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휘 기픈 남간 (뿌리 깊은 나무)
늘푸른언덕
취미 삼아 블로그(코칭으로 아름다운 동행)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6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에는 일기 쓰듯이 기록한 글들을 가까운 지인들과 SNS로 안부 인사 대신 나누다 보니 1년쯤 지나자 책 한 권을 훌쩍 넘은 분량이 됩니다. 그런 분량의 글을 처남이 일일이 정성스럽게 프린트한 후 책으로 편집하여 저에게 깜짝 선물을 합니다.
세상에 내놓기 부끄러워 한 동안 소장하다가 2017년 어느 가을날부터 저장해 둔 글들이 어느 순간 사라질 지 모르니 기록으로 남겨두자고 찾은 것이 블로그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블로그가 벌써 6년이란 연륜을 지나고 있으니 지금까지 제가 한 일 들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공들인 작업인 듯합니다.
얼마 전엔 제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아냈는지 궁금하여 옛날 블로그를 탐색해 보던 중 블로그 상단에서 아주 오래된 블로그 글이 눈이 띈 것입니다.
그 글들은 제가 10여년 전 독일에서 근무할 때 블로그가 뭔지도 모르고 습작하였던 글들이었습니다.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진 글이 마치 아주 낡고 오래된 일기장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발동하여 그 글들을 클릭해 봅니다.
총 17개의 글들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 글들은 제가 2010년 독일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새벽 기도를 마치고 회사에 출근하여 그 날 새벽 기도에서 얻은 묵상들을 글로 담아낸 것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 글들을 들여다보며 10여 년 전의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보는 시간이 됩니다.
17개의 글 중에 제일 시선이 머문 글 하나에 담긴 추억거리 하나를 찾아냅니다.
블로그 글 제목은 [용비어천가 2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뮐쌔
곶됴코 여름 하나니...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인용하고 새벽 기도 중에 이 글이 연상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이 묵상된 것은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쓰러지듯이 나의 신앙도 뿌리가 깊지 못해 늘 불안하다는 회개와 반성의 시간을 가진 듯 합니다.
그리고 그해 독일과 한국의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실시된 묵향전에 초대되는 영광을 얻게 되어 서예 작품 하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 때 이 용비어천가 2장을 서예로 출품하여 좋은 평가를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이 글을 열심히 써 내려가면서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람으로 살기를 다짐했습니다.
조선시대 시인 고산 윤선도가 지은 유명한 연시조 중에서 ‘오우가(五友歌)’란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평생에 가까이 할 벗의 대상을 자연에서 찾아 총 6수로 된 연시조의 서장(序章)에서 그 대상을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이라고 소개한 후 이어지는 각 수에서 그 다섯 벗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 겸허하고 곧은 절개를 칭송하며 소개한 대나무(죽)에 대하여 노래하였는데 현대국문으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킨 것이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계절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윤선도의 오우가 중에서]
흔히 대나무는 ‘허심직절(虛心直節)’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즉 마음은 겸손하면서 절개는 곧은 사람을 이를 때 쓰는 말입니다.
대나무는 비록 가늘게 보이지만 절대 꺾임을 용납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곧고 바르게 쭉쭉 자랍니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나무는 땅 밖으로 싹을 틔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먼저 땅 속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대나무 씨앗을 심어 놓으면 금방 촉이 자라지 않습니다. 1년, 2년, 3년, 4년... 오래오래 기다려 5년이나 되어서야 비로소 땅 밖으로 얼굴을 내밉니다. 죽순을 틔우기 전 4년 동안 그 씨앗은 땅속에서 먼저 자라 뿌리를 수십 미터까지 뻗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땅 속에서 오랜 세월 뿌리를 사방 팔 방으로 쭉쭉 뻗기 때문에 웬만한 태풍에도 강하게 견디어 냅니다.
그렇게 얼굴을 겉으로 내민 대나무는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하는데 그 자라나는 속도가 어마어마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루에 보통 30~65cm씩 자랍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석 달이면 16미터에서 26미터를 자랍니다.
겉으로는 다른 나무보다 가느다랗고 약해 보이나 뿌리를 깊이 내렸기에 가장 강단 있는 나무로서 가뭄에도 잘 견디고 더위는 물론 추위를 거뜬히 이겨냅니다.
대나무의 이런 겸손하면서 절개 있는 모습을 일찍이 고산 윤선도가 칭송하며 노래한 것입니다.
대나무의 그 매력의 비밀은 바로 깊은 뿌리에 있습니다.
지난 주엔 우연히 듣게 된 가까운 친구의 슬픈 소식에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우연히 만나 가끔 연락하며 지내던 친구가 최근 건강검진을 받는 중에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얼마나 충격이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뿌리가 깊은 친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동안 살아 온 친구의 삶을 보면 많은 시련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 시련 속에서 많이 단단해진 듯 합니다. 사람은 누구가 살다 보면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 시련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 결과도 많이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2010년도에 용비어천가 2장의 내용을 묵상하며 돌아보게 된 신앙의 깊이에 대하여 1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꺼내놓고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나의 신앙은 얼마나 성장을 했을까?
혹시 그 때의 신앙이 더 자라지 못하고 정체 상태이거나 오히려 퇴보되지나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깊이를 표현한 흥미 있는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오래도록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공감이 가는 말로 남아 있습니다.
흔히 신앙의 깊이는 우리의 몸이 마치 물속에 잠기는 깊이와 비례한다는 영적 이론입니다.
즉 나의 몸을 적시고 있는 물이 겨우 나의 발목을 덮고 있을 때는 나의 몸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어서 내 마음대로 천방지축 행동한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물이 차올라 허리쯤까지 차오르게 되면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나의 몸을 자유롭게 쓸 수가 없게 되면서 나의 몸을 물의 흐름에 맡기게 되는 상태에 이릅니다. 때론 그 깊이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기도 하는 그런 시기를 겪게 됩니다.
그 단계를 박차고 빠져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더 깊이 물이 차올라 나의 턱 밑까지 차오르게 되면 그때는 내가 나의 몸을 거의 가눌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전적으로 나의 몸을 물에 맡겨야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 시간이 바로 물의 힘, 성령에 이끌리는 영적 단계라는 설명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이 이야기가 오늘 묵상하게 되는 뿌리 깊은 나무와 영적으로 통하는 듯 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불같이 일어나는 영적 공동체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쌓인 믿음의 연륜과 신앙의 뿌리가 깊어 세상의 풍파나 시련에 크게 흔들림이 없어 보입니다. 그것이 이 신앙공동체의 연륜이고 신앙의 저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지난 코로나19의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19가 세상의 많은 부분을 마비시키고 단절시키고 변화시켰지만 그 가운에서도 오랜 기간에 걸쳐 깊게 뿌리내린 신앙이 크게 동요됨 없이 의연하게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이겨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이렇게 깊이 뿌리 내린 신앙의 바탕 위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뜨거운 성령의 능력이 이 신앙의 공동체 안에 불같이 일어나기를 간구하며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46편 1절~3절
첫댓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뿌리 깊은 사람은 시련에 흔들리지 않듯
뿌리 깊은 신앙은 미혹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늘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