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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는 이야기들 스크랩 클로드 모네, 화가로 첫 발을 내딛다
붉은달팽이 추천 0 조회 60 11.02.18 14: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클로드 모네, 화가로 첫 발을 내딛다

 

 

 

 

 

마네보다 여덟 살 어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1840년 11월 14일 파리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아버지 아돌프와 어머니 루이스 쥐스틴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파리 9번구 라피트 가 45번지였습니다. 부모 모두 파리에 정착한 2세대 파리인이었습니다. 아돌프는 모네가 다섯 살 때 서북 해안 노르망디의 르아브르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누이 마리 잔 르카드르의 남편이 아돌프를 야채도매업에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르카드르는 선구업에도 관여하고 있었으며 르아브르에 큰 저택을 갖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모네의 <교사 오샤르의 캬리커처 Caricature of His Teacher, Ochard>, 1856-58, 드로잉, 32-24.8cm.

 

066-3

인물 캐리커처가 처음 출현한 건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 이탈리아에서였습니다. 이탈리아어 caricatura는 '부담지우다'라는 뜻의 'caricare'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용어를 카라바조와 더불어 초기 바로크의 거장으로 인정받은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1560-1609)가 붙인 용어로 알려졌습니다. 카라치는 사실적 외양을 유지한 채 얼굴을 동물이나 채소 또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켰으며, 나중에는 정치적 캐리커처 화가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을 창안했습니다.

 

 

 

 

모네는 1851년 4월 1일 르아브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천성적으로 규율이 내 몸에 맞지 않았다. 어렸지만 나는 어떤 규율에도 굽히지 않았다. … 학교는 감옥과도 같았으며 하루 네 시간 수업이었지만 내게는 대단히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학적부에는 “심성이 매우 착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모네는 일찍부터 캐리커처를 그렸고 나폴레옹 시절 궁정화가로 활약한 위대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문하생이었던 장 프랑수아 샤를 오샤르로부터 드로잉을 배웠습니다. 오샤르는 살롱에 초상화와 풍경화를 선보인 적이 있으며 드로잉의 대가로 알려졌습니다. 오샤르로부터 수학한 화가들 가운데 샤를 륄리에는 르아브르 미술학교 책임자가 되었으며 오통 프리에츠와 라울 뒤피가 이 학교 출신입니다.

 

열여섯 살 때 모네가 주로 그린 것이 인물풍자화와 배 그리고 풍경화였던 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부터 야외에 나가 그리기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네가 1900년 프랑수아 티에볼 시송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교과서의 여백에 꽃무늬를 두르고 파란 연습장을 환상적인 장식으로 채웠지. 그리고 선생님들의 얼굴이나 옆모습을 최대한으로 변형해서 그리곤 했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어머니는 모네가 열여섯 살 되던 1857년 1월 28일에 타계했습니다. 회화에 관심이 없는 아버지는 아들의 회화에 대한 집념을 우려했습니다. 따라서 모네는 아버지와 불화했으며 어머니가 타계한 후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모네는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1858년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된 마리 잔 고모는 조카 모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리 잔은 아마추어 화가로 쿠르베의 친구 화가 아르망 고티에의 친구였습니다. 조카가 회화에 재능이 있음을 안 고모는 지붕 밑 다락방을 작업실로 내주고 계속해서 드로잉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며 그림재료를 사주었습니다. 그녀가 아마 모네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아돌프를 설득한 것 같습니다. 아돌프는 모네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되 경제적인 뒷받침은 해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드로잉 솜씨가 훌륭했던 모네는 ‘O. 모네’라고 서명한 풍자화를 문방구, 액자, 철물 등을 파는 상점에 내다 팔기 시작했으며, 친지와 동네의 유지들이 그의 드로잉을 구입했습니다. 그는 20프랑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었는데 훗날 과장해서 말했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초상화를 그렸다면 지금쯤은 백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다!” 드로잉은 표구상 그라비에의 상점 진열장에 전시되었는데, 상점 주인의 옛 동업자 외젠 부댕Eug?ne Lpuis Boudin(1824-98)의 그림과 나란히 전시된 적도 있었습니다. 고향 옹프륄의 풍경에 정이 들어 해변의 풍경화만을 그린 부댕은 주로 북 프랑스의 노르망디나 브르타뉴지방, 네덜란드의 해변을 테마로 삼았습니다.

 

 

 

 

 

외젠 부댕의 <트루빌의 바닷가 La Plage de Trouville>, 1865, 유화, 67.3-104.1cm.

부댕은 자연과 대상을 직접 바라보고 그림을 그렸으므로 자연의 일시적인 현상이 그의 그림에 반영되었으며, 모네는 이러한 점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부댕이 르아브르에서 작업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모네는 그를 따라 바다와 들로 가서 그의 작업을 처음부터 완성될 때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활력과 신선함을 직접 캔버스에 담아야 한다고 한 부댕은 모네에게 “넌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 넌 풍경화를 어떻게 드로잉하고 어떻게 색을 칠하는지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야외에서 이젤을 세우고 자연의 모습을 직접 그리는 건 그 무렵에 막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1840년대부터 물감을 튜브에 넣을 수 있게 되어 물감 운반이 쉬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 고루한 화가들은 야외에서 직접 그리기를 꺼려했습니다. 화실에서 그린 그림과 자연에서 직접 그린 그림은 당연히 비교되었습니다.

 

 

 

 

 

모네의 <루엘 풍경 Landscape at Rouelles>, 1858, 유화.

15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풍경화는 독립적인 회화 장르가 아니었습니다. 풍경은 인물화의 배경이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 네덜란드에서 많은 화가들이 자연의 빛과 대기의 작용에 흥미를 가지고 풍경을 모티프로 그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과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82)이 풍경화를 그렸으며, 로랭은 아침과 해질녘의 풍경을 역광으로 포착했습니다.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며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로 추앙받는 푸생은 로마에서 활약하면서 상상의 고대 풍경 속에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적 인물을 등장시킨 독창적인 작품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영국의 컨스터블이 네덜란드 화파의 풍경화를 그리면서 야외에 나가 자연을 직접 묘사한 사생(寫生)의 태도는 프랑스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터너도 네덜란드 화파의 영향과 더불어서 클로드 로랭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대상을 명암으로 보는 관념에서 벗어나 대기(大氣)를 그리는 풍경화를 확립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밀레와 바르비종파(派)가 자연주의를 주창했으며,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풍경화는 회화의 중요한 장르가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부댕을 따라다니던 모네는 부댕의 작업에 호기심을 갖고 그의 화실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멀리까지 가서 함께 자연경관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네는 자연히 스승의 화풍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네의 초기 그림에서 부댕의 영향을 발견하기란 쉽습니다.

 

 

모네는 여든두 살 때인 1922년에 회상했습니다.

 

 

그 상점에 풍자화를 전시하곤 했는데, 그 덕택으로 르아브르에서 다소나마 유명해졌으며 변변치는 못하더라도 수입이 생겼다. 게다가 외젠 부댕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때 서른 살 안팎이던 그는 막 화가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 부댕의 제의를 받아 나는 그와 함께 야외로 가서 작업했다. 물감 한 통을 사들고 둘이서 루엘(르아브르 동북쪽)까지 갔다. … 그는 이젤을 세운 후 작업에 몰두했다. … 그제서야 베일이 걷히듯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화가로서의 나의 운명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이제 내가 한 사람의 화가가 되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부댕의 덕분일 것이다. … 그는 너무도 자상하게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으며 자연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의 회상대로 모네는 부댕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며 1858년에 그린 <루엘 풍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야외에서 그린 첫 풍경화였던 이 그림을 그해 8월과 9월 르아브르 전시회에서 소개했습니다. 모네를 가리켜서 “하늘 묘사의 왕”이라고 극찬한 부댕은 모네에게 자연을 탐구할 것을 누누이 가르쳤습니다. 모네는 부댕을 통해서 눈이 점차 열리며 자연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부댕의 화법을 답습했는지는 평론가 귀스타브 제프루아Gustav Geffroy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전 회화에 접근하는 부댕의 진실한 방법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가히 순간적이라고 말할 만한 날쌘 스케치 솜씨에 매료되었습니다.”(1920.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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