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재종 시인을 모시고 풀밭에서 강연을 합니다
때,ㅡ 6월 23일 19시 30분
장소 ㅡ 풀밭동인 학습실(국문과 학습실 인근에 있음)
2. 기말고사가 가까워서...... 공부 많이 하신 분이나 좀 덜 준비되었더라도,
머리식히실 분은 오시면 환영합니다!
혹 잘몰라서 연락하시려면 010-3266-9092 김연구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3. 아래 글은 풀밭회장님의 글을 퍼 왔습니다.
너무길어서.......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보십시오!
독학자
깬 소주병을 긋고 싶은 밤들이었다 겁도 없이 돋는 별들의 벌판을 그는 혼자 걸었다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날들이었다 풀잎 끝마다 맺히는 새벽이슬은 불면이 짜낸 진액 같았다 해도 해도 또다시 안달하는 성기능항진증 환자처럼 대책 없는 생의 과잉은 끝이 없었다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어쩌다 만난 수수 모감처럼 그에겐 고개 숙이고 싶은 푸른 하늘이 없었다 아무도 몰래 끌려가서 아무도 몰래 그대로 처박힐 수도 없었다 생도막 쳐질 수 없었다 눈물이 굳어서 벌판의 돌이 되고 그 돌들이 그를 처음 보고 놀라서 산맥이 될지라도 오직 해석만이 있고 원문은 알 수 없는 생을 읽고자 운명을 포기해도 좋았다 운명에겐 모욕이었겠지만 미물 짐승에게라도 밥그릇을 주었다가 빼앗지는 말아야 했다 빼앗은 그릇을 모래 속에 처박는 세상이거나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때마침 도둑을 맞은 애인 집에서 되레 도둑으로 몰린 경우거나처럼 도대체 아니 되는 그 잔혹한 고통의 독재를 밀며 그에겐 인간만 남았다 자신의 불행을 춤으로 추었던 조르바처럼 한 번이라도 춤을 추지 않는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도 되는 것 같아 춤을 멈추지 않는 사람처럼, 벌판의 황량경이 삭풍에 쓸리는 나날을 불러 그는 고독의 신전에 향촉을 피웠다 그처럼 무장무장 단순한 인간만 남아 보리수 아래서 울었다
* 수수 모감 : 수수 이삭
땅끝에서 폐선을 끌어안다
예보됐던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친들 앞을 가로막는 방파제는 꿈쩍도 하지 않듯 아무리 치료를 해도 더 좋아지지 않는 병의 삶이 있다. 물고기를 잽싸게 채어 먼 수평선으로 데려가줄 듯한 갈매기처럼 우리의 뒷덜미난 채어 질질 끌고 가선 급기야 제 뱃속을 채워버리는 희망이야 있긴 있다. 나는 알코올중독자와 어깨 겯고 선창을 떠돌고 싶었다. 차라리 마흔 넘은 퇴물 작부와 밀항을 꿈꾼 적이 있다. 그 흔한 마약과 부랑을 살 만한 배 한 척 내겐 없었기에 생이 우리에게 베푼 모든 개발 가능한 삶의 파랑을 섭렵해 보지 못한 채 죽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했을 뿐 나는 갈치잡이 배를 타고 세상을 낚아보지도 못했다. 새벽 어시장의 경매꾼처럼 삶을 흥정해 보지도 못했다. 해지는 바다 위 금결 은결의 비단 피륙 같은 질 좋은 아이들에게만 뽀짝거려서 외로움을 자초했고 너른 바다 변방을 둘러친 양식장 부표 같은 경계에 갇혀 그들에게 삶의 인용 아상은 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선 죽어가는 알코올중옥자가 끝장난 창녀와 어떻게든 안간힘의 정사를 나누려 하지만 해송은 푸르고 동백은 붉은 이 땅끝에서 나는 소금기, 소금기에 삭은 선창의 폐선이나 끌어안고 방하착. 방하착, 방차학만 뇌뇔 뿐. 파도의 포말 같은 내가 어둠의 해조음으로 바뀌는 것을 본다.
묵정지, 이 쓸쓸함의 저편
한때의 푸르른 피를 잘 씻어낸 억새꽃 은발들이 잔광에 반짝인다. 한때의 무성한 살을 잘 비워낸 억새꽃 은발들이 바람에 쓸린다. 이때쯤 개울물 소리는 청천에 닿고 나는 묵정지 서 마지기, 할말이 없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서러움을 잘 부린 머슴새가 시방도 쭉쭉쭉쭉 소를 몬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그리움을 잘 빛낸 머슴새가 시방도 그 누굴 호명한다. 이곳저곳 구절초가 속속 듣고 너는 못 뒤엎는 자리, 들을 귀가 없다. 바람은 또 우수수히 풀밭에서 인다. 풀들은 또 소슬하게 그만큼 시든다. 하여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먼가. 꽃도 새도 어둠으로 눕는 자리엔 두루총총 별이 참 많이는 돋는다. 두루총총 서리 쓴 들국빛으로 돋아선 너나 나나의 눈물의 사리를 닦는다. 그러면 타는 밭과 빠지는 수렁을 넘던 우리의 외진 사랑과 노래여, 안녕. 이 저녁 아득아득 저무는 길에서도 찔레 열매들 형형, 사상을 묻고 실베짱이 씨르래기 풀무치 한 떼는 시간 너머의 더 높은 꿈을 연주한다. 너와 난들 이 무명을 무얼로 점등하랴.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에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백련사 백일홍나무를 대함
스님이 입고 있는 입성은 잿물빛도 서연해서 소연해서 사그러지겠더군.
스님이 바라보는 백일홍은 분홍빛도 화사해서 화사해서 자지러지겠더군.
그날사 말고 비는 내리고 내려선 구구구 멧비둘기 불러 무위적정(無爲寂靜)을 허물고
비 맞고도 환하디환한 백일홍, 나는야 차마 차 한 모금 못 넘기겠더군.
벼 익는 때 -농사일지 24
좋아라 저 정갈한 햇볕에 알알이 벼알 영글고 저 싱싱한 바람결에 샛노랗게 벼 때깔나는 오늘만큼만 살고 싶어라 들 가득 눈물 떨구고 싶어라
쟁쟁쟁 청천 두드려 울리며 징게 맹경 들만 들이냐 이 나라 온 들이 울음인 가을에 소리 한 대목 뽑고 싶어라 술 한잔 하고 싶어라
소쇄원에서 詩琴을 타다
소쇄소쇄, 대숲에 드는 소슬바람 무엇을 마구 씻는가 했더니 한 무리 오목눈이가 반짝반짝 날아오른다
소쇄소쇄, 서릿물 스치는 소리 무엇을 마구 씻는가 했더니 몇 마리 빙어들이 내장까지 환하다
자미에서 적송으로 낙옆 따라 침엽 따라 괴목에서 오동으로 다람쥐랑 동고비 따라 빛나는 바람과 맑은 달이 飛潛走伏을 다스리면
여기는 꽃이 없어도 되는가 황국 몇 점만 생생하여도 되는가
오늘은 상강, 저 진갈매빛 한천 길엔 소쇄소쇄, 씻고 씻기는 기러기며와 소쇄소쇄, 씻고 씻기는 푸른 정신 뿐 나 본래 가지 게 없어 버릴 것도 없더니 나 여기 와서는 바람 들어 쇄락청청 나 여기 와서는 달빛 들어 휘영청청
장엄
저 순백의 치자꽃에로 사방이 함께 몰린다. 그 몰린 중심으로 날개가 햇빛에 반사되어 쪽빛이 된 왕오색나비가 내려 앉자 싸하니 이는 향기로 사방이 다시 환히 퍼진다. 퍼지는 그 장엄 속에선 시간의 여울이 서느럽고 그 향기의 무수한 길들은 또 바람의 실크자락조차 보일 듯 청명청명, 하늘로 열려선 난 그만 깜깜 길을 놓친다. 놓친 길 바깥에서 비로소 破精 을 하는 이 깊은 죄의 싱그러움이여 !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 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 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 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날 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정자나무 그늘 아래
느티나무 수만 이파리들이 손사래 치는 느티나무 그늘 소쇄한 정자에 애진 마음이 다 되어 앉아본 적이 있으냐. 물색 푸른 앞들은 가멸지고, 나는 오늘도 정자에 나와선 멍석몰이쯤 당한 삭신이라도 바람의 아홉세베에 씻고 씻어보는 것이다. 느티나무 그늘 암암할수록 그날 밖의 세상은 아연 환해지는 느티나무 그늘에 너와라도 함께인 듯 앉아, 저 느티나무의 어처구니 둥치와 둥치에 새겨진 세월의 鱗片을 생각하면 오목가슴이 꽉 메여 오기도 하는데, 나는 내 사소한 날의 우련 우련 치미는 서러움만 매미 떼의 곡지통에 실어보는 것이다. 이제는 찾는 이도 몇 안 되는 정자에 시방 몇몇의 고랑진 허드레 얼굴들, 그 흙빛 들수록 앞들은 점점 푸르러지는 느티나무 그늘 생생한 정자에서 어제는 하염없던 쑥국새 울음을 듣고 시방은 치자향 아득한 것도 맡아보는데, 딴엔 꽃과 새의 視聽 너머에 더 간절한 바도 있는 것이다. 가령 이 느티나무 둥치 부여안고 흰 달밤, 어느 여인이 목놓아 울고 이 느티나무 둥치 찍어대며 웬 봉두난발이 발분했던가 하는 것들인데, 너는 언젠가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이라고 했던가. 나는 내친 김에 실낱 줄기 못 끊는 저 냇물과 그 냇가의 새까만 벌때추니 떼며 겨울이면 마을의 그만그만한 집들과 나뭇가지 끝마다 열리는 별 떼랑 하냥 난장을 트던 것도 되새김하다간, 그 은성했던 육두문자와 파안대소와도 참 서느럽게는 등을 돌린 정자에 앉아 오늘은 다만 성성한 노동과 오늘은 다만 뜨거운 사랑과 휴식의 오늘의 생생한 나라를 묻고 묻는 것이다. 오늘도 간간 쑥국새 울음은 깃들어선 이렇게 두 눈 그렁그렁하게는 흰구름 저편까지를 바라보게 하는데 그러면 저기, 저 生은 또 어쩌려고 뭉실뭉실 이는 수국화처럼 환한 그늘로 차오르고, 이쯤이면 나도 그만 애진 마음이 다 되어 부쩌지 못하는 걸 너도 알겠느냐. 그러다가도 상처투성이의 느티나무와 그 상처마다에서 끈덕지게는 뽑아내는 푸른 잎새를 헤다보면 그 잎새 하나로 默默靑靑 남는 일도 너무 서러워지지는 않겠다 싶은 날, 앞들은 이미 벼꽃 장관을 펼치는 것이다.
유월의 童謠
유월은 모내는 달, 모를 다 내면 개구리 떼가 대지를 장악해버려 함부로는 들 건너지 못한다네
정글도록 땀방울 떨구어서는 청천하늘에 별톨밭 일군 사람만 그 빛살로 길 밝혀 건넌다네
심어논 어린 모들의 박수 받으며 치자꽃의 향그런 갈채 받으며 사람 귀한 마을로 돌아간다네
국외자
나는 어떤 출구도 찾지 못해서 담장 위에서 흘러내린 병든 장미향기에 취했다 울부짖을 입은 없는데 귀는 열려 있어서 담장 위 새들의 끝없는 빈정거림을 들어야 했다 나의 임무는 삭풍 속의 미루나무 같은 잔혹한 고독을 경작하는 일뿐 나의 사랑은 황음 속에서만 발기했다 여자들은 암소처럼 큰 음부를 들이대며 나의 영혼을 몽유의 안개처럼 거두어갔다 모퉁이의 오동잎이 떨어지는 건 가장 슬픈 일. 내가 슬픈 시간 속에서 쌓은 것은 세상에서 나의 불행을 가장 큰 걸로 믿는 어리석음 뿐이었다 그 오해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무너졌을 나는 대낮에도 자꾸 봉두난발에 휘감겼다 그렇게 휘감겨 넘어진 우울을 벗고 명상하기 위해 신을 내몰았다는 어느 현자처럼 나는 절망하기 위해 귀찮은 신을 내몰았다 낙엽처럼 가벼운 말엔 넋을 놓고 나무둥치처럼 중대한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상에서,내 안에 끝없이 지속시켜온 열정이 내 안을 다 태워버린 후 발견한 문 한 짝, 가만 보니 열쇠는 담장 저쪽에서 잠겨 있었다 나는 어떤 출구도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애초에 입구가 막힌 삶을 살았던 것이다
세월
그러니까, 오뉴월 진초록 속을 뚫고 선홍 선홍 선홍빛 석류꽃 피는 일이 저토록 산뜻하고 해맑아서 새들도 꽃가지에서 꽃잎 따물고 저리 우수수 날아오른다면. 그러니까, 그 꽃그늘 새울음 아래 우리 가슴속 꽃 밝히고 새 날리며 우리 서로 얼굴 맞볼 때 네 맑은 눈동자 속에 내 얼굴 잦아들고 내 짙은 눈동자 속에 네 얼굴 젖어든다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윽고는 저기 청산이며 나무들이며 풀꽃들이며 대책없이 흔들어대는 쑥국새 울음에 뚜욱 뚜욱 뚜욱 석류꽃마저 지는 일이 단 하루라도 한시라도 늦춰만 진다면.
사과꽃 길에서 나는 우네
사과꽃 환한 길을 찰랑찰랑 너 걸어간 뒤에 길이란 길은 모두 그곳으로 열며 지나간 뒤에 그 향기 스친 가지마다 주렁주렁 거리는 네 얼굴 이윽고 볼따구니 볼따구니 하도나 빨개지어선 내 발목 삔 오랜 그리움은 청천(靑天)의 시간까지를 밝히리 길이란 길은 모두 바람이 붐비며 설렌다네
늘 새로운 門
오늘 아침 듣는 까치 소리는 그 목청을 간밤 은하 물에 씻은 듯. 오늘 아침 맡는 대기는 어느 고산의 석남화 밭을 스쳐온 듯.
아침부터 일렁이는 바람아, 넌 한번도 똑같은 몸짓으로 오지 않아서 아침부터 설레는 잎새들이 있고 나는 내 구규를 열어 너와 석인다.
어제는 비가 와서 부챗살 햇귀 퍼지자 온 들판이 반짝이는 수정밭인 듯. 오늘은 풋고추 된장에 혼자 먹는 밥도 달아서 만사가 한눈에 열리는 것도 알 듯 알 듯.
거기에 먼 여울물 소리 같은 서러움과 거기 물싸리꽃 위를 나는 빨간 고추잠자리 편대 같은 그리움도
좀 있으면 좋겠다.
보라, 내가 느낄 때 부는 새 바람 내가 우러를 때 열리는 하늘의 문.
綿綿함에 대하여
너 들어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이면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큰 잠
저 사람 아직도 저기 있네 감나무 그늘 아래 평상을 펴고 저 무량한 햇살에 윤기 잘잘 흐르는 감나무 잎새 헤아리네
저 사람 아직도 저기 있네 감나무 그늘 아래 큰 대자로 뻐드러져서 저 무량한 바람에 수천 수만 살랑거리는 감나무 잎새 헤아리네
텃밭에 참깨씨 마저 놓는 일 잠시 밀쳐두면 어떤가 사람이 잠시 게으르면 감꽃 뚝뚝, 지는 시간도 보고 사람이 스스로 가난하면 소나기 후두둑, 듣는 시간도 잊네
저 사람 아직도 저기에 있네 저 사람 마누라 화급을 다투는 소리 내질러도 밤꽃향기는 풍겨오고 뻐꾹새는 큰 잠을 달래고 하늘은 다시 청정하네
선운사 가는 길
마음의 걷잡을 수 없음을 하늘도 안다는 걸까. 비 뿌리다 해 비추다 다시 거센 바람으로 아직 외투 껴입지 못한 우리를 몰아세우는 날씨를 두고 그녀는 호랭이가 떼로 장가가는 날인갑다고 했다. 사랑 때문에, 정지된 화면처럼 일순 세상이 멎어버리던 시간의 경험을 가진 그녀의 말이 저기 둔덕에 까마득히 꽃사래치는 억새의 울음을 낳은 걸까. 비산비야를 지나고, 풍천장어를 먹으며, 논에서 살던 것이 먼 필리핀 앞바다로까지 알을 낳으러 가려면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곳에서 적응기간을 거쳐야만 바다로 들 어도 심장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그 장어의 생리를 이야기했다.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빨 으르렁거리는 파도를 만나버린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적응기간을 거쳐야 하는 것인가. 예의 파도며 비바람이며 으르렁거리는 것투성이인 만돌리 그 한적한 바닷가에 닿자마자, 선생은 대뜸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는 시구절을 읊어댔는데 귀밑머리가 새하얀 그는 학교 강의도 앗세 작파해버리고 우리를 맞아주었었다. 나이 오십에 아직도 시인지망생이라는 것이 또 수많은 갈매기 울음을 낳게 했으리라. 그때 세상엔 아직도 따뜻한 사람이 많을 거야 하고 말하곤 크 - 하고 울대를 터뜨려버린 김은 얼른 얼른 늙어버리고 싶은 깨끗한 절망을 아직도 간직한 친구였는데, 나는 그보다도 손이 너무 차거운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쏠렸고, 그녀는 결국 오소소 떨어대며 내 팔짱을 껴들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한순간 저 앞길에 걸린 찬란한 무지개를 보았지만, 아직도 미궁일 뿐인 하룻길을 안고 저녁 늦게 들어선 선운사 그 적막 속엔 여즉 불이 밝아 있다는 게 무척 다행스럽게만 생각되었다. 아, 그때 우수수 져내리던 잎새들은 또 무엇이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문이 있다
추상 같은 구중궁궐, 종묘 정전(正殿)의 문짝은 일부러 아귀를 맞추지 않았다 한다, 모셔둔 위패의 혼령이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기 위해서란다. 나뭇잎 하나가 흔들리면 다른 나뭇잎이 흔들리고 멧새가 울면 또 다람쥐가 쥐똥만 한 눈을 반짝이듯 서로가 드나드는 것은 애초에 우주의 일, 내가 어머니로부터 배운 말들과 내가 수많은 책들로부터 배운 지식과 내가 이웃들로부터 배운 사회로, 나 아닌 나를 살며 나는 아귀가 꼭 맞는 문을 만들어 닫았던 것인데, 가령 이런 경우가 있긴 있다. 말해질 수 없는 슬픔으로 남몰래 눈물을 삼키며 마른 장작개비 같던 네가 어느 날 곱게 갈아 끓인 잣죽같이 저미고 감싸드는 경우 나는 스스로 문풍지 우는 문이 되고 싶었다. 너의 상처가 나를 드나들며 새로운 영토를 만나는 그런 목숨을 꿈꾸어 본 적이 있긴 있는 것이다. 나뭇잎 하나가 흔들리니 다른 나뭇잎은 안 흔들리고 뱀이 지나가자 멧새가 푸나무서리에서 튀듯 내가 애인들로부터 배운 질투와 증오와 내가 세상으로부터 배운 상처와 추억과 내가 삶으로부터 배운 권태와 환멸과 죽음만으로 문을 닫아걸고선 나의 고독을 우겨댔던 것인데, 추상 같은 호령도 꺾지 못한 사당의 혼령이란 것도 사실 버리고는 갈 수 있으나 놔두고는 갈 수 없었던 사무치는 마음 아니겠는가, 그 마음 못 다하여 이 지상의 아귀가 맞지 않는 문으로 가끔씩은 사무쳐서 드나드는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死 因
세상에 아름다운 시신은 없다고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剖檢醫 박혜진 씨는 다만 사회가 외면하는 시신의 침묵을 묵묵히 대변할 뿐이라며 웃는다 부검 날은 몸에 배는 부패 냄새 때문에 밖에 나가 점심도 먹을 수 없는 그녀가 토막 난 사체의 위장을 가르고 썩어 문드러진 사체에서 피를 뽑고 유괴 후 숨진 아이 부검 때는 펑펑 울기도 한단다 하지만 그녀가 고독과 죽음을 관통하며 그토록 밝히고자 하는 死因은 저마다에게 어떻게든 있긴 있는 것일까
마음대로 처치할 수 있는 하인이 없고 공포를 휘두를 제국이 없어서 자신을 증오하는 우리들의 너무도 의당한 천국에서 우리들의 죽음은 스스로 저당 잡힌 게 아니던가 인간에 대한 예의, 그 관대한 거짓말 때문에 오월 강변의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보석처럼 짤랑거린다는 말도 나온 게 아니던가
오월의 숲속에선 저절로 일렁이네
비 오고 활짝 개인 날인데도 오늘은 우체부조차 오지 않는 이 슬쓸한 자리보전, 떨치고 뒷산 숲속에 드니 일렁이는 게 생생한 바람인지 제 금보석을 마구 뿌리는 햇살인지 온갖 젖은 초록과 상관하는 것인데 은사시, 자작나무는 차르르 차르르 개느삼, 수수꽃다리는 흐느적 흐느적 왕머루, 청미래덩굴은 치렁치렁 일렁이는 것이 당연할 뿐, 여기서 제 모자란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랑이여, 나 저절로 일렁이네 오월 숲에선 뻐꾸기 한나절 호곡도 가슴 깊숙이 녹아내릴 뿐 세상은 너무 억울하지도 않네
그렇다네, 세월이 잠깐 비껴난 숲에서 일렁이는 것들이 진저리치다 산꿩의 썽썽한 목청을 틔울 때 사랑이여, 난 이 지상의 외로움 조팝꽃 그 쌀알 수만큼은 녹이겠네 아니아니 또르르륵 또르르륵 굴리는 방울새는 은방울꽃을 흔들고 핑핑핑 크루루 하고 쏘는 흰눈썹황금새는 산괴불주머니를 터뜨린다면 다만 이것들의 신기한 재주에 놀라 흐린 눈 동그랗게만 떠보아도 마음의 환한 자리 하나 어찌 못 얻으랴 그 누구라서 농축된 외로움 없으랴만 저 잎새 하나하나로 좀 녹여본다면 계곡의 물소리로 흘러본다면
어느 시인은 저 찌르레기 소리를 쌀 씻어 안치는 소리라 했지 오늘은 이팝나무꽃에다 쏟아붓는군 또 금 주고 사고 싶은 저 금붓꽃의 이파리엔 정녕 어찌 하지 못할 뿐 이 오월 숲의 초록 절정, 이 생생한 일렁임과 아득히 젖어오는 그 무슨 은총과 목숨의 벅찬 숨결 한 자락이 쟁명한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순간을 무척은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없을 때 사랑이여, 나는 내 생의 죄업을 저만치 밀어둘 참이겠네 그렇다네, 서러울 것 하나 없이 서러움도 가득 일렁이는 오월 숲에서 비껴난 세월을 다시 깨우치는 물소리에 서러움도 그만그만하게 여겨질 때까지
사랑이여, 나 오월 숲에서 천지를 우러러 사랑의 길을 묻네 사랑이라서 무슨 거룩한 게 아닐 테지만 저 일렁이는 것들이 하루 몽땅 저물어 머루빛 속 은하수로 일렁인다면 나 그만큼은 드높아야 하네 드높아서는 세상의 길 잃은 사랑의 길을 한껏 비추며 그대로 한번쯤 지워져도 좋을 일이라면 이 설레는 숲에서 저절로 일렁여도 그 무슨 산통 깨는 일은 아닐 테지 저봐, 이젠 어스름 속의 잎새들이 서로의 숨결을 뽑아내 서로를 속삭여주듯 내 아픈 몸의 우선한 것으론 저 무덤 앞 제비꽃이라도 일별하겠네
초록바람의 전언
뒷동산 청솔잎을 빗질해주던 바람이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솔나무의 속삭임을 듣고 푸른 햇살 요동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하자. 달려가선, 거기 미루나무에게 전하니 알았다 알았다는 듯 나무는 잎새를 흔들어 강물 위에 짤랑짤랑 구슬알을 쏟아냈다 하자. 그 의중 알아챈 바람이 이젠 그 누구보단 앞들 보리밭에서 물결치듯 김을 매다 이마의 구슬땀 씻어올리는 여인에게 전하니, 여인이야 이윽고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곤 눈앞 가득 일어서는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무언가 일별을 보냈다 하자.
아무려면 어떤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 초록으로 짙어가는 오월도 청청한 날에, 소쩍새는 또 바람결에 제 한 목청 다 싣는 날에.
坐忘
언젠가 그 언젠가 나주군 금천에 가서 배꽃 보다 돌아왔네 때아닌 서설 덮인 풍경의 온 마을의 배꽃바다, 나 아무 작정 없이 연락도 없이 거기서 사라지고 돌아왔네 워매, 바람 좀 자거라 저놈의 배꽃 다 져부네 거기 금천다방의 미스 홍, 그 장탄식, 하얀 정은 꿈이던가 생시던가 한 세상 더듬었네 더듬는 마음마저 아득해지다 나 그 바다 어디쯤에서 한 잎 배꽃으로 날리거나 들고 난 자취도 없이 내 한 서러움 사라지던 어제던가 내일이던가 나주군 금천에 가서 배꽃 보고 돌아왔네 梨花에 月白은 못 보고 그 청초 향기도 못 듣고 나 거기 두고 돌아와 앉은 자리 환한 자리, 배꽃바다 없는 자리
연자줏빛 그늘
오뉴월 수수꽃다리꽃이 바람에 우수수거릴 때마다 그 청량한 향기가 보이지 않는 사방의 별을 생생히 닦아내는데요. 수수꽃다리꽃을 정혼자에게 보내선 파혼을 통고했다는 한 여인은 저 꽃을 일러 젊은 날의 추억이라 했다지요. 그런 서럽고 서느러운 그늘이 드리워져 수수꽃다리꽃도 우리네 사랑도 연자줏빛으로 웅숭 깊어지는 건 아닐런지요.
미루나무 연가
저 미루나무 바람에 물살쳐선 난 어쩌나, 앞들에선 치자꽃 향기. 저 이파리 이파리들 햇빛에 은구슬 튀겨선 난 무슨 말 하나. 뒷산에선 꾀꼬리 소리. 저 은구슬 만큼 많은 속엣말 하나 못 꺼내고 저 설렘으로만 온통 설레며 난 차마 어쩌나, 강물 위엔 은어떼빛. 차라리 저기 저렇게 흰구름은 감아돌고 미루나무는 제 키를 더욱 높이고 마는데, 너는 다만 긴 머리칼 날리고 나는 다만 눈부셔 고개 숙이니, 솔봉이야, 혈짤배기여 바람은 어쩌려고 햇빛은 또 어쩌려고 무장 무량한 것이냐.
눈물을 위하여
저 오월 맑은 햇살 속 강변의 미루나무로 서고 싶다 미풍 한자락에도 연초록 이파리들 반짝반짝, 한량없는 물살로 파닥이며 저렇듯 굽이굽이, 제 세월의 피를 흐르는 강물에 기인 그림자 드리우고 싶다 그러다 그대 이윽고 강둑에 우뚝 나서 윤기 흐르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며 저 강물 끝으로 고개 드는 그대의 두 눈 가득 살아 글썽이는 그 무슨 슬픔 그 무슨 아름다움을 위해서면 그대의 묵묵한 배경이 되어도 좋다 그대의 등 뒤로 돌아가 가만히 서서 나 또한 강 끝 저 멀리로 눈 드는 멀쑥한 뼈의 미루나무나 되고 싶다
봄날은 간다
강변에 참배꽃 피고 강물에 참배꽃 어리니 너를 사랑한 때처럼 일렁일렁, 세상이 환하더니 강변에 참배꽃 지고 강물에 참배꽃 흐르니 네게 닿지 못한 때처럼 울먹울먹 가슴이 미어진다 사랑이 오고 가는 동안 외로움은 이만치에서 그리움은 저만치에서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것 강변엔 또 어쩌려고 능금꽃 자욱히 일고 강물을 차는 해오라기야 차마 또 어쩌지 못하고
사과꽃길에서 나는 우네
사과꽃 환한 길을 찰랑 찰랑 너 걸어간 뒤에
길이란 길은 모두 그곳으로 열며 지나간 뒤에
그 향기 스친 가지마다 주렁주렁 걸리는 네 얼굴
이윽고 볼따구니 볼따구니 하도나 빨개지어선
내 발목 삔 오랜 그리움은 청천 (靑天)의 시간까지를 밝히리
길이란 길은 모두 바람이 붐비며 설렌다네
이 한도 끝도 없는 유정이라니
누군가 봄바람에 꽃이 날리는 꿈을 꾸면 깨어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던가
하물며 시방 난분분 날리는 꽃비를 맞는 이 한도 끝도 없는 유정이라니!
저기 저 금결 은결 반짝이는 강물이거나 무장무장 번지는 연두 초록이라기보단
꽃을 만지면 향기가 손에 가득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꽃은 지는 것인데
나는 차마 본다, 수많은 시간의 부유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너무나 크고 빛나는 너의 눈물
新餓鬼傳
키르티무카, 영광의 얼굴이라는 이 괴물은 사실 얼굴 하나만 덩그렇게 남은 아귀다, 그처럼 늘 허기져서 피골상접과 봉두난발을 일삼는 그는 오늘은 급기야 골수검사를 하고 나왔다.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으라는 말에 발부터 자신을 차례로 먹어 올라갔던 아귀처럼 처음에 그는 피부터 뽑았다, 거간꾼의 모사로 철없는 방송에서야 그는 헌혈왕에 뽑히기도 했지만 헌혈 이후 주는 빵과 우유의 그 환장할 맛, 아니 그보다는 국가적으로 피가 모자라는 요즘엔 그 피의 거래로 한 달 이상씩을 버티는 그다. 얼굴만 덩그렇게 남고서야, 삶이 무엇인지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준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 내게 올 자격이 없다고 한 시바 신, 그의 자비를 입은 아귀처럼 왕성한 식욕을 위해 얼마 전에 남에게 신장 하나를 떼주어 자기의 자비를 스스로 완성하고 있는 그인데, 이번골수 거래까지 성공하고 나면 한재산 잡아서 다만 몇 년이라도 허기를 면해볼 참이다. 사실 남의 것을 훔친다거나 빼앗을 수도 있겠지만 날이면 날마다 남을 딛는 일조차 못하여 회사라는 지옥에서 출문을 당한 그로서는 자기가 할 수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일이 자기를 스스로 먹는 일뿐이라는 悟道가 있었다. 개미조차 남의 산 몸뚱이를 끌고 갈 수 밖에 없는 모든 숨탄것의 조건을 깨고 자기를 먹는다는게 사실 신의 자비를 입지 않고 어찌 가능한 일이랴. 그러고 보면 자기의 고독과 연애를 파먹고 사는 시인 또한 키르티무카, 영광의 얼굴 아니던가.
문득
노타리 쳐서 물 방방히 실어놓은 내일쯤엔 모낼 논에 어디선가 날아내린 흰 고니 두 마리 그 긴 부리로 무언가를 콕콕 찍어댄다
모판을 나르다 문득 그 광경 바라보고 선 늙은 양주
그 무슨 하늘사자 같은 새의 흰 날개 타고 훨훨 날아가면 아아 거기 꿈꾸던 저승 아닐까, 생각에 시방 그만 눈시울은 젖는가 보다
화음
나의 사랑은 가령 네 솔숲에 부는 바람이라 할까 그 바람 끌어안고 또 흘려보내며 온몸으로 울음소리 내는 것이 너의 사랑이라 할까
나의 바람 그러나 네 솔숲에서만 그예 싱싱하고 너의 그지없는 울음 또한 내 바람 맞아서만 푸르게 빗질하는 그런 비밀이라 할까 우리의 사랑
흐르는 것들과 함께 춤을
꾸역꾸역 뿜어대는 격렬한 사정의 용틀임 같은 화개(花開) 십 리, 다하기 전에 우수수 펄펄 이내 바람의 길을 따르는 십 리 낙화(落花)는, 섬진강 물 위에 차마 읽을 수 없는 문장을 수놓고 먼 데서 아닌 데선 늦게야 치명상을 확인한 병사가 홀로 떨구는 고개처럼 구욱우욱 멧비둘기 운다
강변 모래밭에 취한 처녀들이여 오, 춤을 멈추지 말라 꽃잎 맞은 자리마다 화상 입겠다.
꽃빛 꽃빛 복사꽃빛
꽃빛 꽃빛 복사꽃빛 네 두 볼에 끼친 요런 빛이런가
꽃빛 꽃빛 복사꽃빛 네 땀이슬 맺힌 도도한 가슴의 차마 눈뜨고는 못 볼 그 빛이런가.
꽃빛 꽃빛 복사꽃빛 도화수 아직 시린 물가에서 네 치마에 어디에 함부로 쏟는 도화주 후끈한 술이여.
桃色이라고 했거니 자물쓴다고 했거니 그렇게 질탕한 것도 그만 무릉과 이승간의 꽃빛 탓이거니
꽃빛 꽃빛 복사꽃빛의 하룻날, 저렇게 꽃잎은 지고 풀풀 지고 저렇게 나비는 날고 활활 날고
너와 나는 우련우련하여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곡지통으로 가는 봄날을 말릴 일이거나. 서로를 또 한번 훔친다거나.
봄의 깊이
묻지 말게나 세상의 날은 저무는데 농약에 절고 금비에 시달려 시어터진 앞들 검은그루에 공동산에서 퍼나른 황토와 저실내 모둔 쇠똥두엄을 넣고 저기 저렇게 탈탈탈탈 애벌갈이를 하는 이 뉘냐고
묻지 말게나 지난해 돈사지 못한 토방에 섬섬 쌓인 나락가마들 쥐가 뚫고 날짐승이 죄 물어가도 오늘은 다시 찬샘배미에 나가 삼동에 얼부푼 논두렁 다져 거기 눈녹이물 가두는 이 또 웬 하느님이냐고
묻지, 묻지 말게나 우수 지나 동풍은 그예 불어와 그 바람결에 온몸의 신경통 씻고 보리밭에 날선 노염도 녹여내며 안마당에선 호호백발의 저 봄 씨나락을 고르는 때 어디선가 텃밭 귀영치에선 매화꽃도 펑펑 터지고 있잖느냐고
구례구역의 사랑노래
기차는 저녁 일곱 시에 떠나네 이렇게는 일렁이는 강물 다 놔두고 강물 위에 부서지는 노을 다 놔두고
기차는 저녁 일곱 시에 떠나네 저렇게는 우뚝한 산봉우리 다 놔두고 산정 위에 막 돋는 별들 다 놔두고
네가 가고 나는 남는 이 저녁 역에서 외로움은 산 속 깊은 쑥국새 소리 그리움은 강심 깊이 숨어드는 숭어떼 빛
기차는 저녁 일곱 시에 떠나네 저렇게는 산모퉁이를 도는 기적 소리에 이렇게는 강물도 떨리는 푸르른 저녁
굴뚝 속의 새를 날려 보내다
높디나 높은 굴뚝 속에 빠진 새를 구하기 위하여 높디나 높은 굴뚝을 넘어뜨린 시인 부부가 있다* 처음엔 굴을 파고 들어간 생쥐인 줄 알았다가 하룻밤이 지나서도 그치지 않는 소리 틀림없이 푸드득푸드득, 목숨을 타전하는 소리에 그들의 푸르른 심금은 떨리고 떨렸던 것이다
내게는 아랫마을 방앗간집 아들과 통정했다가 가난하다고 해서 버림받은 누이가 있다 해산 날에 그 집 향해 실려가다가 싸락눈에 삭풍 치는 신작로 한가운데서 제 이빨로 탯줄 끊어 몸을 풀었던 누이, 하지만 그 문전에서 아이만 빼앗긴 채 내쫓겨서 끝내 정신병동에 갇혀버린 누이의 마음은 어땟을까
우리에겐 정녕 바람 불어도 떨리는 게 없어서 등굣길, 청천벽력 같은 미군 장갑차에 압사한 어리디어린 순결 앞에서 또 유구무언일 뿐인가
안암팎의 그리움 죄다 곱사등이인 세상에서 둘러보고 둘러보아도 굴뚝 속 검댕일 뿐인 칠흑 절망을 더는 어쩌지 못한 생들이, 그 속에서 자기 날개를 짓찧는 아픔으로 되레 칠흑 고독을 이기려는 생들이, 어찌 새만 못하랴
쓰러진 굴뚝 밑으로 어리벙벙, 마침내 기어 나와 포르릉, 푸르른 자유를 나는 새를 바라보는 시인 부부의 환한 심금에 신의 연주가 있으리
그리운 죄
산 아래 사는 내가 산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이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뜨거운 죄 아니랴 포르릉 ,어치가 날며 흩어놓은 눈 꽃의 길을 또한 나는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