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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24.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538항)
‘사랑과 소통’의 삶,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하느님의 모든 백성은 교회의 사명 수행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각자가 받은 선물과 각 성소에 알맞은 행동 방식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할 의무에 부응하여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538항)
멋진 어른
어쩌다 어른이 된 필자도 어른의 역할이 무얼까 고민합니다. 어른의 역할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타인과 이웃을 배려하고, 내 중심적 삶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적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권력과 재물, 명예의 욕망과 욕심이 아니라 비록 힘들지만 불편과 쓴소리, 희생을 감내하면서 성숙함, 책임 의식, 공정과 사랑을 지향하는 삶, 그게 바로 어른의 모습, 높은 곳에 있는 분들이 지향해야 할 모습입니다. 그래서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도 모든 교육은 사회의 선익을 지향하는 인격 형성을 추구하고, 인간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며 어른이 되어 그 사회의 책임을 맡을 것을 강조합니다.(242항)
고난들
그럼에도 멋진 어른으로 산다는 건 참 어려워 보입니다. 희생과 헌신은 멋있지만 괴로움과 손해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모욕과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리더와 책임자의 모습은 그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는데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고, 여행하는 동안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5-27)
하느님 중심 삶으로의 전환
가톨릭교회는 사회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진정으로 사람들을 위하고,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시키며, 협력을 통해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하고자 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25항) 그럼에도 해결이 어려운 문제들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기후위기로 올해 여름 폭염과 폭우가 예고되는 가운데 벌써부터 삶이 취약한 이웃들의 안위가 염려됩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과 같은 국제 갈등을 비롯해서 여러 산적한 사회문제, 갈등들도 큰 걱정입니다. 어른들의 역할이 더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과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 핵심은 ‘내 욕심과 불통’이 아닌 ‘사랑과 소통’의 삶이며 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24. 구약성경에 나타난 기도 ③ (「가톨릭교회 교리서」 2578~2580항)
기도할수록 교회 공동체의 자녀가 된다
기도하는 목적은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 모세처럼 개인의 소명을 깨닫고 완수하기 위함입니다. 이번에는 사무엘과 다윗, 솔로몬 임금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공동체성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사무엘 상권에 보면 하느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어떤 소명을 위해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세 번째 부르심에서야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응답합니다. 그런데 이 응답은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가 알려준 것입니다.(1사무 3,9) 사무엘이 주님께 개별적으로 응답하지만, 그 응답을 위해 먼저 “자기 어머니 한나에게서 ‘주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배웠을 것이며, 사제 엘리에게서는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배웠던 것입니다.”(2578) 그리고 기도로 성장한 사무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 또한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거나 하여 주님께 죄를 짓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좋고 바른 길을 가르쳐주겠소.”(1사무 12,23)
이렇듯 기도는 아주 개인적인 하느님과의 만남이지만, 또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기도를 배우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기도합니다.
1954년 콜롬비아의 다섯 살 소녀 ‘마리나 채프먼’은 괴한들에게 납치당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정으로 소녀는 정글 속에서 원숭이 무리에게 키워집니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사냥꾼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소녀를 매춘 조직에 팔아넘깁니다. 시간이 더 지나 성인이 된 그녀는 말도 배우고 결혼도 하여 영국의 평범한 주부가 됩니다. 그녀는 5년간의 숲속 경험을 「이름 없는 소녀」란 제목으로 책에 기술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름 없는 소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각자 속한 공동체에 의해 형성됩니다. 마리나 채프먼이 원숭이에게 키워지면서 사람의 모습으로는 살 수 없었고, 사창가에서 몸을 팔면서 순결한 가정주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수준이 그 사람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자신이 속한 사도단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공동체를 떠났고 결국엔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와의 단절이 곧 기도의 포기,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반면 토마스는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사도단 안에 머물 수 있었기에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대사제는 가슴과 어깨에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보석과 이름들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나의 기도는 내가 속한 공동체, 나의 영향을 받는 이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다윗 왕도 개인적으로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이었으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또한 그 백성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목자였습니다.”(2579) 솔로몬도 성전 봉헌 때 온 “백성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도록 기도하였습니다.”(2850)
우리는 모두 광야를 지나는 백성입니다. 광야에서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에 속해야 합니다. 나의 영성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기도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돌아가시기 직전 “저는 결국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였습니다. 기도할수록 교회의 자녀가 됩니다.
[교황 주일 특집] 교황(敎皇)인가 교종(敎宗)인가?
군주적 이미지 벗어나고자 ‘교종’ 혼용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직
7월 2일은 교황 주일이다. 한국교회는 매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이나 이날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으뜸 지도자를 교황(敎皇), 바로 ‘교회의 황제’로 부를까? 최근 들어서는 황제라는 말이 갖는 부정적 의미를 피하기 위해 교종(敎宗)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교황 주일을 맞아 ‘교황’의 호칭과, 교황과 교종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본다.
교황을 부르는 다양한 호칭
가톨릭교회의 최고 목자인 교황은 여러 호칭으로 불린다. 「교황청 연감」에는 로마의 주교(Bishop of Rome),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Jesus Christ), 사도들의 으뜸 후계자(Successor of the Prince of the Apostles), 보편교회의 최고 대사제(Supreme Pontiff of the Universal Church), 이탈리아 교회의 수석 주교(Primate of Italy), 로마관구의 관구장 대주교(Archbishop and Metropolitan of the Roman Province), 바티칸시국의 원수(Sovereign of the Vatican City State),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ant of the servants of God), 이렇게 8개의 공식 호칭이 열거돼 있다.
영어로 교황을 가리키는 ‘Pope’라는 명칭의 원어 ‘파파’(Papa)는 아버지라는 뜻의 ‘파파스’(papas)에서 유래했다. 본래는 지역 교회 최고 장상을 부르던 말이었지만, 8세기 이후부터 로마의 주교에게만 사용되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1073~1085) 때부터 교황을 부르는 고유한 말로 정착했다.
그렇다면 동양 문화권에서는 ‘Pope’를 어떻게 쓰고 있을까? 우리나라와 일본은 정부와 교회 모두 교황(敎皇)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은 오랫동안 법왕(法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다가 198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일본 사목방문을 계기로 일본교회가 ‘교황’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으로 일본 정부도 ‘교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만과 홍콩은 정부와 교회 모두 교종(敎宗)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의 경우 정부는 교황을 공식 용어로 사용하고, 중국교회의 경우 대개 교종이라고 부른다.
교황 vs 교종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에는 ‘교화황’(敎化皇), ‘교황’과 ‘교종’을 혼용해 오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교황’으로 통일해 쓰고 있다. 이는 ‘가톨릭신문’ 과거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가톨릭시보’는 1967년 4월 23일 1면 알림을 통해 “그동안 ‘가톨릭시보’는 ‘POPE’를 ‘교종’으로 번역, 호칭해 왔으나, 4월 8일 전국주교회의 공용어심의위원회(현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로부터 동 위원회가 이를 ‘교황’으로 번역, 호칭키로 했다는 통보를 받고 앞으로 본지도 ‘교황’으로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제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교황’이라는 말이 생겨났기에, 신앙의 봉사자가 아닌 봉건군주적인 이미지를 지닌 ‘교황’이라는 용어 대신에 ‘교종’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됐다. 고(故) 정진석 추기경도 청주교구장 시절인 1983년 주교회의 회보에 “교회의 황제라는 뜻이 담긴 ‘교황’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전혀 잘못된 표현”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에서도 이 문제를 계속 논의했고, 1991년 10월 11일 “‘교황’이라는 말이 틀리거나 나쁜 이미지를 지닌 용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용어를 무리하게 바꿔야 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종’(宗)이라는 한자 또한 황제들의 이름에 붙이는 군주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어 주교회의는 이듬해 춘계 정기총회에서 “교황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고 결정했다.
「천주교 용어집」에서도 2000년 발행된 초판에는 “‘교종’은 쓰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2014년 개정판을 내면서 ‘교종’이라는 용어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당시 개정판을 낸 천주교용어위원회의 위원장은 강우일(베드로) 주교였다.
이렇듯 가톨릭교회의 최고 목자를 교황으로 부를 것인지 교종으로 부를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이 논란에 불이 붙은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 이후,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기도 했던 강 주교였다. 강 주교는 2013년 3월 21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교황 즉위 경축미사를 주례하고 강론을 하며 교황을 ‘교종’(敎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강 주교는 강론에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하신 그분의 복음적 영성을 드러내는 데 임금이나 황제를 뜻하는 교황(敎皇)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제주교구만 대외적으로 ‘교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 일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도 개인의 성향에 따라 교황 대신 교종이라고 부른다. 제주교구 선교사목위원회 위원장 황태종(요셉) 신부는 “라틴어로 교황을 말하는 ‘Pontifex’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말로 교황은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분’”이었다며 “그 어디에도 황제라는 뜻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교회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교종’(敎宗)이라는 말이 맞다”고 강조했다.
황 신부는 “예전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에 나서며 ‘교회의 황제’라는 의미로 ‘교황’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우리는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인간을 신격화하는 이 용어는 선교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교황을 표현하는 적확한 용어 찾는 노력 더해야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 신우식(토마스) 신부는 “교황의 호칭 중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종’과 교종의 ‘종’은 다른 의미”라며, “교종(敎宗)의 ‘종’(宗)자도 황제를 뜻하는 마루 ‘종’자로 의미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데, 교종이라고 쓰는 것은 신자들에게 혼란만 줄 뿐”이라고 밝혔다. 신 신부에 따르면, 한국교회 현직 주교들도 ‘교황’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있다.
하지만 신 신부는 ‘교황’이 가톨릭교회를 이끄는 수장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인정했다. 신 신부는 “교황의 칭호가 여러 가지인 이유”라며 “교황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찾기 위해 계속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본지 편집자문위원인 대구대교구 신평본당 주임 성용규(도미니코) 신부는 “지금 전 세계 교회는 시노드적인 교회를 위해 내달리고 있는데, 교황이라는 말은 시노달리타스 정신과는 맞지 않는다”면서 “지금이 바로 교황과 교종이라는 용어에 대한 논의를 하기 좋은 때로, 새로운 길로 가기 위해 혼란을 겪을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복자와 성인은 어떻게 되나요? (1)
- 하느님의 종에서 가경자까지 -
한국 천주교회는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7월 1일(토)부터 9월 30일(토)까지 한국의 모든 신자는 매일 시복 시성 기도문을 바치고, 특별히 최양업 신부님께 질병의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한 전구(轉求) 기도를 바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자와 성인이 되는 방법, 곧 시복과 시성의 절차는 어떻게 될까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복자품에 올라야 하는데, 시복 대상자에겐 그의 생애가 완전하고 그리스도교적 덕행으로 가득했다는 공통된 의견, 곧 ‘성덕의 명성’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시복 대상자가 선종한 장소의 관할 교구장이 시복 절차의 권한을 갖지만, 필요하다면 다른 교구장이 맡기도 합니다. 권한을 가진 교구장은 청원인을 선임하여 대상자의 생애와 성덕을 검증할 문서와 증거를 수집합니다. 이렇듯 시복 시성의 첫 단계는 교구 차원의 심사이며, 교구 단계의 시복 대상자가 되면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후, 조사 결과에 따라 조건들이 잘 갖춰졌다고 여겨지면, 교구장은 시복 안건을 다루기 위해 본인의 대리인과 검찰관 그리고 서기 역할을 하는 공증관으로 재판부를 구성합니다. 두 명의 서적 검열 신학자는 하느님의 종에 관한 모든 문서와 그의 저작물들에서 신앙이나 도덕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는지를 평가합니다. 수집된 모든 자료는 교구장이 주재하는 종료 회기에서 봉인됩니다.
이 봉인 작업을 끝으로 교구 단계의 심사가 끝나고, 모든 자료는 로마 교황청 시성부에 전달됩니다. 시성부는 안건 보고관(Relatore)을 통하여 로마 주재 청원인이 ‘심문 요항’(Positio)을 작성하도록 안내합니다. 심문 요항에는 하느님의 종의 생애, 덕행이나 순교, 그와 관련된 성덕의 명성이 확실하게 담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가 그리스도교적 덕목들을 ‘영웅적’ 수준에서 실천하였다는 사실 또는 시성부가 규정한 요건에 맞게 참으로 순교하였거나 목숨을 내놓았다는 내용이 설명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판결이 긍정적이면, 교황은 하느님의 종의 영웅적 덕행이나 순교에 관한 교령의 공포를 승인합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종은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가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시성부 교령을 2016년 4월 26일에 승인했습니다. 현재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가경자이십니다.
[신학이 뭡미꺼?]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성스러운 또 다른 유산: 성전(聖傳)
‘성경’은 우리가 하느님 계시를 ‘말씀’으로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는 성경으로만 기록되어 지금의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신비 속에 감추어 두신 당신의 뜻과 계획을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 교회는 사도(使徒)들이 전해준 하느님 계시의 체험들을 존중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진리를 체험하고 보존하며, 전달해 온 거룩한 전통, 곧 성전(聖傳)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전에 대해 교회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과 함께한 공생활에서 받은 것과 성령의 일깨우심으로 배운 것들을 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전달해 주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6항)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들이 전하고자 했던 것(내용)’입니다. 즉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분과 함께한 공생활 속에서 깨닫게 된 것’ 그리고 ‘그분의 승천 후 성령의 일깨움으로 깨닫게 된 것’을 전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도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전했느냐(방법)’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자신들의 ‘설교’와 삶 안에서의 신앙적 ‘모범’, 더불어 초기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여러 ‘제도’를 통해서 전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리와 전례, 그리고 생활의 표양’을 통해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사도들은 누구에게 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사도들은 교회 안에 기쁜 소식인 복음이 영구히 온전하게 또 생생하게 보존되도록 주교들을 후계자로 세워 자기 교도직(敎導職)의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7항 참조).
가톨릭 교회에는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성전과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역 교회에서 생겨난 신학적, 생활 규범적, 전례적 또는 신심에 관한 전통 또는 전승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사도들에게서 유래(由來)하는 성전과 구별해서 ‘교회 전승’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전승들은 교회 교도권의 지도 아래 ‘사도 전승’에 비추어 보존되거나, 수정 또는 폐기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성전은 사도들에게 위탁된 하느님 말씀이 사도 계승을 통해, 곧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통해 교회 안에서 설교와 모범, 그리고 제도를 통해 전해지는 것으로 ‘교회 전승’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두 개의 큰 기둥 위에 세워졌습니다. 하나는 가톨릭 신앙을 성령의 감도로 “기록된 하느님 말씀”인 ‘성경’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인 ‘성전’이라는 큰 기둥으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 교회에서는 기록된 하느님 말씀(성경)과 사도들로부터 살아있는 교회 공동체에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성전)을 모두 하느님 계시의 원천이자 신앙의 유산으로 삼고 똑같은 열성과 경외심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과 성전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을 섬기려 하는 교회의 교도권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성전, 그리고 교회의 교도권은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다른 것이 성립될 수 없고,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작용 아래 궁극적으로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와 같은 성경과 성전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을 읽고, 들으며, 교회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배워, 삶으로 살아가야 할 차례입니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의 마음에 있다(로마 10,8).
[가톨릭 신학19]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2) : 예수님이 옳으셨다!!
혹시 그리스도인이 아닌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해 보신 적이 있나요?
예수님의 말씀, 치유 기적, 사람들을 대하시던 태도 등등은 청년들에게도 분명 매력적입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님의 지혜, 사람에 대해 가지셨던 동감과 사랑에 매료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비참한 죽음입니다. 지금처럼 청년, 장년, 노년 할 것 없이 삶의 고단함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그분의 한없이 무력하고 비참하기만 한 죽음은 “예수님처럼 살아볼래?”라는 초대 앞에 아마도 사람들을 망설이게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인품을 가지셨던 것은 좋은데, 그래서 뭐란 말인가요? 그분은 결국 인생의 실패자 아닐까요?”
예수님은 분명 우리에게 위로와 평화,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내게 이러저러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쩌면 나를 위한 ‘행복 자판기’로 여겨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에는 구원받고 행복한 것도 당연히 포함됩니다만, 내가 정말 그분을 받아들인다면, 그분이 살았던 삶의 방식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분처럼 사람을 대하고, 사람을 돌보고, 필요하다면 내 것을 내어주고 좀 더 나아간다면 나를 희생할 수 있는 것까지도 포함하겠지요.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우리를 보고 또 누군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전해지는 방식이고요.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의 ‘인간적인 끝’이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라면, 어쩌면 우리의 신났던 발걸음은 잠시 멈칫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정말 끝이라면요. 부활은 이것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심으로써 하느님은 그분이 옳았다는 것, 그분의 생각, 삶의 방식, 죽음에 이르도록 충실하게 지향했던 것, 그것들이 모두 참으로 옳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사건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근본 동기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가르침, 지상의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더 귀한 가치가 있다는 것, 우리의 인간적 판단을 넘어 끊임없이 하느님의 판단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 그래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애쓰고 그 뜻이 실현되도록 기도하며, 그것에 나를 필요로 하신다면 기꺼이 내어드리는 것 등등, 이런 예수님 삶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의 확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인간적인 끝남’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던져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닌 거지요. 그리고 그 정말 ‘끝날 때’란 바로 하느님만이 개입하실 수 있는 바로 그때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도 된다는, 그것이 옳다는 것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발터 카스퍼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신앙은 단순히 자연법칙을 깬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기적 사건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답이라고, 그래서 예수님 부활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 부록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신앙의 집약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에 기초합니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요, 토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