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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구석 모스크바>
- 모스크바 공국 초대 대공 다닐을 묘사한 그림 -
모스크바는 1147년에 건설되었지만 아직까지는 블라디미르 공국에 속해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이 곳은 정말로 작았고, 중요하지 않은 소도시였다. 당시 블라디미르 공국에서 중요한 도시는 수도 블라디미르, 수즈달, 로스토프 등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1263년 죽을 때 모스크바는 당시 겨우 3살이었던 막내 다닐에게 상속되었다. 그나마도 다닐이 너무 어렸던 관계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동생이자 그의 뒤를 이어 블라디미르 공국의 대공이 된(1) 야로슬라프가 보낸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이후 성년이 된 그는 모스크바 통치권을 회수했으며, 형인 드미트리와 안드레이가 노브고로드 및 블라디미르를 두고 다툴때 개입하기도 했다. 또한 리투아니아의 대공 다우만타스(2)가 1285년 트베르를 침공하자, 트베르를 구원하고 다우만타스를 잡아죽였다고도 전해진다. 형인 드미트리가 1294년 죽자 그는 친척인 트베르 공 미하일과 동맹을 맺고 안드레이에 대항했다. 그러던 1296년 라쟌 공국의 공작 야로슬라프가 킵차크 칸국을 선동, 지원을 받아낸 후 모스크바를 침공했다. 다닐은 페레야슬라브 근교에서 이들을 패퇴시켰는데 러시아인들이 몽골인들을 상대로 거둔 첫번째 승리였다.
- "확실히 모스크바는 아직 너무 작고 초라하구나..." -
이후 1300년 그는 야로슬라프의 뒤를 이어 라쟌의 공작이 된 콘스탄틴을 포로로 잡았다. 콘스탄틴은 풀려나기 위해 라쟌 공국의 영토였던 콜롬냐를 모스크바에 넘겨주었다. 2년 후 페레야슬라브 공 이반이 후계자 없이 죽자 다닐은 페레야슬라브도 집어삼켰다. 그는 1303년에 죽었는데 죽기 직전 자신의 뜻에 따라 수도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소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모스크바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는 1652년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된다.
<떠오르는 신성>
- "아놔 즉위하자마자 이게 뭔 일이야." -
그가 죽은 뒤 장남 유리가 모스크바 공작이 되었다. 그는 먼저 블라디미르 대공이 된 삼촌 안드레이로부터 페레야슬라브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가 죽자 그는 블라디미르 대공이 되기 위해 아버지와 동맹을 맺었던 트베르 공 미하일과 다투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미하일은 군대를 동원, 모스크바를 포위하여 유리의 발을 묶어놓았다. 그 후 미하일은 사라이로 가 톡타이 칸에게서 블라디미르 대공의 자리를 인정받았다.
미하일은 이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 그는 아버지가 포로로 잡았던 콘스탄틴을 죽이고, 콜롬냐를 정식으로 합병했다. 또한 스몰렌스크 공국을 공격, 모자이스크를 점령하였다. 그는 트베르에 대항할 생각을 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1314년에 노브고로드, 러시아 총대주교와 동맹을 맺고 트베르에 대항하려고 했다.
이후 우즈베크 칸이 집권하자 그는 1315년에 사라이로 찾아가 2년이나 머무르며 우즈베크 칸의 호의를 얻으려고 애썼다. 우즈베크칸은 그를 마음에 들어해, 미하일을 블라디미르 대공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그를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앉혔다. 거기다 자신의 여동생 콘차카를 유리의 아내로 주었다. 킵차크 칸국의 지원을 얻어낸 유리는 몽골군대와 함께 내친김에 트베르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미하일은 트베르 근처 보르텐보에서 유리의 군대를 제압하고, 유리의 동생 보리스, 그리고 아내 콘차카를 포로로 잡았다. 유리는 노브고로드로 도주한 후 미하일에게 평화를 구걸해야 했다.
- "니 놈이 내 여동생을 죽였다고. 저놈의 목을 쳐라!" "잠깐... 이건 모함이야!" -
근데 대반전이 벌어졌다. 콘차카가 죽은 것이다. 유리는 평화제의를 거두고, 우즈베크 칸에게 콘차카가 미하일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미하일은 자신이 사라이에 반항할 뜻은 없었다는 의미로 포로로 잡았던 몽골인 장군 카브가디를 풀어주었지만 카브가디는 사라이에서 유리의 말이 옳다고 증언했다. 결국 미하일은 사라이로 압송되어 1318년 11월 22일 처형된다.
이런 일들을 겪은 후 1319년, 유리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그는 러시아 전국의 세금을 거둘 권리를 얻어낸 상태였다. 그는 이후 노브고로드 군대를 이끌고 카렐리야(3) 일대에서 스웨덴과 싸우다가 1323년 오레크호보(혹은 뇌테보리) 조약을 맺어 노브고로드와 스웨덴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미하일의 아들 드미트리가 1325년 유리가 공물들을 빼돌린다고 사라이에 고발을 했고, 그는 사라이로 소환되었다. 하지만 그는 재판을 받기 전 드미트리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실은 곧 들통났고 8달 후 드미트리도 처형되었다.
<돈주머니 이반>
- "징수하자 징수하자. 오늘도 밝은 모스크바의 하늘" -
유리가 죽자 그의 동생 이반이 모스크바 공이 되었다. 그는 우즈베크 칸을 구워삶아 1328년 블라디미르 공이 됬으며, 동시에 전 러시아 공국들의 공물들을 수취할 권리를 얻었다. 킵차크 칸국의 조세 징수인이 된 것이다.
- 이반 이전까지의 세금 징수 방식. 다루가치가 일일이 방문하고 다녔다. -
이전까지 킵차크 칸국은 잠시 유리에게 징수권을 주었을 때를 빼고는 몽골인 관리, 한국인들도 어느정도 들어봤을 다루가치라 불리는 존재들을 통해 공물들을 수취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항이 끊이지 않았기에(4)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할 러시아인을 조세 징수자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한편 1325년 러시아 총대주교 표트르가 모스크바에 있다가 병사했는데(5) 이를 계기로 이반은 같은 해 후임 총대주교 테오그노스투스를 모스크바로 모셔왔다. 모스크바가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 "땅은 이렇게 모으는 것이여~" -
이반 1세는 이를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킵차크 칸국이 요구한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킵차크 칸국에는 그들이 요구한 만큼의 돈을 바쳤다. 당연히 나머지는 이반 1세의 소유가 되었다. 이반 1세는 이를 바탕으로 국력을 키우고, 부를 쌓으며 돈놀이를 시작했다.
이 무렵 러시아는 수많은 공국들이 난립한 상태였다. 가장 강하고, 러시아의 대표 격이라는 블라디미르 공국만 해도 잇따른 분할상속으로 블라디미르 공국 안에만 모스크바, 트베르, 수즈달을 비롯 수많은 공국들이 난립해있었다. 이들 중에는 가난한 공작들도 많았다. 이들 상당수가 이반에게 돈을 빌려야 했는데 당연히 갚을 능력이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땅은 이반에게 압류되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모스크바가 강해지면서 일부 도시들이 자발적으로 모스크바에 투항하기도 했다.
덕분에 이반은 칼리타, 즉 돈주머니 이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만 이 돈주머니 이반에는 다른 설이 있는데 그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서 빈민들에게 많이 베풀어서 돈주머니 이반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어찌 되었든 이반은 당대 러시아의 유력한 제후로 떠오를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블라디미르 대공의 직위도 유지했고, 그 자리를 계속 자기 후손들에게 넘겨줄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영광을 향하여>
- "아놔. 대공 되려면 사라이 까지의 달리기 경주랑 아부 경쟁을 해야 된다고?!!" -
1340년 이반 1세가 죽었다. 후계 구도는 아직 불명확한 상태였다. 니즈니 노브고로드에 있던 장남 시메온, 그리고 그의 동생들인 이반, 안드레이, 그리고 트베르 공 콘스탄틴, 수즈달의 콘스탄틴은 모두 사라이로 달려갔고, 우즈베크 칸에게 자신들이 모스크바의 계승권과 블라디미르 대공으로써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계승 분쟁은 시메온이 칸의 측근에게 뇌물을 먹인 덕에 시메온의 승리로 끝났다.
시메온은 즉위 즉후 바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인 토로츠크의 세금 징수권을 주장했다.(6) 토로츠크의 보야르들은 징수원을 가두었지만, 이에 대한 모스크바의 응답은 전쟁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토로츠크에서 민란이 일어나 보야르들이 쫓겨나고 반란군은 시메온에게 토로츠크를 바쳤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이를 인정해야 했다.
- "매부. 순순히 말로 할 때 땅 내놓으슈." "야 이 리투아니아 놈들아. 사위 땅 빼앗는게 니들 법도냐?!!" -
그리고 이듬해 알기르다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이 모자이스크를 공성했다가 게디니마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물러났다. 참고로 황당한 건 시메온은 게디니마스의 딸과 1333년에 결혼했다는 것이었다.(7) 따라서 장인이 사위를 공격하고 그걸 이끈 건 처남이라는 소리가 되는 셈이다.
- "저녀석들 믿지 말라고"? 하긴 사위도 거리낌 없이 공격하는 놈들은 믿을게 못 되지." -
처가의 사위 공격에 경각심을 느낀 걸까. 시메온은 킵차크 칸국의 쟈니베크 칸에게 1347년 리투아니아가 사신을 보내자 쟈니베크에게 리투아니아를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쟈니베크는 리투아니아 사절단을 체포해 시메온에게 넘겼다. 시메온은 알기르다스(8)와 협상을 벌여, 사절단을 석방시키고, 대신 알기르다스가 트베르의 율리아나와 결혼하게 했다. 아내의 죽음으로 끊긴 연줄을 다시 회복해보려는 것이었다. 이는 종교법 위반이었지만 총대주교의 승인을 받는데 성공했다. 단 정황상 야우누티스를 모스크바가 잡아놓는다는 전제가 붙었던 것 같다.
한편 같은 해 시메온에게 노브고로드의 구원 요청 사절단이 왔다. 그들은 스웨덴과 리투아니아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줄 군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무시되었다. 이후 1351년 그는 다시 한번 알기르다스와 스몰렌스크 공국에 속한 몇몇 마을들의 소유권을 두고 두고 충돌했는데, 알기르다스가 이상하게 소극적으로 나온 덕에 쉽게 분쟁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중세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흑사병을 묘사한 중세의 판화. 참고로 이 그림의 제목은 죽음의 춤이라고 한다. -
하지만 이것이 시메온의 마지막 대외 활동이었다. 당시 유럽을 휩쓸던 흑사병이 1353년 모스크바를 덮쳤다. 흑사병은 모스크바를 황폐화시켰다.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죽었고, 시메온의 두 아들들도 죽더니 곧 시메온도 흑사병에 걸려 결국 죽고 말았다. 그의 후계는 동생 이반이 잇게 되었다.
(1) 단 수도는 블라디미르가 아닌 트베르였다.
(2) 여기서의 다우만타스는 프스코프의 다우만타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워낙 기록이 부족한데다 당시 리투아니아가 혼란스러웠기에 그가 진짜 대공이었는지도 의심받고 있다.
(3) 핀란드와 러시아 국경지대. 스웨덴과 노브고로드의 분쟁지역이었으며 훗날에는 핀란드와 러시아(소련)의 분쟁지역이 된다.
(4) 당장 1327년 트베르가 다루가치들을 죽이는 등 반항을 일삼아 짓밟아야 했었다.
(5) 일설에 의하면 표트르는 죽어가면서 모스크바를 축복했다고 한다.
(6) 1335년 리투아니아의 대공 게디니마스가 토로츠크를 침공할 때 구원해준게 명분이 된 게 아닌가 싶다.
(7) 폴란드, 튜튼기사단, 몽골 등에 대항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와 러시아는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1250년대 경부터 활발히 통혼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교회를 믿는 리투아니아 대공이 출현한 적도 있었으며, 프스코프의 다우만타스처럼 아예 러시아로 귀화한 인물도 있었다.
(8) 막내 동생 야우누티스가 킵차크 칸국에 간 사이 그를 몰아내고 대공이 된 상태였다. 야우누티스는 사라이 궁정에 감금됬다가 매부 시메온의 도움으로 석방, 정교회로 개종한 상태였다. 다만 이 해 시메온의 아내가 죽는 바람에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첫댓글 흠 러시아의 공민왕이 이제 슬슬나올때가~ ㅋ
드미트리 돈스코이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