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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밭(아겔다마) (마 27:3-10)
마 27:3-19=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행 1:19=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가룟유다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팔았습니다.
당시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은 삼십은 종 한 사람의 몸값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종처럼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종처럼 취급한 곳이 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모를 거역하는 자를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욕을 합니다.
그 욕먹을 일을 인간들이 한 것입니다.
천벌을 받을 자들이지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모르고 살아요.
죄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니 만사를 자기중심으로 바라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늘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하여도 우이독경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려고는 생각지 않고 자기 말만 읊조리고 갈 뿐입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깨달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서 죄사함 받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이 기쁨이고 의미가 되어야 함에도 많은 교인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면 자기 사정만 열심히 아룁니다.
하나님! 우리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우리 자식들이 말을 안 들어요.
요즘 사업이 힘들어요.
많이 아프고 병들었어요.
좋은 자리 결혼하게 해주세요.
날 좀 행복하게 해 주세요.
돈 좀 벌게 해 주세요.,,,,
교인들이 기도를 들어보면 거의가 이런 수준입니다.
에피소드입니다.
과거, 벌써 십 수년이 되었네요.
교인 중에 어떤 분의 기도입니다.
새벽 기도를 하던 때입니다.
어느 날 주일 예배도 잘 참석하지 않는 분이 새벽 기도 하러 나온 겁니다.
보통 목사들은 성도들이 안하던 행동을 하면 가슴이 철렁 합니다.
아! 저 집에 무슨 문제가 터졌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엔 복음을 모르던 때이라 목사가 주로 하는 일이 성도들의 가정사를 다 들여다보면서 기도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무당노릇을 한 것이지요.
여하튼 교인이 안하던 짓을 하면 목사는 긴장을 합니다.
간단하게 설교를 마치고 각자 기도시간을 갖는데 그때는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온 신경이 그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어요.
강단에서 기도하면서 신경이 그분에게 가서인지 본의 아니게 그 분의 기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황당한지!
웃음이 납니다.
자신이 무슨 계약을 하면서 계약금으로 오만원을 상대방에게 주었는데 그 상대방이 돈을 안 받았다고 한데요.
그러니 하나님 그 사람이 내가 준 계약금 오만원을 받았다고 기억이 좀 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웃을 일이지만 자기 딴에는 엄청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었어요.
얼마나 다급하였으면 그 새벽에 교회엘 다 나오고 안하던 기도도 했겠어요.
어쩌면 이 분의 모습은 참으로 순진무구해요.
이 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성도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는 처리 전문가예요.
이런 모습이 어디 이 분 만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 99% 교인들의 모습이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관은 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인간을 꽉 잡고 있기 때문에 어느 시대이고 앞서 말한 그 분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일신상의 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 교인들 대 부분이 우상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몰라요.
엄청 하나님을 사랑한데요.
이건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달라요.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고, 좋아하는 것은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좋아할 뿐이지요.
이용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나와도 자기 할 말만 쏟아 내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로 가장 잘 드러나요.
기도하는 것 보세요.
완전히 일방통행입니다.
혼자 10분이고 30분이고 1시간이고 떠들다가 갑니다.
마치 전화 수화기에 상대방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떠드는 것과 같아요.
그리곤 기도했데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관심도 없어요.
오로지 난 이렇구요.
난 저렇구요.
맨 날 나 죽겠거든요.
하나님 어찌 좀 해 주세요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자기 아들이 세상에서 죽임당하여서 야단인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지금 우리아이가 고3인데 어느 대학에 가는게 좋을까요?
요즘 수학점수는 그런대로 나오는데 영어 성적이 영 안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느 학원에 보내면 성적이 좀 올라가겠습니까?
아니면 사업을 하나 할까 하는데 어떤 사업이 잘 되겠습니까?
주식하는 사람은 하나님 어떤 주식을 사야 상종가를 치겠습니까?
하나님 요즘 우리 남편이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어쩌면 좋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신랑이 나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고부간에 갈등이 너무 심해서 우울증에 걸릴 지경입니다
어떻게 좀 해결해 주세요.
여러분 지금 정선희씨의 남편인 탤런트 안재환씨가 자살해 죽었어요.
정선희씨는 실신을 하고 공황 상태에 빠져 있어요.
그런데 그 분에게 가서 정선희씨 지금 내가 사업 문제로 고민이 많고, 자식 문제로 고민이 많고,
시어머니 문제로 고민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물어 보세요.
뭐라고 하는지?
이게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교인들이 그런 짓을 하나님 앞에서 버젓이 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러니 교인들은 하나님에 뜻은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오로지 자기 육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어요.
여러분이 이런 인간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 것 같은지 생각 좀 해 보셨어요.
생각 안 해 보았지요.
이걸 믿음이라고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지금 이걸 믿음이라고 받아 주어야 할까요? 말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고 예수님이 죽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 돈을 자기가 쓰지 못하고 예수를 죽인 제사장들에게 갖다 주었어요.
그러자 제사장들이 그 예수님 몸값을 헌금함에 넣지 않고 “토기장이 밭” 을 하나 사서 “나그네들의 무덤” 을 삼았습니다.
그 밭 이름을 예수님의 피 값으로 샀다고 해서 “피 밭” 이라고 했습니다.
육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피밭 하나 남겨 놓고 가셨어요.
그것도 나그네들이 묻힐 무덤으로요.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 줄 몰라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은데,,
기껏 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덤하나 달랑 만들어 놓고 가신 겁니다.
그런데 전 지금 인간들 눈에는 아무 보잘것없는 그 피밭을 살펴보고자 하는 겁니다.
전 예수님의 몸값으로 산 이 피밭에 의미를 깨닫고 펑펑 울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했는지 몰라요.
예수님께서 피밭을 사 놓고 가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곤비한 인생사를 살아야 했을까?
어휴!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암튼 성도가 험한 세상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 놓으신 피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피밭 속에 담긴 놀라운 복음을 알아봅시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샀다고 합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샀다고 했어요.
아까 예수님의 몸 값으로 뭘 샀다고 했지요.
피 밭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바울은 피로 교회를 샀다고 합니다.
결국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몸 값으로 산 나그네들이 묻힐 무덤이 교회인 겄입니다.
물론 제사장들은 토기장이 밭을 샀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밭을 산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겨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자기 목숨을 버리고 남겨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린 흔적이 서려 있는 곳이예요.
이 흔적이 얼마나 귀중하였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지키게 했다고 했겠습니까?
바울이 지금 그러잖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한다고,,
여러분! 하나님께서 교회를 인간에게 맡기지 않고 성령께 맡긴 이유를 알겠습니까?
인간에게 맡기면 인간의 뜻으로 세워요.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교회가 되요.
인간의 교회란? 곧 인간들 소원을 들어주는 절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를 치게 되면 인간의 뜻이 개입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만 교회 안에서 증거 되도록 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자 합니다.
성령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이란?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를 값 주고 산 자들이라고 하지요.
결국 교회란?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울산 목양교회를 산 것이 아니고 울산목양교회 안에 성도를 피 값으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교회라고 말 할 때는 성도들의 모임을 말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흔적을 지키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했으니 성도에게 오신 성령님도 성도 안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신 사건을 잊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누가 성도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의미를 아는 자가 성도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르면 성도가 아니에요.
왜인줄 아세요.
그 속에 성령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십자가 피를 지키기 위해서 보내 주신 분이지 우리 소원 들어주라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이 그 속에 있는 성도라고 한다면 성령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를 기억하도록 인도를 하십니다.
인간의 소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죄라고 지적을 해요.
이 성령의 지적을 받으면 돌이키게 되요.
아! 내가 또 육신의 생각을 했구나!
이런 못남 놈이 있나! 라고 마음에 상한 심령이 생겨요.
그래서 자기가 죄인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곤 잠시 잘못된 생각에서 돌이키게 됩니다.
이런 돌이킴을 회개라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은 다 자기라는 존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없으면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지 않아요.
자아는 자기 몸뚱이라 끌어안으라고 해요.
세상에서 자기 몸뚱이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필요해요.
그러니 세상 것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에 불러 들여서 넌 세상에 나그네라고 알려주시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가서 너 이래도 세상 것 달라고 할래! 라고 책망하고 육신의 정욕을 죽여서 무덤에 묻으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일컬어 나그네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무덤이 뭐하는 곳입니까?
육신을 묻는 곳이지요.
맞아요.
교회는 육신을 묻는 곳입니다.
육신이 요구하는 것을 묻어버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성도를 세상에서 나그네로 만들어 주어야지, 주인으로 만들어 주면 안되요.
세상에 주인이 되면 삶이 힘들어져요.
여러분 왜? 사는게 힘듭니까?
다 세상에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신이란 놈은 꼭 상대방과 비교하는 습성이 있어요.
사람이 언제 불행을 느끼느냐 하면 타인을 통해서예요.
집안에 아무것도 모른채 혼자 있으면 결핍을 몰라요.
혼자 있다가 갑자기 TV를 켜면 그 속에 타인이 보여요.
그러면 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게 됩니다.
드라마에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이 부럽고, 장신구들이 부럽고, 사는 집이 부러워요.
주인공의 애인이 부러워요.
그러면 자신이 비참해져요.
상대방과 비교하여서 못하다고 생각되면 갑자기 불행하다고 느껴져요.
잠자고 있던 불행이 눈에 타인이 들어오면서 확 깨어나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일단 불행하다고 생각이 되면 그것을 소유하려고 움직여요.
소유하기 전까지는 잠도 안와요.
밥 맛도 없어요.
소화도 안되요.
우울해져요.
자기 욕구가 채워져야 만족이 되요.
그런데 또 다른 잘사는 놈을 보게 되요.
그럼 또 결핍이 찾아와요.
그래서 인생은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일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집에 일을 땐 멀쩡했는데 시장에 데리고 갔더니 확 달라져 버리는 것과 같아요.
시장에 있는 장난감을 보면 갖고 싶고 그러면 남에 눈 아랑곳 하지 않고 사줄 때까지 길바닥에 주져 앉아서 우는 겁니다.
그럼 엄마는 놀래요.
애가 안 그랬는데 왜? 그러냐고 당황을 합니다.
그것은 엄마가 아이에게 결핍을 가져다 준 겁니다.
멀쩡히 집에 잘 놀던 아이를 시장엘 데리고 가서 결핍을 불러 준 거에요.
자신이 아이에게 불행하다는 생각을 심어 주고선 왜? 그러느냐 라고 하면 안되요.
저는 교인들이 백화점으로 쌀쌀 맞게 돌아다니면 예수를 잘 믿는 인간으로 보지 않아요.
거기 가면 좋은 옷 입은 사람들이 지천에 깔렸어요.
그러면 자신은 촌뜨기로 전락해요.
왜? 나는 저 사람들과 같은 부를 누리지 못하는가?
갑자기 불행해져요.
그러면 결핍을 느끼고 불행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 많이 벌어오지 못하는 신랑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어요.
돈 많이 벌어다 주는 사람이 그리워져요.
집에 들어오면 괜히 신랑이 꼴도 보기 싫어지고 자식도 귀찮아져요.
그러면 알콩달콩 살던 집구석이 갑자기 지옥이 되고 맙니다.
요즘 사회적 병리 현상이 애인을 두는게 유행이라고 합니다.
드라마 내용은 전부 불륜물입니다
드라마마다 불륜을 소재로 한다는 것은 사회현상이 그렇다는 겁니다.
방송국은 광고로 먹고 살아요.
광고주가 광고를 하려면 시청률이 높아야 값이 비싸요.
그럴러면 시청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해요.
가만히 시장 조사를 해 보니 일탈을 하는 불륜 드라마예요.
그것도 삼각관계,,,,
얼키고 설킨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아침 드라마부터 심야 드라마까지 불륜을 소재로 내 보내는 겁니다.
아줌마들이 애인을 두는 이유는 자기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예요.
신랑이 주지 못하는 것을 애인이 대신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신랑은 외식한번 하자면 온갖 잔소리를 다 하는데 애인은 안 그래요.
애인은 고급 요리에다 비싼 옷도 펑펑 사줘요.
여러분 마누라가 고급 요리타령을 하거나 전엔 안 그랬는데 신랑 알기를 우습게 여기면 거의 애인하나 키운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구를 위해서는 윤리와 도덕은 거추장스러운 사치에 불과해요.
세상에 화려함을 보고 미치지 않을 인간은 없어요.
그런데 그 화려함도 족함을 채워 주지 못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무저갱이기 때문입니다.
전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마귀라는 놈은 이런 인간의 탐욕을 알기 때문에 항상 좋은 것으로 미혹을 합니다.
사람의 눈과 입은 거짓말을 못해요.
한번 좋은 것 먹으면 입은 그 맛을 기억하고 있어요.
또 다시 그 맛을 찾도록 합니다.
인간은 퇴행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실패로 봐요.
그래서 풍족하게 살던 사람이 사업이 망하면 자살 하는 것예요.
죽으면 죽었지 가난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겁니다.
사람들이 현실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연히 예수님을 우상숭배식으로 믿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가 세상에 대한 육신의 정과 욕심을 죽여 버리는 일을 단행 하십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죽이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구약에 성막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인데 성막엔 항상 제물이 죽임 당하는 곳이었어요.
성막엔 항상 피 비린내가 진동하였어요.
그래서 제사장들은 향을 피워서 성소 안을 정화 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값으로 나그네들의 무덤을 산 이유가 교회는 세상에서 나그네인 성도들을 육신이 요구하는 정과 욕심으로부터 해방 할 수 있도록 죽임 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칼이 되어서 우리 안에 있는 탐욕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세워서 죄라고 지적을 해요.
그래서 죄인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죄라고 고발을 해요.
이 죄가 지적되면 현재의 삶이 고마움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진정한 쉼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잠시 뿐이지만,,,
깨닫고 회개하고, 또 돌아가고,,
마치 사사기처럼 악순환이 되요.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짐을 지고선 쉼을 얻을 수 없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쉼을 주시는데 어떻게 주시느냐 하면 죽임으로서 주세요.
포기하게 함으로서 줘요.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보세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쉬게 해 주신다고 합니까?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이지요.
즉 옛 사람을 죽여준다는 뜻입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심으로 쉼을 주세요.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옛사람의 소욕이예요.
이 놈이 살아서 펄떡거리는 한은 삶은 쫓기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도들을 십자가에다가 옛사람을 죽이게 합니다.
피밭으로 끌고가 주의 약속으로 하늘에 소망을 주고 땅에 것을 초월하도록 해요.
땅을 이길수 있는 것은 하늘 밖에 없어요.
마귀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을 죽을 것에 눈을 고정시키고자 해요.
그런데 인간의 눈에는 죽을 것이 화려해요.
그래서 보는 순간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를 보는한 벗어나야지 벗어나야지 하는 것은 구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생명과로 눈을 돌리게 합니다.
하늘에 생명으로 땅에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합니다.
골 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물론 잘 안되지요.
그러니 성도는 다른 것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 자기 안에 있는 욕심 많은 한 놈과 싸우는 겁니다.
속사람이 겉사람을 이기면 쉼을 얻어요.
하지만 겉사람은 자기 욕구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라고 충동질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그것이 죄라고 고발을 해요.
이 때 터져 나오는 것이 탄식이고 상한 심령입니다.
결국 나는 나를 이길수 없음을 알고 기도하게 됩니다.
주여! 종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다윗도 죄를 이길수 없음을 알고 상한 심령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주의 은혜로 자기 안에 예루살렘 성을 쌓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예요.
시 51:16-18=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다윗은 하나님은 제사보다 이런 마음을 기뻐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런 마음은 자기 안에 성령이 일어나게 하세요.
그래서 성신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시편 51:10-12=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육신의 볼모에 사로잡히면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져요.
마귀는 성도를 지옥으로 데려기지는 못해요.
하지만 마음 속에 지옥은 만들수 있어요.
어떻게 지옥을 만드느냐 하면 세상의 것으로 결핍을 일으킴으로 해요.
겉사람은 결핍을 느끼면 불행해져요.
그래서 성령은 성도는 피밭으로 불러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옛사람을 장사지내게 하고 세상에 나그네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돈에 목말라 하는 것은 그 만큼 돈을 많아 안다는 뜻입니다.
어른과 어린아이를 비교하면 어른은 돈을 잘 알고 어린아이는 돈을 잘 몰라요.
그러니 어른은 돈 때문에 고민을 하여도 어린아이는 돈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요.
어린아이는 돈을 모르기 때문에 돈을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여준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여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이냐 하면 세상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없애요.
마치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보다 더 좋은 장난감으로 현재 가지고 놀던 것을 스스로 놓게 하는 방법처럼 해요.
이런 방법으로 세상 것을 버린 사람이 바울입니다.
삼층천의 영광을 보고선 세상에 대한 눈이 멀어졌어요.
눈이 멀고 보니 야! 세상 이거 별거 아니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에 눈도 의식하지 않고 살았어요.
창피 한 줄도 몰랐어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이 너무도 화려하였기 때문이었어요.
교회란? 하늘에 소망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곳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그 곳이 피밭이고 예수님의 몸값으로 산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일컬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복음은 세상을 대수롭게 보게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십자가 피에 능력이지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예요.
그러니 세상에 평가를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어요.
너희가 이 영광을 모르니 없음을 창피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나처럼 하늘에 영광을 보았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힘이 들어요.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니 평생 타인에게 맞추어서 살아가는 겁니다.
남들 의식하고 눈치 보느라고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해요.
이게 죽을 때가 되면 남에 눈을 의식하지 않아요.
할머니들 보세요.
도로 한 복판을 질러 다녀요.
할머니 그러면 안돼요 라고 해도 막무가내예요.
차가 빵빵 거려도 바쁜 것 없어요.
오히려 힐끔 힐끔 쳐다보면서 욕을 해요.
어린아이들은 교통질서를 지키지만 나이 들어 보세요.
자기 편한대로 자기 마음대로 남 의식하지 않아요.
죽을 때가 되어서 인간의 허상을 알게 되어가는 겁니다.
한평생 남에 눈 의식하고 산 것이 다 헛것이라는 것을 죽을 때가 되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가 되어서 알게된 것을 성령이 임하면 알게 되요.
그러니 성령이 임한 성도는 젊어사도 남에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성도의 복이 늙어 죽어서 알 것을 일찍 알게 된 겁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알았어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느냐가 중요하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느냐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눈치 보지 않았던 겁니다.
천국이 커 보이면 세상은 작아 보여요.
천국이 커 보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는 거예요.
나그네가 좀 불편하고 힘든 것으로 불평하면 안되요.
다 지나가는 형적이라고 여기세요.
바울에게 지금 여러분이 당하는 아픔과 문제를 가지고 상담해 보세요.
뭐라고 하는가?
세상을 너무 크게 보지 마세요.
세상이 큰 게 아니라 내가 크다고 보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피밭에다 다 묻어버리세요.
자존심도, 자아도,,,,
예수 있으면 다 얻은 것이니 참고 사세요.
그냥 조금 불편하게 사세요.
그져 그렇게,,,,,허~허~ 하고!
http://blog.daum.net/cross114/울산 목양교회 정낙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