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인간―동물간 이종교배 연구 승인으로 다가올 대재앙>
영국 정부가 주요 선진국 가운데 처음으로 동물 난자에 인간의 DNA를 주입하는 인간과 동물간의 교잡배아 연구를 승인할 것으로 전해져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전세계로 확산될 전망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 외신들은 윤리 문제로 인해 현재 중국만 허용하고 있는 인간과 동물 교잡배아 연구에 대해 영국 정부가 1년간의 검토 끝에 연구를 허용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영국 정부는 이에따라 이 연구를 허용케 해달라고 요청한 두 연구팀에 연구 허가를 내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영국 당국은 불치병 치료 목적 등에만 연구를 허용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인간 정자와 동물 난자 또는 인간 난자와 동물 정자간의 이종교배 연구는 허용치 않고 인간 세포와 동물 난자간의 교잡배아 연구만 허락할 것으로 보인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위에서 말한 인간-동물 교잡배아(交雜胚芽)란 “인간의 체세포에서 핵 DNA를 추출한 후 핵을 제거한(유전정보를 제거한) 동물의 난자에 주입하여 만든 배아를 말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종배아(異種胚芽)는 99.9%가 인간의 유전형질을 보유하고, 0.1%만 동물의 형질을 보유하게 된다.
이종배아에서 추출하는 배아줄기세포는 근육·뼈·내장·뇌·피부 등 모든 종류의 조직세포로 분화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 배아줄기세포는 암이나 파킨슨 질환, 알츠하이머 질환 같은 질병의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종배아는 연구용 인간 난자가 극심하게 부족한 상황에서 구하기 쉽고 또 다루기도 쉬운 소·토끼·돼지 등 동물의 난자를 사용함으로써 인간 난자에 의존하지 않고도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종배아 연구는 영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008년 5월 영국 하원은 종교계와 보수당의 반대에도 이종배아 생산을 허용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고, 뉴캐슬대학교, 킹스칼리지런던, 워릭대학교 연구팀이 인간수정배아관리국(Human Fertilisation and Embryology Autority, HFEA)의 승인 하에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종배아 연구는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가톨릭 등 종교계와 반대론자들은 이 연구가 프랑켄슈타인을 만드는 괴기스러운 실험이라고 비판하며, 생명윤리의 혼란을 초래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과학계와 의학계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 치료를 위해 꼭 필요한 실험이라고 맞섰다.
이종배아에서 추출하는 배아줄기세포는 근육·뼈·내장·뇌·피부 등 모든 종류의 조직세포로 분화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 배아줄기세포는 암이나 파킨슨 질환, 알츠하이머 질환 같은 질병의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벌어 졌었다. 이른바 황우석 사건이다.
필자는 황우석교수 개인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황우석교수가 외쳤던 배아줄기세포 재현 가능성이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멘델이 재발견된 이유는 그가 출판한 논문의 결과가 수십 년 뒤 다른 학자들에 의해 ‘재현’됐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전법칙을 발견한 학자들은 선취권을 합의하기 위해 멘델을 이용했다. 이 말은 그들이 발견한 현상과 멘델이 발견한 현상이 큰 틀에서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멘델이 무슨 생각으로 실험을 수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형질을 나타내는 단위가 존재하고, 이들이 거의 정확한 정수비로 분리된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었다. 멘델의 실험 결과는 지나칠 정도로 정확했지만, 이는 이론이 예측하는 결과에 합치했다. 지금 다시 노란 완두콩과 초록색 완두콩을 교배해도 멘델의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과학은 ‘재현 가능’한 측정량에 몸을 기대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실험도 이론적으로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난자의 핵을 다른 세포의 핵으로 치환하면 유전체가 뒤바뀐 줄기세포를 ‘이론적으로’는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핵치환을 통해 맞춤형 줄기세포를 만드는 일은 자연에 숨겨진 법칙을 찾는 작업이 아니다. 자연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성공률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황 교수의 논문에도 이처럼 낮은 성공률을 언급한 부분이 있다. 성공적인 핵치환을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난자가 필요하다. 선진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대한민국에서만 가능했다. 엄청난 윤리적 비판이 쏟아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황 교수의 논문은 자연에 존재하는 현상을 찾고 이해하려는 과학의 성과물이 아니다. 과학이 예측하는 바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공학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실험 결과가 재현되든 안 되든 언제든 실험 조건이 달랐다는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다. 이런 건 과학이 아니다. 어제는 되고 오늘은 되지 않는 그런 불분명한 결과는 과학의 토대가 될 수 없다.
그에게 재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재현의 기회를 주면 그는 성공할 것이다. 난자의 핵을 치환하는 일은 이미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핵심은 그것이 가능하느냐는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들이 말한 것처럼 효율적인 핵치환 기술이 마련됐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황 교수는 실패했다. 황 교수는 멘델처럼 자연법칙을 찾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과학적으로 이미 알려진 현상을 기술적으로 향상시키고 싶어한 공학자였을 뿐이다. 따라서 재현 가능성이라는 과학의 문제에서 그는 비껴서 있었다. 교량을 건설하는 기술자가 값싼 재료를 사용해 부실한 다리를 건설했다면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건 다리를 다시 건설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멘델의 연구는 재현 가능성에 열려 있지만 황우석 교수의 것은 그렇지 않다. 둘은 다르다. 멘델은 ‘언제나 재현되는’ 자연법칙을 찾고 있었지만, 황 교수는 지식을 응용하고 있었다. 멘델의 논문은 조작의 의심에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지만, 황 교수의 것은 그렇지 않았다.
종을 혼합시킨 개체인 키메라 생산 연구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동물에 인간의 세포를 주입함으로써 원시인류 발달에 관한 비밀을 벗기고 획기적인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 프로젝트들, 특히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동물에 삽입하는 연구들은 후대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인체의 특정 세포를 변이 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렇게 높은 형태적 특질을 가진 세포를 동물의 배아나 두뇌에 삽입하면 엄청난 과학적 가능성과 더불어 상상할 수 없는 윤리적 곤경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몸은 쥐인데 두뇌는 인간이라든가 부모는 쥐인데 몸은 인간의 형상을 한 생명체가 탄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키메라를 만드는 과학자 중에는 이처럼 끔찍한 동물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안전을 위해 내셔널 아카데미는 키메라 연구 중 배아줄기세포와 관련된 가이드라인 작성에 매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작성한 이 가이드라인은 과학자들이 인간의 배아줄기세포를 침팬지와 같이 인간이 아닌 영장류에게 이식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다른 종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는 것을 엄격하게 경고하고 있다. 또한 종을 불문하고 인간의 배아줄기세포를 이식한 키메라는 절대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만약 이를 어기게 되면 먼 훗날 인간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정자를 가진 동물과 인간의 난자를 생산하는 동물 간의 교배로 인한 것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연구자들은 또한 동물의 뇌 주요부분에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주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동물의 몸 안에 인간이 갇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동물에 삽입하고자 한다. 이 세포들이 배양접시보다 살아있는 생명체 안에서 얼마나 잘 성장하는지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론토 대학 연구자이자 키메라 연구를 옹호하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필립 카포위츠(Phillip Karpowicz)는 “이것은 연구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시스템이다. 키메라의 배아는 세포를 잘 키울 수 있는 일종의 시험관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카포위츠는 이 방법이 특히 두뇌나 눈의 성장을 연구할 때 유용하다고 설명하면서, 눈과 뇌 조직을 이루는 대부분의 세포가 배아에만 존재하며 성인에게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이미 내셔널 아카데미에서 규정하는 가이드라인을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인간과 동물의 키메라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메이요 클리닉의 과학자들은 장기 이식 후 면역거부반응을 연구하기 위해 돼지 태아에 인간의 혈액줄기세포(배아에서 추출한 것이 아님)를 이식했다.
베일러 의대의 과학자들은 두가지 혈통의 동물-인간 쥐를 만들었는데 이름을 “휴마우스(humouse)"라고 명명했다. 하나는 면역성을 연구하기 위한 것으로 인간 T-세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면역체계와 인간에게 발생하는 암세포를 가지고 있다.
2008년에는 인간의 피부세포에서 DNA를 추출하여 소의 난자에 삽입 한 이종 교배가 처음으로 성공했다. 영국 뉴캐슬대 연구팀은 인간 DNA를 소의 난자에 삽입 한 후 전기 충격으로 성장시켰다. 총 32개까지 만들었고 3일 동안 생존했다. 이 배아는 생물학적으로 99.9%는 인간이고 0.1%는 동물이다. 이종교배 시킨 배아를 6일 동안 성장시키면 줄기세포를 추출이 가능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배아는 여성 자궁에 이식되지 않았다. 단지 여성의 난자가 부족하여 소의 난자를 사용했을 뿐이다.
이외에도 염소와 양의 혼합종인 “기프(geep)”, 메추리-병아리 혼합종(quail-chick)을 포함해 비슷한 두 종을 섞은 키메라들은 거의 논란이 되지 않았다.
인간과 동물 교잡배아 연구가 아무리 치료 목적을 가진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인간의 욕심이 대재앙을 부르게 되어있다. 영국 BBC에서 제작한 영화 한편을 소개 하면서 끝맺음 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에드워드 포레스트 박사(Edward Forester: 찰스 댄스)는 인간과 짐승의 혼혈종을 탄생시키기 위해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여 암 고릴라에 인간의 정자를 수정시키는데 성공, 고릴라는 온몸에 털이 난 아이를 낳는다. 박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실험이 무서운 것임을 깨닫고 아이를 죽이려 하지만 죽이지 못한다. 결국 박사는 아이에게 고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양육한다.
영국 BBC에서 제작한 영화은 한 국영 연구소에서 인간과 동물의 수정을 통해 인간의 복제가 가능한가의 여부, 그리하여 유전공학과의 연계를 통해 인간 생활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오랑우탄과 인간 사이의 한 생물체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중간 단계의 골돈은 차츰 사람과 같은 형상으로 자라지만,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성대가 유인원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뱉는 단음의 소리, 즉, 외파음 한 음절만을 발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는 그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박사에 의해 수술을 받고나서 해결이 된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습득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시사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영혼의 문제인 것이다.
신화적 차원에서의 신이란, 인간의 거울이며 표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과학을 올려놓으므로서 인간은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신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과학을 지배하였던 인간은 이제 그 과학에게 지배를 받으려 한다.
지난 96년 태어난 돌리는 복제 인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인간은 <복제>라는 과학의 부산물을 통해 보다 풍요로운 세상을 영위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며 한편,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그 이면에 도사린 불길한 기운을 간과하여 더 큰 화를 부를 수도 있다. 어쩌면 <복제>를 통해 각종 질병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유전자의 복제로 인간의 영혼까지 되살릴 수 있을까?
끊임없이 밀림의 꿈을 꾸었던 골돈의 무의식이 바로 어미로부터 이어진 영혼이라면 자신의 출생으로 인한 갈등과 번민으로 괴로워하는 골돈은 아비로부터 이어진 인간의 원초적인 윤리의식에서 기인된 영혼이라 할 수 있다. 그 두 영혼의 갈등을 골돈이 과연 극복해낼 수 있었을 것인가?
처연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던 어미가 끝내 그 아들을 쳐죽이고 무연히 등을 돌렸던 것은 어미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사회에서도 결코 받아질 수 없는 존재임을 알기에 어미로서 최선의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넘치는 것은 모자라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과학의 발달은 때로 사회, 윤리적 통념을 뛰어넘고 있다. 이제, 근원적 윤리 관념이 과학에 우선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해지기 위해서는 그 영혼에 기초한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진정한 자유의 표상으로 다시금 우뚝 서야 한다. 종교적 차원을 뛰어넘은 인본주의적 차원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