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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공부방_160713_박윤철교무님_생명의 눈으로 개벽하자, 수운과 소태산의 만남.hwp
원기 101년 7월 13일 수요마음공부방
학산 박윤철 교무님 <생명의 눈으로 개벽하자, 수운과 소태산의 만남>
초벌 : 이도심 / 완성 : 김혜진
오늘 세 번째 강의가 되겠는데 동학강좌 제3장 생명의 세계관, 개벽, 그리고 수운과 소태산 대종사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제 그동안의 동학혁명을 앞에서 이끌었던 전봉준 장군하고 그 동학혁명이 운영되던 시기에 동학의 최고지도자인 해월 최시형 선생님이 둘이 아니었다, 전혀 대립적이지 않았다는 이런 취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드리고 강의로 들어가겠습니다. 그 두 분이 대립적이지 않았다는 단서 또는 실마리를 백범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에서 찾았어요. 시중에서 가장 편하고 알기 쉽게 읽을 수 있는 백범일지는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창원대학교 사학과 도진순 교수님이 주석을 달아주신 분입니다. 한국현대사의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분입니다. 나중에 꼭 동학뿐만 아니라 김구라는 분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계신 분인지 기본적으로 한국인이라면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마치시면 책을 좀 읽어보시고 읽다보면 감동과 눈물이 함께할 것이고, 주변 자녀분들과 손자들에게도 권할 만합니다.
백범김구선생의 일지 속에 전봉준이 전라도에서 병사를 일으켜서 동학의 도인들이 수없이 타살 당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해월선생님이 호랑이가 지금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앉아 있을 수 있겠소냐 하며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싸우러 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걸 지금까지 모든 학자들이 1894년 9월 이후로 해석을 했다. 저는 9월이 아니라 3월, 처음부터로 봤던 이유는 백범일지 속에 백범선생님이 동학운동이 일어났던 갑오년 1년 전 계사년 가을에 황해도를 출발하여 그 이듬해에 해월 선생님을 만납니다. 거기서 해월 선생이 숨어계셨다는 곳까지를 계산을 하자면 아무리 더딘 걸음으로 걸어와도 3개월이 안 걸리는 거리에요. 도저히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맞서 싸우라는 이야기를 9월로 해석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반드시 3월의 이야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전봉준과 해월선생 둘이 대립해서 동학운동이 실패를 했고, 동학 때문에 일본이 들어와서 식민지로 되었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사실 나라가 못 막는 것을 민초들이 일어나서 막으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9월이 아니고 3월이라고 주장을 하니까, 그동안 동학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인식이 있으니까 그런 상황에 1995년에 일본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인류학 연구실에서 전라남도 진도 출신 동학농민 지도자 해월이 발견되는 사건이 터집니다. 그 당시에는 조선일보, 한겨레 등의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언론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한 쪽으로 기울어져있는 생각을 했는지, 그 사건이 터진 순간에 대한민국에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휴직을 하였습니다. 1년 휴직을 허가 받고, 97년 4월에 홋카이도 대학에 들어섰어요. 그 당시 저의 일본어 실력은 인사만 나눌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1년이 넘게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어요. 근데 그 당시 제가 학교의 중추적인 책임을 맡고 있었고, 또 97년 당시 IMF가 터지고 영산에서도 지원하기에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더 있어야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잘못했다고 생각 하는데, 그래도 그 당시에는 이 시기를 놓치면 더 이상의 진상조사는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떼를 썼어요. 그랬더니 휴직 기간을 늘려주셨고, 그 이듬해에 박사과정을 진학을 해서 4년 동안 일본 유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동학 자료가 제일 많이 있는 곳이 외무성 산하의 외교사료관이라는 데가 있어요. 그 외교사료관을 일년에 적으면 두 번, 많으면 네 번씩 가고, 또 제 연구를 도와주시던 교수님이 학교에다 신청을 해가지고 비행기 표라든지 다 해주셨어요. 이렇게 자료들을 찾아내보니까 일본자료에 해월선생이과 동학 전봉준장군이 함께 3월부터 손잡고 싸웠던 내용이 한 5~6개 기록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 국내로 다시 들어와서 국내자료를 다시 재검토했더니 <동비토록>, <양호전기> 등에서 똑같은 내용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학계에다가 발표를 하고 소개를 했습니다.
전봉준 장군과 해월 선생님이 대립적이지 않았단 얘기는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해야 될 부분이에요. 그래서 이제 지난주에 요약했던 키워드가 ‘영성’과 ‘혁명’이에요, 자기구원과 세상구원. 제가 안암교당의 특강을 흔쾌히 수락한 이유 중 하나는 장차 제 뒤를 이을 교무들을 한 10명 발굴하려고 온겁니다. 출가를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출가라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가장 최고의 삶을 살다간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봤을 때, 결국 자기완성과 이웃사랑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목적이에요. 자기완성이 결국 ‘영성’이고, 이웃사랑이 결국 ‘혁명’인데, ‘성불제중’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목적이지요? 대종사님이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님한테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해야 할 일이 ‘성불’과 ‘제중’, 그 두 가지라고 했잖아요. 자기완성과 세상구원... 그 두 가지 측면에서 해월 선생은 영성(자기완성) 쪽이 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세상 구원에 대한, 이웃사랑에 대한 그것이 충돌하고 있거나 배제되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거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봉준 장군도 마찬가집니다. 너는 왜 동학을 좋아했느냐 하고 물었을 때 ‘수심경청’해서 ‘보국안민’하자는 것이 동학이었기 때문에 동학을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이 얘기는 자기완성과 세상구원을 통일하려고 하는 그 두 가지 길을 원만하게 우리식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동학에다가 목숨을 걸고 좋아했다는 표현을 했단 말이죠. 전봉준 장군을 굳이 우리가 비교한다면 ‘혁명’쪽에 액센트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완성이나 영성의 측면을 소외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영성과 혁명을 100으로 봤을 때 해월선생님은 영성 쪽이 51, 전봉준선생님은 혁명 쪽이 51, 나머지 49는 똑같다고 보시면 돼요.
이런 모습으로 동학농민운동이 갑오년에 전개가 됐어요. 그 전개 과정을 얘기하면서 오늘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1894년 음력으로 1월 10일, 양력으로 2월 11일 정도 됩니다. 조병갑의 악정에 반대해서 전봉준 장군이 고부에서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해가지고, 1894년 음력으로 11월 초에 우금치에서 혈투를 벌입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전봉준 공추’라는 마지막 신문 기록에 따르면,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의 접전을 해요. 우금치에서 10월말에 일주일정도 격전을 벌이고, 11월초에 또 일주일동안 격전을 벌이는데, 그 격전을 벌인 내용이 그 분의 최후 진술 속에 남아있어요. 일주일 접전을 하고나니 그가 거느렸던 1만명의 동학군이 3000명이 줄었고, 그래서 그 패배를 되새기면서 논산으로 후퇴해서 다시 정비를 해가지고 2차 접전을 마치고 났더니 휘하에 500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기록이 최후 신문에 남아있습니다. 9500명이 다 희생되지는 않았겠지만, 거의 대다수가 우금치 전쟁이후로 산화를 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피눈물 흘리면서 다시 후퇴를 해가지고, 지금까지는 우리가 우금치 전투에서 끝난 줄 알았어요. 그동안의 1995년 추적과정에서 우금치와 똑같은 규모의 대 혈전이 우금치와 40키로 떨어져있는 곳에서 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우금치에서는 500명의 동학군과 200명의 일본군이 싸워서 일본군 전사자는 단 한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동학농민군에 총을 맞아 전사한 일본군이 연산전투에서 나와요. 그 연산전투가 12월 10일경에 거기서 대전투를 벌이고 역시나 거기서도 밀립니다. 밀려서 이제 남쪽으로 후퇴를 해서 순창에서 체포가 되어가지고 1895년 음력 3월 29일에 사형선고를 받지요. 그래서 지금 처형이 되어가지고 한남대교에서 들어오면 예전에 오른쪽으로 단국대가 있어요. 그 언덕에 시신이 버려졌다고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 시신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찌됐던 그렇게 해서 95년 양력으로 4월, 음력으론 3월말에 처형 당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끝나는데,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1년 전 94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년 이상을 살펴보면 민초들이 일어나서 싸워 1년 이상을 간 전투가 없어요. 일본에 가서 우리와 같은 민중운동이 있었는가 보니, 딱 10년 전에 자유민권이라는 운동이 있었는데 1주일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중국 또한 태평천국혁명이 있었는데, 상당히 규모가 있어요. 그런데 내세운 혁명 이념 차원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이념과 비교가 안 됩니다. 태평천국운동이 마지막에 장렬하게 좌절되어갈 때 그 지도부끼리 벌인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보면, 전혀 혁명이라고 볼 수 없는 성격의 운동이에요. 우리 동학농민운동은 조직면, 기간면, 혁명이념면에서 다른 운동들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래서 일본에 계시는 우리 제일동포 중 한국근현대사 학자 최고의 전문가 중에 한분인 조경달이라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1998년에 역전을 내신게 <이단의 민중반란: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책을 일본의 최고 권위 있는 “이와나미 서점”이라는 곳에 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세계 민중운동사 민중혁명사를 살펴보면 동학농민운동-그분(조경달)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 표현-만큼 규모나 혁명이념에서 비교할 만한 민중운동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19세기 말 ~ 20세기 사이에 민중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의, 최고 수준의 민중혁명운동이라는 겁니다. 한국은 아직도 그런 얘기하는 학자가 별로 없어요.
어찌됐든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데, 여기서 들어가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이!?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조선 인구가 1052만명이라는 기록이 나오고, 30년 이상을 발로 뛰면서 전국 팔도를 조사해보니까 적어도 1/4~1/3(250만~350만명)이 동학군이었는데 지금 우리시대와 같이 인프라가 전혀 없던 시대에 어떻게 그 엄청난 인원의 민초들이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보겠다고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냥 일어났을까요? 동학농민운동으로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예요. 그게 무엇이었을까? 그걸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 돼요.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못 먹고, 못 입고, 억눌리고, 두들겨 맞고 그러니까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 면도 있죠.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정도가 아니었어요. 홍종식이라는 서산 출신의 접주가 나중에 살아남아서 증언하기를 동학군에 들어가면 사람차별이 없었대요. 하루 일찍 들어가면 하루 먼저 양반이 되고, 하루 먼저 늦게 들어가면 하루 더 쌍놈이 되었고, 그리고 동학에 들어가면 하루도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동학은 확실히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비전을 제시했다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손병희선생 얘기도 지난번에 했잖아요. 어찌됐든 이 동학에 뛰어들면 그 엄청난 차별과 억압의 시대에 한사람의 인간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어요. 원불교 식으로 말하면 처처불상의 부처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 것과 관련돼서 사람을 하늘로 대접하는 실천적 이야기는 해월선생님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증명이 되고 있죠. 당신이 젊을 적 머슴살이를 했기 때문에 동학에 뛰어든 계기가 됐을 수 있죠. 사람을 어떻게 차별할 수 있는가? 사람은 곧 하늘이니까, 사람 차별하지 말고 하늘처럼 모셔라, 베 짜는 며느리가 하늘님이다는 얘기들이 이제 그 어떤 평등사상, 그다음에 이제 유무상자라고 이야기 했었잖아요. 어느 방면으로든지 앞서있는 사람이 ‘유’이다. 지식, 몸이 갖고 있는 기술 등 요즘 새로운 혁명의 세계에서는요, 신체지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신체지를 엄청나게 가지고 있으셨다. 저희 어머니가 한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어머님이 엄청나게 맛있는 엿을 만들 수 있는, 엄청나게 맛있는 동치미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런 것들은 대단한 ‘지’입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는 어떤 지혜, 지식을 생각하는데, 몸으로 전승되는 이 신체지라고 하는건 엄청난 거예요. 그러니까 이론지로서 앞선 사람은 그것으로 ‘유’의 역할을 하는 거고 신체지를 앞서 갖고 계신 분은 그것으로 ‘유’입니다.
오면서 책을 하나 사보려고 스마트폰으로 무슨 책을 검색하면서 왔냐면, 약선이라는 말이 요즘 많이 써요. 몸에 좋은, 약이 될 수 있는 음식을 약선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전문가가 원광대 출신 곽준수라는 분 계세요. 예전에 <야생초 편지>라는 글을 쓰신 황대권 선생님 이상으로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계세요. 그런데 그분이 학문으로 배운 것만이 아니고, 직접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경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례들을 찾아서 데이터화 하고 있대요. 신체지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깐 이 세상 사람치고 유 없는 사람이 없어요. 또 무 없는 사람이 없다고요. 그래서 그 유무상자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인 게 아니에요. 굉장히 끈끈한 일종의 공동체인거죠. 어느 정도로 끈끈하냐면, 그 동학군이 몇 십년동안 탄압을 받았으니까, 동학농민들의 선후배 동지가 체포되어서 수감되면, 지금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인가 있잖아요? 민가협처럼 뒷바라지 하는 팀이 구성되어가지고, 접주가 한분 체보되었다면, 재빨리 가족들을 다른 고을로 피신시켜요. 피신을 시키면 살림기반이 없으니 굉장히 살기 어렵잖아요. 그러면 전부다 십시일반으로 도와요. 어떻게 돕냐면 근검절약해서 도와요. 우리로 치면 저축조합운동과 같은 그런 방식으로요. 그러면서 그런 통문이 해월선생님을 예를 들면 자기 재산을 막 있는 대로 털어서 남을 돕는 다는 일이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진수성찬으로 먹을 것을 국수 한 그릇 먹어서 절약되는 돈으로 도우라면 할 수 있잖아요, 담배 하루 열 개 피던 것 갑자기 끊으면 금단현상 오니까, 10개를 8개로, 7개 줄이며 절약 되는 돈, 그런 식으로 금주, 단연, 육식을 금하고 사치를 금하는 통문들이 남아있어요. 그렇게 해서 절약된 돈으로 감옥에 계신 고통 받는 우리 동지들을 다 지켜내는 거예요. 얼마나 힘이 되겠어요. 그런 끈끈한 것들이 계속 유지가 되는 거예요. 그냥 세상 바꾸자 하는 정신으로만 되는 건 아니지요. 인간적으로, 정서적으로 굉장히 강력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게 동학 조직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러면 궁극적으로 그 사람들이 왜 뭉쳤을까?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생명의 세계관”, 사람을 살리고자 했어요. 동학농민군이 발표한 행동관념 규율이 널리 알고 있는 것이 있다. 12개조 기율이라는 게 있어요. 이게 한국 사회에 다 알려져 있어요. 좀 관심 갖는 사람은 알아요. 12개조 폐정개혁안, 12개조 기율은 아마 정상적으로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들은 다 알 것이에요. 12개조 기율 앞에 전문이 있더라고요. 우리 동학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이 목숨만은 해치지 않으며, 행진하면서 지나갈 때 절대 민폐를 끼치지 않고, 효자, 충신, 열녀, 존경할만한 학자가 사는 동네 십 리 안에는 절대 주둔하지 않는다. 제일 앞부분에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폭동입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손자병법 이상의 수준의 내용이잖아요. 이게 어디서 왔을까요? 동학의 ‘사람은 하늘이다.’에서 온 거에요. 전봉준 장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동학군들 막 끌어 모을 때, 영광 법성포에 그 당시에 전라도 28개 고을의 세금을 걷어서 서울로 보내는 조창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급관리들이 많지요. 소위 아전, 향리라고 하는, 향리를 거꾸로 하면 이향이잖아요. 그래서 법성포 이향들에게 보내는 통문이 남아있는데 핵심 내용이 뭐냐면, ‘너희들도 피해자다. 그러니 와서 사실대로 이실직고를 하면 해결의 방책이 있으니 자진신고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적으로 몰아가지고 일망타진하고 그런 식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끌어들여서 뭔가 큰 체계, 더 큰 세계에 눈을 뜨도록 했어요.
공주1차전투를 마치고 전봉준장군이 한 일이 뭐냐면, 충청감사 박재순한테 호소문을 보냅니다. 여기서 잠시 삼천포로 좀 빠져보겠습니다. 이 박재순은 친일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면면에 걸쳐서 친일행위를 조사한 결과 명성황후 시해사건부터 1910년 나라를 뺏길 때까지 모든 조목에 가장 전형적인 친일, 악질적인 친일파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 둘째 딸이 고려대 철학과 당시 10년 전 쯤 친구들을 몇몇 집으로 데려왔어요. 그 친구 중에 박모양이 있었어요. 나중에 봤더니 박재순의 증손자가 제 딸하고 친구였어요. 그것이 우리 살아있는 역사에요. 그 아버지는 유명한 고려대 교수였답니다. 어찌 되었든 박재순에게 ‘당신과 내가 적이 아니다. 진짜 적은 일본놈이 아니냐? 우리가 일본놈을 물리치기 위해 합력하자!’ 라고 그 호소문을 쓸 때 아마 피눈물을 흘렸겠지요. 끝내 외면하지요 박재순은. 어찌되었든 간에 동학의 정신이나 동학농민군들이 궁극적으로 실천하고 실현하려고 했던 것은 생명의 소중함, 사람을 살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많은 악질적 관리들이 동학 농민군에게 공격을 받고 그랬지만, 우리는 대체로 그런 공격만 했다고 알지, 동학군들이 진정한 지식인, 청백리 관리들 절대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 두 가지 사례를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 사드 문제로 시끄러운 경상남도 성주. 성주에 가면 성주를 대표하는 민족의 큰 어른이 계십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님입니다. 이분은 한말에 과거에 합격을 해서 젊어서 이제 종 몇 품정도의 관리로 출사를 하다가 을사늑약(1905)이 강제로 체결된 것을 보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소를 올린 뒤 사직을 하고 집에 내려와서 술로 세월을 보냈어요. 그 때가 30 대 후반인데, 그 시기에 우리 이 땅의 참된 관리나 지식인들은 그게 있지요. 나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그 나라의 욕을 해결하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참여해야 돼요. 그게 유학의 정신이에요. 그런데 그걸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삶의 의지를 전혀 상실해버리고, 술로 울분을 토했어요. 그 당시 술로 세월을 보내던 심산님의 어머니께서 타일렀는데, 심산 선생님의 가문이 지금으로 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였어요. 대단한 명문가에요. 어떤 명문가냐면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싸우면서 전사한 경상도 관찰사 학봉 김성일의 의성 김씨 후손이에요.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런 자식인데 어떻게 이렇게 술로 세월을 탕진하고 있는냐는 그 말에 깨우치셔가지고, 이분이 마흔살에 해외로 망명을 합니다. 그래서 상해의 임시정부 요인이 되고, 마흔이 넘는 나이에 군자금을 모으려고 국내로 들어와요. 아마 상해임시정부의 요인들 중에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국내에 잠입해가지고 독립자금을 모금한 사례는 심산님이 유일할 겁니다. 체포가 되지요. 그래서 이제 대구 감옥에서 굉장히 가혹한 고문 끝에 절름발이가 되고 평생 절름발이로 사셨어요. 그렇게 투쟁을 하신 어른이고, 이승만 정권에는 끝까지 내 눈으로 이승만 당신의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죽겠다고 할 정도로 기개 있는 반독재 싸움을 하셨던 대단한 분인데, 동학농민군이 성주로 갔을 때 그 가문에 손끝하나 털끝하나도 안 건드렸어요. 효, 재, 충신의 마을의 십 리 안엔 주둔 안한다고 한 것을 그대로 실천했어요.
그게 이제 경상북도의 경우는 심산선생님의 가문이고, 전라남도는 어디에 그 사실을 확인했냐면 장성에 가면 또 가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성씨가 있죠. 기 씨, 고봉 기대승 선생의 후손이고, 한 말에 의병장이 대 여섯분이 나오신 그런 집안인데, 이 집안의 손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어요. 기씨 집안의 사위로 들어간 교수님이 전북대학교에 계세요.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같이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집안에 전해온 얘기들을 동학군들이 와서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뭘 알고 있는 거잖아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말이죠. 그렇지만, 악질적인 관리들은 처벌을 했지요. 어찌됐던 간에 동학 농민군들을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하고 반드시 살려내야 하고, 재조명 해야 될 내용이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정신이었어요. 그게 어디서 왔냐면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에서 왔어요. 사람뿐 만 아니라 만물도 하늘이라고 하는 건데 일단 사람 문제가 제일 중요했으니까요. 이 생명의 세계관이라는 것을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바로 그 부분이 동학 이후에 이 땅에 등장하는 여러 새 종교들, 증산 강일순선생의 증산도나 우리 소태산 대종사님의 원불교에서나 가장 바탕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정신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세계관, 철학, 거기에 바탕 해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생명이 생명답게 대접받고, 생명이 생명답게 유지를 해서 살아가려면 동학 농민군들은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개벽이에요. 오늘 두 번째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개벽입니다. 원불교도 개벽종교이죠? 한국 근대의 큰 정신적 흐름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개벽종교가 잇따라 계속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희망적인 사항은 이것을 혁명적으로도 평가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서해안 쪽으로 이르는 지역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이 개벽 종교적 전통이 서해안 쪽에 벨트를 이루고 있어요. 동학은 경상도 경주에서 생겼지만, 혁명으로 꼽힌 것은 전라도에서 꼽히잖아요? 그 뒤에 나온 개벽종교가 증산도인데, 정읍에서 증산도가 나오잖아요? 그 뒤에 나오는 게 충청남도 연산에서 나온 정역이라고 있어요. 그 다음에 이제 소태산 대종사님의 원불교가 나오고, 또 그 앞에 직전에 대종교가 나오고요. 참 희한합니다. 이렇게 동학, 정역, 원불교, 대종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키워드가 바로 개벽입니다.
여러분 “개벽”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한 10년 전 쯤에는 개벽이라는 말을 자꾸 쓰니까 그것은 족보에도 없는 말이니 그거 쓰지 말자는 교수들도 계시더라고요. 그만큼 안 알려지고, 생소한 개념이에요. 개벽은 무엇입니까? 보통 개벽은 천지개벽, 또는 천개지벽에 줄임말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린다. 저도 그 말을 대학교 다닐 때 처음 들었는데, 잘 이해를 못했어요. 지금도 잘 이해를 못하고 있지만, 그때부터 이해가 안됐어요. 개벽이라는 말이 어려워서 종법사님께 여쭤보았는데 “개벽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다 갈아엎어가지고 새로 만드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정확합니다. 새로 만드는 겁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롭게 태어나는 겁니다. 문명으로 치면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다 바꾸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개벽을 한 마디로 말하면,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완전한 차원의 변화에요. 부분이라든지, 어떤 제도라든지 하는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안 드러나는 것까지 바뀌어야 개벽이 되는 것입니다. 드러나는 것들이 문명인데, 이 문명에도 정신이 있고, 철학이 있고 가치관이라는 게 있고 그러잖아요? 그 생각까지도 싹 다 바꾸는 것입니다. 이게 개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제가 어느 정도로 안 바뀌는지 실례를 들어드릴까요? 어려서 무의식적으로 먹던 음식이 치매가 걸려서도 드리면 맛있게 잡수신다는 거 아닙니까. 무의식까지도 바뀌어야 하는 게 개벽인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요. 한 가지만 바꾸는 것도 어려운데 다 바꿔야 되고, 드러난 것뿐만이 아니라 안 드러나는 것도 바뀌어야 되니까 대단히 어려운거지요. 그러니까 개벽은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려요. 여러분들 중 특히 젊은 대학생들에게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하냐면, 왜 우리 젊은이들한테 어른들이 잘못해서 삼포 오포 칠포세대를 만들어줬을까요? 이건 우리 젊은 대학생들 책임이 아니고, 우리 어른들 책임이에요. 한국사회를 이따위로 만든 것이 다 우리들 책임이에요 사실은. 맞지요?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요. 그러한 절망적 현실에서 뭔가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겠다는 신념과 희망을 우리가 줘야하는데,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보면 답답해 미치겠어요. 여러분들은 안 답답하세요? ‘세월호’라는 세 글자만 생각하면 가슴에서 천불이 나고, 여전히 안 바뀌는 것 같고 그러잖아요. 그럴 때 생각나는 어른이 계시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이분이 그렇게 동학을 정말 좋아하셨던 분이에요. 동학의 정신은 생명 사상임을 만나는 사람마다 얘기하셨던 분인데, 제가 이제 전생사 얘기를 살짝 할까합니다. 지금은 이제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제가 대학원 다닐 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었어요. 맨날 정부 눈치만 보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제 어용교수 물러나라고 데모를 했어요. 나중에 그 어용교수가 대학원장이 됐어요. 이제 데모를 한 저는 어떻게 되겠어요? 노골적으로는 못살게 굴지 못하고, 교묘하게 지도교수를 바꾸라고 탄압을 합니다. 다른 4명하고 같이 공동대표를 하면서 데모를 했었는데, 성질급한 다른 친구들은 자퇴해버리고 다른 대학으로 가버리더라고요. 왜냐하면 맨날 주변 친구들, 선배들한테 너네는 정신병원에서 정신없는 짓만 하고 있냐고 비판을 받고 그러니까, ‘에잇, 내가 여기 아니면 다른 대학원 못가나.’하면서 다 나가버렸어요. 저는 갈 데가 없잖아요. 그러다가 또 이제 노동조합 만드는 창립발기인이 되어가지고, 정신문화연구원 노조를 만들었어요. 이제 두 번째 별을 달았잖아요? 그 정도만 그치면 끝날 수도 있는데, 그 때 이제 88올림픽이 있잖아요.
88올림픽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해봐야 될 부분이 있어요. 88올림픽 이전에 자본주의, 자유주의권에서 LA올림픽이 있었어요, 그리고 러시아에서 모스크바 올림픽이 있었어요. 서로 대립을 해가지고, LA올림픽에는 사회주의권에서 안 가버리고, 모스크바올림픽에서는 보복성으로 자유주의권에서 다 안 가버렸어요.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열린 88올림픽 때는 자유주의던,사회주의이던 다 와요. 그런데 정작 북한은 문제가 되잖아요. 한국에서의 많은 연구자들, 그리고 사회과학 출판사 사장들, 운동하는 사람들이 아니 타민족은 다 오고, 더군다나 올림픽은 비정치적인 일인데 다 부르면서 왜 북한은 올림픽때 왜 못오게 하냐며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래서 북한바로알기운동을 전개를 하지요. 그 북한바로알기운동이라는 게 뭐냐면 북한에서 인쇄된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문학 작품들을 일본을 거쳐서 수입을 해가지고 그대로 사진판으로 찍어서 보급하는 운동이에요. 한번 있는 그대로 공부해보자는 거였어요. 그래서 안기부에 그 사회과학 출판사들 다 걸리잖아요. 어느 날 대학원을 간다고 갔더니 연구원 사무국장이 부르더라고요. 너 리스트에 올라왔는데 어떻게 할래? 연락할 때 까지 나타나지 마라. 라고 연락을 받았고, 본의 아니게 몇 달 잠수를 탄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에 장일순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분은 젊은 시절 저희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시절을 보내셨어요. 중립화통일론을 부르짖어가지고, 박정희정권 때 강원도 제1호 없는 빨갱이로 찍히신 게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십니다. 그 분을 무슨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감시와 탄압을 해서 그 분 댁 앞에 파출소가 생겼었어요. 지금 다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이셨어요. 그 고난과 숨죽인 세월 몇 십년을 사시면서 지혜를 터득하셨다고 봐집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변혁을 하려고 하고 그러다가 이제 흔들리고 괴로워하다가 원주에 장일순 선생님을 찾아가는데, 그 분이 저희에게 주신 몇 가지 자문 같은 말씀이 있어요. “뿌리고만 가거라.”, 개벽은 뿌리고만 가는 사람이 많아야 가능한 것 같아요.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왜 보통 그 당대에 결실을 다 보고 싶어 하잖아요. 별로 뿌리지도 않고 그러는 사람이 더 많아서 문제지만, 대체로는 내 당대에 그 결실을 원하는데 그 분은 끊임없이 뿌리고만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 뿌리고만 가는 사람이 누구였냐면,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님이었다 이 말이죠. 그 분이 34년 동안에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 어떤 날은 저녁 늦게 도착해서 새벽에 도망가야 되는 날도 있고, 1898년 음력으로 4월 4일에 원주 송골이라는 곳에서 체포가 되는데, 제가 이제 원주에서 제 와이프가 교사를 하고 있어가지고, 4~5년 원주에서 산 적이 있어요. 그래서 별로 안 알려진 시절에 송골을 몇 번 답사를 하고 그랬는데, 답사를 하면서 체포될 당시에 여러 가지 관련 기록이 없는지 찾아보니까, 임순호라는 분이 체포 전후에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놓으셨더라고요. 그런데 그 최시형선생님의 체포 전후에 상황의 내용 속에 어떤 내용이 있었냐면 음력으로 4월 4일날 저녁, 그리고 4월 5일날 새벽이 어떤 날이었냐면 스승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도를 깨달은 날이에요. 그 다음날이 기념일인데, 4월 4일 그 전날 저녁에 새끼를 꼬았더라고요 72세에. 그래서 많은 해월 연구자들이 최시형 선생님께 붙인 영광스러운 별명이 있죠, 일하는 하늘님. 250군데가 넘는 은신처를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일을 하시니까 제자들이“ 아니 왜 새벽에 도망을 가실 분이 그만 주무시고 쉬어야 되지 않겠느냐, 여기다가 나무심고 그런다고 선생님이 덕을 봅니까.”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혀를 끌끌 차시면서 “다음 사람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느냐.”하면서 해월선생은 끊임없이 씨를 뿌리고 가셨어요. 그런데 무위당 장일순선생님이란 분이 저희들한테, 특히 원주가 70년대 후에 민주화 운동에 메카가 되잖아요. 오늘날 원주가 협동조합의 도시가 된 것도 그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협동운동을 개최해가지고 그렇게 되었는데, 돌아가시면서까지 강조했던 것이 결실을 거두려고 하지 말고, 씨만 뿌리고 가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개벽은 아까 말한 대로 모든 것을 바꿔야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바뀌어야 하고, 그러면 기존에 있는 것보다 차원변화가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잖아요.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서 어떤 자세가 필요하냐면 씨를 뿌리고 가는 자세여야 합니다. 한국사회가 안 바뀐다고 답답해하시잖아요. 거꾸로 한번 해석해봅시다. 우리가 얼마만큼 바꾸기를 열망하고 씨를 많이 뿌려왔는가도 생각을 해보자 이거에요. 개벽은 씨를 뿌리는 자세여야 해요.
또 하나, 개벽과 무엇이 연관이 되냐면 생명의 세계관과도 연관이 되지요. 개벽을 이뤄내려는 근본적인 철학 가치가 이거여야 해요. 혼합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동학에서부터 원불교까지 이어지는 이 개벽정신의 핵심은 단 하나의 생명체도 배제하거나 소외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세계관이에요.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까지도. 왜? 다 연결되어있으니까, 하나이니까요. 원불교의 진리관, 세계관에 들어가면 가장 근본의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전부 연결되어 있어요.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냐면, 저 우리가 제거해야할 악인, 가장 나쁜 독재자도 사실은 나의 모습일 수 있어요. 우리가 거기까지 나아가야 돼요. 그럴 때 개벽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 더 들어가면, 제가 그 장일순 선생님한테 많이 혼나면서 배운 것 중에, 저는 이제 80년에 군대에서 5.18을 겪었단 말이죠. 이 5.18의 트라우마는 세세생생 제 삶이 바뀌어도, 제가 군대 시절에 특히 내가 원불교 교무 자격을 가지고 아무저항도 할 수 없고, 문제제기도 할 수 없었고, 피눈물 나게 탄압받는 그 고통의 현장에서 너무너무 무력했던 내 상황을 생각하면, 저는 수백 생이 지나도 이 트라우마는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제대하고 나서 암살단을 조직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때 그 장일순 선생님 만났을 때, 저한테 그런 기운이 풍겼을 것 아니에요. 저한테 던지던 화두가 ‘전두환을 사랑해라.’ 였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까놓고 얘기해서 그 작자 때문에 내 인생이 다 뒤틀렸는데? 제가 그 광주민주화운동 겪기 전에는 수양, 수행을 잘해서 제 얼굴만 보면 그냥 모든 분들이 행복해지고 구원받고 눈물 흘리는 참 마음씨 착한 교무가 되고 싶은 게 꿈이었는데, 근데 그 꿈이 없어져버렸잖아요. 광주 민주화운동 때문에 투사가 되어버렸잖아요. 마음이 꼬였잖아요. 암살하고 싶은데 사랑하라고 하니, 그때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백프로 이해를 할 수 없지만, 10~20%는 이해가 돼요. 참으로 이 세상을 차원변화 시키고 싶은 사람은, 그 서원을 가진 사람은 사랑할 수 있겠구나 싶어요. 제가 젊었을 때 <로메로>라고 감명 깊게 봤던 영화가 있어요. 남미에서 독재자하고 싸우는데, 젊은 신부들이 뛰어들어서 게릴라로 싸워요. 신부가 총을 잡았어요. 정말 그때 눈물을 흘리다시피 봤던 장면이, 총을 쏴야할 때 신부님은 못 쏘고 결국 맞아 돌아가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이제 아주 보수적이고 아무것도 모르던 로메로라는 주교님이 투사가 되는 그런 영화에요. 우리는 정당한 분노는 해야죠. 정당한 분노 없이 개벽은 절대 이룰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정당한 분노가 무엇에 기반을 해야 되냐면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전봉준 장군에 관해서 한마디 해달라고 인터뷰를 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남자였다. 생명의 세계관을 가진 남자였다.” 하고 말한 적이 있어요. 개벽은 바로 거기서부터 올 것이고, 여러분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세 번째 강의의 마무리로 들어가겠는데요. 우선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이제 기본적으로 원불교라고 하는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동학을 공부를 하고 있단 말이죠. 그건 아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원불교가 이 땅에서 실현해야할 어떤 사명이랄까 그것들을 동학을 통해서 재발견 하자, 또 우리 원불교인들이 실현해야할 과제를 구체적으로 수행하는데 동학 속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취지가 있다고 봐져요. 그래서 결국엔 이제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계승과 창조입니다. 동학으로부터 시작된 어떤 이어가야할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이 땅에서 일어난 수많은 민초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 운동들이 많이 있지요.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만큼 조직적이고, 혁명이념이 명확하고, 대규모로 거기에 더더욱 가슴 아프고 슬픈 사연은 대단히 많은 희생을 치렀어요. 저는 그 분들을 생각하면 살아있는 그날까지 갑오년에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져가면서 외쳤을 그분들의 꿈이 무엇일까?
가장 쉽게 얘기한다면 동학군들은 그 어떤 외세 앞에서도 민초들의 희생이 없는 그런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게 123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1세기 이상이 흐른 이 나라가 ‘외세 앞에서 더 이상 희생 없는 그런 아름다운 나라로 바뀌었는가?’ 라고 물으면 전혀 안 바뀌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바뀌지 않았죠. 지금도 우리는 외세 앞에서 여러 측면에서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 뉴스에서 괌이라는 섬에 사드가 배치될 때 미군이 어떤 식으로 했는지 jtbc에서 보여주더라고요. 환경오염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등 다 미리 조사하고 알려줬대요.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사드 배치하면서 그런 거 지금 하나도 없습니다. 그 속에서 누가 희생되겠어요? 어떤 한 조직, 한 나라, 한 단체, 한 민족에게 위기가 닥치면. 가장 밑바닥에 사회적 약자들부터 희생될 수밖에 없지요. 성주에 가장 약자들부터 또 희생될 겁니다. 외세 앞에서 우리가 123년 전에 조상들이 지키려고 했던 그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지요. 그래서 피눈물 나게 이 동학의 역사를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23년 전에 이 나라는 두 동강 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두 동강난 나라에서 피 튀기는 동족 죽이기, 정치 싸움을 하고 있지요 지금도. 잠깐 해빙의 무드가 왔다가 그 꿈이 무참하게 사라지고 일촉즉발의 위기가 지금 한반도에 조성되고 있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동학농민군들의 희생을 우리가 헛되이 하고 있는 건 아니냐는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동학군들의 꿈, 동학의 꿈을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1860년에 수운 선생께서 동학을 만든 이유, 123년 전 1894년에 동학농민군과 전봉준 장군이 우금치에서 만 명을 이끌고 500명밖에 남지 않았던 그 싸움을 통해서 실현하려고 했던 꿈은 무엇이었는가? 이 나라 이 땅에서 제대로 된 나라, 제대로 된 세상을 살 수 있는 후손들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꿈이었어요. 아직도 그 꿈은 미완성으로 남아있어요. 그런 점에서 동학사상에 대한 공부, 동학혁명에 대한 공부를 우리는 계속할 의무와 사명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대종사님께서 우리 회상을 펼치셨을 때, 살아남았던 수많은 동학도들이 수운 선생님께서 오신 것처럼 생각을 해서 몰려들었습니다. 그 선진님들 보면 조성광 선진님은 동학군 출신이시고, 최수인 할머니도 동학도셨고, 일산 이제철 선진님 집안이 동학농민 후손이에요. 많은 선생님들이 대종사님을 수운선생님의 후신으로 생각하고 몰려들었다. 뭔가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있잖아요. 그리고 이제 1930년대 조성광 선진님을 데리고 경주 용담을 찾아가십니다. 이 사건도 간단히 넘어갈 사건이 아닙니다. 1930년대 불법연구회의 교세는 5000~6000명 정도입니다. 별 볼일 없었어요. 일제가 어떻게든지 유사종교로 몰아가지고 짓밟으려고 하던 그런 시기입니다. 시퍼렇게 감시망을 펼쳐놓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 무렵에 백백교라는 사이비 종교 사건이 터져가지고, 어떻게든지 조선민족이 만든 신종교들은 전부 때려잡으려고 했던 게 그 당시 일제 식민정책의 종교정책입니다. 가장 폭압적이면서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어디서 증명할 수 있냐면 종교는 총독부 학무국에서 다뤄야 돼요. 제가 일본에 학습원 대학에서 가가지고 거기에 일제 강점기 때 우리 것을 싹 갖다가 보관해놓은 대학 중에 하나거든요? 거기에 동학문화연구소라는 게 있습니다. 가가지고 한국에서 가져간 자료들을 뒤져보니까, 신종교 관련 자료가 많이 있어요. 전부 전부 비(非)자 써가지고 어디서 관장했냐면 경무국에서 관찰했어요. 그것은 범죄 집단이라고 보고 있다는 얘기잖아요. 이게 사실은 총독부 종교 정책의 본질입니다.
그런 시절에, 가장 어떻게 보면 일제에 마지막까지 저항해가지고 피눈물 나는 희생을 치른 그 동학의 본산지를 불법연구회 창시자가 동학군 출신 제자를 데리고 방문을 해요. 이게 무슨 사연이에요. 여러분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더더구나 백백교 사건이 터져가지고 그 난리치던 시절입니다. 소위 교주가 감시망을 대종사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시대에 대종사님이 동학후손들을 데리고 경주로 가서 절을 했어요. 그 생각을 하면, 제가 동학공부를 잘했단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대종경 속에 앞으로 우리 회상이 드러나면, 수운과 증산 그 어른들도 함께 드러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우리가 그분들한테 참 많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니까 만약에 소태산 대종사님이 수운 선생의 시절에 태어나셨더라면, 제 느낌은 그래요. 수운 선생님의 가셨던 길을 이분이 가셨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그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개벽이 온 순서를 말씀해놓으시잖아요. 새벽이 온 것을 알려주고(수운), 그 다음에 농사지을 절기를 알려주고(증산), 대종사님은 농사법을 직접 알려주셔서 농사를 짓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 그것을 구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실현했던 전봉준 장군, 이런 분들이 어떻게 보면 길을 닦아주셨던 거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 원불교가, 대종사님이 치러야할 희생을 줄여주신 역할을 하셨다고 볼 수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표현을 한번 생각해봐야 될 것 같아요. 수운 선생의 꿈, 전봉준 녹두 장군의 꿈이 흘러 흘러서 어디로 와있을까? 저는 그 꿈이 우리에게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불교만의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가지고, 그 동학의 꿈이 지금 원불교에 와있어요. 미처 다하지 못했던 개벽의 꿈이 지금 우리에게 와있다는 것을 생각을 해야 될 것 같고요.
자, 이제 여기서 한번 꼭 집고 넘어가야할 마무리하겠습니다! 동학은 왜 졌을까요? 동학농민운동은 왜 졌을까하는 문제에요. 왜 졌을까요? 무기가 열세여서?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어서? 오합지졸이여서? 아닙니다. 잘못된 근대에 의해서 희생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현재 지금 누리고 있는 물질문명, 과학문명, 현대문명의 핵심에 한 요소가 과학이잖아요, 과학! 그것도 우리가 만든 과학이 아니라 서양과학! 서양과학을 상징하는 물건이 우리를 짓밟은 일본군에게는 있었어요. 그게 스나이더 소총이었어요. 우리에게는 없었어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1894년 당시에 이건 핵미사일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겐 없었어요. 동학농민 운동들은 뭘 들고 싸웠냐면 죽창, 농기구, 북, 장구, 꽹과리, 깃발 등 고함치는 것이 전술이었으니까 그런 것들을 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근대문명에 어두운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약자를 철저히 희생시키고 성립된 문명이에요. 약육강식의 문명이었다고요. 우리를 짓밟은 일본이 그 약육강식의 문명에 철학 위에 서있어요. 일본가서 후쿠다와 유키치라는 학자의 저서를 대학원에서 보고 같이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보니까 어떤 내용이 있냐면 장애인, 배움이 없는 사람은 배제해야 한다고 수두룩하게 나와요.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후쿠다와 유키치의 논리가 뭐냐면 철저히 약육강식의 논리, 강자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서 생명의 차원에는 강약이 함께 살아가잖아요.
우리가 잘 아는 먹이사슬은 새로운 생물학에 의해서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생물학에서 보면 한 종의 유지되는데 필요한 남은 부분을 그 위의 포식자에게 준다는 거예요. 나의 존재에 남은 여백을 남에게 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원불교로 말해서는 뭐에요? 살리고 살리는 관계에요. 이게 새로운 생물학에 관한 논리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그 당시, 또는 19세기에 세계적으로 퍼졌던 문명의 핵심은 반대의 논리였어요. 죽임의 논리였고, 지배의 논리였고, 강자의 논리였어요. 여기에 그것을 상징하는 일본군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이 바로 스나이더 소총이에요 우리에겐 없었죠. 스나이더 소총은 1분에 15~20발이 나갑니다. 우리 화승총이란 걸 한 5%정도의 농민군이 가지고 있었어요.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고 안개가 끼면 못 쓰는 총이에요. 이게 사거리는 30m 거리에서 밖에 쓰지 못하였어요. 스나이더 소총은 유효사거리가 250~300m정도입니다. 그러면 화승총을 들고 일본군 한 놈을 죽이러 가려면 그 코앞의 30m까지 가야돼요. 그러면 250m에서 30m를 뺀 220m 사이에서 다 쓰러져 죽는 거예요. 그것이 없어서 우리가 죽은 거예요. 잘못된 근대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잘못된 근대에 의해서 희생당한 민족이 우리만이 아니더라고요. 제 3세계가 대부분의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어요. 일본 내에도 오키나와 사람들 아이누민족이 그런 사람들이에요. 우리만 그런 고통을 당한 게 아니더라고요. 전 세계적으로 그런 고통을 당했어요. 그러니까 동학농민군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근대에 보편적으로 일어났던 현상 중에 하나에요.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이 추구하려던 정신은 잘못된 근대를 극복하려고 한 보편성을 갖는 대단한 의미의 혁명이란 말이에요. 세계사에 내놓아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위대한 민족의 자산인거에요. 그런데 그 위대한 민족의 자산 그것을,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님은 몸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그것을 계승하려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단 말이에요. 여기에 우리 안암교당에서 강좌를 개최한 어떤 목적이 확실하게 확인이 될 거예요.
동학은 다시 말하면, 동학의 것이 아니에요. 사실 우리 모두의 것이에요. 우리가 살려내야 할 민족의 자산이에요. 대대로 후손들이 살려내야 할 대단히 훌륭한 그런 세계적인 철학과 사상과 운동을 갖고 있는 그런 거예요. 그런 것을 우리 스승님께서, 원불교 교조께서 보란 듯이 경전 속에 그걸 강조하고 당신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다고 하는 얘기는 우리가 이 동학을 왜 이해하고, 공부하고, 계승해야 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가르침이라고 결론을 맺으면서 제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질의응답>
Q1. 동학이라는 표현은 누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나요?
A. 간단하게 수운 최제우 선생님이 1861년 늦가을에 남원 교룡산성에서 <논학문>이라는 경전의 한편을 쓰면서 거기서 동학이라는 말을 처음 씁니다. 그래서 그 <논학문>을 동학논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수운선생님이 직접 스스로 쓰셨습니다.
Q2. 지금 100년이 지난 원불교에서 개벽의 의미는 무엇이고, 개벽을 어떻게 살려갈 수 있을까요?
A. 마지막에 제가 잘못된 근대화라는 표현을 했어요. 그것을 원불교가 올바른 근대로 바꾸는 일이에요. 그 중에 하나가 ‘과학’ 때문에 졌다고 했잖아요. 과학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돼요. 이게 동학과 원불교의 차이이기도 해요. 대종사님께서는 그 과학에 대해서 편견 없이 바라보았어요. 동학군들은 ‘스나이더 소총’이라는 과학에 대해서 거의 세뇌적으로 무조건 반대였어요. 이해가 잘 안됐고, 부정적인 기능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요. 그래서 동학은 근대라는 부분, 과학이라는 부분이 좀 약해요. 그런데 우리 원불교는 이미 우리가 그 과학 앞에 한번 졌잖아요.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과학을 더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말했던 적자생존의 생물학이 아니라 새로운 생물학처럼, 과학의 그런 측면을 우리가 널리 수용해가지고 현실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명이 아니라 살리는 문명 쪽으로 바꾸는 일, 이게 앞으로 원불교가 추구해야할 개벽의 핵심적인 방향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Q3. 들으면서 계속 제가 원불교를 다니면서 들었던 의문이기도 한데, 원불교에서 하늘님 이야기라든지, 동학 이야기라든지에 대한 언급이 많이 안하신 것 같아요. 반면에 우리의 가르침은 부처로부터 왔고, 불교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언급, 그래서 원불교와 불교가 무슨 관계냐는 것에 대한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보면, 동학이 어찌 보면 그 근대 시대의 그런 맥에 대한 이해가 잘 되었는데 그런데 오늘 말씀은 시천주라던지, 우리가 하늘님에 대한 이야기들이 왜 이렇게 우리 안에 없었을까, 그 반면에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그득하고요. 이런 것들이 관점의 차이인가요?
A. 그 문제를 한 차원 새롭게 변화시켜야 된다는 고민을 했었는데, 제가 동학 전문가잖아요. 자기가 자기얘기 한다고 맨날 욕할까봐 굉장히 조심스러웠어요. 지금도 조심하고 있지요. 근데, 백낙천 선생님은 명확하게 보시더라고요. 당신의 개벽에 관한 글이 한 6~7편 돼요. 그리고 이번에 백주년 학술대회에서도 기조강연 하셨고, 기조강연 하시기 전에 사실은 세 시간 반에 걸친 특별 인터뷰를 다 녹화도 해놓고, 지금 풀고 있어요. 뭐라고 정의를 하시냐면 아주 명쾌하세요. 원불교는 굳이 불교로 표현한다면 개혁불교가 아니라 개벽불교에요. 그럼 그 개벽은 어디서 왔죠? 동학에서 왔죠. 그러니까 한쪽에는 동학, 한쪽에는 불교라고 하는 축이 원불교의 양대 축이에요.
지금까지는 원불교학과 나오신 분들이 전부 불교 연구자가 많았어요. 그러다보니까 어떻게 되지요? 경향이 조금 치우쳤지요. 백낙천 선생님은 교전 교정영역작업을 10년 이상 하신, 사실은 좀 부끄러운 얘기일수도 있지만 출가 교무님 이상으로 교리에 해박하신 분이에요. 그 분이 명확하게 양대 축으로 봐야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답은 이미 나왔다고 봐지고, 그래서 우리가 그런 개벽적 전통을 어떻게 앞으로 잘 살려낼 것인가가 지금부터 과제라고 볼 수 있어요. 이미 그건 결론 났습니다. 그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Q4. 지난시간에 동학수련 얘기 하시면서 모여서 아침에 주문을 외웠다고 하는데, 주문 말고 또 뭐가 있지 않았을까하는데, 다른 수련방법이나 백성들이 실제로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실천의 노력은 따로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A. 주문 수련얘기만 했는데, 그게 1단계 수련이랍니다. 이게 뭐냐면 ‘영성’, 자기 안에 환한 어떤 존재가 갊아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로 말하면 내 불성이, 성불할 종자가 확실하게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주문수련이에요. 그 위로 4단계 수련이 더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이 뭐냐면 우리로 말하면 ‘대원견성’의 경지가 동학의 수련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내용은 천도교에 이문길이라는 오랜 세월 수련하신 분 계신데, 그분이 쓰신 수련서에 보면 5단계로 되어있어서 첫 단계가 이제 주문수련에 의한 영성체험, 하늘님 체험, 우리로 말하면 불성체험에서 신앙과 수행이 가장 1단계에서 시작되는 거지요. 4단계가 더 있고, 그 정도로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그 다음에 이제 교단이 조직화 되는 것이 1880년대인데 그 당시 우리로 말하면 솔성요론, 계문이라든지, 일상수행의 요법처럼 그런 수련의 방법이나 내용이 체계적으로 나타나요. 그 중에 하나가 앞으로 오는 시대에는 여성이 도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성학적으로 표현하면 해월선생은 한국을 빛낸 최고 페미니스트에요. 이 말도 아무도 안하더라고요. 여성학자들은 반성해야 돼요 사실은. 여성들이 해야 되는데, 공부안하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그 분의 업적 중에 하나가 다가오는 시대에는 여성들 가운데 도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수련을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수도규칙을 1889년에 제정을 합니다.
Q5.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많이 드는데,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개벽관, 세계관, 가치관 등이 충분히 유의미하지만, 현실적 세계에서 인간 사회가 불완전한 현실적 세계에서, 법학으로 표현하면 통념은 때때로 정당화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괴리를 어떻게 현재사회에서 풀어나갈 것인가가 숙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불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한 그러한 고민은 계속 될 수밖에 없고,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오기 전에, 1시간 전에 고대 앞에서 뵙고, 교수님이 사주신 두부백반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크게 배운 것 중에 하나가 현재 독일의 경우는 공권력이, 정당하지 못한 공권력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횡포를 자행할 때는 거기에 저항할 국민의 권리가 있다는 저항권을 독일 헌법에서 인정한다더라고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역시 고수를 만났다는 생각도 들고, 깊은 고민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요.
이제 마무리 말씀으로 최근에 제가 읽고 있는 책 중에 하나가 <자본주의를 넘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인도의 사카르라는 사회 운동가이자 사상가, 정치가인 사람이 쓴 책이에요. 그래서 인디라 간디여사가 독재를 할 때, 투옥되어가지고 수많은 암살의 위험 속에서 5년을 단식하고 무죄석방이 되신 그 사카르의 사상이 프라우트라는 것이더라고요. 이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여기에 보면 어떻게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내용들이 나왔는데,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간디의 아임사가 다시 강조되고 이더라고요. 무저항 비폭력운동, 아임사는 저항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저항을 명백하게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저항을 어떤 모습으로? 비폭력적으로, 죽임의 모습으로 나타내서는 안 되고, 살리는 모습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안의 영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전두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가야 되고, 씨를 뿌리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남은 것은 뒤에 오는 세대들이 거두기를 희망하면서, 내 당대 때 눈앞에서 가시적인 효과로 나타나려고 할 때, 그때부터 시행착오가 나타나는 것 같아요. 뿌리고 가는 자세, 그리고 저항하되 비폭력적으로, 그것은 <로메로>란 영화에 나오는 젊은 신부가 총을 잡았으되, 마지막 순간에 총을 쏠 수 없었던 그 마음, 생명에 관해 무한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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