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석의 100년 산책]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왜 대학교수가 되려고 했나
중앙일보
입력 2023.03.17 00:50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학문과 인격을 키우고 싶은 열망
나무도 모여서 숲을 이룰 때 성장
아첨과 편 가르기는 절대 피해야
김태길·안병욱 교수와 만난 행복
나는 직장이나 공동체 내 인간관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초등학교 교사로 1년간 일했으나 그 학교는 교사가 셋뿐인 가정적 분위기였다. 중학교 선생님들과 초등학교 교사인 나 사이엔 직책과 인격의 차등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중학교 때 선생님들보다 한 차원 낮은 선생 같은 아쉬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런 느낌이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뒷받침했을지 모른다.
대학을 끝내고 해방이 되면서 고향에 있는 중등학교를 운영했다. 고향 주변의 청소년들에게 중등교육까지는 책임지자는 뜻에서였다. 함께한 교사들은 중학교와 대학 동기들이었다. 역시 가족 분위기였고, 학생들은 순박한 시골의 청소년들이었다.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 가르치는 것은 빙판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았다. 불가능하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생존 자체가 위험한 처지가 되었다.
이승만과 김성수, 무엇이 달랐나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2년 후에 탈북하고 서울 중앙중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직장다운 일터에 들어선 셈이다. 자연히 공동체 안의 내 위상과 대인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정치계 현실이 끼친 영향도 있었다. 그즈음 터득한 몇 가지 깨달음이 생겼다.
첫째, 상사에게 아첨하는 일은 하지 말자. 내가 상사나 지도자가 되면 절대로 아첨을 일삼는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첨 분자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했다. 인촌 김성수는 함께한 사람들과 격의 없는 우정을 나눴기에 모범적인 인간관계를 남겼다.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동료와 선의의 경쟁은 좋으나 상대를 비방하거나 나보다 안 되기를 바라는 반(反)인격적인 행위는 하지 말자. 내 인품과 인격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선한 사회생활에서 밀려날 뿐이다.
셋째, 같은 직장이나 공동체서 편 가르기를 하는 어리석은 과오를 범하지 말자. 윗사람이나 동료를 대할 때 서로 존중하며 공생의 미덕을 높여야 한다. 정치계의 편 가르기가 국사를 망치는 사례를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연세대에 오면서 두 가지 기대를 품었다. 중고등교사보다 인격과 학문의 수준이 높은 선배들과 함께하기에 인격함양과 학문발전의 희망을 안고 출발했다. 내 대학동료들은 먼저 교수가 되었고 나는 10년 정도 학문을 소홀히 했으므로 나 자신의 부족을 인정했다. 그러나 5~6년 후에는 그 거리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학교수의 수준과 학문적 열정이 기대보다 높지 못했던 것 같았다.
도산·인촌 등 사회 지도자와 교류
내가 중앙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 신인 교사에게 당부했다. “우리 학교에 있는 동안에 열심히 공부해서 학문의 길을 걷든지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을 간직해 주세요. 둘 다 놓치고 60세가 되면 후회하게 되고 인생의 공허감과 낙후감을 갖게 됩니다”라고 했다.
대학에 몸담고 있을 때도 모범이 될 만큼 인격과 품위를 갖춘 선배나 동료는 많지 않았다. 내가 대학 다닐 때의 교수들과 차이가 있어 보였다. 학문적 열정과 인격적 소양에서는 나도 비슷한 위치에서 출발해 늦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대학에 오기 전부터 도산·인촌을 비롯해 여러 종교계 지도자나 사회 인사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다.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들과의 교류는 다른 교수들보다 앞서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운동권 학생들의 활동이 표면화하면서 같은 계통의 일부 교수들이 편 가르기에 앞장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상과 학문은 물론 대학교육의 전통과도 어긋나는 태도였다. 기독교교육이 폐쇄적이 되면 인문학의 우수성과 창조적 가치창출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대학을 떠날 때쯤 되어서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내가 존경하는 김태길·안병욱을 비롯한 친구들이 대학과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학문적 열성과 높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배와 제자들이 그런 소중한 친구들을 사표로 삼으면서 대학의 전통을 이어가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들의 애국심과 지성사회를 위한 성의 있는 노력이 새 역사를 이끌어 갈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큰 소가 떠나면 작은 소가 지켜
큰 소가 떠나면 작은 소가 자라 그 뒤를 계승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요사이 나는 후배 교수들에게 “총장의 존경을 받는 교수가 되라”고 권고한다. 그런 교수는 대학의 운영을 책임 진 총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협조하게 된다. 세계를 이끌어 가는 대학이 모두 그렇다.
내가 교육계로 진출한 때는 교육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있을 때는 훌륭한 대학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떠난 뒤부터는 넓은 사회와 유구한 역사의 고장에 다시 동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그만큼 성장했거나 지도력을 갖추었다는 뜻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나무는 홀로일 때는 영향이 크지 않다가 같은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게 되면 그 공동체는 역사의 주체가 된다. 그 숲이 한 산을 차지하면 위대한 유산을 남길 수 있다. 지성인의 사명이 그런 것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