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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四君子)
우리나라, 중국(中國), 일본(日本) 회화(繪畫)에서, 그 소재(素材)가 되는 매화(梅花), 난초(蘭草), 국화(菊花), 대나무의 고결(高潔)한 아름다움이 군자(君子)와 같다는 뜻으로 일컫는 말이다.
四 : 넉 사(囗/2)
君 : 임금 군(口/4)
子 : 아들 자(子/0)
(유의어)
매란국죽(梅蘭菊竹)
정의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 네 가지 식물을 일컫는 말로 고결함을 상징하는 문인화의 화제를 일컫는 말이다.
개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국화는 늦은 가을에 첫 추위를 이겨내며 핀다. 대나무는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한다는 각 식물 특유의 장점을 군자(君子), 즉 덕(德)과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사군자라고 부른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문인묵화(文人墨畫)의 소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앞서서 시문(詩文)의 소재로서 등장하였다.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긴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명대(明代) 이르러서이다. 그 이전에는 개별적으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대나무가 '시경(詩經)'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 매, 난, 국은 화조화(花鳥畫)의 일부로 발달하기 시작하다가 북송(北宋) 때 문인화의 이론과 수묵화의 발달과 더불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매, 난, 국, 죽의 순서는 이들을 춘하추동의 순서에 맞추어 놓은 것이다.
중국회화에서의 사군자
시문에서의 사군자
대나무는 아름다움과 강인성 그리고 높은 실용성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인의 생활과 예술에 불가결의 존재로 되어 왔다. '시경'의 위풍(衛風)에는 주(周)나라 무공(武公)의 높은 덕과 학문 그리고 인품을 대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다. 이것이 대나무가 군자로 지칭된 최초의 기록이다.
난초의 향기와 고귀함의 찬미 그리고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시 '이소(離騷)'에 그가 난초의 향기를 즐겨 넓은 지역에 이 꽃을 가득히 심었다는 구절이 보인다.
국화 역시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전원 시인으로 유명한 도잠(陶潛)에 의해서 지조와 은일(隱逸)의 상징으로 그 위치가 굳어졌다. 그는 자기의 뜻을 조금이라도 굽혀야 하는 관직 생활을 참지 못하여 3개월도 못 되어 사직하고 돌아오며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집에 와 보니 폐허가 된 골목에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가 그대로 있음을 반겼다고 읊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편의 시에서 국화와 술을 즐기는 자기 생활을 읊었다.
매화도 일찍부터 아름다운 모습이나 지조의 상징으로 많은 시문에 나타났다.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와 더불어 은거 생활을 한 송나라 시인 임포(林逋) 이후로 특히 문인들 사이에 애호되었다. 이와 함께 아직도 눈이 덮여 있는 매화나무 가지에 처음 피는 꽃을 찾아 나서는 심매(尋梅)가 문인들의 연중 행사로 알려졌다.
사대부화로의 발달 과정
고사(故事)나 문학을 통하여 상징적 의미를 얻게 된 이들 네 식물은 자연히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물론 수묵화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에도 이들이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북송 이후부터는 사대부 여기 화가(餘技畫家)들에 의해서 몰골법(沒骨法) 묵화로 그려졌다. 그 중에서 국화잎이나 매화의 수간(樹幹)은 몰골법으로 그리지만, 꽃잎 하나하나는 윤곽선만으로 그리기도 하고 난초는 백묘법(白描法)을 쓰기도 한다.
송대의 문헌에 따르면 대나무가 제일 먼저 9, 10세기쯤에 묵화로 그려졌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 다음으로 묵매가 그려졌다. 난과 국도 11세기 중엽에는 묵화로 그려졌음이 등춘(鄧椿)의 '화계(畫繼)'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북송 때 이미 네 가지 식물이 모두 묵화로 그려졌고, 후대 문인 묵화로서의 사군자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들은 산수화나 인물화에 비하여 비교적 간단하고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기 화가들인 문인들에게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다. 또한 서예의 필력 자체가 쓴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으로 북송 때부터 사군자화는 화가들의 인품 또는 성격 전체를 반영한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문인들 사이에 더욱 환영받는 소재가 되었다.
그림의 형태나 기법이 간단할수록 그 소재 자체에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남송 말기부터 원대(元代) 초기에는 몽고족의 지배하에서 나라를 잃고도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은둔 생활을 한 문인들 사이에 무언(無言)의 저항 수단으로도 그려졌다. 유명한 예로는 원대 초기의 사대부 정사초(鄭思肖)의 난초이다. 흙 없이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대나무와 매화는 소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총칭 아래 역시 같은 이유로 원대에 많이 그려졌다. 그밖에도 죽석(竹石), 고목죽석(古木竹石), 석란(石蘭), 난죽(蘭竹) 등의 배합으로도 많이 그려졌다.
묵죽화를 사대부 화가들의 가장 적절한 자기 표현 수단으로 만드는 데 공헌한 사람은 북송의 소식(蘇軾)과 문동(文同)이다. 이들은 서로 절친한 사이였으며, 화가로서의 기질이 좀더 탁월하였던 문동의 묵죽화는 깊은 통찰력을 가진 소식의 능숙한 시문에 의하여 그 가치가 더욱 상승되었다.
묵매는 북송 때 화광산(華光山)의 선승(禪僧) 중인(仲仁)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남송의 화가 양무구(楊无咎)에 의해서 기법이 확립되었다. 원대에 와서 문인화 이론이 한층 더 발달됨에 따라 특히 묵죽과 묵란은 서화 일치(書畫一致), 회화의 사의성(寫意性)을 주장한 문인들에 의하여 한층 더 성행하였다.
조맹부(趙孟頫), 이간(李衎), 오진(吳鎭), 예찬(倪瓚) 등이 묵죽으로 유명하였고, 오태소(吳太素), 왕면(王冕)은 묵매로, 정사초(鄭思肖), 조맹부(趙孟頫), 설창(雪窓)은 묵란으로 유명하였다.
명대의 문인 화가 가운데 왕불(王紱), 하창(夏昶) 등이 묵죽으로, 문징명(文徵明)은 묵죽과 묵란으로 유명하였고, 심주(沈周)는 여러 가지 묵화(墨花)와 더불어 묵국을 많이 그렸다. 서위(徐渭)는 자유분방한 필치로 묵죽과 묵국을 많이 그렸다.
명대의 가장 유명한 묵매 화가로는 진헌장(陳獻章)을 들 수 있다. 청대의 대표적인 사군자 화가로는 정섭(鄭燮)과 도제(道濟) 등을 들 수 있으며 금농(金農)은 백매(白梅)와 홍매(紅梅)를 화려하게 그렸다.
사군자 화보의 발달
송나라 때 모든 분야의 학문이 발달되고 출판 기술이 보급됨과 때를 같이하여 여러 가지 지침서가 편찬되었다.
미술 분야도 예외가 될 수 없어 남송 초에는 이미 화광중인과 양무구의 기법을 체계화해 놓은 '화광매보(華光梅譜)'라는 일종의 화매 지침서가 출간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림이 포함되었던 것 같지는 않고 현존하는 '화광매보'가 그 당시의 것과 같은지도 확실하지 않다.
1261년에 발간된 송백인(宋伯仁)의 '매화희신보(梅花喜神譜)'라는 묵매보에는 매화꽃의 생장 과정,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낸 백 개의 매화 그림과 더불어 매화꽃의 모습을 읊은 시(詩)들이 목판화로 아름답게 인쇄되었다. 이 책은 지금도 원래의 모습대로 전하며 간결하고 청초한 남송시대의 묵매화의 양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원대에 이르면서 화보(畫譜) 편찬은 백과사전적 규모로 발달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간의 '죽보상록(竹譜詳錄)', 오태소의 '송재매보(宋齋梅譜)'를 들 수 있다.
이들의 구조와 내용은 조금 차이는 있으나 그 주된 목적은 문인 묵죽·묵매의 기원과 전통을 밝히고 화죽(畫竹), 화매(畫梅)의 지침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하지만 이와 아울러 기법이나 그림의 양식이 획일화되는 경향이 있어 개성의 표현을 중요시하는 문인화 본연의 정신에 어긋나는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원대에는 가구사(柯九思), 오진(吳鎭)과 같은 문인 화가에 의해서 묵죽 화첩 형식으로 된 새로운 묵죽보(墨竹譜)가 만들어지고 이와 같은 전통이 명대로 계속된다.
이에 비하여 묵란화와 묵국화는 청대 이전에는 화보 형식으로 되어 널리 보급된 예는 없는 듯하다. 송대의 몇몇 난보(蘭譜)와 국집보(菊集譜)들이 있으나 이들은 화보가 아니다.
청대에 와서는 왕개(王槩) 등에 의하여 편찬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이 1679년과 1701년에 걸쳐 발간되었다. 그중 제2집이 '난죽매국보(蘭竹梅菊譜)'로서 중국 회화사상 비로소 사군자가 한꺼번에 화보로 만들어져 화법이 일반에게 보급되었다.
우리나라 사군자화의 발달
고려시대의 사군자화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나라 회화의 소재도 다양해지고 송과 원의 영향으로 사대부화의 전통이 생기기 시작한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작품은 없다.
그러나 '고려사' 또는 당시의 문집에 수록된 기록을 통하여 묵죽, 묵란, 묵매가 고려 왕공 사대부(王公士大夫) 사이에 널리 그려졌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빈번했던 사신들의 내왕를 통하여 중국 회화가 실제로 고려에 많이 전해졌다. 그중에는 사군자화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에 두 나라간의 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충선왕이다. 그는 원의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원의 조맹부(趙孟頫), 주덕윤(朱德潤)과 같은 당시의 사대부 화가들과 교유하게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조맹부는 원대 초기의 산수, 묵죽, 묵란의 대가였으므로 원대의 사대부화의 이론과 회화 양식이 고려에 전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고려시대에 묵매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중기의 문신 정지상(鄭知常)과 후기의 차원부(車元頫)이다. '동국문헌(東國文獻) 화가편(畵家編)'에 단순히 '선화매(善畫梅)'라고만 했으므로 그들의 그림의 성격을 알 수는 없다. 묵란화는 말기의 사대부 윤삼산(尹三山), 옥서침(玉瑞琛) 등이 잘 그렸다고 전하며 선승(禪僧) 중에도 매, 죽, 난을 모두 잘 그린 석축분(釋竺芬)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에 비하여 묵죽을 잘 그린 사람들의 수는 더 많고 그에 관한 기록도 찬(讚)이나 화제(畫題)의 형식으로 많이 남아 있다. 김부식(金富軾)의 집안은 아들 돈중(敦中), 손자 군수(君綏) 등 삼대(三代)가 묵죽으로 이름이 났고, 이인로(李仁老), 정서(鄭敍), 정홍진(丁鴻進) 등이 기록에 남아 있다.
이 당시 대부분의 찬이나 화제는 묵죽을 그린 사람들을 소식이나 문동에 비교하며 찬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인품을 대나무의 여러 가지 특성에 비유한 것도 있다. 이는 전형적인 북송 문인 묵죽화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군자화
조선 초기에도 고려시대에 이어 사군자화가 계속 문인들 사이에 그려졌음은 물론이고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들 사이에도 필수화목이 되었던 것 같다.
화원을 뽑는 시험에 관한 '경국대전'의 기록에 보면, 시험 과목 중 대나무 그림이 제일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 화목으로 되어 있어 산수화나 인물화보다 더 중요시된 것을 알 수 있다.
묵매와 묵란도 화원 시험 과목에는 들지 않았지만 중기부터 많이 그려졌던 듯하며 현존하는 작품수도 많다. 15, 16세기부터는 백자(청화, 진사, 철사백자 등)에도 매와 죽, 그리고 좀 늦게 난과 국 등의 그림이 표면 장식으로 나타나는 것도 사군자화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기의 사대부 화가인 이정(李霆), 오달제(吳達濟), 어몽룡(魚夢龍) 등은 조선시대 묵매와 묵죽화의 양식적 전통을 수립하였다. 후기에 들어오면 조선시대 사군자화는 질적, 양적인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 시기는 바로 회화사 전반에 걸쳐 진경산수(眞景山水), 풍속화 등 한국적인 회화의 발전을 보게 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김정희(金正喜)와 조희룡(趙熙龍)을 정점으로 하여 말기의 사군자화는 약간 수그러진 듯하다. 그러나 김규진(金圭鎭)·민영익(閔泳翊)의 묵죽, 강진희(姜進熙), 조석진(趙錫晉)의 묵매, 허유(許維), 민영익, 이하응(李昰應) 등의 그림에서 새로운 구도와 필치에 의한 시대적 감각의 표현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묵국화는 매, 죽, 난에 비하여 훨씬 덜 그려졌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사대부 화가들의 작품 또는 말기의 화원들의 작품이 다수 전한다.
조선 초기(1393∼1544년)의 사군자화
고려시대 사군자화의 유품이 없으므로 조선 초기 사군자의 양식적 기원을 찾기는 다소 어렵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대부들의 묵죽화, 묵란화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실제로 남아 있는 작품 수는 얼마 안 된다.
가장 연대가 이른 묵죽화는 수문(秀文)의 '묵죽화책(墨竹畫冊)'이다. 이는 10장으로 된 화첩(畫帖)으로 1424년(永樂 甲辰)에 해당하는 연기(年記)가 있다.
그 다음으로는 박팽년(朴彭年)의 것으로 전하는 몇 점의 묵죽 그리고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묵죽이 남아 있다. 수문과 신사임당의 그림은 모두 대나무 잎의 크기에 비하여 줄기가 가늘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원말의 예찬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예찬의 그림이 당시 조선 화단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들 상호간의 연관을 짓기가 어렵다. 또한 수문의 그림은 10장 모두가 배경이 비교적 많이 포함되어 산수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점에서도 서예적 성격이 강조된 북송과 원대의 묵죽과 크게 다르다.
묵매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하는 8장으로 된 화첩(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굵은 수간(樹幹)이 약간 경사지게 화폭의 아랫부분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가느다란 가지가 뻗어 나와 몇 개의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수장품 목록에는 원대의 왕면(王冕)의 묵매도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왕면 그림들은 꽃이 가득히 달린 화려한 매화 그림들로 알려져 있다. 제한된 수의 유작(遺作)으로 초기 묵죽·묵매의 양식을 규명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이미 이 시대 그림들은 중국의 사군자화와는 다른 양식을 보이고 있다 하겠다.
조선 중기(1550∼1700년)의 사군자화
중기에는 비교적 많은 작품이 남아 있어 사군자화의 양식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선 묵죽화에서는 이정을 들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초기의 묵죽화 양식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묵죽화 양식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서예성을 좀더 강조한 것이다. 짙은 단색조(單色調) 농도의 먹과 엷은 먹으로 각각 대나무 한 그루씩을 그렸다. 이 때 뒤의 대나무는 앞의 대나무의 메아리와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실성(寫實性)을 좀더 강조한 것이다. 줄기가 굵은 통죽의 음영 효과를 잘 살려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거기에 강한 필치로 몇 개의 잎을 가해 놓은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양식은 후기의 유덕장(柳德章)에 의해서 계승된다.
묵매도 마찬가지로 조선 묵매화의 양식이 수립된다.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는 어몽룡, 허목(許穆), 오달제 등을 들 수 있다. 어몽룡의 그림, 특히 그의 '월매도(月梅圖)'는 대체로 신사임당의 구도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굵은 둥치와 마들가리의 단순한 대조에서 차츰 벗어나 화면을 좀더 화려하게 대각선으로 자르는 구도가 등장한다.
이와 같은 경향은 허목, 오달제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지며 매화꽃도 입체감이 좀더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이 때에는 또한 비백법(飛白法)으로 된 노간에 윤묵(潤墨)으로 찍은 점들이 대조를 이루며 화려한 느낌을 더해 준다. 조속(趙涑), 조지운(趙之耘) 등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의 묵란에 관한 기록은 많으나 묵죽이나 묵매에 비하여 유작의 수가 적다. 이정, 이우(李瑀) 그리고 이징(李澄)의 바람에 나부끼는 난을 그린 작품들만이 전한다. 묵국의 경우는 초기의 작품은 볼 수 없다.
중기의 사대부이며 명필로 이름난 이산해(李山海)의 그림이 한 점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필력(筆力)에 관한 평판에는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허목이 '미수기언(眉叟記言)'에서 이산해의 묵국을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수준의 작품을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1700∼1850년)의 사군자화
조선 후기에는 남종화(南宗畫)의 본격적인 수용과 더불어 '서화 일치'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군자화가 더욱 성행하게 된다.
또한 남종화법의 지침서인 '개자원화전'이 우리 나라에 전래됨에 따라 사군자화도 구도나 기법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비교적 전대의 양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김정희의 화론과 묵란·묵죽처럼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최고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유덕장은 중기의 이정의 두 가지 양식의 묵죽을 모두 답습한 대표적 인물이다. 어느 면으로 보면 그의 묵죽은 이정의 것보다 먹의 농담 대조가 좀 더 단순화된 감이 있어 은은한 맛이 덜하나 힘차고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강세황(姜世晃)은 사군자뿐만 아니라 인물·산수 등 여러 분야에 세련된 기법을 보인 드물게 보는 사대부 화가이다.
위의 두 사람이 18세기를 대표한다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신위(申緯), 김정희, 조희룡을 들 수 있다. 신위의 묵죽은 먹의 농담 변화가 여러 층이며, 대나무 잎을 그린 필치가 좀더 부드럽다. 그리고 바위나 토파(土坡) 역시 오파(吳波) 양식에 기초를 둔 부드러운 필치로 되어 있어 남종화의 영향을 보여 준다.
이 때의 문인 화단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한 김정희는 묵란, 묵죽에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킬 것을 한 번 더 강조하여 예서(隷書)의 획(劃)과 묵란의 획을 동일시하였다.
또한 문인 정신의 표현인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였다. 그가 남긴 많은 묵란·묵죽, 특히 힘차게 뻗어나간 난엽은 추사체(秋史體) 글씨와 더불어 기괴한 일면을 보여 준다.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희룡은 난초나 대나무에 있어서는 스승에 미치지 못하나 묵매에는 단연 후기의 제일인자로 꼽을 만하다. 그의 묵매는 중기의 묵매화 구도에서 탈피하였다.
즉, 좁고 긴 화폭에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며 힘차게 올라가는 굵은 둥치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잔가지에 꽃이 달린 화려한 구도를 이루었다. 매화꽃은 윤곽선을 그린 것, 몰골법의 묵매 및 홍매 등 다양하며 수간도 비백법과 윤묵획이 조화를 이룬다.
묵국도 '개자원화전'의 본을 따라 많이 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죽, 매, 난에 비하여 유작의 수가 훨씬 적다. 그 가운데 문인 화가 이인상(李麟祥)의 '병국도(病菊圖)'는 강한 표현력을 가진 섬세한 필치로 작가 자신의 생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문인 묵죽의 대표로 꼽을 수 있다.
조선 말기(1850∼1910년)의 사군자화
김정희의 영향으로 19세기 중기에 이미 토대를 굳힌 남종화풍은 말기에도 강세를 보이며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는 사군자 가운데 난초가 가장 유행하였다는 인상을 주나 실제로는 매, 난, 국, 죽 모두 상당히 보편화되어 왕공 사대부와 화원 등의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다. 따라서 그림 양식도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대부 화가들은 묵매, 묵란을 많이 그린 허유, 난초로 유명한 이하응, 그의 양식을 답습한 김응원(金應元), 이들과는 좀 색다른 묵란을 그린 민영익, 묵죽으로 뛰어났던 김규진 등이 특기할 만하다. 화원으로는 유숙(劉淑), 장승업(張承業) 등을 들 수 있다.
허유와 이하응의 난초 가운데 많은 작품이 대련식(對聯式)으로 된 길고 좁은 종폭(從幅)으로 이에 따라 특수한 구도가 성립되었다. 즉, 난초 두세 포기를 화폭의 아래위로 대각선의 위치에 배치하고 이들이 절벽이나 바위로부터 옆으로 늘어진 모습을 많이 그렸다. 이와 같은 구도는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훨씬 동적이며 활달하게 뻗어 내려간 난엽과 더불어 전체 화면에 활기를 부여한다.
민영익의 난초는 전서(篆書)의 획을 상기시키는 장봉획(藏鋒劃; 붓끝이 획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필획의 모양이 둥근 감이 나고 두께가 거의 일정한 것)이며 난엽이 거의 직각으로 한 번 꺾이는 특수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명나라 말·청나라 초의 화가 도제의 난초와 비슷하다.
말기 묵죽의 대표자라고 할 만한 김규진은 여러 종류의 대나무를 골고루 그렸다. 가장 특징 있는 것은 무성한 잎이 많이 달린 굵은 왕죽(王竹)이다. 죽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윤묵으로 곧게 뻗어 올리고 마디 사이의 간격을 최소로 남겨 대나무의 곧은 인상을 강조한 듯하다. 그 밖에도 달밤의 죽림(竹林)을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게 변화 많은 먹의 농담으로 표현한 그림도 있다.
묵매는 화원들 사이에 많이 그려진 듯하며 양기훈(楊基薰), 장승업, 조석진 등의 유작이 많이 있다. 양기훈의 그림은 전대의 그림에 비하여 좀더 기교를 부려 지나치게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복잡한 가지의 배치를 보인다. 사대부 묵매 화가로는 허유, 강진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소품(小品)으로 꽃의 크기가 강조된 특징 있는 그림을 남겼다.
그러나 말기의 묵매는 대체로 중국 화본의 영향에 많이 의존한 탓인지, 복잡한 꽃술과 점(點)의 지나친 사용 등으로 간결한 맛을 잃고 있다. 묵국도 화본의 영향을 많이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화원 유숙(劉淑)의 그림 또는 안중식(安中植)의 작품들에서는 화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신선한 국화를 보게 된다.
이상과 같이 조선시대의 사군자화는 중기로부터 많은 화가들이 배출되어 양식적 전통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후기·말기가 되면 한편으로는 중국 사군자화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극복하며 독자적인 양식을 보였다.
중국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 좋은 작품도 많이 남겼다. 현대까지도 동양화의 정신과 기법을 제일 단적으로 표현하는 화목(畫目)으로 간주되어 계속 그려지고 있다.
사군자(四君子)
동양 화훼도의 한 화제(畵題).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군자에 비교해서 그린 그림으로 문인화의 영역에 속한다.
매화는 겨울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특성으로 인해 군자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난초는 담백한 색과 은은한 향기로 인해 군자의 고결함을 나타낸다고 여겨졌다. 또 국화는 서리 내리는 늦가을까지 꽃을 피워 군자의 은일자적함에 비유되었으며,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 때문에 군자의 높은 품격과 강인한 기상으로 여겨져 왔다.
원래 사군자는 화조화의 일부로서 취급되었으나, 그 상징성으로 인해 북송(北宋) 때부터 문인들이 즐겨 그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나의 독립된 화목으로 정립되었다. 묵죽(墨竹)을 사대부 화목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북송의 소식(蘇軾)과 문동(文同)이며, 묵매화(墨梅花)는 화광중인(華光仲仁)에 의해 많이 그려졌다. 이들은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는 문인화론을 형성하면서 그 이론적 토대를 뒷받침했다.
처음에는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으로 그려졌으나 북송 이후부터는 문인화가들에 의해서 주로 먹을 사용한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려졌다. 원대(元代)에는 몽골족에게 나라를 잃은 한족 문인화가들 사이에서 지조와 저항의 표현으로 자주 그려졌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鄭思肖)의 난초 그림으로, 뿌리없는 난초를 그려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명(明)의 신종(神宗)에 황봉지(黃鳳池)가 '매죽란국사보(梅竹蘭菊四譜)'를 편집했고, 문인 진계유(陳繼儒)는 '사군'이라 불렀는데, 후에 '사군자'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군자'라는 명칭은 명대(明代)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대(淸代)의 왕개(王槪)가 편집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제3집은 바로 매난국죽에 관한 사보(四譜)이다. 청대의 정섭(鄭燮)이 사군자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송(宋), 원(元) 회화의 영향으로 고려시대의 사대부들이 묵죽, 묵매를 그렸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대부들은 물론 화원(畵員)들도 사군자를 많이 그렸다. 조선 중기에는 독자적인 양식이 선보였고, 후기에 들어오면 남종화(南宗畵)의 유행으로 더욱 많이 그려졌다.
사군자(四君子)
잔설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주위를 맑게 하는 난초, 늦가을 모든 꽃들이 시들어갈 때 꿋꿋이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 칼날 같은 눈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이 네 가지 식물은 한결같이 그 생태가 군자의 그것을 닮아,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라 부른다.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아들인 왕휘지(王徽之)가 하루라도 떨어져 살 수 없었던 것은 단금(斷金)의 벗도 아니요, 사랑하는 연인도 아닌 대나무였다. "이 사람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耶)."
그에게 대나무는 벗과 연인 모두를 아우르는 자신의 분신이자 자신을 경계하는 규범이었을 것이다. 초(楚)나라의 우국시인(憂國詩人) 굴원(屈原)에게는 난초가 그러하였고, 동진(東晋) 은일시인(隱逸詩人) 도연명(陶淵明)에게는 국화가 그러하였다.
이렇듯 고전적(古典的) 문인들에 의해 그 상징성이 배가된 사군자는 후세 문인들의 공감을 얻으며 문예(文藝)의 소재로 각광받게 된다. 문학 방면에서의 사군자에 대한 찬미는 곧 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져 사군자를 소재로 한 그림이 출현하게 된다.
그중 가장 이른 것은 대나무로 그 기원은 당대(唐代)부터라고 하나,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북송(北宋)대 문동(文同)과 소동파(蘇東坡) 이후였다. 매화 역시 비슷한 시기에 선승(禪僧) 중인(仲仁)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전 작품이 없어 그 자취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그의 뒤를 이은 양무구(揚无咎)가 본격적으로 매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묵매(墨梅)의 기틀을 확립해간다.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야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송(南宋)의 조맹견(趙孟堅)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원초(元初) 정사초(鄭思肖)부터였다. 그는 이민족에게 국토를 잃은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심회를 땅에 뿌리를 박지 않고도 살아가는 노근란(露根蘭)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국화는 사군자 중 가장 뒤늦게 발달하였다. 송대나 원대부터 그 전조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단일 소재로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청대(淸代) 이후이다.
이렇듯 사군자가 문인들에게 창작되고 완상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지니는 군자적 상징성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만, 그 기법적 특징과도 적지 않은 연관이 있다. 문인들이 일상에서 글씨를 쓰던 붓과 먹을 이용하여 약간의 형상성을 가미하면 곧바로 그림이 될 만큼 형사(形似)와 운필(運筆)에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송의 문인사대부들에 의해서 대나무와 매화를 중심으로 사군자가 그려지던 즈음, 고려에서도 사군자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이나 고려 모두 과거제도를 통해 문인사대부층의 저변이 확대되었고,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향하는 시대 분위기 또한 양자가 동궤(同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부식(金富軾)에 의해서 묵죽(墨竹)이, 정지상(鄭知常)에 의해서 묵매(墨梅)가 그려진 후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는 크게 유행하게 된다. 대표적인 작가들로서는 고려의 정홍진(鄭鴻進), 정서(鄭敍), 안축(安軸) 등이 있었고, 조선 전기에는 강희안(姜希顔), 신잠(申潛), 유진동(柳辰仝) 등 문인사대부들은 물론,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인종(仁宗) 등 군왕을 비롯하여 화원이었던 안견(安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나 조선 전기 사군자는 현전하는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그 기량이나 양식적 특징을 고찰할 길이 없다. 다만 조선 전기 화원들이 그린 몇몇 청화백자(靑華白磁)에 시문(施紋)된 대나무 그림에서 고려 말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였을 원대 이간(李衎)의 묵죽 화풍의 유향(遺響)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서예성과 회화성의 적절한 조화
실제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사군자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은 선조(宣祖) 연간에 이르러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묵죽에 탄은(灘隱) 이정(李霆), 묵매에 설곡(雪谷) 어몽룡(魚夢龍)을 들 수 있다.
세종대왕의 현손(玄孫)인 이정은 소재의 다양성과 복합적 운용, 소재의 특징을 명료하게 부각하는 화면구성, 극명한 대비를 중시하는 조형감각, 서예성과 회화성의 적절한 조화, 절제되고 응축된 기세의 표현 등으로 한국 묵죽화의 전형을 확립하였고, 어몽룡 역시 압축적이고 간명한 화면구성과 빠르고 강한 운필로 매화의 강직하고 청신한 기운을 기품 있게 그려내 한국 묵매화의 기틀을 정립하였다.
한국 사군자의 비조(鼻祖)라 할 만한 이 두 사람이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고유의 이념으로 계승 발전시킨 율곡(栗谷) 이이(李珥)계 문인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묵죽과 묵매의 양식적 전통은 당대는 물론 조선 후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묵죽은 위빈(渭濱) 김세록(金世祿)과 수운(岫雲) 유덕장(柳德章) 등이 이정을 계승하였고, 묵매는 창강(滄江) 조속(趙涑), 미수 허목(許穆), 오달진(吳達晉) 등이 어몽룡을 계승한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그중 오달진의 '묵매'는 빠르고 격정적인 필치로 강인한 매화의 상징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화면을 가로지르며 부러진 주간(主幹)은 병자호란 때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그의 동생 오달제(吳達濟)의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절개와 충의를 연상시켜 비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한편 홍진구(洪晋龜)는 비록 수묵화는 아니지만 구륵과 몰골을 적절히 구사하며 담채(淡彩)의 국화를 그려 묵국(墨菊)의 단초를 열어놓는다. 본격적으로 묵국이 그려진 것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에 의해서다. 이번 사군자전에서 우리나라 묵국의 시초에 해당되는 이 두 사람의 국화 그림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성과였다.
조선 말기에 화단의 주류로 떠오른 사군자
묵국이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비로소 사군자가 하나의 화목(畵目)처럼 통칭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음 조선 화단에는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화풍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사군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조(正祖)연간 예원(藝苑)의 영수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정이나 그를 계승한 유덕장과는 사뭇 다른 유연한 필치로 문아(文雅)한 느낌의 난죽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 자하(紫霞) 신위(申緯) 등에 계승되면서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한다.
김홍도의 '백매(白梅)'는 김홍도 특유의 주춤거리는 듯 출렁이는 필선과 부드러운 선염으로 등걸과 마들가리를, 그리고 그 위에 수줍게 맺혀 있는 꽃봉오리를 소담하게 베풀어 놓고 있어, 강인함을 강조한 기존의 묵매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있다. 어렵게 받은 그림값을 다 들여 매화음(梅花飮)을 즐기던 단원의 마음속에 있던 매화는 기세등등한 매화가 아니고 이 '백매'와 같이 소탈하고 정감 있는 매화였나 보다.
반면 임희지와 신위는 기존 양식을 비교적 충실히 계승하며 유려(流麗)하고 습윤(濕潤)한 느낌의 필치로 격조 높은 난죽을 그리고 있는데, 특히 신위는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 3대 묵죽화가로 평가받을 만큼 묵죽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조선 말기에 들어서는 사군자가 화단의 주류로 떠오를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여기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소치(小癡) 허유(許維),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등 그 문도(門徒)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청대(淸代) 문인화풍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이들은 사실성보다는 탈속한 이념미(理念美)를 추구하였다.
국망(國亡) 이후에도 사군자에 대한 애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니, 석촌(石邨) 윤용구(尹用求),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과 같이 국망의 통한을 한묵(翰墨)으로 자오(自娛)하며 지내던 많은 문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상하이(上海)에 망명해 살았던 민영익은 당시 상하이 화단을 압도한 당대 제일의 사군자 대가였다.
일제 이후에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 등이 방일(放逸)한 붓질로 난죽을 그려 남기고 있지만, 기법이나 양식적인 진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군자(四君子) 매란국죽(梅蘭菊竹)
매화(梅花)와 난초(蘭草), 그리고 국화(菊花)와 대나무를 소재로 하여 수묵(水墨) 위주로 그려진 묵매, 묵란, 묵국, 묵죽 등을 사군자(四君子)라 부르는데, 이와 같은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수많은 식물들 중에서도 매화는 설한풍(雪寒風) 속에서 맑은 향기와 함께 봄을 제일 먼저 알리며 피고, 난초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홀로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고, 국화는 늦가을 찬서리를 맞으면서 깨끗한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하는 등, 그 생태적 특성이 모두 고결(高潔)한 군자의 인품을 닮았기 때문으로 명나라 진계유(陳繼儒)가 매란죽국보(梅蘭竹菊譜)에서 사군자라 부른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옛부터 군자에 대한 인식은 그 신분성보다는 고매한 품성에 의한 인격적 가치로서 존경되었기 때문에 사군자를 그릴 때도 대상물의 외형보다 그 자연적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더 중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군자 그림은 외형의 단순한 재현이나 형식의 답습이 아니라 대상물이 자라고 성장하는 자연의 이치와 조화의 정신을 깊이 생각하면서 느껴진 자신의 감정과 마음의 정서와 뜻을 표출, 즉 사의성(寫意性)을 통해 가치가 추구되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사군자 그림은 동양화와 수묵화의 중심사상과 핵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의화(寫意畵)의 정수이면서 동양회화의 대종을 이루었던 문인화의 대표적 화목으로서 고려 때부터 성행되어 이조에 계승된 남종화파(南宗畵派) 중, 특히 문인화가(文人畵家)들이 마음을 수양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매체로서 널리 다루어졌으며, 이는 곧 사군자가 그림뿐 아니라 동양의 문화와 정신의 본질적 가치와 의의를 집약시킨 하나의 표상으로서 전개되어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매화나무의 굵고 거칠게 생긴 검정색 줄기의 강인함과 녹색을 띤 어린 가지에 흰빛 또는 담홍색으로 맑고 청아하게 피는 꽃을 매화(梅花)라 부르고 그 열매는 매실(梅實)이라고 부른다. 매화는 추위를 이기고 가장먼져 피는 꽃으로 그 향기 또한 일품(一品)이니 선비들이 그를 좋아 했고 추운 겨울의 세 벗이라 하여, 송(松)죽(竹)매(梅)를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렀다.
엄동설한에서 제일 먼저 피는 매화는 입춘절과 함께 새해를 알리는 향기의 전령사로 흔히 이르기를 매화는 아무리 춥고 배가 고파도 향기만은 팔지 않는다. 매일생한 향불매(梅一生寒 香不賣)라 하여 그 절개를 조선시대의 여인들로 비유 하기도 하고 지조 높은 선비의 정신으로 추앙 받았습니다.
牆角數枝梅(장각수지매)
凌寒獨自開(능한독자개)
遙知不是雪(요지부시설)
爲有暗香來(위유암향래)
담 모퉁이의 매화 몇 가지, 추위를 이기고 홀로 피었네. 멀리서도 눈이 아님을 알겠나니, 은은한 향기가 풍겨오누나.
왕안석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송나라 신종(神宗)에게 발탁되어 이른바 신법(新法)이라 칭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보수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좌천되었는데, 이 시는 추위를 이겨내고 피는 매화에 대해 읊고 있으며, 엄동설한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뿜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매화를 통하여 꺾일지언정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느끼게 한다.
난(蘭)은 연약한 풀이지만 굳게 솟은 꽃대에서 피는 꽃은 그 향기가 천하일품으로 난(蘭) 또한 많은 잎이 생기고 오래 가는 식물로 잎이 여러개 뻗어 나는데 그 중의 한 두잎을 길게 그리므로 해서 많은 형제들 중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입신양명을 기원하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바라는 것이다.
磊磊幾塊石(뇌뢰기괴석)
馥馥數枝蘭(복복수지란)
寫得其中意(사득기중의)
幽情在筆端(유정재필단)
우둘투둘한 몇 덩어리 돌, 향기 풍기는 두어 가지 난초. 거기에 담긴 뜻 그려 내니, 그윽한 정이 붓 끝에 담긴다.
공자는 청년시절에 주유천하를 하면서 명인대가를 찾아 다니다가 어느 봄날 자그막한 고개길을 오르는데 매우 피곤하고 다리가 아파 오는지라 잠시 언덕 위에 쉬어가기로 하여 덥석 주저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야릇한 향기가 코를 자극하여 향기를 쫓아 슬금슬금 기어가 보니 조그만 암벽아래 한 그루의 난초가 있었고 그 난초꽃 옆에서 향기에 취해 얼마동안 자리하고 있다가 불현듯 무릅을 탁치고 "올커니 바로 이것이야~! 난초는 여기 있었는데 내가 향기를 쫒아 왔지"하며 벌떡 일어나 고향 집으로 되돌아가 불철주야(不撤晝夜) 책을 읽고 수양을 하니 공자의 덕망이 높음에 천하의 인물들이 모여 들었다 한다.
국화는 모든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을 지나 만물이 시들고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홀로 피어나는 모습은 현세를 외면하며 살아가는 품위있는 자의 모습이나 오상고절(傲霜孤節)한 군자를 연상케 하며, 그래서 옛부터 국화는 정절(貞節)과 은일(隱逸)의 꽃으로 알려져 왔다고 하겠습니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탕평책을 반대했던 성품이 엄정, 강직하여 바른 말을 잘해 여러 번 파직되었던 이정보(李鼎輔)의 시조입니다.
菊花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高節)은 너 뿐인가 하노라
무는 여성의 절개와 선비의 지조를 뜻하고, 죽순은 자손 번성과 효(孝)의 의미합니다. 선비를 뜻할 때는 가는 청죽을 주로 그리는데 비록 가늘고 허약하고 속은 비었다 하나 그 지조는 굳게 지키면서 사철 푸르게 색을 지니고 있으니 절대로 변절하자 않는다는 뜻이며, 효는 죽순이 성장 한다는 것은 자손이 번성 한다는 것으로 부모에게 손을 안겨 준다는 것이야 말로 효 중의 효라고 옛 선조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虛心秉高潔(허심병고결)
不受一塵浸(불수일진침)
五月淸溪上(오월청계상)
蕭蕭風滿林(소소풍만림)
마음 비우고 고결함 잡으니, 한 점의 속진도 침입 받지 않는다. 오월의 맑은 시내 위에는, 소소한 바람이 숲에 가득하다.
매란국죽(梅蘭菊竹)
매화와 난초와 국화와 대나무로, 고결함을 상징으로 하는 시서화의 대표적 소재이다.
매화와 난초, 국화와 대나무를 합쳐 매란국죽(梅蘭菊竹)이라 하고, 이것을 사군자(四君子)라 부른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많고 많은 식물 중에서 이들이 덕행과 학문이 뛰어난 군자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유교사회에서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큰 덕목으로 지키는데 이 식물들이 각각 특유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봤다.
매화는 꽃샘추위를 이겨내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며, 난초는 산중에서 홀로 은은한 향기를 멀리 퍼뜨린다. 늦가을 서리 맞으면서도 고고한 국화, 모두 잎을 떨군 겨울철에 독야청청한 대나무 등은 그래서 선비들의 시화의 소재로 사랑받아 왔다.
사군자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 더 발전했다는데 은둔생활을 하며 즐길 수 있기 때문으로 본다. 사군자를 각각 노래한 시문은 부지기수라도 잘 알려진 몇 가지만 보자. 먼저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워 향기를 내뿜는 매화는 우리 시가에만도 600여 수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조선 세조(世祖) 때의 문신 강희안(姜希顔)이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1품으로 쳤고,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운명 때 남긴 말이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라 했을 정도로 아꼈다. 신흠(申欽)의 "매화는 일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란 명구는 음미할수록 와 닿는다. 중국 송(宋)나라 임포(林逋)는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아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렸다.
연약한 잎에 굳게 솟은 꽃대에서 피는 난초꽃은 고귀한 절개를 나타내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이소(離騷)에서 그 향기를 노래했다는데 역사는 오래 되지만 숫자는 가장 적다. 향기가 십리를 간다고 향문십리(香聞十里)에, 지초와 감화를 주고받는 우정 지란지교(芝蘭之交) 등 듣기만 해도 미소가 머금어지는 성어가 다수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시인, 서화가였던 신위(申緯)의 시 구절은 명언이다. "사람 그리며 한 그리기 어렵고, 난초 그려도 그 향기 그리기 어렵네(畵人難畵恨 畵蘭難畵香)."
난초가 봄이라면 국화는 가을이라 춘란추국(春蘭秋菊)이라 했다. 국화라 하면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꺾어들고 아득히 저 멀리 남산을 바라보네(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구절을 먼저 떠올린다. 국화가 꽃 중의 은일자라며 은자의 심경을 노래했다.
이보다 낙목한천(落木寒天)에 홀로 핀 국화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읊은 이정보(李鼎輔)의 시조나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 한 서정주(徐廷柱)의 시가 더 좋다.
대나무는 윤선도(尹善道)가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사철 푸르다고 좋아했는데 앞서 김시습(金時習)도 그 절개를 노래한 것이 있다.
綠竹出巖嵬(녹죽출암외)
托根巖下土(탁근암하토)
바위 모퉁이에 솟은 푸른 대나무, 바위 아래 땅에다 뿌리를 붙였구나
老去節兪剛(노거절유강)
蕭蕭藏夜雨(소소장야우)
늙어 갈수록 더욱 굳어지는 절개, 우수수 밤비를 머금었구나
사군자의 고난을 이기고 고고한 절개를 은은히 내뿜는 덕목을 시화로 예찬하기보다 실생활에서 닦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뒤로 더 구린 모습을 보일 때 더욱 그러하다.
板橋(판교) 鄭燮(정섭)의 梅蘭菊竹(매란국죽)
● 梅(매)
寶劍鋒從磨礪出(보검봉종마려출)
보검의 칼끝은 숫돌에 갈아야만 만들 수 있고
梅花香自苦寒來(매화향자고한래)
매화의 향기는 혹독한 추위를 이겨야만 나올 수 있다.
● 蘭(난)
雖無艶色如嬌女(수무염색여교녀)
비록 아리따운 여인 같은 요염함은 없지만
自有幽香似德人(자유유향사덕인)
스스로 그윽한 향기 지녀 덕 높은 사람을 닮았네.
● 菊(국)
已看鐵骨經霜老(이간철골경상로)
철골 같은 대궁이 이미 서리를 겪었으니
莫遣金心帶雨斜(막견금심대우사)
그 꽃이 비를 맞아 기울지 않게 하라.
● 竹(죽)
咬定青山不放鬆(교정청산부방송)
청산이 무너지지 않도록 꽉 붙잡기 위해
立根原在破岩中(입근원재파암중)
깨어진 바위 속에 뿌리를 깊이 세우고 있다.
▶️ 四(넉 사)는 ❶지사문자로 亖(사)는 고자(古字), 罒(사)는 동자(同字)이다. 아주 옛날엔 수를 나타낼 때 가로 장대 네 개의 모양으로 썼으나 三(삼)과 혼동되기 쉬우므로 전국시대 무렵부터 四(사)를 빌어 쓰게 되었다. 四(사)는 코에서 숨이 나오는 모양을 본뜬 것이었으나 그 뜻으로는 나중에 呬(희)로 나타내고, 四(사)는 오로지 수의 넷을 표시하는데 쓴다. ❷상형문자로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四(사)는 ①넉, 넷 ②네 번 ③사방(四方)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네 사람을 사인(四人), 네 곱절을 사배(四倍), 넷으로 가르거나 갈라짐을 사분(四分), 사방의 경계를 사경(四境), 사방의 둘레를 사위(四圍),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다는 말을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사면초가(四面楚歌), 주위에 사람이 없어 쓸쓸함을 일컫는 말을 사고무인(四顧無人), 길이 사방 팔방으로 통해 있음이나 길이 여러 군데로 막힘 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팔달(四通八達), 이리저리 여러 곳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으로 길이나 교통망이나 통신망 등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오달(四通五達), 사면이 봄바람이라는 뜻으로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좋은 낯으로만 남을 대함을 이르는 말을 사면춘풍(四面春風), 사해란 곧 온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천하의 뭇사람들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사해형제(四海兄弟), 네 갈래 다섯 갈래로 나눠지고 찢어진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짐 또는 천하가 심히 어지러움 또는 질서 없이 몇 갈래로 뿔뿔이 헤어지거나 떨어짐을 일컫는 말을 사분오열(四分五裂),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이라는 뜻으로 인생에 있어 반드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온갖 괴로움을 이르는 말을 사고팔고(四苦八苦), 사철의 어느 때나 늘 봄과 같음으로 늘 잘 지냄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사시장춘(四時長春), 사주의 간지로 되는 여덟 글자 또는 피치 못할 타고난 운수를 이르는 말을 사주팔자(四柱八字), 천하의 풍파가 진정되어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사해정밀(四海靜謐), 갓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뜻으로 뒤늦게 비로소 일을 해 봄을 이르는 말을 사십초말(四十初襪), 404 가지 병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걸리는 모든 질병을 이르는 말을 사백사병(四百四病), 네 마리 새의 이별이라는 뜻으로 모자의 이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사조지별(四鳥之別), 천하를 제 집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천하를 떠돌아 다녀서 일정한 주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사해위가(四海爲家), 사궁 중의 첫머리라는 뜻으로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를 이르는 말을 사궁지수(四窮之首), 사방의 지세가 견고하고 험한 자연의 요새로 되어 있는 땅을 이르는 말을 사색지지(四塞之地),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따로따로 떨어짐 또는 그렇게 떼어놓음을 일컫는 말을 사산분리(四散分離), 어떤 주창에 응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사방향응(四方響應) 등에 쓰인다.
▶️ 君(임금 군)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은 손에 무엇인가를 갖는 모양으로 천하를 다스리다는 뜻과, 口(구)는 입으로 말, 기도하다의 뜻의 합(合)으로, 君(군)은 하늘에 기도하여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君자는 '임금'이나 '영주', '군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君자는 尹(다스릴 윤)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尹자는 권력을 상징하던 지휘봉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다스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직책이 높은 사람을 뜻하는 尹자에 口자가 결합한 君자는 군주가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君(군)은 (1)친구나 손아랫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에 그 성이나 이름 아래에 붙여 쓰는 말 (2)조선시대, 고려 때, 서자(庶子) 출신인 왕자나 가까운 종친이나 공로가 있는 산하(傘下)에게 주던 작위(爵位). 고려 때는 종1품(從一品), 조선시대 때는 정1품(正一品)에서 종2품(從二品)까지였으며, 왕위(王位)에 있다가도 쫓겨나게 되면 군으로 강칭(降稱)되었음. 이를테면,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 등이다. 이와같은 뜻으로 ①임금, 영주(領主) ②남편(男便) ③부모(父母) ④아내 ⑤군자(君子) ⑥어진 이, 현자(賢者) ⑦조상(祖上)의 경칭(敬稱) ⑧그대, 자네 ⑨봉작(封爵) ⑩군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백성 민(民), 신하 신(臣)이다. 용례로는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을 군주(君主),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를 군국(君國), 임금의 명령을 군령(君令), 임금의 자리를 군위(君位),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군자(君子), 처방에 가장 주되는 약을 군제(君劑), 임금의 총애를 군총(君寵), 임금의 덕을 군덕(君德), 임금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를 군도(君道),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군림(君臨), 임금과 신하를 군신(君臣),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군(家君), 엄하게 길러 주는 어버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자기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을 엄군(嚴君), 남의 남편의 높임말을 부군(夫君), 남의 부인의 높임말을 내군(內君), 거룩한 임금을 성군(聖君), 어진 임금을 인군(仁君), 재상을 달리 일컫는 말을 상군(相君), 임금께 충성을 다함을 충군(忠君), 포악한 군주를 폭군(暴君),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됨을 득군(得君), 덕행을 베푸는 어진 임금을 현군(賢君),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첫째는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둘째는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자삼락(君子三樂), 임금과 신하와 물과 물고기란 뜻으로 떨어질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일컫는 말을 군신수어(君臣水魚), 임금은 그 신하의 벼리가 되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똑같다는 말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큰 의리를 일컫는 말을 군신대의(君臣大義),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는 말을 군자무본(君子務本), 군자는 큰길을 택해서 간다는 뜻으로 군자는 숨어서 일을 도모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옳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말을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말을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는 뜻으로 가을에 새로 나는 표범의 털이 아름답듯이 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아주 빠르고 뚜렷하며 선으로 옮겨가는 행위가 빛난다는 군자표변(君子豹變),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아서 백성은 모두 그 풍화를 입는다는 뜻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을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욕신사(君辱臣死) 등에 쓰인다.
▶️ 子(아들 자)는 ❶상형문자로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아들을 뜻한다. 지금의 子(자)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글자가 합쳐져 하나가 된 듯하다. 지지(地支)의 첫째인 子와 지지(地支)의 여섯째인 巳(사)와 자손의 뜻이나 사람의 신분이나 호칭 따위에 쓰인 子가 합침이다. 음(音)을 빌어 십이지(十二支)의 첫째 글자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子자는 ‘아들’이나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子자는 포대기에 싸여있는 아이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양팔과 머리만이 그려져 있다. 고대에는 子자가 ‘아이’나 ‘자식’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중국이 부계사회로 전환된 이후부터는 ‘남자아이’를 뜻하게 되었고 후에 ‘자식’이나 ‘사람’, ‘당신’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子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아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子(자)는 (1)아주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어 (2)신문(新聞), 잡지(雜誌) 따위 간행물(刊行物)의 어느 난을 맡은 기자(記者)가 자칭(自稱)할 때 쓰는 말 (3)십이지(十二支)의 첫째 쥐를 상징함 (4)자방(子方) (5)자시(子時) (6)글체에서, 그대의 뜻으로 쓰이는 구투(舊套) (7)글체에서, 아들의 뜻으로 쓰이는 말 (8)민법상에 있어서는 적출자(嫡出子), 서자(庶子), 사생자, 양자(養子)의 통틀어 일컬음 (9)공자(孔子)의 높임말 (10)성도(聖道)를 전하는 사람이나 또는 일가(一家)의 학설을 세운 사람의 높임말, 또는 그 사람들이 자기의 학설을 말한 책 (11)자작(子爵) 등의 뜻으로 ①아들 ②자식(子息) ③첫째 지지(地支) ④남자(男子) ⑤사람 ⑥당신(當身) ⑦경칭(敬稱) ⑧스승 ⑨열매 ⑩이자(利子) ⑪작위(爵位)의 이름 ⑫접미사(接尾辭) ⑬어조사(語助辭) ⑭번식하다 ⑮양자로 삼다 ⑯어리다 ⑰사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여자 녀/여(女), 어머니 모(母), 아버지 부(父)이다. 용례로는 아들과 딸의 높임말을 자녀(子女), 며느리 또는 아들의 아내를 자부(子婦), 아들과 사위를 자서(子壻), 아들과 손자 또는 후손을 자손(子孫), 아들과 딸의 총칭을 자식(子息), 남의 아들의 높임말을 자제(子弟), 십이시의 첫째 시를 자시(子時), 밤 12시를 자정(子正), 새끼 고양이를 자묘(子猫), 다른 나라의 법률을 이어받거나 본떠서 만든 법률을 자법(子法), 모선에 딸린 배를 자선(子船),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자막집중(子莫執中),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자모지심(子母之心), 듣고 본 것이 아주 좁고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자성제인(子誠齊人),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는 자위부은(子爲父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