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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출 20:1-17)
지난 시간에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의 중점은 우리는 더러운 인간인지라 의로우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인간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도 없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에만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오해해 왔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보내셨다는 지식의 차원에서 끝나버리고, 또는 우리의 삶을 좋고 편한 길로 인도하시는 사랑에만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간과해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가까이 할 수 없도록 막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성경은 그분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고, 죽어야만 하는데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면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그 어떤 열심도, 종교행위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예배드린다고 하나님께 가는 것 아니며, 기도한다고 하나님께 가는 것 아니며, 헌금한다고 하나님께 가는 것 아닙니다. 주님을 믿어야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곧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는 주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지 행위 자체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거부하시는 것은 인간에게는 하나님 앞에 선이 되고 기쁨이 될만한 그 무엇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아직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자신이 하는 행위가 종교적인 행위라는 이유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의로 삼는 것이지 주님만을 의로 여기는 믿음은 보여지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갈 만한 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이유도 나의 더러움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고 이런 고백이 있는 신자라면 과연 그에게서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고자랑하는모습이있겠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의로움을 증명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선한 행위, 남들이 알아주는 행위를 보여야 하다는 강박감에 사로 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실수를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흉을 보고 욕할까라는 염려가 자신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돈이 있어서 100만원 헌금하는 사람과 돈이 없어서 헌금을 한푼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할 때 하나님은 100만원 헌금하는 사람만 영접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적게 준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게 있는 자나 많이 있는 자나 자신의 소유가 의의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은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하면서 돈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헌금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빚을 내서라도 헌금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빚도 갚아주시고 만배나 축복을 해주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무당들이 하는 짓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 자신을 죽이시는 분이심을 앎으로서 신앙이 출발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길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로움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분이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십자가에 달린 모습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의를 내세우겠습니까? 이런 신자는 자신의 믿음조차도 자기의 의로 여기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더러움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심을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신 분은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의로우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의 정신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지키며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인데 그 사랑을 완벽하게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지키고 행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인간이 왜 죄인인가를 알아야 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알고 주님을 아는 신자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귀한 분으로 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 때문에 천국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천국만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자신이 어떤 어려움과 환경에 빠져 있다고 해도 주님을 믿게된 것으로만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믿음, 이런 삶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게 하셨다면 옛날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길을 제시하셨습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의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이제 율법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 또는 예수님이 오셨어도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규범은 있어야 하는데 그 규범의 역할을 율법이 해야 하기 때문에 십계명은 오늘날도 계속해서 신자들이 실천해야 할 법이라느니 하면서 많은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주장은 모두 성경에서 벗어난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스스로를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율법이 폐지되고 없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또 율법을 예수님이 완성했다는 것은 인간이 실천할 수 없는 율법을 예수님 편에서 실천했다는 것인데 또 다시 신자의 규범으로 법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고, 오늘날 우리는 십계명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절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먼저 말씀하는 것은 지금 율법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신분인가를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벗어난 존재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애굽과 상관없는 존재이며 이제는 그들을 구원하여 낸 여호와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애굽에서의 사고 방식은 보여져서는 안되며 오로지 하나님의 사고 방식만이 보여져야할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단지 신자로서의 행동 강령이나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세상에 신이 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신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우리의 힘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다른 것을 힘으로 삼아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살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만을 신으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2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너를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즉 우상이란 자기 자신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신을 찾을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애굽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위해서 신을 부를 때 비록 그 이름이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며 따라서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거룩을 대신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행위까지도 거룩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어떤 종교행위에 거룩의 의미를 두게 되면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려고 할 것이고, 그것으로 복을 얻고자 힘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한다면 그것이 곧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즉 기도한다면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피조물의 입장을 상기해야 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께 그 무엇도 요구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깊이 깨우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4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휴식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안식일을 말하면서 휴식을 해야 일의 능률이 오른다는 등의 말을 하면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칠 일째 하루를 쉬라는 것은 육일동안 일하고 먹고살았던 모든 것은 우리가 일해서 되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일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내가 일할 수 있는 직장, 힘, 건강, 이런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내가 일해서 벌어들인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효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 하나님은 그 백성을 돌보십니다. 즉 부모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여호와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도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의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의 배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까지 같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남편과 아내에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부부관계에 침범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부부 관계를 깨뜨리게 된다면 그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깨뜨리는 것이 됩니다.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합니다. 도적질이란 남의 소유물을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에게는 다같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신자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의 것을 도적질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도전하는 행위가 됩니다. .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거짓 증거라는 것은 이웃을 해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을 해친다는 것은 우리가 다함께 어린양의 피로서 구원받은 한 형제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함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은 한 몸입니다. 신자는 이웃을 한몸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웃에 악한 마음을 가지고 헐뜯고 거짓말하는 모든 것이 몸의 관계를 해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0계명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웃의 것을 탐낸다는 것은 이웃과 나눌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의 소유에 대해서 탐욕이 일어날 때 그 속에는 시기와 질투가 함께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과 자비로 다가오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웃은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야 할 대상입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 법 앞에서 어떤 마음이 듭니까? 십계명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야 할 모습입니다. 십계명이 곧 하나님의 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의를 완성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법 앞에서 자신들은 실패한 인생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후에 제물이 흘리는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법의 정신을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랑도 은혜도 그리스도안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임을 알고 주만 바라보고 은혜로만 살아갈 때 그런 신자를 통해서 율법의 정신인 사랑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을 보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