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名品)은 럭셔리(luxury)가 아니다. ‘무슨 소리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루이비통, 구찌, 샤넬같이 고가의 해외 패션 브랜드 제품을 가리켜 매체에서,
백화점에서, 길거리에서 ‘명품’이라 부르는 걸 당연시해왔으니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선 ‘명품’을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그런 작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디에도 ‘비싼’ ‘해외’라는 수식은 없다.
영어 단어 ‘럭셔리’의 사전적 정의는 ‘호사스러운, 쾌락과 만족을 주는 생활.
그리고 필수품보다는 사치(indulgence)를 위한 것’으로 돼 있다.
럭셔리 굿즈(luxury goods)는 ‘필요한 것은 아닌데 소득이 오르는 것과 비교해
사고자 하는 욕망이 큰 제품들, 수요의 소득탄력성(Income elasticity of demand)이
큰 제품’을 말한다.
이렇듯 분명 명품과 럭셔리는 결이 다르다. 등치(等値)가 아닌 두 단어이지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선 ‘명품=럭셔리 해외 브랜드’라는 공식이 생겼다.
‘명품’이 ‘고가 제품’이란 인식이 생기면서 마케팅 차원에서 명품이 남발됐다.
아파트, 신도시, 감귤, 심지어 몸매 얼굴 같은 외모까지 붙이는 수식어가 돼 버렸다.
그러나 최근 명품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더 테이블’팀이 20대 이상 성인 여성 314명을 대상으로 명품에 대한 인식과
소비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 ‘명품’은 물질적 소비재라기보다는
‘정신적 만족’으로 풀이됐다.
응답자들은 ‘진짜 명품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서 ‘가격이 아닌 인격, 품격’ ‘개성’
‘가치’ ‘나만을 위한 단 하나’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것’ ‘지적 재산’ 등이라 답했다.
“‘똥’가방, 로고만 봐도 지겨워… 손 떨면서 산 명품백, 장롱에서 낮잠”
명품은 언제부터 럭셔리의 대체어가 됐나
해외 럭셔리(luxury)가 명품(名品)이란 단어로 통상 불리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
1920년부터 현재까지 조선일보 기사를 검색한 결과, ‘명품’이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기사는 1964년 6월 9일 ‘명품’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독주회 관련 기사였다.
그 이후 1974년까지 10년간 한 건도 없다가 1975년부터 1993년까지 연간 10건 정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때 쓰인 명품은 ‘백자·청자 같은 문화재급 도자기’,
‘빈센트 반 고흐 등 국내외 유명 회화 작품’에 붙는 말이었다.
명품의 사전적 의미대로 ‘뛰어난 작품’, 영어로 표현하면
‘masterpiece’를 명품으로 지칭한 것이다.
명품이 해외 고가 브랜드를 지칭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본격적인
수입 자유화와 경제성장이 계속되고 해외 브랜드가 쏟아질 무렵으로 보인다.
영어의 ‘럭셔리 굿즈(luxury goods)’는 사전적인 의미대로라면
‘사치품’ ‘호화품’이 돼야 했었지만 업체들의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
선택된 단어가 ‘명품’이었다.
198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에 버버리 등 해외 브랜드가 속속 입점한 이후,
1990년 9월엔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이 들어섰다.
1991년 루이뷔통코리아·샤넬코리아, 1994년 프라다코리아 등이
국내에 둥지를 틀면서 이 브랜드들의 광고·홍보 문구는 어느새 ‘명품’으로 통일됐다.
당시 백화점에서 해외 수입 파트를 담당했던 A씨는 “럭셔리를 적확하게 표현할 단어를
찾기가 어려워 일본에서 어떻게 쓰는지도 알아봤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어 고심했었다”고
회상했다. 일본에선 럭셔리를 ‘브란도(ブランド·브랜드)’라고 부른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책 ‘럭셔리코리아’에서 “사치품이라는 말이 주는
거부감을 줄이고 소비자들의 선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명품이라는 단어를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1991년 루이뷔통코리아가 한국에 진출한 뒤 국내 첫 홍보 담당 매니저였던
손주연 한피알 이사는 “당시 원문의 ‘럭셔리’를 국내 소비자들에게 쉽게 알릴 수 있는
단어를 찾다가 일부 언론에서 해외 브랜드 제품에 명품을 붙이는 걸 보고
공식 보도자료에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이라 적었다”고 했다.
그는 “루이뷔통 그룹(LV MH)이 각종 백화점에 매장을 내고
사세를 확장하면서 명품이란 단어로 인식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덧붙였다.
‘명품’의 범람, “흔해져서 오히려 촌스러워”
1990년대부터 본격 상륙한 럭셔리 브랜드(통상적으로 ‘명품’이라 번역된) 제품은
매년 판매율이 20~30%씩 꾸준히 성장하며 한국을 ‘세계 8위 명품 소비국’
(2013년·컨설팅업체 베인&컴퍼니 조사)으로 올려놓았다. 너도나도 구매하다 보니
2000년대 중반엔 ‘3초 백’이란 달갑지 않은 별칭을 갖게 된 가방(루이뷔통 ‘스피디 백’)
까지 등장했다. 길가에서 3초에 한 번씩 볼 수 있는 핸드백이라는 뜻이다.
‘명품’이 일반화되면서 고가(高價) 브랜드가 전략적으로 내세우던 희소성은 희미해지고,
되레 ‘식상하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20~40대 여성들이 많이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
‘82쿡닷컴’ ‘맘스홀릭’ ‘레몬테라스’ 등에선
“10년 전에 비해 명품백 열풍이 사라진 것 같다”
“명품백 과연 필요한가” 등에 대한 논의가 여럿 올라와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줌마렐라’가 지난 2월 ‘명품 가방을 사야 하냐’는
자체 설문을 한 결과,
‘하나쯤 있으면 좋다’가 48%를 기록하긴 했지만 ‘없어도 된다’(16%),
‘가방 따위 신경 안 쓴다’(17%)는 의견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 사이트들에 올라온 댓글엔 ‘명품’에 대한 달라진 시선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명품이 유행 더 탄다. ‘똥’ 가방(루이뷔통을 가리키는 말) 같은 것,
이젠 브랜드 로고 무늬만 봐도 지겹다. ‘
딱’ 티 나는 브랜드 보여주는 게 촌스럽고 천박하단 것도 알게 됐다.”
“몇백만원짜리를 사고 ‘대를 이어 쓴다’며 자기 합리화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몇백짜리가 시즌별 나라별로 나오니 더는 가치가 없어 보였다.
한두 해만 지나도 유행 뒤떨어진 구닥다리로 느껴질 뿐이다.”
“결혼식엔 샤넬 백이란 공식이 언제적 얘긴가. 촌스럽고 유행 지난 느낌이다.”
“손 떨면서 사봤지만, 어디 들고 나갈 데도 없어 장롱에서 썩고 있는 걸 보니
그 돈으로 다른 걸 할걸 하는 후회가 든다.”
“싼 가격에 품질 좋은 게 많아 요즘엔 선택 폭이 넓어졌다.
에코백을 들어도 멋스럽고 흔한 말로 ‘저렴이’들도 디자인과 재질이 좋다.”
이런 트렌드는 ‘숫자’로도 드러난다.
최근 들어 일부 고가 브랜드는 판매가 줄어 전년 대비 마이너스 신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안 사고 덜 산다는 얘기다. 명품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의 소비 풍조가 바뀌었다고
본사에 보고서를 내고 대책회의를 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과시적 소비가 부끄럽다… ‘럭셔리 셰임(luxury shame)
명품 선호 현상이 한풀 꺾인 이유로는 소비자들의 높아진 눈높이,
해외여행 증가로 현지 브랜드 노출 증가, 국내 제품 품질 향상으로
늘어난 선택지 등이 꼽힌다.
여기에 장기 불황으로 ‘실속형 소비’가 늘면서 ‘가치’를 중시하는
흐름이 생겨난 것도 명품 소비 패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유럽과 미국 등에선 이미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과시적 소비를 부끄러워하는
‘럭셔리 셰임(luxury shame)’ 현상이 일기도 했다.
“지갑 한 번 더 쳐다보고 손 떨면서” 산다던 해외 고가 브랜드 제품도
최근 ‘빌려 쓰는’ 시대가 됐다.
패션회사 마케팅 팀장인 남윤주씨는
“너도나도 ‘우리가 명품’이라고 들고 나오니 명품이란 단어를 들어도
솔깃하지 않게 됐다”며 “차라리 제품의 철학이 뚜렷하고
나만의 개성을 살려주는 제품에 눈을 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럭셔리, 소유에서 정신적 만족으로
미국의 브랜딩 전문가 마틴 린드스트롬은 저서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에서
“고가 제품을 사는 데 빠져드는 건 자존감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며,
불안감의 표시”라고 지적했다. 자신보다는 물건을 통해 존재감을 나타내려 한다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풍토가 고가 제품 소비를 조장한다는 논리다.
한 수입 의류 대표는 “우리나라는 공식적인 자리뿐만 아니라 조찬 모임, 동창회,
계모임 같은 사적인 모임에서도 남의 눈치를 신경 쓰는 분위기라
명품을 필요 이상 사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최근 라이프 스타일의 가치가 ‘물질적인 소비’에서 여행, 문화생활 등
‘경험’으로 이동하면서 명품의 개념이 ‘소유’에서 ‘누림’으로 바뀌고 있다.
‘레옹’ ‘셀레브리티’ 매거진 편집장 출신인 신동선 YG케이플러스 이사는
“과거엔 ‘유행’을 좇느라 구분되지 않는 모습이 많았다면 이젠 남과 다름을
보여주는 ‘개성 제일주의’가 나를 드러내는 최고의 수단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패션 유통이 다양해진 것도 명품 일변도의 소비 풍토를 바꾸고 있다.
컨설턴트 출신의 한 회사 대표는 “개성으로 무장한 크리에이터들의 독립 브랜드,
부담되지 않는 가격대 안에서도 스토리를 담은 디자인 제품이 많아졌다”며
“라이프 스타일이 바뀌고 온라인·프리마켓 등으로 유통 채널이
다양해져 인식이 변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확산하면서 자고 일어나면 새 브랜드가 뜨고 진다.
브랜드 생명력이 확연히 줄었다. 가치의 무게중심도 이미 이동했다.
럭셔리가 ‘명품’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호시절은 분명 저물고 있다.
100만원 써야 한다면?… “여행” 62% “명품” 19%
명품 브랜드 성장률이 예년 같지 않고, 명품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더 테이블팀이 지난달 29일부터 31일까지 사흘간 20대 이상 성인 여성 314명에게
‘명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란 제목의 설문을 실시한 결과,
명품을 사는 빈도와 관심이 과거보다 확실히 준 것으로 나타났다.
1년간 명품을 하나도 안 산 사람이 50.6%
특히 눈에 띄는 건 ‘지난 1년간 명품을 단 하나도 사지 않았다’는 답변이
50.6%에 이른다는 것이다. 과거 ‘명품계’까지 들어가며 명품 소비에 열을
올리는 소비자 행태가 사회현상으로 떠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다.
‘거리에서 명품백을 든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묻는 답변에는 ‘관심 없다’가
39.5%나 차지했다. ‘고급스러워 보인다’(25.8%) ‘나도 사고 싶다’(11.5%)는
긍정적인 답변도 37.3%였지만 ‘개성 없어 보인다’(12.4%) ‘짝퉁 의심’(10.8%) 등
부정적인 시각도 23.2%로 조사됐다.
‘100만원을 써야 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복수 응답)라는 질문에선
삶의 가치 변화가 또렷이 보였다. ‘여행을 간다’가 61.8%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공연 등 문화생활에 투자한다’가 22.6%로 다음을 차지했다.
‘명품 가방이나 옷을 산다’는 답은 19.1%였다.
유형적인 소비보다는 무형적 만족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는 얘기다.
인격, 철학, 가치, 개성, 취향… 명품의 잣대가 바뀌다
“진정한 명품은 나 자신(사람)이 명품이 되는 것”
“내 가치가 올라가면 굳이 들지 않아도 되는 것” “인간이 명품이면 뭐든 빛난다!”
“나의 지적(知的) 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 품목” “나만의 프라이드”
“나의 이야기가 담긴 것” “내가 소유했기 때문에 가치가 더 있어 보이는 물건”
“나와 어울리는 품위”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내 취향에 맞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게 다 명품이다” “세상에 없는 나를 위한 단 하나”
“닳도록 써도 애착이 가는 내 손때 묻은 소장품” “시간, 여유, 센스와 격”….
주관식으로 ‘진정한 명품’에 대한 정의를 묻는 말에 나온 답들이다.
‘가치’ ‘인격’ ‘독창성’ ‘개성’ 등의 단어가 주요 키워드였다.
가격을 명품의 잣대로 보던 경향도 바뀌었다.
“굳이 가격이 비싸지 않아도 의미 있는 것”
“철학 있는 디자인과 합리적인 가격대의 내구성”
“내 처지에 맞는 것”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무조건 비싼 물건보다는 애정을 가지고 아끼는 물건”
“가격을 떠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물건”
“명품이든 시장표든 뭘 걸쳐도 빛이 나는 센스” 등의 답변이 나왔다.
마케팅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제품 품질과
기업 철학에 좀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미는 소비자도 늘었다.
명품에 대해
“나만의 철학 또는 신념을 유형의 물질에 담아내는 것”
“역사와 전통이 있고 현재와 공감할 수 있는 것”
“내 눈에 아름다운 제품과 기업 윤리가 바른 것”
“사용자를 어디까지 생각하고 만들었나.
디테일이 얼마나 꼼꼼하게 살아있나 알 수 있는 것”
“쓸수록 자랑스러워지는 것” 등이란 답이 이를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