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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둔재(미탄치, 미장치) 640m 강원 평창
산줄기 : 한강영월지맥
들머리 : 평창읍 노론리 하수처리장 삼거리
위 치 강원 평창군 평창읍 노론리/미탄읍 창리
높 이 640m
# 멧둔재 : '낮은 둔덕'이란 뜻의 순수한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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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화전동네 미탄의 평창 나들이길... 멧둔재 평창
입춘이 지났건만 평창 읍내 종부다리 아래로 흐르는 평창강은 아직 기지개도 펴지 못한 상태다. 읍내에서 멧둔재로 가는 42번 국도변 역시 마찬가지다. 흰눈을 뒤집어 쓴 써늘한 겨울산이 손 흔드는, 눈 많이 오고 겨울 긴 평창 땅.
멧둔재 옛길 산행을 위해 나선 취재 일행의 차가 막 멧둔재 터널을 통과했다. 곧 산행 출발지인 미탄면 창리의 샘내마을이 나올 것이었다.
지금 전국의 고개란 고개는 연일 터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더라도 재가 높고 꼬불꼬불해 넘기가 험악하다 싶으면 최신공법으로 미련없이 속을 파내고 있는 것이다. 일행이 찾아가는 멧둔재 아래로도 터널이 뚫린 것은 1991년 12월. 터널이 뚫리기 전만 해도 비포장의 고갯길로 차를 넘는 데 40분 나짓 걸렸다. 이제 10분도 채 걸리지 않으니 재 아래 미탄 사람들에게는 제법 큰 변화라면 변화일 것이다.
미탄이 평창에서도 산골마을로 이름난 것은 순전히 험악한 지형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평창쪽으로는 멧둔재가 가로막고 있고, 동쪽 정선 방면으로는 비행기재가 버티고 있다. 또 남쪽 방면 역시 밤재를 넘어야 영월로 나갈 수 있는데 이 밤재가 포장된 것 역시 15~16년 전이고 북쪽으로는 남병산~청옥산~가리왕산 줄기가 길을 내주지 않는다.
미탄면 창리에 살고 있는 김봉수씨(73세, 전 농협조합장)는 "종부(언덕에 종이 있었다는 데서 평창을 일컫는 말)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평창에서는 모두 들을 수 있었는데 유독 미탄만 들을 수 없었으니 바로 멧둔재가 가로막고 있어서" 였다. 어쩌면 미탄은 고립무원의 땅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미탄(美灘)의 본래 이름은 미창(米倉)이었다
터널을 빠져나온 차는 곧 영월 방면 413번 지벙도가 갈라지는 삼거리인 일명 '투방거리'를 지나 주유소 앞에서 멈춰 섰다. 옛길 출발지인 창리 샘내마을의 LG정유 미탄주유소 앞이다. 창리는 정선으로 곧장 통하고 면소재지가 있는 미탄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주유소에서는 길 건너편의 영춘가든 뒤로 멧둔재 옛 버스길이 나 있는 게 보였다. 일행은 버스가 다니던 신작로를 따라 걸어넘을 것이지만 신작로 이전에 사람들은 어떤 경로로 고개를 넘었을지 궁금했다.
어제 노론리에서 만난 김재봉씨(76세)는 길은 고개 전후의 골짜기로 나 있었으며 그 길로 우마차를 끌고 넘으려니 힘이 들자 일제 때 신작로를 뚫게 되었다는 사연을 들려주었다.
또 율치리의 김문규 이장은 평창 나가는 길은 대략 세 가지라고 일러주었는데, 남족 율치리에서는 소용전과 대용전 마을을 거쳐 멧둔재를 넘었고, 북쪽 회동마을에서는 다래넘이란 고개를 넘어 평창으로 나갔다. 또 마지막으로 42번 국도가 지나는 창리 샘내마을에서 곧장 멧둔재로 향해 골짜기를 타고 오르는 길인데 이것이 가장 큰길이었다.
영춘가든을 찾아가 주인 임두규씨를 통해 멧둔재를 걸어넘어본 사람을 수소문하니 나타난 이가 김봉수씨였다. 고개를 넘어 학교를 다녔다는 김씨는 "등교시간을 맞추다 보면 고갯길을 뛰어야 할 지경이었어요. 재 말랑이까지는 꼬박 40분이 걸렸는데 일단 말랑이에 서고 나서는 그 다음부터는 줄창 뛰어내려갔습니다."
당시 재말랑이에는 주막집과 떡집이 두 곳이나 있었다. 김봉수씨 말처럼 "물만 있으면 생길 수 있는게 떡집" 인데 화전민이 많았던 미탄에는 곡식도 풍부했다. 하무려 '창리(倉里)'가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듯 하루에 두 차 이상 곡식을 실어 나갈 정도였다. 미탄이란 이름도 일제하에서 왜곡된 것이고 본디 '미창(米倉)' 맞다는 얘기까지 붙였다.
그러고보니 어제 노론리에서 만났던 김재봉씨 역시 재너미를 가리켜 '미창' 이라 말했던 게 생각났다. 일행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개 아니었던 것이다. 주막집과 떡집은 길이 넓혀지면서 사라졌다.
김봉수씨로부터 해방전 목탄차와 휘발유차가 다니넌 시절의 얘기를 듣는 동안 시간은 벌써 정오를 넘기고 있었다. 짧은 게 겨울해인지라 일행은 서둘러야 했다.
모처럼 옛길 산행에 동참하겠다고 천안서 올라온 류재호 주재기자와 그곳에서 코오롱스포츠 천안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창수씨(40세, 천안 에델바이스산악회), 고한에서 온 주춘옥씨(45세, 노두산악회장)와 사진촬영을 맡은 김부래기자 등 5명의 일행은 멧둔재 옛길로 들어섰다.
평창장까지 30리길, 미탄장은 해방후 생겨
영춘가든을 돌아서자마자 무인지경이었다. 앞으로 바라다뵈는 삼방산(980m) 눈비탈로는 내리꽂힌 나무들이 한겨울을 호소하고 있다. 허나 발바닥으로는 봄기운이 감지됐다. 동쪽 사면이라 오전 내내 햇빛을 쬔 덕분인지 길 위에 쌓여 있던 눈은 녹아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없다. 이맘때면 늘 버들개지가 은회색 깃을 세울 때이지만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옛길은 한동안 42번 국도아 나란히 뻗어나갔다. 과거 고개를 비틀거리며 올랐을 차들은 이제 저 아래 국도로 터널을 향해 시원스레 질주하고 있다. 멀리 산자락에 안긴 창리가 보이고 저 등성이 너머는 율치리가 있을 것이었다. 율치리는 석탄광산이 많아 왜정 때부터 광선업이 주류를 이루던 동네다. 캐낸 석탄은 밤재를 넘어 교통이 좋은 영월로 실어 날랐는데 이 밤재가 포장된 것이 15~16년 전이다. 동네 사람들이 장을 보거나 서울로 갈 때는 모두 멧둔재를 넘어 평창으로 나갔다.
2km 남짓 동행하던 42번 국도와 헤어지자 옛길은 산모롱이를 이리저리 돌아가기 시작한다. 마을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일행들은 김봉수씨가 들려준 얘기를 화제로 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장을 볼라치면 평창으로 나갔다. 평창까지는 30리고 정선까지는 80리길이었다. 그후 미탄에 장이 들어선 것은 해방후로 5, 10일장인 평창에 이어 미탄장은 6, 11일장이 서고 있다.
육지 한 가운데라 바다 고기를 구경하기 힘들었던 미탄에는 정선을 경유해 들어온 이른바 '등금장사' 들이 드나들었다. 평창 읍내는 강릉에서 직접 해산물이 들어왔지만 미탄에는 삽당령이나 백봉령을 넘어 정선으로 온 보부상들이 이곳까지 해산물을 공급했다. 대개 이들은 고등어나 소금 따위를 등에 지고와 산간에서 흔한 옥수수나 콩 등 곡식과 교환해 갔다.
50분 남짓 걸었을 때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도마치였다. 마을 뒷산이 도마치산이고 또 북쪽 회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도마치인데 고개 이름이 마을이름이자 산이름이기도 한 특이한 곳이다. 5가구가 살았다지만 지금은 1가구. 그것도 농사철에만 상주하지 겨울에는 무인동네다. 옛길은 이 마을 끝을 휘감아 돌아가고 있었다.
해방 직후 대형버스 다니면서 사고도 잦아
까마귀울음이 텅빈 도마치마을을 울린다. 해방전 마루보시(현재 대한통운)에서 운행하던 목탄차나 휘발류 버스가 드나들 때만 해도 도마치는 제법 길목 좋은 동네였을 것이다. 회동에서 버스를 타러 넘어온 사람들도 서성거렸을 것이고.
꼬불거리는 비포장 산길로 버스를 몰 정도라면 10년 경력은 쌓아야 가능했다고 하는데 교통사고가 많은 요즘과는 달리 길이 더 험했던 해방 전에는 버스 사고가 별로 없었다는 게 김봉수씨의 얘기이다. 오히려 6.25후 버스들이 많이 굴렀는데 이는 차가 대형화되면서부터이다.
멧둔재로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시기는 지척에 있는 비행기재의 것과 비슷하다. 비행기재로 30인승 강원여객아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54년경. 강릉에 본사를 두고 있던 강원여객의 버스들은 정선을 경유해 평창으로 혹은 제천이나 서울로 운행되었다. 비행기재와 비교하면 멧둔재 길이 거리가 짧고 모롱이 수도 적어 넘기가 수월한 편인데 비행기재가 3년 앞서 터널이 뚫리고 포장이 된 것은 바로 그런 연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을에서 고갯마루까지는 1시간 남짓 걸렸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고갯마루를 지키는 것은 삼방산 안내 표석과 이동통신 무선기지국. 내리막길은 서향인지라 올라온 길과는 달리 길에는 눈이 켜켜이 쌓여 있어 미끄러웠다.
노론리까지는 올라온 거리의 절반 가량이니 1시간이면 충분할 듯싶었다. 일행이 멧둔재를 넘는 동안 재 아래로 터널을 바져나와 평창을 향해 내달리는 차들이 보였다. 또 과거 길손들이 지나갔을 재 아래 맨 첫동네 재밑마을도 내려다보였다.
어제 만난 김재봉씨의 집도 그곳 어디께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었다. 재밑마을은 지금은 다섯 가구뿐이지만 한때는 스물일곱가구나 되었던 큰 동네였다. 재밑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김재봉씨는 열일곱살 때 자다가 일어나 징용돼 갔다가 스무살에 돌아온 이후로도 지금까지 마을에 남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는 취재 일행을 향해 "지금도 그때가 눈에 선해요" 라며 옷이나 담뱃대니 생활용품 꾸러미를 지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가던 장사꾼 얘기를 들려주었었다. 마을에 사는 집도 4집뿐인데 그는 자신의 집을 가리키며 "일제 때 지은 집인데 아직도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딴 이유 없지요. 공기 좋고 물 좋으니까요" 라며 건강한 치아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던 것이다.
마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길을 재촉한다. 사람살이에 행복이란 무엇인지. 가난함을 부자로 만드는 것은 역시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인 것을.
*멧둔재 여행길잡이
일제 때 생긴 무인지경 옛 버스길
멧둔재(640m)는 평창군 미탄면 창리와 평창읍 노론리 경계다. 멧둔재 옛길은 멧둔재 터널이 뚫리기 전 지금의 42번 국도변의 미탄면 창리 샘내마을에서 고개를 경유해 다시 42번 국도를 만나는 평창읍 노론리까지 연결된 비포장 옛 버스길을 말한다. 비포장 구간만 8km로, 걷는데만 3시간 걸린다.
샘내마을의 LG정유 미탄주유소맞은편에 있는 영춘가든 뒤로 난 비포장길이 옛길이다. 노론리까지 줄곧 외길이다. 영춘가든을 출발하면 무인지경. 50분 남짓 가면 산중 마을 도마치가 나온다. 농번기가 아니면 상주하는 주민이 없다.
고갯마루에는 삼방산 등산로 안내 표지석과 이동통신 무선기지국이 있다. 이후 노론리까지도 무인지경. 엣길이 거의 끝날즈음 오물처리장이 나오며 이곳을 지나면 곧 42번 아스팔트 포장길이 나온다.
버스가 다니넌 길이라 눈 쌓인 겨울이 아니면 승용차도 넘을 수 있을 정도로 길 상태가 좋다.
평창읍 노론리 재밑마을의 김재봉씨(033-332-8498)와 미탄면 창리의 김봉수씨(033-332-3874)를 찾아가면 멧둔재에 얽힌 얘기를 들을 수 있다.
*교통
멧둔재 여행 기점은 대중교통편이든 승용차든 평창을 기점으로 삼는 게 편하다. 서울, 원주, 제천 이하 방면에서는 중앙고속국도 신림IC에서 나가 주천을 경유해 평창으로 들어가는 것이 빠르다.
승용차편 평창읍에서 정선 방면 42번 국도를 탄다. 멧둔재 터널을 지나 영월방면 413번 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를 지나 직진하면 샘내마을 앞 도로변으로 LG정유 미탄주유소가 나온다. 이곳이 옛길 여행 출발지. 반면 도착지점인 노론리쪽에 차를 미리 대 놓고 싶으면 평창 쪽에서 터널을 지나기 약 2km 전에 오른쪽으로 오물처리장으로 난 포장길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대중교통편 평창과 미탄 혹은 정선을 오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평창시내버스터미널(033-332-2407)에서 출발하는 평창~미탄행 시내버스가 06:30, 10:00, 15:30, 18:20 하루 네 번 다닌다. 약 10분 걸리고 요금은 900원. 들머리 샘내마을과 날머리쪽 노론리 산너머남촌식당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내릴 수 있다.
*잘 데와 먹을 데
옛길 출발지점이나 도착지점 둘다 숙박시설이 썩 좋지 않다. 20여분 거리인 평창 읍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 낫다. 평창에는 다슬기해장국이 유명하다. 종부다리 앞에 있는 너 골뱅이 나 매운탕(033-333-8535) 집은 메기, 쏘가리 등 민물 매운탕과 주인 전수옥씨가 평창강에서 직접 건져올린 다슬기를 주재료로 만든 골뱅이해장국(4,000원), 골뱅이파전(5,000원), 골뱅이무침(10,000원) 등을 주메뉴로 취급하고 있다.
샘내마을 출발지점이기도 한 영춘가든(033-333-3229)에서는 약간의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 산촌두부, 찌개백반 등 식사류와 부침과 동동주 등 마실 거리를 판매하고 있다. 또 5명 이내의 소수 인원일 경우 미리 연락하면 민박도 가능하다. 그외 주유소 옆에 아라가든(332-6990)에도 칡냉면, 돼지갈비 등을 취급하고 있다. 주유소 매점애서는 간단한 간식거리를 판매하고 있다.
노론리의 도착지점에는 민가가 없는 만큼 숙식을 해결할 곳은 한 곳뿐. 재밑마을 건너편의 옛 주막터에 있는 산너머남촌(332-0021)이 있다. 닭도리탕, 닭백숙, 토끼탕을 하며 민박도 가능하다. 재밑마을에는 민가가 두어 채 있지만 민박은 하지 않는다.
*이곳
대상리의 솔내음 황토방
평창강 굽어보는 운치 그만, 찜질방도 갖춰
평창 읍내에서 시야를 조금만 돌리면 주천방면의 31번 국도 변으로 평창강을 끼고 있는 한적한 민박집이나 여관을 이따금 만날 수 있다. 그중 대상리 노가리마을의 솔내음황토방(033-333-4748/011-362-2019 조태분)은 읍내에서 10분 거리로 최근 문을 연 아담한 콘도식 민박집. 시설이 깨끗하고 널찍한 주차장이 있으며 집 앞으로 평창강이 굽어보이는 운치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용 가능한 방은 4개이며 부대시설로 향토음식점과 카페 등도 곧 들어서면 숙박 복합공간으로 자리잡을 예정이다.민박료는 2인 기준 2만5천원. 이 집의 특색은 소나무로 지은 찜질방도 갖춰놓고 있는 점. 투숙객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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