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 잘 쇠셨으리라 믿습니다.-
추석은 뭣 하는 날이지?
서울 사는 초등 2년생 손녀 :
'할아버지 집에 와서 함께 맛있는 거
먹는 날이요.'
서울 사는 절친이 내외 단둘이서
부모님 성묘한 사진을 찍어
추석 연휴 7일 일정으로 뉴욕 여행 중인
의사 외동 아들과 같은 의사인 며느리에게
카톡으로 보냈다고 푸념을 한다.
형제의 맏인 소생 사정은?
며느리들은 언젠가 부터인가
2세 생산하면 참석 안 하는
즈그들 멋대로 법(?)을 내세워,,,,,,,
딱 3형제 세 사람만 선친 성묘를 한다.
그래서 형식적인 성묘 보담,
선친의 족적이 남겨진 고향 곳,곳을
돌면서 추념하는 게 외려 참 한가위
치레가 아닌가 생각켜 성묘 후 고향
전주를 돌아본 단상입니다.
초등 3학년 까지 이 산 기슭에 살면서 엄청
많이 놀았던
완산(完山 ,전주의 별칭이기도)을
내려가다, 중도에 전에 없었던 동학농민군
전주성입성비를본다. 그러니까
여그 완산 칠봉에 농민군이 주둔했다고롸,,,
꼬맹이 시절에서 까까머리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들렸던 이곳이 농민군의
진지라고롸!
참 내,,!
지 고장의 엄청난 역사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역사를 알아보러 돈 들여,
품 들여 여행한 것이 부끄럽다.
,,,,,,,
초딩 1년 때 아우와 같이 여기 왔다가
머리가 피멈먹이 된 청년의 주검을
찦차에 싣고 와 버리는 군인들을 보고
아우 손을 꼭 잡고 가까운 집으로 급히 왔다.
전쟁통이니께 어느 쪽 군인인지도 몰랐고,
어린 소생 처음 본 주검이어서
'아~ 사람은 죽는 거구나!'고 느꼈다.
일제 때 심었다는 완산 칠봉 삼나무 군은
에지간한 일본 스기나무에 뒤지지 않는다.
삼나무 군락지 바로 옆 계곡
(그때는 물이 흘러 5~6 미터 높이의
폭포를 이루며 전주천으로 흘렀는디,,,,,,)
에 있는선친이 자주 들리셨던
약수터로 갔다.
소생도 때로는 선친과 함께,
더러는 혼자서
자주 왔던 옛 정 포근한 약수터다.
약수터 시비
洗心
- -----전략----
비사벌 완산 정기
그리움 실고
시름도 웃음인양
가꾸어 온 자리
아~ 어느 하늘 아래
이 보람 또 깃들 것이랴!
(위 시문은 당시 꽤 이름난
시인 白楊村님 작)
이환희 당시 전북도 지사가
약수터 조성위원장으로,,,
선친도 발기인으로 ,,,,,
완산에서 청학루로 내려가는 길에
초등 3학년 까지 세들어 살던
갑부 백씨네 집 터다. 물론 장소
빼고는 화아~악 변했삐렸지.
다시
조금 더 내려가면,,
초등 3학년 까지 댕겼던,
교가 ♬ 완산칠봉~ 푸른정기 새 아침~ ♬의
완산국민핵교 터에 무슨' 곤지중핵교'가 섰다.
왼편으로 완산초등학교. 아~항, 운동장이
두개로 갈려 있구나!
좀 더 구도심 남부시장으로
내려오면
무던히 많은 발자국을 남긴 다리 매곡교
(梅谷橋, 옛날에는 완산칠봉에 매화꽃이
절경을 이룬다고해서,,,,지어진 이름)
남부시장, 전동성당, 경기전,오목대
그리고 한옥마을이 전주 관광의 핫플레이스
선친은 남부시장 입구에서
( 소생이 사진 찍은 위치)
육이오 때 노점상으로 장사길로 들어섰다.
선친이 여기서 느닷없이 제이국민병의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 1년 가까이 가족과
생이별 하고 진주까지 끌려갔다.
전쟁도 한 번 안 하고 9만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해체되면서 걸어서
전주까지 오셨다.
어린 소생은 거의 매일 해질 무렵이면
신흥학교의 군대 병영을 향해 아무 내용도
모르고 선친이 오시는가 하고
눈빠지게 기다렸었다.
돈이 좀 잡히자 당시 최고 상권 거리인
(풍)남문통에 가게를 샀다,
셋집을 벗어나 지금의 한옥마을 핵심인
경기전 근처의 동인동에 집도 샀다.
아이템도 잡화에서, 앵경전문점으로,
남문통 거리는
호남노트사,
청음당 아이스케키,
남문유리점,
럭키양화점,
아관원 중국요리점
그리고 우리집 안경원 등
당시로는 전주 시민들에
잘 알려진 가게들이 주우욱
나열 되어있엇던 번화한 거리였다.
상전벽해다.
한옥마을 주변 관광지 조성으로
깨끗히 조성된 남문통 길.
정결하고 정숙하다.
번화하고 활동성 있던 옛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다.
행원 여기만 예 그대로 위치여서
위치를 가늠을 할 수가 있구나!
젊을 때 한 두 번 여기서
가야금 창 들으며 한 사발
들이키고 행하 건네며
객기도 부려봤지러,
옛 울 가게집 사진으론 (1972년)
참 정겨운디 말여!
소생 젊음이 꼭꼭 심겨진 옛집이
초원 편의점으로,,,,,,가슴 뭉클.
왼쪽 초원 편의점, 오른 쪽은
소방서였다가
국민은행 전주지점이 들어섰었다.
국민은행 쪽으로 바로 옆 사거리 모퉁이에
전주완산 경찰서가 있고
경찰서 옆 벽면에 대형 전주 고지도가
걸려 있다.
걸개 그림 아래 풍남문을 통해 전주 감영,
객사 등이 그려져 있구나!
완산경찰서는 울 가게 앞의
중앙직할파출소 자리였다. 파출소
입구에 滅私奉公이라 쓰여 있었다.
滅私奉公 자신을 희생시켜??
그 사거리에 전북도청과 상무관이 있었지.
전주 객사.
엄청 깨끗하게
리노베이션 했네.
관광도시 전주의 중심이
옛 소생 동네다.
경기전 후문.
여기가 3년 간 다니고 졸업한
중앙국민학교 정문이다.
원래 경기전(전주 이씨 왕조의 발상지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각,
안에 전주사고가 있다.)구역인데
무슨 연유로 중앙초등학교가 들어섰는지?
그리고 언제 지금의 원 위치에 정비되었는지?
잠시 휴식하려 들렸던 중앙학교,
아니 경기전 후문 쪽의 카페.
각종 시설이 관광객을 위한 공간으로
싹 다 리노베이션. 외국인들이 유달리
눈에 띈다.
약 60년 전까지도 젤 컸던 개인 병원
'김외과'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되었네,
......
한 밤 중 선친이 갑자기 통증이 와서
소생 득달같이 달려 김외과 정문을 두드리고
고함을 쳐도 기척이 없어 닫힌 문을 큰 돌로
두드려 원장님을 깨우고 위수술에 들어갔다.
그 동안 가까운 전동성당에 가서 땀을 흘리며
선친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한 참을 생각에 잠겨 선친을 그렸다.
경기전 돌담 건너 소생이 살던 살던 집이다.!
경기전연가라! 이름 멋들어지게 지었다.
주인을 뵈러 조심 들어섰다.
주인은 외출 중이고 숙박 중인 미국에서
왔다는 70대 노부부가 말을 걸어 왔다.
안 사람이 : '제가 전주 이씨여서요.'
소생 '참 보기 좋습니다.
노후에 홍복이십니다.'
바깥양반:
'40년 이민 생활에 고생 많았습니다.'
---
중앙 마루에 둘째 애로 배부른 내자가
앉은 모습이 어른거린다.
초등 3학년에서 6학년 까지 살았던
옛집을 보러 가는 중.
말했지요! 소생의 옛동네가
관광 전주의 관광 핫플레스라고,,,
이름하여 '전주한옥마을'관광지.
한옥마을 중심지에.
동학혁명기념관에 입장했다.
동학과 전주는 관련이 깊고 깊다.
동학운동은 한국민주화운동의 뿌리이자
정신적 초석이라고들 한다.
3.1독립운동, 4.19 의거, 5.18 광주민주항쟁
그리고
최근의 평화 촛불운동 등이 그렇다고
생각된다. 부패한 지배세력과
사회적 모순에 대항하여
민중이 어떻게 대응했던가를
현재의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동학혁명이다.
동학농민군은 除暴救民,
輔國安民,斥攘斥倭
- 즉,
폭정의 벼슬아치를 없애
나라와 백성을 평안케 하고,
일본을 비롯 침략 외세를 물리친다.-의
깃발 드높히고,
고부, 백산 기포를 발판으로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함락,
잠시였지만 울나라 최초의 민주정을
실시했던 집강소가
울 동네 풍남문 안 쪽이였다고.....
-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斷想.
제작, 감독 : 一雲
구경 한 번 잘 했수다.
나도 개성에서 태어나 5살때
서울 용산 원효로 이사와 6.25때 피난
남원 운봉 정읍 고창을 거처
대전 선화국민핵교 3학년 초까지 다니다
전주 중앙핵교로 전학
중앙핵교 이발소 담넘으면
나가 살던 판자집이 나의 본적이 되었네 그랴
지난세월 더듬어 보니 겁나게 거시기허냉...허 허 허
허허 댓글 고마우이
나가 농민군전주성 입성비와
전적지 문 비석이 넘 더러워
전주시청 공윈관리과3에 전화하려고 했는디,,,,, 대전 소재라
一雲 성님!
과히 문장력은 소동파 입니다
成자浩자律자 님이 춘부장인줄 알았으면
그 앞에서 담배를 안피었을틴디요
죄송하네요
글구 이글을 진작 알았다면
'금요산행' 에서 수 없이 다녔는데...
좀 아쉽네요
머물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잉크병 동무님
넘 띄우면 떨어질 때
아주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