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2002년 10월 10일 경북 포항시 포스코 인재개발원에서 "한국사학의 새로운 지평"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의 기조강연에 나선 역사학자 이기백씨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제 무덤 앞의 작은 돌에 이렇게 적어주기를 가족에게 부탁해놓고 있습니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그가 지금까지 이룩하고자 했던 역사학은 "민족"과 "진리"라는 두 개념으로 수렴된다. 그는 학문적 성향으로 볼 때 전형적인 실증고증학 계열에 속한다.
엄밀한 사료 비판과 고증을 가장 큰 무기로 내세우는 실증사학은 두계 이병도의 등록상표처럼 통하는데, 실제 한국역사학계에서 이기백씨는 두계 사학의 적통자로 평가되고 있다.
사료에 대한 비판과 검증 과정은 그에게 역사의 "진리"를 캐는 작업이었다. 그는 이 고된 과정을 통해 사실(史實)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고, 여기에 역사학자의 사관이 가미되면 그것이 곧 역사의 진리라는 믿음을 안고 살았다.
이기백 역사학의 또 다른 코드인 민족과 관련해서는, 식민치하에서 자란 세대가 대개 그렇듯, 그가 구축한 한국사 또한 강렬한 민족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요즘 학계 일부에서 민족은 근대 이후 국민국가 체제가 만들어낸 역사적 개념이라는 주장이 연이어 터져나오고 있으나, 식민지배를 몸소 겪었고, 고향(평북 정주)이 북한이요, 한국전쟁의 참상을 지켜본 그에게 민족은 메시아의 외침과도 같았다.
그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1962년 「국사신론」과 그 확대개정판인 「한국사신론」(1967)에서 본격화된다. 특히 「한국사신론」 서문에서 이기백씨는 일제 식민사학을 조목조목 호되게 비판하면서 주체적 민족사학을 선언하게 된다.
사실 "이기백 역사학"은 이 「한국사신론」이라는 한국사 개설서 및 그 일부로 첨부된 식민사학 비판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역사학은 때마침 몰아친 국사교육 열풍과 각종 국가고시에서의 국사과목 필수화와 맞물리면서 더욱 힘을 발휘해갔다.
정확한 통계수치는 출판사인 일조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나 이 「한국사신론」은 현재까지 판을 거듭하면서 100만부 가량이 팔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문 역사학 서적으로는 기록적인 판매량인 셈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민족"과 "진리" 및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가 동원한 실증고증학적 방법론은 1980년대 후반 재야사학자들이 주도한 이른바 "국사교과서 파동"의 와중에 뜻밖에도 "식민사학"이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기백씨는 재야사학자들이 겨냥한 표적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물론, 그 스스로도 국회에 소환돼 자신의 역사학을 변명해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이 국사교과서 파동이 그에게 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국회 증언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일화는 한국역사학에서 이기백이라는 이름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확인시킨다. 그가 분명 이병도 이후 한국역사학 최고의 거봉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첫댓글 그렇지만 이기백은 식만시학을 극복한듯한 논저(한국사신론)를 통해 실증사학이 식민사학의 아류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사실은 식민사통의 학맥과 학설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