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우국충정의 기록 ‘시역의 고민(弑逆의 苦憫)’
사회적 역사적 실체가 분명한 안두희의 김구 저격은, 그것이 ‘사살’이든 ‘암살’이든 덮는다고 덮어지고 지운다고 지워질 수 없을 뿐더러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사건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의미 단위이자 우리 사회 담론 생산의 시원(始原)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의 현재성을 규정하기 위한 치열한 텍스트란 사실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어렵게 찾은 안두희의 육필, ‘시역의 고민’을 ‘나는 왜 김구 선생을 사살했나-안두희의 시역(弑逆)의 고민’으로 복간해서 독자 제위께 내놓는 결단을 했다. 청년장교 안두희의 ‘고민’에 대해 만시지탄이긴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의 양심이 응답해야 할 시점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도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좌익 분자들에게 포섭된 김구
1948년 8월 15일의 건국과 정부수립을 앞두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초대 내각은 만장일치로 백범 김구를 부통령으로 추대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서의 위상과 독립운동에 기여한 그 나름의 역할 그리고 김구에 대한 민중의 신망을 대한민국 정부는 온전히 수용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초대 내각의 결단과 신생 독립국 민중의 여망은 김구의 거절로 보기 좋게 무산되고 말았다.
부통령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김구는 외세 배격과 자주통일국가 건설이라는 반탁운동 당시의 명분을 그대로 유지하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을 반대했다. 그뿐 아니라 신생 독립국의 후견 역할을 하던 미국을 외세로 몰아 미군 철수와 내정 불간섭을,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추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철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김구의 요구는 외세, 즉 미군 철수로만 그치지 않았다. 김구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을 노렸다. 즉 미군 철수로 인한 군사적 공백을 1억5000만 달러 상당의 군사 원조로 상쇄하기로 합의한 이승만 정부와 미국 간의 합의를 전면 백지화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김구의 바람대로 결국
1949년 5월말 대부분의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철수하고
------- 6월 30일 철수를 완료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또한 미군 철수에 따른 군사적
------------- 공백 메우기 위한 1억5000만 달러 군사 원조 백지화마저 수용해 버린다.
------ 6월 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긴 채 미군이 모두 한국을 떠났다.
미군을 모두 떠나게 한 행위는
곧 북한의 남침을 전적으로 도운 새빨간 빨갱이 아닌가?
그런데 남한 대다수 백성들은 김구를 위대한 인물로 이해하고 있는게 아닌가?
잘 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남한 여론을 빨갱이들이 휘 저을 만치
남한이 뺄갱이 소굴이란 말인가?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자위력으로 김일성의 북한 공산집단과 그 배후인 소련과 중공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김구는 자신의 요구대로 미군이 실제로 철수를 시작하고 1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군사원조마저 백지화된 상태에서 국회와 군대를 장악하기 위한 시도를 본격화한다. 소장파 13명을 제헌국회에 입성시켜 국회 장악을 시도한 ‘국회프락치사건’과 청년장교들을 대거 포섭함으로써 군대 장악을 시도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1949년 6월 10일 38선을 넘으려다 붙잡힌 정재한(鄭載漢)이라는 여간첩이 음부에 숨기고 있던 박헌영에게 보내는 암호문서가 발각되면서 그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이 사건은 헌병대와 검경이 합동으로 내사를 해오면서
1949년 4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3차에 걸쳐 관련 의원들 13명의 의원들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1심에서 모두 유죄판결 받은 후 이에 불복 하고, 2심에 계류중 6·25전쟁이 발발하며 서울이 북한 괴뢰군에 점령되자 1명 제외하고 모두 월북했다.
사실상 남로당의 끄나풀이거나 당 핵심 요인들이었던 그들은 북한 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자들로서 이른바 민족자결을 내세워 외국 군대(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남한 단독정부를 공공연히 부정하는 선전·선동 활동을 해왔다.
군대 내 청년·중견 장교들에 대한 좌익 세력의 포섭도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이미 여순반란 진압을 통해서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뿐 아니라 그 세포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피해 월북한 영관급 장교들도 있었다. 춘천 지역 방어를 맡고 있던 표무원 소령과 강태무 소령이 각각 대대 병력을 이끌고 집단 월북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그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도사린 존재였다. 안두희는 경교장이 좌익분자들의 아지트이고 김구는 이미 좌익분자들에게 포섭됐다고 봤다. 안두희로서는 당연히 김구가 그들을 감싸고도는 것이란 의심을 키워 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검경의 추적을 받던 남로당계 좌익 인사들이 경교장으로 숨어들면 수사가 중단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순반란의 배후이자 월북한 표 소령과 강 소령을 감싸고 돈 것 또한 김구라는 항간의 의혹은 단지 의혹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한민국 군대는 이미 김구의 군대라는 것이 미국 정보당국과 언론의 중론이었다.
‘건국실천원양성소’와 ‘혁신탐정사’가 김구의 사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한독당의 비밀당원들에게는 8월 15일 국회에서 열릴 예정인 광복 4주년 및 정부수립 1주년 기념식을 전후한 모종의 행동을 암시하는 예비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안두희는 한독당의 비밀당원으로서 예비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뿐 아니라 우익의 주요 리더인 송진우와 장덕수를 암살한 배후가 김구임을 안두희는 의심 차원을 넘어 확신하고 있었음을 다음의 상황 전개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길도형 도서출판 장수하늘소 대표
그날, 안두희가 김구에게 던진 10 가지 질문
1949년 6월 26일 오전 10시 좀 넘은 시각, 아내의 유산 소동으로 주말 밤을 설친 안두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며 세종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안두희의 머릿속은 아내의 유산보다 경교장을 둘러싼 거대한 흑막과 음모의 실체를 두고 해온 고민이 난마처럼 뒤얽혀 있었다.
연초, 지인의 소개로 김구를 만났을 때 김구는 마치 잃었던 아들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무량한 애정을 담아 대한민국 육군 소위 안두희를 품었다. 그 뒤로 주말마다 경교장을 찾아 안부를 여쭙고 시국에 대한 세평과 입장을 들으며 안두희는 김구를 ‘존경해 마지않는’ 정치적 스승이자 스스로를 백범의 자식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만남이 잦아질수록 김구에 대한 의심을 키워 올 수밖에 없는 안두희였다. 안두희는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시국에 대한 김구의 모호한, 아니 반역으로 오해 살 만한 행각과 경교장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무리의 정체에 대해 완곡하게 질문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안두희에게 돌아오는 것은 김구의 냉담한 반응이었다. 질문 자체를 깔아뭉개는 것도 모자라 청년장교의 애국심을 폄하하는 힐난도 서슴지 않았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광화문 네거리까지 올라온 안두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이 선 듯 좌회전하여 서대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새문안 교회 앞을 지나 지금의 서울 역사박물관 못 미쳐 지날 때쯤 자연장(紫煙裝)이라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복잡한 생각도 정리할 겸 김구를 만나 무슨 말부터 꺼냄으로써 담판을 시작할 것인지도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안두희는 그렇게 10여 분간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가 결심이 서기라도 한 듯 다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경교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경교장 정문 경비를 서고 있던 경찰은 익숙한 얼굴이 들어서자 가벼운 목례로 맞았다. 안두희 또한 눈인사 정도로 정문을 통과하여 경교장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비서인 선우진이 로비 데스크에 앉아 이국태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2층 집무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있는 데스크로 다가간 안두희는 선우진에게 “선생님 방에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선우진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안두희를 맞으며, “선객이 있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하고 답했다.
안두희는 두 사람의 잡담을 흘려들으며 경교장 응접실을 서성였다. 얼마 뒤, 김구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몇 번 얼굴은 봤지만, 직접 통성명은 한 적 없는 강 대위였다. 강 대위가 선우진과 인사를 나누고 경교장 현관을 빠져나갔다.
“올라가시지요?” 선우진이 잡담을 나누던 자세 그대로 안두희에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안두희는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참이었다. 안두희는 김구에게 첫 인사를 한 이후로 근대 들어 소원해지긴 했지만, 김구의 집무실을 무람없이 드나드는 경교장 주요 인사 중 하나였다.
김구와 대면한 안두희는 그로부터 30여 분에 걸쳐 언쟁을 이어갔다. 격한 감정을 실어 공박을 주고받는 가운데 안두희는 자신으로 하여금 결단할 수밖에 없게 한 열 가지 의혹 관련 김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열 가지 의혹은 다음과 같다.
(Q 1) 국회 소장파와 선생님 사이에 일찍부터 내통되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정평이요, 이번 그를 피검(被檢) 시 김약수를 선생님께서 숨기셨다는 억측까지 가지게 되었던 것이온데, 선생님과 그들과의 관계는 정말 어떤 것입니까?
(Q 2) 선생님께서 남북협상 당시 서울을 떠나시며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Q 3) 그렇게 굳은 서약을 하시고서, 돌아오신 뒤에 왜 뚜렷이 대국(大局)의 전망과 선생님의 심경을 밝혀 말씀치 못하셨습니까?
(Q 4) 무슨 숨은 사정이 계셨습니까?
(Q 5) 왜 모든 걸 국민 앞에 천명치 못하느냐는 말씀입니다. 협상 다녀오신 후 태도는 어떠하셨습니까?
(Q 6) 미군의 철퇴 주장하셨고, 미국 원조를 거부하셨고, 유엔의 처사를 비방하시면서 급기야는 5.10선거까지 부인하신 것, 어찌 그렇게 그 주장하심이 공산당과 꼭 같습니까?
(Q 7) 전라도 방면 순회하실 때 정부를 부인하고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짓고 이 박사를 사대주의자 전형적인 존재로 매도하셨으니 공적인 국면도 국면이오나 그렇게도 국민 전체가 쌍벽으로 모시던 두 분 교의가 끊겼다고 생각될 때 온 겨레 실망이 어떤지 아십니까?
(Q 8) 건국실천원양성소는 무엇하는 기관이며 혁신탐정사는 누구의 것이며 또 한독당의 소위 비밀당원 조직망이란 무슨 사명을 부여한 결사입니까?
(Q 9) 한국 군은 김구 씨 군대라는 외인 평론에 대해 선생님은 무슨 말로 반박하렵니까?
(Q10) 선생님! 제게 8.15기념 전후 중대한 지령 있을지 모른다는 예비 명령은 무엇에 대한 준비입니까?”
- 여순 반란은 누가 사주한 겁니까?
- (부하들을 이끌고 집단 월북한) 표(무원) 소령, 강(태무) 소령과 기거한 놈은 어떤 놈?
- 송진우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 장덕수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젊은 시절의 안두희(좌)와 노년의 안두희(우)
안두희의 진실을 위하여
이 책은 안두희가 김구 저격 직후 체포되어 방첩대(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 영창에 갇힌 다음날인
6월 27일부터 첫 공판일 전날(8월 2일)까지 사건의 전말과 취조, 심문, 공판 준비 과정에서의 심경을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옥중수고(獄中手稿)이다. 또한 김구를 저격 사살하는 직접적 계기가 된 경교장을 배후로 암약하던 국회 침투 남로당 프락치들을 일망타진하게 되는 경위 등을 밝힌 역사적 기록물이자 현재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혼란상의 근원을 분석하기 위한 역사적·사회적으로 중요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안두희는 종신형 확정 후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까지 특별 감형과 잔형 면제를 통해 육군 포병 소위로 복귀,
전쟁에 참전한다. 이어 휴전과 함께 전쟁이 끝나고
1953년 12월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영창에서 쓴 한 달여 동안의 일기를 초고로 삼아
1954년부터 1년여의 준비를 거쳐
1955년 10월 26일 ‘시역(弑逆)의 고민’이란 제목으로 초판 발행한다.
1949년 8월 재판정에 방청하러 온 아내에게 건넨 옥중 일기를 아내가 집 마루 밑 땅 속에 묻어 감추어 둠으로써 그 내용을 온전히 보전하여 책으로 묶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형 확정 후 수형 기간 법정진술 등의 공판 내용을 기록한 일기는 6·25전쟁 통의 형무소 방화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저자는 그것을 후속편으로 펴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시역(弑逆)의 고민’ 초판본은 약 1년여 서점가를 통해 판매된 것으로 보이나 안두희에 대한 중상모략과 테러가 빈발하며 사회적 봉인과 대중의 기억 속에서 강제 삭제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 책 나는 왜 김구 선생을 사살했나? 는,
1955년 초판본에 조사와 어미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명사 또는 명사형 어휘들이 한자로 표기된 바 원문 그대로를 한글로 바꾸어 표기했으며 맞춤법만 지금에 맞게 바꾸었다. 당시 말글의 쓰임새 또한 사건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이해하는 한 단면이라 판단하여 극존칭의 경어체도 그대로 살렸다.
저자에 대한 반역 낙인과는 별개로 초판본 출간 이후 사회적 분위기는 책 자체를 불온시 했다. 특히 4·19 이후 민족주의가 득세하며 특정 정치·이념 세력에 의해 조작 또는 저자가 의도를 갖고 창작한 위작으로 매도 사장된 채, 65년여를 세인들의 관심에서 삭제되어 왔다.
그러나 일기문 전체에 담긴 저자의 고뇌와 출판을 둘러싼 낭설과 왜곡, 중상모략에 대비코자 한 저자의 진심은 우리 사회 지성의 양심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행위 주체로서 안두희의 독자적 결단이고, 우국충정에 바탕한 의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