은 알지 못하게 했다 .
요즘말로 점조직 형태다 . 회원은 8.000 명에 이르렀으며 , 서북지방 의 그리스도 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 신흥시민 층 과 신지식층 이 중심을 이뤘다 .
구국 교육운동 - 신민회 의 재력가 와 회원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수는 수십개 에서 100 여개 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
문맹퇴치 와 더불어 신교육 강화에 역점을 둔 운동이 었다 . 그중에서
정주 의 오산학교 , 평양의 대성학교 강화의 보창학교 는 강화군 에만 21개
소학교 , 분교 를 열었으며 ,북부 와 중부 각지역 에도 보창학교가 설립 되었다 ,
이 교육운동은 구국( 救國)에 큰 기여를 하였다 .
강연 및 출판운동 -
계몽강연 운동으로 구습타파 와 애국주의 ,국권회복 , 민권사상 ,
민족단합 의식 , 자발적 의무교육 실시 , 대한매일신보 를 기관지 로
사용하였고 , 후에 친일파 로 돌아선 최남선 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한 잡지 <소년>역시 신민회 를 대변 했다 . 또 출판물 보급 총판을
평양 ,서울 , 대구 에 태극서관 (太極書館)에 두고 합법적 활동을 했으며 ,
민족문화 와 국사학 에 조예가 깊은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외각단체
로 조선광문회 (朝鮮光文會)를 설립 , 출판활동 을 이끌었다 .
민족산업 진흥운동 -
민족산업자본 확충의 일환으로 평양 마산동 에 자기제조주식회사
(瓷器製造株式會社), 협성동사 (協成 同事) , 조선실업회사 (朝鮮實業會社) ,
등의 회사를 세워 사리원 의 모범농촌 등을 주도 했다 . 그러나 취약한
자본으로 일제의 대자본 에 밀려 큰 성과를 낼수 없었다 .
독립군 양성운동 -
의병운동 의 현대화 를 위해 만주 에 무관학교 (武官學校) 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를 창설 , 독립전쟁을 계획 하여 1910년 가을 만주 에 후보지를
선정하고 , 1911년 봄에 만주 봉천성 유하현 (柳河縣) 에 신한민촌 (新韓民村)을
건설해 단체이주 를 하여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했다 .
신민회 활동 은 1909년 을 전후해 일본이 애국적 인사 들에 대한 감시 와 탄압이
강화 되면서 주된 감시대상 이 었던 안창호 를 비롯한 이갑 , 이동휘 , 신채호 ,
조성환 , 등은 1909년 연해주 , 서북간도 , 등지로 망명 했고 ,
이회영(李會榮) , 이시영 (李始榮) 등 6형제 와
회원 일부가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 했다 .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이 선언된 후 양기탁 (梁起鐸) , 이동녕 , 안태국 ,
김구 (金九) 등 나라안에 있는 신민회원 은 서울 , 양기탁 회원집 에서 회의를 갖고 ,
중국 산둥성 (山東省) 에선 안창호 , 신채호 , 이갑 등 이 모임을 가졌는데 ,
두모임 회의결과 , 다수로 독립전쟁론 이 결정 됐다 .
이에 따라 신민회 는 독립전쟁 에 대비하는 만주 이민계획 과 무관양성 을 위해
청년들과 지원할 자금조달 책임을 비밀리 에 지역별로 분담 하여 활동 했다 .
그러나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 으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나
국내에 남아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이 무너 졌다 .
국권피탈 을 전후 하여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장독립투쟁
으로 운동노선 을 전환 함으로써 만주와 중국에서
일어난 독립전쟁 의 밑거름이 됐다 .
105인 사건은 안중근 의사 의 사촌인 안명근 (安明根) 이 <일본인 총독 >
데라우치 마사다케 (寺內正毅) 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인 바 일본경찰 은
이사건을 빌미로 모든사건의 배후로 신민회 를 지목 , 일방적 검거와 탄압, 조작하여
유동렬 , 윤치호 , 양기탁 , 이승훈 , 이동휘 등 600 여명 을 구속 했다 .
그러나 신민회원 이나 그리스도 인 들은 총독암살 음모 를 꾸민사실이 없으므로
600 명중 대표적인 인물 105인 만 기소한 사건이다 . 그러나 1심 (審) 과
2심 (審)에서 99명은 무죄석방 되고 윤치호 , 양기탁 , 안태국 , 이승훈 ,
임치정 , 옥관빈 등 6명만 주모자로 몰려 징역선고 4년을 받고 복역했다 .
안명근의 암살실패 는 , 암살전 신부 (神父)에게 고해성사 를
했는데 이내용을 뮈텔주교 가 조선총독부 에 제보하여
실패로 끝나고 신민회 는 파국을 맞은 것이었다 .
(사진은 묵암 (默菴) 이종일 (李鐘一 )선생 ) ( 사진은 대한매일신보 의 초대주필 박은식 (朴殷植) 선생 )
(1858 - 1925 )선생은 한문을 수학 , 벼슬 ( 1859 - 1926 ) 애국자강 운동 을 널리 홍보하며
은 정3품 , <제국신문>창간후 계몽활동 과 신민회 기관지 로 그역할을 충실히 하신 분이다 .
애국자강운동에 앞장선 선각자 이시다 . 오늘날 병든 신문들 과는 달랐다 .
우리나라 최초 일간지 제국신문 ( 帝國新聞)
당시 황성신문 (皇城新聞) 외에 더 먼저
발행된 역사를 가진 신문이 제국신문 이다 .
제국신문 은 1898년 8월 10일자 순 한글로 창간 (創刊) 되었다 .
발행인 은 이종일 (李鐘一) , 이종면 , 유영석 . 동인 . 으로 돼있다 .
( 1900년 경의 학동 (學童) 들 , 이곳에선 과연 무엇을 배웠을까 ?
벼루나 붓이 보이지 않으니 몹씨 궁굼하다 . 나도 6.25때 피난처 에서
몇개월 서당 (書堂)에 다닌적 있는데 .....이렇지는 않은것 같다 .
여긴 방도아니고 마당인것 같다 . )
( 1906년 민영휘 (閔泳徽)친일파 가 설립한 휘문의숙 (徽文義塾) 10월 11일 개숙기념 ,
<현 휘문고교 전신> )
( 평양 숭실전문학교 의 초창기 천문학 실습 장면 , 외국인 교사가 이채롭다 .
분명 , 영어몰입교육 은 절대 아니다 )
(사립 세브란스 병원학교 제1회 졸업생들 ,
(1908년 6월 2일 )교육열 고취로 각지방 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립학교 가 설립 되었는데.
1917년 <전문학교 령>에 의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가 설립 되었다.
.
사립 숭일하교 의 졸업생과 교직원 기념사진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졸업생들
(1907년 8월9일 군대해산 명령에 저항한 수원 진위대 강화 분견대 간부들 ,
왼쪽사진 오른쪽 2번째 가 이동휘 (李東輝) 참령 (현 소령 )
( 시위보병연대 의 장교 정장 )
< 군대 해산>전 훈련원 에서 훈련에 여념이 없는 시위병 들 ,
( 1907 년 ) 광화문 주변 인것 같다 .
박승환 (朴昇煥) 참령 의 자결 ( 1869 - 1907 ) 군인 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
신하 로 충성을 하지 못하니 , 만번 죽어도 아까울것 없다 .
( 軍不能守國 , 臣不能盡忠 , 不死無惜 ) 라는 유서를 가슴에 품고
군대 해산식 이 있는 1907년 8월 1일 아침 서소문 안 시위대 제 1대대 장실 에서
자결 을 하였다 . ( 옆에 사진은 공부할 나이에 빗자루 장사 로 장터를 헤메는 아이들 .
아마도 애들 아버지는 의병이 아닌가 ? 싶다 . )
(1907년 8월 1일 <강제해산 >직전에 훈련원에 모인 시위보병연대 장병들 )
대한제국 의 군대 해산 ( 大韓帝國의 軍隊解散)
1907년 7월31일밤 , <대한제국> 순종황제 가 군대해산 을 명하는 조칙 을 내려
군대가 해산 됐다 . 그러나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 와 <이완용>에 의해 조작된
<조칙>이란 것이 밝혀 졌다 .
1907년 7월 31일 밤 , 미리 군대해산 의 칙서를 작성해 놓고 <이완용> 이
<순종황제>의 제가가 난것처럼 통감<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내,
<순종황제>가 <한일병합>실천의 의지로 군대를 해산 ,시킨 것이며 ,
민심이 동요하거나 왕명을 위반하고 폭동을 야기한다면 ,
무차별 진압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는 완벽한
< 씨나리오> 였다 .< 대한제국>의
버팀목이 었던 <군대>가
사라진 것이었다 .
<내각수반>에 왕산(旺山) 허위 (許蔿)선생 같은분이
한분만 더 계셨어도 <이완용>을 견제나 제거를 할수 있지 않았나 ?
희미한 기대와 아쉼을 위로해 본다 .
1907년 8월1일 , 오전 11시 , 동대문 훈련원 , 맨손체조를 한다고 병사와 장교를
소집해 놓고 , <순종황제>의 <군대해산>조칙을 낭독과 동시 ,
중무장한 <일본현병>들이 포위하여 <군대해산>을 시작해 .
<황제의 하사금 >으로 , <하사>에겐 80원 ,
1년이상 , 근무자 에게 50원 , 1년미만 ,
병졸에겐 25원 ,을 주었다 .
이때 , <고종복위운동>을 꾀하다 실패한 ,서소문 (西小門) 시위연대 , 제1대대장
박승환 (朴昇煥)이 <사령부 집합>에 불응하고 <군대해산>명령이 하달되자 ,
갖고있던 <권총>으로 자결 하였다 . 그의 장렬한 순국은 부하장병들의
대대적 <무력항쟁>의 실마리가 되었고 허위 (許蔿) 선생도
<연천>에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서울>로 진격
동대문 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
존재 (存在) 함 으로 불행(不幸)한 인물들
이완용 (李完用) 은 우리나라에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로 국가 (國家)나
국민(國民)이 모두가 불행 했다 . 이재명 (李在明 ) 의사 의 칼날 이 조금만 더 깊이 ,
조금만 더 옆으로 박혔다면 ,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
지금도 땅을치고 통곡할 일은 해방후 이승만 (李承晩)정권의 친일파 감싸기로
현재까지 혼란의 연속이 계속 되고 그 집안과 자손 (子孫)들은
부귀영화 (富貴榮華)를 노래하며 당연한 듯 살고 있다 .
당시 그는 친일매국 (親日賣國) 으로
<조선 제 2 의 갑부>가 되었다 .
이 완 용 의 혈족 --- 조카 : 친일 사학자 (親日 史學者) 두계 , 이병도 (李炳燾)
종손자 : 서울대 24대 총장 이 장 무
문화재 청장 이 건 무
이렇게 이들 후손들은 아무 꺼리낌 없이 잘먹고 잘살고 <이완용>이
불쌍한 농민들 한테 탈취한 땅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
그러나 정부와 사법부 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