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시인
1968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
2012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 『엄마를 베꼈다』
엄마를 베꼈다
김도연
언젠간 알게 될 것이여
씻지도 않은 씀바귀 뿌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엄니는 알듯 모를 듯 혀를 찼다
그때마다 내 목구멍에도 씀바귀가 뿌리를 내렸지만
파란 대문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나는
씀바귀의 쓴 맛을 알지 못했다
그 후
밤마다 꿈속까지 뻗어 내려온 씀바귀 뿌리가
나를 파란 대문으로 인도했지만
세월의 속살은 아직 부드러웠고
파란 대문은 이미
닿을 수 없는 고향집이 되어 있었다
별을 따고 싶었지만
도시의 별은 너무 높이 떠 있었다
파랑새는 차츰 말을 잃어 갔으며
눈은 점점 깊어만 갔다
결국 나는 내 슬픈 눈망울에 별을 그려 준다는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세월은 저희들끼리만 행복했다
남자의 언약은 언제나 공수표였다
별을 보기 위해선 눈을 감아야 했다
별보다 더 높은 하늘에 파란 대문이 걸려 있었다
세월이 알게 해 준다던 엄니는 그 세월에 막혀
끝내 파란 대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도깨비 바늘만 무더기로 피어
함부로 고향집을 넘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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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서
김도연
기다리면 오는 것이지만 그녀는 오고야 말았다
목련꽃 하얗게 침입한 오늘 아침 이 순간에도
창가에 부딪히는 그 모든 풍광이 지겹지 않다
봄날은 가는 것이고
또 내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한순간 애틋한 문을 열었다가 닫을 것이고
닫힌 문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또 옷깃 여며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슬픔은
서럽다거나 애틋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별서이므로
후회의 밤은 그래서
길다
논산역 귀퉁이 작은 플랫폼 뒤꼍에 엄마는 피어났고 봄꽃처럼 그렇게 떠나보냈었다.
그때 웃으며 붉은 눈시울 꾹꾹 참아가며 등 돌리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며칠 전 우리 집 뜰에 다시 제비꽃이 피었다.
살아낸다는 것은 이 문과 저 문 사이를 부지런히 통과해서 무심히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말자.
엄마를 만나고 엄마를 보내며 사는 일이 슬픔을 비껴서며 외로움을 견디는 나의 별서 아니었던가.
그렇게 엄마는 엄마의 논리로 엄마답게 봄을 건넜고, 나는 참으로 무덤덤하게 엄마를 만나고
보내는 중이라고 애써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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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벌레
김도연
말라가는
고추 속을 들여다보니
붉은 고추보다
더 바싹
말라가고 있는 고추벌레
염천 속에 들어
고추씨만 파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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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덧칠한 슬픔에게
김도연
온몸으로 꽃을 피우다
와르르 억장 무너지는 슬픔의 본성 때문에
먼 산을 향해 입술만 달싹거린다 모두들
이렇게 머물러 있는 이곳
여기는
묵정밭을 닮아 천백 일 일하고도
하루가 지나도록 밭을 갈아야 허공에 헛손질하는 날들을
떠나보낼 수 있다고
깊은 한숨에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찾아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다
별들은 서로의 호칭을 부르다가 서로를 버텨내겠지
밀어내는 슬픔과 밀려오는 슬픔이 자꾸 늘어나는 것을
온전히 누구의 탓으로 돌릴 것인지
떠나갈 것들 앞에 햇살은 앞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질겅질겅
슬픔을 씹어대고 있다
겨울과 가을이 엎치락뒤치락 천일의 시간을 수놓고 있는데
기억을 잊은 파랑새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슬픔 하나를 부리에 물고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지금 당신은
그 먼 곳에서 번쩍
두 손 흔들며 나를 부르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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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게 나이가 들어갈 무렵
김도연
거울 앞에 적막이 앉아 있다
습관처럼 제 몸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다
강아지 코코도, 코코의 그림자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덮어둔 시집도
습관처럼 적막을 닮아간다
그렇게 모두들 아무도 모르게 나이가 들어갈 무렵
꽃들은 참 용감하게도
피었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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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꽃잎이 다 마르기 전에
김도연
이슬방울 하나가 구르고 굴러
무사히 지상에 안착할 때까지
풀잎 하나가 기꺼이 제 몸을 낮춰주던 것처럼
나를 위해 스스로 암흑이 되어버린 그림자가 젖은 풀잎처럼
내 곁에 눕습니다
가벼운 침실에 둘은 너무 무거운데
어쩌자고 달빛은 또 이렇게 무분별하게 번져오는지
어쩌자고 봄날은
아무 대책도 없이 랄랄라 랄랄라 웃고만 있는지
눈 질끈 감고
나를 지탱하는 흔들리는 당신에게 위로도 해보지만
그래요, 그것이 나를 향한 연민이라면 이대로 폭삭
늙어가도 좋아요
주인없는 어둠을 지우며
내 속에 웅크린 나 자신을 향한 눈먼 안부쯤이야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들 어때요
구차한 변명처럼 자장가를 부르던 날들이 랄랄라
늘어가겠지만
뭐, 괜찮아요!
어제의 기억은 내일도 부재중일 테니까요
젖은 풀잎이 다 마르기 전에
나 홀로
어느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 이슬처럼 구르고 구른다 해도
지상의 침실은
언제나
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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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파의 진실
김도연
쪽파를 다듬다가
뽀얀 속살을 보며
우리도 저런 순하고 간지러운 시절 있었지 생각했다
양념을 골고루 섞어가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굴리고 포개지며
쪽파가 파김치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너와 나의 여정도 오랫동안
쓰라리고 아파하며 저려지고 숨죽이며
여기까지 도착했구나 생각했다
시퍼런 숨, 죽이며
붉은 양념들 온몸에 덕지덕지 바르고
얌전히 누운 쪽파의 실체
너를 위해 오른쪽과 왼쪽 자리까지 양보했다면
서로 상처 줄 일 없었을 것을,
이제야 실천에 옮긴다
죽어야 살아나는 쪽파의 진실이
맵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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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은 고개를 북으로 꺾고
김도연
태양의 골목길 끝에서 꽃들은 고개를 북으로 꺾는다
수직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수런거리다가 햇살에 녹은 봄날의 강물은
얼굴 치켜들고
긴 겨울 침묵했던 입술을 닦는다
갑작스런 사월의 강설
모질게도 꽃잎 짓밟아 한동안 소란 피우고난 뒤에서야 바람에
날개 접는 꽃들
꽃들은
죽어서도 꽃무덤 공동체를 이루고
노래는 비에 젖어 시체로 눕는 다는 것을
계절은 알고 있었을까
태양은 골목길 끝자락에 와서 고개를 동남향으로 돌리려다가
떠나기 싫은지 투닥투닥
오가는 빗줄기 사이사이 꽃의 행간을 넘나드는
새들은 하얗게
하얀 기억을 쏟아 붓는다
석 달 열흘간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꿈속의 계단을 찾아 힘겹게
물병자리에 올라온 나는
왜 여기서
홰를 치는 것일까
간결한 눈망울 빤한 거짓말로 밝은 표정을 짓는 데이지 꽃이
파랑새가 되어
날개 파닥이는 봄날
꽃들은 고개를 북으로 꺾고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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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사 능소화
김도연
멀고 먼 별에서 편지가 왔다
꽃에게 다가가려 노력하면 할수록 첫 발자국부터 발걸음 무거워진다
바람은 햇살의 연인 햇살은 능소화 꽃술에 보이지 않는 과녁,
꽃의 심장에 화살을 겨눈다
오래오래 오랜 생각 끝에 간절히 다가서며
무장을 푼 짙은 향기, 능소화는 어느새 입맞춤하려고
눈을 감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늘 언저리 멀리 두고 온 애절한 사연 속으로 별이 지고
별이 진 허공에 몸을 매달아놓은 능소화 입술 붉은 꽃
상처 입은 꽃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붉은 뺨에 키스를 퍼붓는 햇살 속으로 손을 흔든다
그러다가 예고도 없이 툭 떨어지는
붉은 꽃 모가지 기다림의 온도가 꽃 속에 식어가고
낯선 별에서 편지가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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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새를 가르쳐 준 사람
김도연
회화나무 높은 가지에 둥지를 틀었다
아직도 남은 생을 정성껏
보듬기 위해
차가운 부리를 밤새 깃털 속에 파묻었다
따뜻한 숨결로 남아있다고 믿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당신
있고도 없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세상 모든 이들이 몰라봐도 상관은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봄꿈은 야위어가고
눈부신 계절이 환희 속에 시들어 갔었고
혼자 남아 매일 매일 작별을 한다고 해도
당신 곁에 오래 오래
남아있고 싶을 뿐
한 번도 내 것인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내 것이라 착각하며
한 순간 한 순간 내 것으로 품어 안은 시간들이
이번 생에 울다웃다 갔다고 믿고 싶었다
만삭달이 그믐달로 변해갔어도
한 겨울 추위 속에 처음의 새벽 종소리를 기억하며
우리는 한통속 함께 두 눈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누가 파랑새를 훔쳐갔을까’
<출처 : 부흐고비>
첫댓글 김도연의 주옥같은 글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