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화 金香花(1897 ~ 1950)】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인 유관순과 같은방에 수감"
1919년 기생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며 1897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순이. 만세운동 주도 당시 기생이였고 1919년 3월 29일 기생 33명과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고있었다. 그때 그녀가 동료들을 설득해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일본경찰은 김향화를 만세운동 주도자로 체포했다. 체포된 김향화는 일제에게 잔인한 고문을 받았고 1919년 5월 27일 재판장 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인 유관순과 같은방에 수감되었다. 수감중 고문으로 몸이 상해 만기 1개월전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일제의 감시는 심해졌다. 그녀는 김우순으로 이름을 바꾸고 1935년 경성으로 상경했다. 그녀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그녀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1950년 사망한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녀의 유해와 후손은 찾지못하고 있으며 2009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지만 후손이 없어 보관중이다.
본명은 김순이(金順伊)이고 기생으로 생활하면서 사용한 기명(妓名)은 김향화·김행화(金杏花)이다. 나중에 김우순(金祐純)으로 이름을 바꿨다. 1919년 수원(水原)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897년 7월 16일 서울에서 아버지 김인영(金仁永)과 어머니 홍금봉(洪今鳳) 사이에 1남 2녀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일찍이 수원으로 이사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5세 무렵 수원군 북수리(北水里)에 사는 나이 많은 홀아비 정도성(鄭道成)에게 시집갔다. 1914년 18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과 이혼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생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기생이 되었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수원기생조합(水原妓生組合)에서 춤과 노래 등 기예가 가장 뛰어난 기생이 되었다. 1918년 서울에서 발간된 조선 예기(藝妓)의 사진과 프로필을 적어 놓은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는 수원을 대표하는 기생으로 소개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장례일에 맞춰 소복을 차려입고 동료 기생 20여 명을 이끌고 상경하여 덕수궁(德壽宮)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망국의 설움을 토로하며 통곡하였다. 같은 해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발발하였고 수원에서는 3월 16일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선배 기생인 서도홍(徐桃紅)을 찾아가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수원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30여 명을 모았다. 거사를 앞두고 몰래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하는 한편 거사일을 3월 29일로 정하였다. 이날은 기생들이 수원의 자혜병원(慈惠病院)으로 정기적인 성병 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1919년 3월 29일 김향화 일행은 자혜병원으로 향하였다. 병원 앞에 이르자 치마 속에 감춰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꺼내 들고 동료 기생 3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계속 만세를 부르자 병원에서는 이들의 검진을 거부하였다. 곧바로 동료 기생들과 병원을 나와서 다시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경찰은 총칼을 들고 달려 나와 위협했지만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고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도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2개월의 감금과 고문을 당하고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같은 해 11월 2일 가석방으로 출옥하였다.
이후 수원에 거주하였지만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더 이상 기생을 할 수 없었고 결국 1934년 이름을 김우순으로 바꾸고 숨어 살았다. 수원에서의 생계 유지가 곤란해지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1935년 서울로 이사하였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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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화 출옥 보도 기사(『매일신보』 1919. 11. 2)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