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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허무주의는 리얼리즘이다 - 최승자의 신작을 읽는 순서
1.
우리 시의 흐름에서 기억할 만한 전환 중 하나가 1980년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그 중심을 이루는 일군의 시인 가운데 최승자의 존재를 부인하기 어렵다.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최승자 시의 역할과 의미는 단순히 그 성취를 ‘여성시’에 국한하기를 거부한다. 또한 그의 시가 이룬 성취가 삶에서 추출된 진액으로 생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따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삶의 빛과 그림자가 고스란히 예술에 전사된다는 의미에서, 삶과 예술이 같은 길을 가는 예술가의 존재는 동서고금의 예술사에서 하나의 고전적 전형을 이룬다. 이런 부류의 예술가들에게는 불행조차도 예술 작품에 광휘를 더하는 연료가 되곤 했으나, 예술의 덕택으로 삶의 행복을 구한 예는 아주 드문 것이니, 그 동반이 공평한 것이라 하기는 어렵겠다. 실제 삶의 체험이 시의 직접적 계기로 작용하는 최승자 시의 특성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고전적 전형을 일부 닮아 있다. 이런 특성이, 1980년대적 전환의 세목을 구성한 다른 시인들의 시와, 그 생성과정에서 ‘차이’를 만들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시적 질료의 생성과정이 시에서 압도적 진정성을 확보하는 충분조건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시적 진술의 내막이 그의 삶이 밟은 궤적과 밀접해 있음과, 이에서 말미암은 강력한 진정성을 눈치 채지 못한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최승자에게 시는 자신의 창조적 재능을 드러내기 위해 이용되는 방편이 아니며,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통찰과 직관을 자랑하기 위해 과장된 예술적 연출이 아니다. 그의 시는 순조롭지 않은 생애를 사는, 사실 우리 모두 그런 생애를 살고 있는 것이지만,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한 인간의 내면과 등가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보이곤 하던 더러 참혹하고 더러 공격적이기까지 한, 예의 번득이는 수사까지도 문학적 효과를 위해 과장되거나 가공된 것이 아니다. 예나지금이나 그에게 삶은 문학보다 언제나 무거운 무엇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오래 최승자의 시를 읽어온 독자들에게, 요즘 그가 쓴 시를 읽은 일은 진공 속에서 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은, 우선 최승자의 시의 역사, 곧 맥락을 전제로 읽는 것이며, 나아가 시와 삶을 함께 밀고 온 전체적 삶의 특정 부면을 실루엣으로 잠시 보는 것이다.
이번에 최승자의 신작 다섯 편을 읽으면서 나는, 시의 깊은 속결보다 삶의 형편과 삶에 대한 생각의 추이를 읽으려고 했음을 고백해야 하겠다. 우리를 향해 강력한 지향성을 지닌 모종의 신호를 투사하는 저 문학적 발신의 근원을 이루는 두 초점, 즉 창작자와 창작물에 대한 호불호의 조합을 열거할 수 있다. 곧, 시보다 시인에게 더 큰 호감을 갖는 경우, 반대로 시인보다 시에 더 큰 호감을 갖는 경우, 시와 시인에게 두루 호감을 갖는 경우, 이와 반대로 시와 시인 모두 특별한 호감이 없는 경우, 넷이다. 물론 세 번째가 가장 행복한 경우, 네 번째가 가장 불행한 경우일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는 그 우열을 가리는 일이 간단치 않다. 그 중 세 번째가 최승자와 그의 시를 보는 나의 태도라고 할 텐데, 앞 두 가지 중에서 더 고른다면 첫 번째가 좀 더 가까울 것 같다. 처지와 경우에 따라 같은 작품이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
2.
신작의 다섯 편을 관류하는 주제어는 ‘시간’이다. 이 낱말은 마지막의 「하늘 한 판이 허수이」, 한 편을 뺀 나머지 네 편에서 거듭 나타난다. 우선 첫 작품을 읽자. 「eine grüne Nacht eine blaue Nacht」에서 시인은 우화 같은 꿈을 제시한 후 이를 해석하고 있다. 그 꿈의 일차적 그림은 ‘공책 위를 개미가 기어 지나간다’이다. 시인은 단계적으로 이를 풀어서 이 ‘공책’은 ‘시간의 공책’인데, 이것이 곧 ‘역사’임을 알려준다. 나아가 ‘개미’는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라고 설명한다. 종국적으로 이 꿈의 그림이 ‘역사 위를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 기어 지나간다’임이 본문에서 바로 발명된다. 제3연에서는 이 그림이 “허전하고 텅 빈” 것으로 평가되었음을 알려준다. 이어 이 작품의 후반부는,
그리고 구름 없는 오후가 흘러갔다 / 그리고 그늘들이 헤살프게 흔들렸다 //
역사라는 시간의 공책 위에서 / 개미 한 마리가… //
eine grüne Nacht / eine blaue Nacht
로 마무리된다. 인용구의 첫 연은 꿈 아닌 세상에서 또 하루가 무료하게 흘러갔음을 알린다. 이 구절은 ‘오후’의 시간과 ‘그늘’의 공간을 작디작은 부분으로 포함하는 거대한 역사의 시공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무심하고 담담하게 흘러온, 또는 흘러가는 무엇이라는 전언을 안고 있다. 이어 전반부에서 보여준 꿈의 그림을 가볍게 환기하는데, 첫 연의 앞 절반만을 그대로 옮기고 있으나, 나는 이 축약부에서 “개미 한 마리”가 좀 더 강조되고 있다고 읽는다. 이렇게 되면 이 시를 지탱하고 있는 꿈의 그림이 이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인간은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가라는 낡은, 그래서 중요함이 증면된 질문의 범상한 변주로 읽어야 할 확률이 증대된다. ‘역사’라는 문명내적 추상명사와, ‘집단 무의식’이라는 지적 연장과, 공히 ‘푸른 밤’으로 번역될 외국말 어구의 병렬이 담지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이 시의 깊은 내막은 독자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 인상적 규모를 감당할 만한 견고한 세부의 기초를 독자가 발견하는 데 다소 난항이 있기 때문이다. 세부가 견고하지 않으면 시적 전언은 소기의 그릇을 얻지 못한다. 닻 없는 배, 묶인 곳 없는 연이 되어 떠도는 것이다. 살피자면 이 시의 전반부가 제공하는 꿈의 문제적 그림에서, ‘개미’와 ‘공책’의 인접성은 명료하지 않다. 형식논리로 보자면 ‘공책’은 ‘사람’ 또는 ‘필기도구’에 가까운 무엇일 테고, ‘개미’는 ‘사막’ ‘운동장’ 등 자연지형과 유관한 무엇과 인접관계를 이루는 무엇이다. 물론 ‘개미’와 ‘공책’이 만나는 문맥은 흥미로운 것일 수 있으나, 이 시의 규모 속에서 이 만남이 정교한 의도를 통해 실질을 도모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즈음 시인의 고민거리가, 시의 완성도를 꾸리는 세부의 정돈보다 더 큰 규모의 형이상학적 고뇌에 있음을 이 시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이 형편은 신작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역시 삶이 시를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간에 대한 천착에 주목하자면 네 번째 작품 「시간의 잿빛 그림자」를 먼저 봐두는 것이 어떨까. 이 시에서 시인의 뇌리에 반복되는 시간의 속성은 ‘괴어 있음’이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고 고여 있다는 말은, 시간을 그렇게 답답하게 인식하는 주체가 있다는 뜻이며, 그의 기억 속에서 순차에 상관없이 사건이 축적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수 세기”를 “저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과 존재를 함께 고민한 철학자의 이름도 등장한다.
하이데거적 창문으로서의 / 한 존재도 흔들린다 //
흔들리고 흔들리는 / 이 세계 속에서 왜 시간은 / 늘 괴어 있는 것일까?
“하이데거적 창문”은 하이데거의 개념인 용재성(用在性, Zuhandenheit)과 전재성(前在性, Vorhandenheit)의 설명적 비유를 원용한 표현으로 짐작된다. 전자는 유의미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계를 유용한 연장으로 사용하는 실천적 존재로서 인간과 상관하는 개념으로 실천적 배려와 도구로 만나 얽힌 세계의 양상을 가리키며, 후자는 그 얽힘이 해제되어 단지 관찰과 그 대상으로 만나게 되는 세계의 파편적 양상을 가리킨다. 용재성의 관점에서 세계는 ‘창’ 있는 단자들의 집합이 되고, 전재성의 관점에서 세계는 ‘창’ 없는 단자들의 집합이다. 일상을 무리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 세상은 용재성이 전제하는 구조적 얽힘과 상관의 틀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창’ 또는 ‘창문’을 통한 빛의 그물은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질서 있는 세상의 설명이 된다. 물론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단편적 언급에 철학자의 거창한 명명과 용도를 들이대 그 정합성을 논하는 것은 별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좌우간 시인은, 서로를 비추고 서로에게 빛을 나누어주는 ‘창문’인 존재들도 축적된 사건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세계의 흔들림’과 ‘시간의 고여 있음’을 질의한다. 이는 ‘세계의 부조리성’과 ‘역사의 반복’에 대한 확인과 회의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시인에게 흔들림은 영원할 것으로, 고여 있는 시간은 죽음의 색깔인 ‘잿빛’으로 파악된다.
돌아가, 두 번째 작품 「비 그치고 돈 갑니다」를 읽는다. 좀 어렵다. ‘비[雨]-그치다’와 ‘돈[貨幣]-오/가다’의 인과성, 동시성, 순차성 등에 대한 풀이의 갈피가 그러한데, 이는 시인이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비-그치다’에서 독자가 머뭇거릴 이유는 없으나, ‘돈-오/가다’는 편치 않다. “비 그치고 돈 왔다”는 상황은 “어느 TV가 재방송으로 돌리고 있”다고 표현될 정도니까 우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돈’은 셋째 연의 ‘시간 공장’과 무연해 보이지 않으며, 넷째 연의 ‘구름’은 ‘비’와 무연하지 않다. 아마도 ‘시간공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또는 이 세상을 송두리째 제어하는 어떤 원리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이 시는 이 시간공장과 돈 사이에 걸린 하나의 숙제를 보여주는데, 아직 내 독법으로는 이 숙제를 다 풀지 못하겠다.
‘비’에 눈길이 간다면 마지막 작품 「하늘 한 판이 허수이」를 먼저 읽는 것도 괜찮겠다. 이 작품은 비 오는 아침 풍경을 ‘건조한’ 필치로 담은 소품이다. 비 오는 풍경을 건조하게 그리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의 고층아파트는 풍경의 수직적 인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비와 결합되면 수직적 인상은 증폭된다. 고층의 테라스에서 목을 내밀고 빗방울들이 낙하하는 것을 내려다 본 적이 있는가?
빈, 젖어 있는 저 하늘 // 나의 아침 창가에서 //
하늘 한 판이 허수이 / 젖어 무너져 내린다
하늘은 객관적으로 젖어 있고, 주관적으로 비어 있다. 부산하지 않은 시인 또는 화자의 아침은 붕괴를 반복하는 세상을 관측하기에 적절하다. 이제 우리는 신작 가운데, 이번 신작들의 세계를 가장 잘 요약하고 있으면서 최승자 시의 미래를 가장 잘 엿보게 하는 작품, 「나의 natural chart에서」를 읽음으로써 최승자의 신작 읽기를 마무리해야 하겠다. 이 시의 전반부를 지탱하는 기둥은, “나의 natural chart에서 / moon이 떨고 있었을 때”라는 구절이다. 분량으로는 대략 5분의 3을 차지하는 앞 세 개 연에서 각각 한 차례씩 이 구절은 똑같이 반복된다. 이 구절만 읽고 미루어 생각하자면 시인의 인생을 확정적이며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천궁도에서 ‘달’의 존재 또는 위치는 모종의 운명적인 장애나 불행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장애 또는 불행의 예언은 다양한 ‘소리’를 낳는데, 이들은, ‘어디선가 한 세상 너머’에서, ‘수 세기 너머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바람 스쳐가는 소리’, ‘은빛 강물 흘러가는 소리’, ‘아득하게 슬픈 빗소리’, ‘시간의 그늘 속으로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 등이다. 이렇게 표현된 세상의 모습은 이미 앞서 다른 시에서 본 것처럼, ‘영원히 반복되는 일상적 사건’의 다른 이름이다. 무의미한 일상적 사건이 영원히 반복되는 곳은 지옥이다.
3.
신작에 드러난 화자의 내면은 세상의 부조리와 어둠을 확인하고자 하는 강박과 근사하다. 이는 한 차례의 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반복되는 것이라서 치명적인 성격을 띤다. 사실 허무는 증상의 일종이 아니라 반응의 일종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반응들 가운데, 비교적 진상을 왜곡하지 않고, 성실하고 건강한 태도를 지켜낸 결과로 볼 수 있다. 허무에 대한 가치 판단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가치 판단에 연동한다. ‘미물’인 우리에게 세상은 광대무변하므로 세상의 속성에 대한 다기한 판단이 허용될 수 있다. 이렇게 다기한 판단 중 하나로서 허무는 나름의 진정성과 인과적 근거를 갖는다. 어떤 사람에게 허무주의는 리얼리즘이다. 이 ‘어떤 사람’들에게 보통사람은 우리의 삶이 허무한 것이라는 진상에 고개 돌리고 사는 자이다. 나도 그 ‘어떤 사람’ 중 하나이다.
다시 하이데거의 명명에 기대어 살피자면 잘 구성된 용재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때 공기와 빛의 중요함은 항용 잊혀진다. 이를 요사이 유행하는 생태과학으로 보아 한 종이 진화론적으로 잘 적응한 생태계 내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유비할 수 있겠다. 이 생태계의 고마움은 망각되기 일쑤다. 각도는 좀 다르지만, 자본주의의 메카니즘 속에서 삶의 진상에 대한 질문을 거세한 채, 또는 거세당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 대부분의 삶도 이와 닮은 면이 있다. 지금 최승자는 그러한 용재성의 우산 바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삶은 긴요한 무엇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주체가 근원적인 삶의 문제에 맞서 있을 때 예술의 자리는 어디일까. 그 자리는 아예 없거나, 있어도 옹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술은 근원적인 삶의 문제를 넘어선 곳, 또는 비껴선 곳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오늘 최승자의 시는 힘겹게 읽힌다. 삶의 근원적인 문제가 시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 존재에 대한 근원적 회의의 바람직한 귀결의 한 갈래를 실존주의에서 엿볼 수 있다. 애초 내던져진 삶에 대한 치열한 자각과 이에 대한 주체적, 실천적 의미 부여를 강조한 실존주의의 해답은 사실 눈물겨운 것이다. 요컨대 허무주의는 리얼리즘이며,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으로 가는 인식적 도정이기도 하다.
내게 최승자 시인은 삶이라는 전장에 선 여장부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 선입견의 계기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걸친 몇 차례의 만남 때문이다. 학교 동아리 후배에게, 또 문단 후배에게 ‘여장부’ 또는 인생의 스승과 같은 인상을 주던, 강한 사람, 무서운 시인의 모습을 다시, 간절히 만나고 싶다. 나는 앞으로도 그의 시를 또박또박 읽을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내 간절함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희중
시인․문학평론가. 전주대 교수
첫댓글 너무 고독해 그것이 얼마만큼인지 알 수조차 없을때 " 자화상" 시에 나오는 한 부분을 떠올린답니다. ... 내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뿐 .....
제겐 여장부라기보다 여전사로 생각됩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자신의 전 생을 던져 존재에 대한 끝 없는 질문을 던지는 시인의 모습에서 '하이데거적 창문으로서의 한 존재의 흔들림' 을 보는 것이 말 할 수 없는 감동을 갖게 합니다. 송명희 시인, 최승자 시인의 시가 있으시면 같이 나눠 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