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패 시험이 열리는 계절은 늦은 가을로, 낙엽 이 우수수 떨어질 때였다. 보통 애기기생은 기 패 시험이 열리기 직전까지 자신이 쌓은 재주 를 갈고 닦았다.
가란은 열여섯이 되자 꽃봉오리처럼 수줍게 물이 올랐다. 살결은 더 고와지고 두 뺨은 복 숭아처럼 발그스름하며 눈매는 새침했다. 입 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결 좋은 머리카 락은 단정하게 땋아내려 댕기로 질끈 묶고 있 었다. 만약 상투를 틀지 않은 도령들이 보았더 라면, 꿈에서도 잊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조차 올리지 못한 애기기생의 자태는 이미 머리 올 린 기생보다도 더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란이 검무를 추고 있노라면, 그것은 매혹적 이라기보다는 치명적이었다.
채홍 준사가 그 춤사위에 반해 애기기생으로 만든 것은 이미 연위 기방에서는 전설처럼 내 려오는 이야기였다 그 말처럼 가란의 춤사위 는 다른 기생과 확연히 달랐다. 특히 검무를 출 때면, 그 칼날에 가슴이 시원하게 베이는 기분이었다. 몸에 무게가 전혀 없는 듯이 가볍 게 움직이다가도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칼날 은 빠르고 경쾌하게 노닐다가도 망설임 없이 허공을 그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추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춤사위였다.
가란에 대한 소문은 차츰차츰 퍼지고 있었다. 단양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가란에게 다른 기생들의 잔치를 보게 할 때, 자연스럽게 가란 의 존재도 상대방에게 알려졌다. 감추려고 해 도 그 재능은 감춰지지 않았고 점점 피어나는 미색은 눈길을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그리하 여 밖에서는 가란의 기패 시험을 기대했다. 기 패의 색을 놓고 내기가 이어지기도 했으며 초 야권을 누가 살 것인지에 대해 팽배하게 신경 전을 벌이기도 했다. 고작 삼 년 전에 부엌데 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도록 가란은 유명세 를 타고 있었다.
“그렇다는데 너는 어떤 심정이냐?”
마른기침을 토하며 밥 할매가 느물느물하게 물었다. 한참을 검무를 추던 가란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지도 않은 채 주저앉았다.
“다른 것 생각할 시간이 없는 걸요.”
밥 할매는, 지난 이 년의 세월 동안 홀로 이십 년을 보낸 것 같았다. 호호백발은 숱이 적어져 묶을 수도 없게 되어 산발했고, 얼굴이며 몸이 며 주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검버섯은 꽃처 럼 얼굴과 목, 손등에 피어났고 거동은 더욱 힘들어져 지팡이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백태 낀 뿌연 눈동자지만, 생기가 맴돌았다.
“한 달이 지나면 기패 시험이 열리지. 너는 이 인근의 기패 시험을 치를 애기기생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야 한다. 그래야 옥패를 받지.”
“정말이지, 밥 할매의 옥패 욕심은 알아줘야 해요.”
“나 좋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네 년 좋으라고 한 건데 뭐가 불만이냐.”
밥 할매가 투덜거렸다. 이제 밥 할매는 기세 좋게 소리를 치거나 걸쭉한 욕설을 뱉지 못한 다. 그것도 힘이 드는지 요즘은 작은 목소리 투덜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가란은 그런 밥 할 매의 모습에 자꾸 가슴 한 켠이 싸해졌다.
“제가 옥패를 받아오면 뭐 해주실 건데요?”
“아니, 이 년이?”
“굳이 옥패에 연연해야 하나요? 목패를 받나 옥패를 받나 기생인 건 매한가지인데.”
평소라면 걸쭉하게 욕 한 바가지는 나왔을 터 였다. 하지만 밥 할매는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뜻 모를 눈빛으로 가란을 바라보았다.
“밥할매?”
“꼭 옥패여야 한다. 목패나 동패 받아오면 회 초리에 네 종아리를 거덜 낼 것이야!”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밥 할매는 평소와 같았다. 여전한 옥패타 령에 저 고집 있는 성격까지. 가란은 그 태도 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힘쓰는 데 까지 열심히 노력해 보겠노라 대답했다. 밥 할 매는 순순한 가란의 태도에 마음에 든다는 듯 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검댕 묻히고 기생들 뒤를 졸졸 쫓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어엿한 애기기생 으로 보이는구나.”
“좋으세요?”
“옥패 받으면 생각 좀 해보마.”
“어이구.”
“내가 늘 말했지 않느냐. 기생 년들 삶이란 결 국 그 끝이 정해져 있음을. 그럴 바에야 조금 이라도 더 자유로운 옥패 등급의 기생이 되는 수밖에 없다. 혹은, 궁기가 되든가.”
또다시 나오는 옥패에 가란은 지겨워졌지만, 뒤에 붙은 궁기에 의아해졌다.
“궁기라뇨?”
“만약 평생에 남자를 한 명이라도 받을 거라 면, 임금 정도는 되어야지.”
“임금이 뭐가 아쉽다고 기생인 저를 봐주겠어 요?”
“멍청한 년. 임금이니 아쉽고 외로운 게지. 아 니었으면 궁기를 만들었을 것 같으냐? 본디 가장 높은 곳이 가장 좁은 곳이다. 임금 쯤 되 면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을 만큼 좁은 곳에 살고 있을 터인데, 어찌 외롭 지 않겠느냐. 넌 그런 외로운 자의 곁에서 보 듬어주고, 예쁨 받아라. 그게 제일 인생 피는 일이야.”
“별로 내키지 않아요.”
“그럼 옥패를 받든가.”
더 대화를 나눠도 옥패 외에 결말이 나지 않을 것 같으니, 가란은 곁에 세워 둔 거문고를 자 신의 무릎 위에 얹었다. 그리고 술 대를 잡고 익숙하게 문현부터 대현까지 차례차례 때렸 다. 가란은 곡을 타기 전에 이렇게 한 번씩 하 는 것이 어느덧 습관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둥
깊고 낮은 소리가 울림통을 통과했다. 밥 할매 는 투덜거리던 입을 다물고 가란의 연주에 귀 를 기울였다. 재작년에 가락을 못 뽑아 징징 울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절절한 음색이 었다. 모두 가란더러 가무기(歌舞伎 춤과 노 래가 뛰어난 기생)가 될 것이라고들 했지만, 아마 춤사위가 아니더라도 명연주자가 되지 않았을까.
기생이 다재다능 할수록 좋다지만 가란은 정 말 못하는 것이 없었다. 서화며 시며 학식이며 모자란 것이 없다. 게다가 단양이 데리고 다닌 지난 일 년하고도 반, 수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그 외의 잡다한 것들도 많이 알게 된 모양인지 뭘 이야기해도 막힘 없이 술술 나왔다.
밥 할매는 가란의 모습에서 예전의 부엌데기 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부엌데기 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밥 할매는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았 다. 기생은 밥 할매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지 만, 한편으로는 손에 놓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 다. 깊은 애증으로 기생 질을 그만두고서도 이 렇게 기방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던가.
어차피 기생이 되기로 했으면, 옥패를 받았음 싶었다. 옥패. 한때는 밥 할매가 손에 넣었던 그 기패는, 그저 기패라고 하기에 너무도 많은 권리를 담고 있었다. 다른 양인의 여자들처럼 살 수 있는 권리, 자유로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마치 바람을 얹은 기패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한 남자만을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기생으로 있 으면 이 남자 저 남자 손 탈 것이다. 그럴 바에 야 왕의 비호 아래서 하늘을 떠받들고 사는 것 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밥 할매는 때때로 가란을 생각보다 훨씬 아끼 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때까지 가르치고 살피고 관심을 주는 이유 가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밥 할매는…….
“밥 할매.”
“응?”
“이제 쌀쌀하니 안에 들어가 주무세요.”
“난 안 졸았다.”
“눈 감고 계신 거 다 봤어요.”
밥 할매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가란은 아무것 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다시금 거문고를 켰다. 거문고의 듣기 좋은 음색에 밥 할매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는 놀릴 때 마다 바로 반응이 와서 재미있었는데, 요즘 가 란은 오히려 밥 할매를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넉살이 좋아졌다. 밥 할매는 한숨을 쉬 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이러니 저 러니 해도 가란의 거문고 음색은 정말로 듣기 좋았다.
밥 할매는 깜빡 거리는 눈꺼풀이 이내 감겼다 는 것도 몰랐다. 최근에 심해진 기침도 가라앉 아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밥 할매는 어 느덧 잠에 들었다.
가란은 밥 할매가 잠이 들자 거문고의 연주를 멈췄다. 그러고는 주변을 지나다니는 이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한 뒤, 얇은 요를 가져 와 어깨에 둘러 주었다. 밥 할매는 요즘 들어 부쩍 쇠약해진 모습이었다. 일 년 하고도 절반 의 세월 동안 세상을 돌고 온 가란은, 연위 기 방에 돌아오자마자 밥 할매는 제일 먼저 찾았 다. 여전히 괄괄하고 딱 밤이나 놓을 것 같던 밥 할매는, 가란의 예상과 달리 너무도 왜소하 고 늙어 있었다. 목청 크기도 줄어들고 기력이 사라진 밥 할매. 가란은 그에 가슴이 아팠다.
“잠깐 다녀올게요.”
밥 할매의 어깨를 싼 담요를 꼼꼼하게 여민 뒤 가란은 정자에서 자리를 벗어났다.
* * *
“가란입니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고, 가란이 방으로 들 어섰다. 방 안에 들어선 가란은 단양과, 그 곁 에 앉은 한 기생을 보았다. 그 기생은 가란도 익히 아는 이였다. 매월이라는 기명을 쓰는 그 기생은 입이 무겁고 나이를 제법 먹은 이였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어머니.”
매월이 눈치 좋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가란은 매월의 입에서 나오는 호칭을 듣고 놀라고 말 았다.
“지금 자리에서 물러나시게요?”
어머니.
그 호칭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수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에게 허락하는 것이었다. 단양에게 어 머니라는 호칭을 쓰는 이라면, 미래에 이 연위 기방을 이끌 대모(大母)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비록 아직 퇴기가 될 마음은 없다만 훗날을 대비하는 것이 대모의 책임이란다. 왜. 아쉬우냐.”
“무엇이요?”
“어머니라는 호칭을 매월에게 줘서 말이다.”
단양은 말투가 퍽 부드러워졌다. 예전의 엄격 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겨울이 지 나 녹는 얼음처럼 단양은 가란에게 깊은 감정 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매정한 것.”
“큰어머니…….”
“나는 네게서 큰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라는 호칭을 듣고 싶었건만. 무슨 고집에 그리도 거 절을 하는지.”
단양이 혀를 찼다. 가란은 그저 웃고만 있었 다.
가란이 애기기생이 되고 1년이 지났을 때, 단 양은 가란더러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라고 했 다. 그 말은 곧 단양의 진정한 수제자가 되어 기방을 이끌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애기기생들 같아서야 덥석 물을 그 제안을, 가 란은 거절했다. 그 이유를 단양은 알면서도 모 른 척했다.
단양은 코웃음을 쳤다. 하는 수 없다고 했지 만, 단양이 반드시 알려줄 거라는 믿음이 깔린 눈빛이다. 정말이지 예전의 부엌데기가 맞는 가 싶을 정도로 가란은 많이 변해 있었다.
“나도 아는 것은 많지 않다.”
결국 단양은 가란에게 지고 말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밥 할매가 한 때 옥패를 받을 뻔한, 다재다능하고 총기 넘치던 애기기 생이었다는 것이지.”
지금의 밥 할매만 아는 사람들로서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가란은 그 말을 믿었 다. 가란은 밥 할매로부터 걷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가란의 걸음걸이의 기초는 밥할매가 가르쳤다. 우아하게, 학이 걷듯 구름 처럼 가벼운 걸음을 걷던 밥 할매의 뒷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었다. 늙고 추한 모습과 달리 밥 할매의 걸음은 향이 날듯했다.
“지금으로부터 수 십 년 전에 열린 기패 시험 에서는 으뜸 한 명을 가려내지 못했다. 너무도 재기 넘치는 젊은이가 둘이나 되었기 때문이 지. 용호상박(龍虎相搏), 어느 한 명을 떨어뜨 릴 수도 없었다고 한다.”
단양은 자신의 스승이 했던 말을 떠올리려 노 력했다. 꽤 오래 전의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리 려니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 나자 그 이야기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옥패는 하나고, 옥패를 받을 자격의 애기기 생은 둘이었다지. 한 명은 포기해야만 했다. 서로 모르는 이라면 다시 경합이라도 벌이련 만, 둘은 너무도 서로 잘 아는 벗이었어. 경합 을 벌여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결국 그 자리에서,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옥 패를 양보하고 그 자신은 목패를 집어 들었다. 그 사건은 아주 유명해서, 전국에 퍼졌더랬다. 당시 옥패를 양보한 애기기생의 이름은 운월 (雲越).”
가란은 그 기명이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았 다.
“네가 아는 그 밥 할매다.”
당시 밥 할매는 아주 유명했다고 한다. 옥패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목패를 집어 든 것은 무척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벗을 위해 양보한 우정이기에 굉장한 미담이 되었다. 한 동안 운월이라는 기생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 한 듯 바빴다고 한다. 모두가 운월을 보고 싶 어 했고, 멀리서도 운월을 보러 왔었다. 비록 받은 기패가 목패였어도 대우는 옥패를 받은 기생만큼이나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중간에 무슨 사정이 있어, 그 누구보 다 빠르게 퇴기가 되었다지.”
“사정이요?”
“거기까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기구한 사정 이 있었다느니 하는 소리만 들었지. 그래, 궁 금증이 풀렸느냐.”
“덜 풀렸지만 이쯤에서 만족하렵니다.”
“능글맞기는.”
단양이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것이 질책이 아님 을 알기에 가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밥 할매의 유일 한 소원이 옥패 같더구나. 그냥 하나 따주렴.”
“어찌 옥패가 그냥 하나 따는 것이 되겠어요.”
“내 좋지 않은 안목에도 넌 하면 된다. 그렇게 보이는 구나.”
“큰어머니는 점점 밥 할매를 닮아 가시는 것 같아요.”
“무슨 그런 욕이 다 있느냐.”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투덜거리는 것이, 오히 려 더 밥 할매 같았다. 적어도 가란이 부엌데 기였을 적 둘은 그리 친하지 않았다. 한 명은 기방을 이끄는 대모로, 한 명은 부엌살림을 맞 는 사람으로서만 지냈더랬다. 그런데 가란의 존재가 아교가 되어 어느덧 둘은 많이 가까워 졌다. 서로 친하지 않다고 백 날 말 해 봤자, 척 척 맞는 호흡 하며 닮아가는 모습 때문에 믿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어찌되었든 이제 기패 시험도 얼마 남지 않 았구나. 네 재주야 잘 알고 있기에 분발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라.”
“예, 큰어머니.”
“…밥 할매에게 속았지, 속았어.”
아쉽다는 듯 단양은 가란을 다시금 바라보았 다. 가란도 단양도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 다. 그저 한 명은 아쉬움을, 한 명은 미안함을 드러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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