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탉’ 죽인다고 문제해결 안 되듯… 敵意 품고 만든 정책은 성공못해
문화일보 2021.01.20.
▲ 일러스트 = 이철형 작가
■ 김태환의 이야기철학 - ⑨ 여주인과 하녀들
우화 속 하녀들 기상시간 알리는 수탉 없앴지만 오히려 일할 시간만 더 늘어나
정책입안자들, 욕망 실현수단 제거하면 당면과제 풀 수 있다고 오판… 국민의 마음 읽어야
새벽에 수탉이 울면 일어나 하녀들을 깨우고 들들 볶는 여주인이 있었다. 지치고 피로에 찌든 하녀들은 수탉을 목 졸라 죽였다. 자신들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주범이 여주인을 깨우는 수탉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탉이 죽자 언제가 새벽인 줄 알 수 없게 된 여주인은 한밤중에 하녀들을 깨워 일을 시키게 됐다.
수탉은 왜 우는가? 수탉의 울음은 짝짓기, 영역 표시와 관련된 행동으로 알려져 있다. ‘수탉 두 마리와 독수리’ 같은 우화를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도 과학적 연구 없이 이미 수탉 울음의 의미를 대강 이렇게 이해했던 것 같다. 수탉 두 마리가 여러 암컷을 놓고 싸운 끝에, 패자는 덤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승자는 자랑스럽게 높은 담 위에 올라가 크게 울었다. 그러나 담 위에서 우는 녀석을 독수리가 채어가는 바람에, 암컷은 덤불 속에 숨어 있던 수탉의 차지가 됐다. 우화 특유의 반전으로 결국 울지 못한 수탉이 짝짓기에 성공하지만, 이 이야기는 수탉이 자신의 지배권을 공표하고 확정하기 위해 높은 곳에서 크게 운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또 하나 확인되는 것은 수탉이 반드시 꼭두새벽에만 우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수탉은 낮에도 지배권을 주장할 필요가 있을 때 언제든 운다. 밤이 지난 뒤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는 것도 그런 필요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에게 수탉의 울음은 새벽이라는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가? 그것은 수탉의 새벽 울음에 몇 가지 두드러진 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수탉은 매일 새벽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운다. 둘째, 새벽 울음은 수탉이 밤 동안의 침묵을 깨뜨리는 첫 울음이다. 셋째, 수탉의 새벽 울음은 밤의 정적을 깨뜨리기에 시끄러운 낮 동안의 울음보다 우리에게 더 뚜렷한 인상을 준다.
낮과 밤은 빛과 어둠으로만 구별되는 게 아니다. 소리에도 밤과 낮을 구획하는 기능이 있다. 밤은 고요하고, 낮은 소란스럽다. 수탉은 낮의 소란스러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훨씬 전에 울기 때문에 소리로 새날의 시작을 예고하는 동물이 됐다. 그러나 고요와 소란의 대립은 밤과 낮을 가르는 경계로서 빛과 어둠의 대립만큼 명백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인간이 살지 않는 숲도 낮이 밤보다 현저하게 시끄러울까? 많은 동물이 밤잠을 자고 낮에 활동하지만 그와 반대되는 동물도 없지 않다. 게다가 깨어 있는 동물이 모두 다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밤의 고요와 낮의 소란 사이의 대조는 무엇보다도 인간 세상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깨어 있을 때 매우 시끄럽게 구는 동물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다양한 활동을 하며 더 많은 소리를 만들어냈고, 그에 비례해 인간이 잠든 밤과 낮 사이의 소음 격차는 커져 왔다.
그러니 인간 세상에 들어와 가금이 된 수탉의 낮 울음은 다른 수많은 소음 속에 묻혀버리기 쉽다. 유독 수탉의 새벽 울음이 강렬하게 지각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밤의 고요를 깨뜨리며 새로 밝아오는 아침을 예고하는 수탉의 울음소리는 그만큼 깊은 신화적, 상징적 의미를 얻는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자신의 엄청난 배신을 깨닫게 한 것도 수탉의 새벽 울음이었다.
인간이 문화를 이루고 닭을 길들여 집에 데리고 살게 되면서 수탉의 새벽 울음은 이처럼 특별하게 지각될 뿐만 아니라 그 기능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수탉이 자신의 권력이나 지배영역을 표시할 필요성은 자연적 거주지를 떠나면서 거의 사라졌지만 그 본능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늘 같은 시간에 첫 울음을 우는 수탉을 알람 시계가 발명되기 이전의 알람 시계로 사용한다. 수탉 자신은 여전히 자신의 강한 힘과 위세를 표현하려고 우는 것이지만, 그 소리가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리듬을 환기하고 잠에서 일어나게 하는 실용적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수탉을 길들여 함께 산 이래 아주 오랫동안 수탉을 생물학적 시계로 이용해 왔으나, 수탉의 몸속에 정말 그런 시계 장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일본 나고야(名古屋)대 연구팀은 2013년에 수탉들이 외부 빛의 자극과 무관하게 일정한 시간에 깨어나 운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그들은 이 외에도 여러 마리 수탉이 있을 때 저마다 깨자마자 무조건 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서열이 높은 수탉이 깨어나 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라 운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알아냈다. 새벽 울음이 여전히 수탉들 사이의 권력 서열을 표현한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수탉의 새벽 울음을 마치 수탉 본연의 사명인 것처럼 상상한다. ‘고양이와 수탉’이라는 우화가 그러한 예다. 고양이가 수탉을 잡았는데, 뭔가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수탉이 밤에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사람들이 잠을 설친다고 꾸짖었다. 그러자 수탉은 사람들이 하루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깨워주는 것이니 자신의 울음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반박한다. 물론 수탉 자신이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할 리는 없다.
수탉에게는 인간의 잠을 설치게 할 의도도, 일정 시간에 인간이 일어나는 것을 도와줄 의도도 없다. 수탉은 자기 존재와 위신을 알리기 위해 소리를 지를 뿐이다.
어쨌든 수탉의 새벽 울음은 인간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위의 우화에서 고양이가 말한 문제점도 있고, 수탉이 말한 효용도 있다. 아침에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은 늦잠꾸러기에게 수탉은 방해꾼이고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아침형 인간에게는 고마운 알람이다. 우화 ‘여주인과 하녀들’에서 부지런한 여주인과 일하기 싫은 하녀들 사이에서도 수탉은 본의 아니게 갈등의 한복판에 던져진다. 수탉은 부지런한 여주인의 충실한 조력자이지만 하녀들에게는 일할 시간을 터무니없이 앞당기는 저주스러운 존재다. 하녀들은 수탉을 자기네 불행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죽여버린다. 그러나 그들을 정말 괴롭힌 것은 여주인이지 수탉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녀들의 잔인한 선택은 전혀 문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남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자신의 삶을 침해하거나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인간은 어떻게 하는가? 인간은 극단적인 경우에 상대를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좀 더 부드러운 갈등에서는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하려는 상대의 의지를 꺾기 위해 압박을 가하거나 다른 마음을 먹도록 설득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상대방의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길을 찾는다. 여주인의 의지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여주인이 새벽에 일어나는 데 필요한 수탉을 제거한 하녀들처럼, 상대에게서 목적 달성의 수단을 빼앗는 것이다. 좀 더 일상적인 예를 들어본다면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해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컴퓨터를 부숴버리는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이 해결책에는 심각한 문제가 뒤따를 수 있다. 하나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상대가 여전히 의지를 갖고 있는 한, 수단을 빼앗더라도 그것을 우회하는 다른 수단이 있을 수 있고, 그 새로운 수단이 본래의 수단보다 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아이는 이제부터 집에 안 들어오고 PC방을 전전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대에게서 수단을 빼앗을 때는 어떤 우회로가 있고, 그에 대한 대비책은 무엇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수단을 제거함으로써 목적 달성의 길이 완벽하게 차단됐을 경우 그러한 좌절에서 발생하는 불만이 다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목적 달성을 방해하려 할 때는 그러한 예기치 않은 상황 발생에 대한 대비책이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여주인의 경우 수탉을 빼앗김으로써 일찍 일어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게 됐다. 수탉이 안정적으로 해주던 알람 역할을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 대신하면서 하녀들은 이전보다 오히려 더 불안정하고 고된 삶을 살게 된다.
자신과 갈등 관계에 있는 상대를 통제하려고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일이다. 하녀들은 여주인이 수탉만 없으면 자기네처럼 마음 편하게 쿨쿨 잘 줄 알고 수탉을 죽였다. 그들은 여주인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며, 여주인에게 수탉은 단잠을 중단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새벽까지는 맘 편하게 자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상대에게서 수단을 빼앗는 것이 어떤 효과를 낳을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갈등 관계에 있을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의 목적, 의지, 욕망에 대해 적대적이고 부정적일수록, 그런 부정적 편견이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에 들어앉아 게임에만 몰입하고 있는 아이의 마음에 대한 적의는 컴퓨터를 부수는 단순무식한 대응으로 흘러가기 쉽다. 아이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만큼 경시하기 때문에 욕망이 실현될 통로만 막으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주인에게 괴롭힘을 당한 하녀들도 그런 함정에 빠졌다.
이는 특히 정책 입안자들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교육 정책과 부동산 정책이 실패를 거듭하는 것도 이와 유사한 이치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흔히 교육 현장과 부동산 시장을 왜곡하고 어지럽히는 사람들의 과욕에 대해 적의를 품는다. 그리고 그 욕망을 실현해주는 수단을 없앰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제거된 수단을 대신할 새로운 수단이 등장하지는 않을까? 욕망 실현의 길이 막혔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런 비교적 간단한 질문조차 잘 던지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릇된 욕망을 단죄하는 정책을 주장하고 실행하는 정책 입안자들도 개인으로서는 그렇게 적대시하는 욕망을 똑같이 가지고 행동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그런데도 그 마음을 정확하게 읽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욕망을 적대시하는 공인적 의식과 욕망을 품은 개인의 마음 사이에 어떤 차단벽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교육이나 부동산 같은 사회 문제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정책은 언제나 그 문제를 만들어낸 마음을 읽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 과제는 여주인을 이해할 수 없었던 하녀들이 당면한 과제보다 더 쉬운 것일 수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기만 해도 상당한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서울대 독어독문과 교수
■ 용어설명
새로운 이솝우화 : 이솝우화는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노예이자 이야기꾼 이솝이 지은 우화 모음집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 주인공인 데다 내용이 교훈적이어서 오랫동안 어린이들의 도덕 교육용 교재로 이용돼 왔지만 ‘김태환 교수의 이야기 철학’은 이솝우화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 해석해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