岐陽文化 聖域化 事業(案) 1. 事業 趣旨 및 當爲性 가. 趣旨 (1) 들어가는 말 500여년을 이어온 朝鮮(大韓帝國)의 허망한 망국과정에서 황실과 조정의 관리들과 當時政權의 實勢들이 그렇게 많았지만 국가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고, 오히려 나라 팔아먹는 일에 뒤질세라 앞장서는 賣國奴도 적지 않았다.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우리 무실 柳가의 조상들은 무너지는 나라를 맨몸으로 버텨내려고 향중의 열사들과 의병을 결성하여 싸웠으며, 1910년 망해버린 나라를 다시 찾아 세우려고 1945년 조국 광복이 되던 날까지 국내와 국외에서 목숨과 재산을 초개와 같이 던져 싸웠던 독립운동유공자가 전국에서 안동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내앞의 협동학교(東山 柳寅植 선생 주관 개교) 자리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워졌으며, 그 중에서도 우리 무실 柳門이 어느 문중보다 많았다. 이는 우리 入鄕祖 岐峯 柳復起 할아버님 6부자 분의 ‘岐陶遺業’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 岐峯과 陶軒 兩代의 가르침인 충(忠) 용(勇) 효(孝) 우애(友愛) 구휼(救恤) 근면(勤勉) 정진(精進) 등 무실 류씨의 ‘岐陶遺業’은 종친의 가훈으로 종가 대청에 편액을 만들어 걸어두고 자손들의 행동과 업적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2) 오늘날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무한대의 신장을 요구하면서 국가에 대한 의무와 충성심은 점차 희박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참된 선비( 義를 바로잡고, 利를 꽤하지 아니하며, 道를 밝히고 功을 따지지 않으며, 殺身成仁, 見利思義, 見危授命을 실천하는 知識人) 정신을 구현하신 전주 류씨 수곡파의 터전을 굳건히 자리 잡아 ‘岐陶遺業’정신을 물려주신 岐峯 柳復起, 墨溪 柳復立 형제분과 류복기의 아들 5형제분의 발자취를 재조명하여 (3) 우리 문중의 차원을 넘어 한 지역 내지는 국민 전 체의 정신적 표상이 되게 하는 사당과 충성(忠誠)스러운 시비(詩碑)와 어록비(語錄碑) 등을 세워서 충의공원(忠毅公園)을 조성하여 굳건한 국가관을 심어줄 교육의 장을 마련하여 한국정신문화(韓國精神文化)의 수도(首都) 안동(安東)의 정신(精神)을 부각하는데 기여코자한다. (4) 우리 수류는 국가의 수자원 이용 계획으로 인하여 반 천년의 역사와 그 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아름다운 정신적 유산을 임하댐에 고스란히 수몰시키고 4000여 세대가 동서팔방으로 흩어져서 새로운 지역에서 정신없이 살아 온지 20여년이 흘렀다. (5) 이제 와서 생각하니 너무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조상의 업적마저도 몽땅 임하댐에 수몰시키고, 겨우 목숨만 이어 온 우리들이 부끄럽고 훌륭하신 조상님에 대하여 죄송스러움을 통감하는 동시에 훌륭한 정신문화를 아무런 표적도 남기지 않은 채 몽땅 수몰시킨 국가에 대하여 원망의 감정과 울분이 솟구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심정이다. (6)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이라도 임하댐에 수몰시킨 전주 류씨 수곡파의 조상님 들이 물려주신 잃어버린 정신적인 유산을 복원 시키고 올바른 국민정신교육의 도장을 마련하는 차원의 충의공원(忠義公園) 조성사업을 成事시켜야 할 것이다. (7) 전주 류씨 조상님들의 드높은 정신문화와 우국충정의 발현은 岐陽 書堂을 구심으로 성장 발전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기양서당 주변인 임동면 무실마을에 건립 하고자 한다.
나.當爲性 (1) 서기 1592년 (임진) 4월 13일에 왜군 20만이 부산으로 침입하여 1598년 왜군 철수에 이르는 7년간 일본의 침략 전쟁을 맞아 우리 국토는 만신창이가 되고 전 국민이 왜놈의 발 밑에 짓밟히어 죽어가던 시절(1592 - 1598) (2) 나라로부터 녹을 먹던 관리도 아니요 지역의 토호도 아닌 지방의 젊은 선비로서 1560년경에 안동에 入鄕하여 겨우 30년! 가족이라야 동생 하나와 아들 5형제가 전부였던 보잘것없는 평범한 백성이 (3)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자 누구보다도 먼저(1592. 6. 1.) 떨쳐 일어나시어 외사촌 金 涌, 진사 裵龍吉 등과 협의하여 향중의 인사들에게 통문(격문)을 보내고 20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金允明을 大將으로, 裵龍吉을 副將으로 金 涌을 수성장으로 추대하고, 당신은 군량도감의 어려운 임무를 자임하여 안동의병을 출발시키는 어렵고도 충성스러운 일에 선봉을 서신 것이다. (4) 그해 8월에 초유사 김성일의 초유일도사민문(招諭一道士民文)이 도착하고, 예안, 춘양, 영주, 예천, 의성, 군위, 내성, 비안, 영해, 청송의 향병과 연합하여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이 조직되어(1592. 8.20.) 경상도 북부지역의 의병을 총괄하게 되었다. (5) 예안의 金 垓를 大將으로 李庭栢, 裵龍吉을 左 右 副將으로 公은 본진 정제장과 도군관(都軍官)이란 막중한 임무를 담당하여 1592년 9월 2일 운산역에서 안동열읍향병의 발대식을 시작으로 10월엔 용궁 11월엔 함창으로 이동 문경 당교의 왜병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작전을 짜서 1593년 1월 1일엔 당교에서 5월 2일엔 松峴(松邱)에서 야밤에 적진과 적의 이동 통로를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전하는 전과를 올렸다. 長男 友潛공은 초기부터 부친을 수행하면서 도왔다. (6) 기봉공을 기리고자 함은 창의에 앞장서신 일과 당교, 송현 전투에서 승전하신 것도 대단하셨지만 밀양에서 적의 선봉을 막았고 경주전투에서 안동열읍의병대장 金垓공이 殉死하자 사기가 떨어진 안동열읍향병의 잔여 병력을 무사히 후퇴시켜 의병의 안전을 도모하셨다.
의병장 류복기(柳復起)의 임란창의록(壬亂倡義錄) 류 중 영 창의록 원본 사진과 국역한 내용
창의록 원본 (20 x 101)
임진(壬辰)<1592>년 4월 14일 계묘(癸卯). 동래(東萊)가 왜구(倭寇)에게 함락(陷落)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전사(戰死)함. ○ 순찰사(巡察使) 김수(金?)는 열읍(列邑)에 군사를 모아 거사(擧事) 할 것을 전령(傳令)함. 6월 초1일 己丑. 배용길(裵龍吉), 김 용(金 湧), 류복기(柳復起)는 거의 (擧義)할 것을 공모(共謀)함. 며칠 후 안집사(安集使) 김 륵(金 ?)이 명(命)을 받들고 와서 선비를 마을의 장수로 하여, 각기 기거하는 마을에서 군사가 될 장정을 점고하게 함. 7월 17일 甲戌. 배용길(裵龍吉)이 구린촌(九?村)을 찾아가서, 낮에는 산꼭대기에 숨었다가 밤이면 집에 돌아와 잠자는 틈을 타서 그 부형의 동생과 아들 200여명을 기군(起軍)하여 대오(隊伍)를 나누어 분정(分定)했다. 19일.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본부(本府)-<安東>에 들어왔고, 배용길(裵龍吉)이 작성한 명부를 넘겨줬다. 8월 5일 壬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招諭文)이 왔다. 배용길(裵龍吉)은 즉시(卽時) 일읍(一邑)에 통문(通文)을 내어 여강서원 (廬江書院)에 모이게(約會)했는데, 김윤명(金允明) 김윤사(金允思)가 더불어 왔을 때, 오직 류복기(柳復起), 정조(鄭 操) 만 미리 와 있었다. 또 통문을 내어 전법사(全法寺)에 모이도록(約會) 했다. 9일 丙申. 전법사(全法寺) 송정(松亭)에서 서로 더불어 맹서(盟誓) 하기를, ‘임금의 말(日馭)이 도성(都城)을 떠나 피란(避亂)길에 올랐고, 백성의 시신(屍身)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내 한 몸 죽는 것을 어찌 아끼겠는가?’ 하면서, 군사를 모두 관청 문서에 등록(登錄)하고, ‘白面空拳(아무런 직함도 장비도 없는 맨주먹)으로 분발(奮發)만 하면 어찌하겠는가?’ 싶었으나,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패(成敗) 강약(强弱)은 가히 계산(計算)할 수 가 없다.’고 하고, 서로 더불어 서명(署名)하여 맹서(盟誓)하였다. 12일 己亥 임하(臨河)에서 회맹(會盟)하였다. 한 고을의 선비들이 기약은 하지 않았는데 찾아온 자가 100 여명이었다. 생원(生員) 김윤명(金允明)을 대장(大將)으로, 진사(進士) 배용길(裵龍吉)을 부장 (副將)으로 삼고, 이형남(李亨男)을 정제유사(整齊有司)로 류복기(柳復起)를 향군 도감(鄕軍都監)으로 추천했다. 18일 乙巳. 향교(鄕校)에 모여서 이정백(李庭栢)을 새로 대장(大將)으로 하고, 향교(鄕校)를 진소(지휘본부) 로 했다. 20일 丁未. 예안(禮安), 의성(義城), 군위(軍威) 사람과 연합의진(聯合義陳)을 구성(構成)할 것을 일직현(一直縣)에서 회맹(會盟)하였다. 예안(禮安)의 김(金) 정자(正字) 해(垓)를 대장(大將)으로 하고, 생원(生員) 이정백(李庭栢)과 진사(進士) 배용길(裵龍吉)을 좌우(左右) 부장(副將)으로 하고, 유학(幼學) 류복기(柳復起) 이형남(李亨男)을 정제장(整齊將)으로 하고, 이름을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으로 칭(稱)하고, 안동(安東)을 본진(本陣)으로 했다. ○ 이 때 적은 서쪽으로 올라가고 조령(鳥嶺) 이남(以南)에는 매(每) 30리에 1 둔(屯)을 설치했는데, 함창(咸昌) 당교(唐橋)의 적(敵)이 가장 강대(强大) 했다. 적(敵)이 안동(安東), 예안(禮安)성(城)을 함락(陷落)한 후에, 의거(義擧) 했다는 통지(通知)를 듣고는, 즉시(卽時) 철수(撤收)하여 돌아갔다, 용궁(龍宮), 예천(醴泉) 등지에는 불 지르고, 노략질하여 남은 것이 없었다. 11월 초5일. 순찰사(巡察使)가 김윤사(金允思)와 유학(幼學) 류복기(柳復起)를 연병장(練兵將)으로 하여 정병(精兵)을 골라내었다. ○ 이로부터 예천(醴泉) 송구(松邱)로 진지(陣地)를 옮겨서, 적진(敵陣) 과 대치(對峙)하여 장사(壯士)를 매복(埋伏)시키고, 적(敵)의 동태(動態)를 살피다가, 상주(尙州) 반암(盤巖)에서 왜군(倭軍) 의 말 2필(匹)을 쏘아서 빼앗았다. 癸巳(1593)년 정월 초하루. 적(敵)이 휴식(休息)하는 것을 엿보고, 밤중에 적(敵)의 진중(陣中)에 복병(伏兵)이 돌입(突入)하여, 적군(敵軍)을 무수(無 數)히 사살(射殺)하고, 그들의 창검을 빼앗고. 연달아 진천뢰(震天雷)를 쏘아, 일진(一陣)이 크게 경동(驚動)했고,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이튿날 밤에도 같은 방법(方法)으로 10여인을 사살(射殺)했다. 이로 부터 4월에 이르기 까지 8 번이나 당교(唐橋), 반암(盤巖), 송현(松 峴)) 등지에서 복병(伏兵)을 매복(埋伏)하여, 적의 목을 벤 것이 20여명이 며, 적(敵)의 우두머리 1명을 생포(生捕)했고, 그 나머지를 무수(無數)히 사살(射殺)했다. 전후(前後)로 사살(射殺)하고, 포획(捕獲)한 적(敵)을 순찰사(巡察使)에게 보 고(報告)하여, 유공자 모두가 상훈(賞勳)을 받게 했다. 순찰사(巡察使)에게 공문(公文)을 보내면서 끝 부분 제송(題送)에 가로되, “목을 벤 적병(賊兵)의 귀를 보려는 구경꾼들이 이마와 어깨를 비벼댔다.“ 고 했다. 본도(本道)가 의병(義兵)의 으뜸이 된다고 하면서, 안집사(安集使)가 계문(啓聞) 하기를 “안동향병은 김 면(金 沔), 곽재우(郭再祐)등과 더불어 성세(聲勢)가 상응(相應)하고, ‘적봉이 비록 많다고 해도 장차 근심할 바가 없다.’고 했다. 권응수(權應銖)는 진소(陳所)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안동(安東) 창의(倡義) 후에 영남(嶺南) 10여 읍(邑)의 적(敵)은 머리와 꼬리가 단절(斷絶)되어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향병(鄕兵)의 힘이다.” 라고 했다. 이때 서울로부터 영(嶺)을 넘어온 적이 당교(唐橋)에 있던 진지(陣地)를 철 거(撤去)하여 치해(治海)에다 설치(設置)하니, 하읍(下邑)에는 왜군이 꽉 들 어차서, 죽이고 노략질하는 근심이 난(亂)의 초기(初期)보다 더욱 심하였다. 이상
※ 1594년4월부터는 和議가 추진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 (7) 1596년에는 八公山上庵에서 嶺南地方의 각 고을 義兵將 32인의 會盟에 동참하여 하늘은 이 땅에 나쁜 運을 내렸는가? 섬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감히 쳐들어 왔다. 누가 나라위해 干城將 능히 되어 三都에 一隊의 왜군을 모조리 소탕할까?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간 것은 어찌 참아 말할 손가? 신하된 자가 일어나 복수할 때가 되었구나. 창과 칼을 가진 우리들이 무궁한 憤恨으로 강물이 쓸어버리듯이 한 번에 씻어버리자. 天以東方値否運 島夷敢擾小中華 誰能爲國干城將 掃盡三都一隊倭 忍說鸞輿西路幸 爲人臣子復?時 枕戈蹈刃無窮恨 欲決江河一洗之 라는 칠언율시를 지어 결의를 다짐했다. (8)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岐峯공(43세)께서는 향중에서 死士(죽기를 각오한 사람)를 募集하셨는데 長男 友潛공과 (1575년생),次男 得潛공이 (1578년생) 따라 가겠다고 하자, 三男 知潛공과 (1583년생) 四男 守潛공, (1585년생) 五男 宜潛공이 (1588년생) 떨쳐 일어나 함께 가겠다고 하니 公이 義롭게 여겨 허락하시어 아들 5형제(당시 가족에서 남자 전원)를 대동하고 400리 먼 길을 걸어서 창령군 火旺山城의 방어사 곽재우 장군 휘하에 합류하여 전쟁이 승리로 끝날 때(1598년 12월)까지 守城 하시었다. ※ (초기에는 참여했으나 1593년 大將 金垓 公 殉死후 안동열읍향병이 解散된 후에는 불참한 의사(義士)가 많았다.) ※ 火旺山城 동고록(同苦錄)과 수성록(守城錄) 그리고 당시 함께 싸운 의사의 문집에 기록이 남아있고 대구시 망우공원의 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봉안된 영남의병의 위패는 315위) (9) 전쟁이 끝난 뒤에도 흉년이 들어 굶주린 사람이 거리에 가득하니 가마솥을 길가에 걸고 죽을 끓여서 많은 사람을 구했다. 公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조참판(吏曹參判)의 증직교지를 받았다. (기봉 류복기 행장 참조)
(10) 季氏 墨溪공은 伯氏 岐峯公의 지시를 받아 진주성으로 달려가서 경상우도 관찰사이신 외숙부 학봉 김성일 선생을 보좌하는 주부로서 진주대첩이라는 큰 전과를 올리고, 학봉선생 께서 진중에서 殉死하시면서 성을 사수하라는 유명을 받들어 진주성 수문장을 담당하여 김천일, 고종후등과 함께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 될 때 성을 사수하시다가 장열히 전사하시어 그 공로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시고 진주 창열사(彰烈祠)의 주벽(6인 중 1인)에 위패가 모셔져 매년 晉州市에서 享祀를 올리고 있으며, 경기도 용인시 송문리에 충신 정려각(旌閭閣)이 건립되었다. 순국 당시의 연세가 36세 였다.
이 사진은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의 위패를 한 위씩 찍은 것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다.
그 중에 우리 문중(전주류씨 수곡파) 어른 7위(기봉 류복기, 묵계 류복립, 형제분과 류복기의 아들 5형제분 -(도헌 류우잠, 연암 류득잠, 용암 류지잠, 류수잠,류의잠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2010, 2011년 향사는 우리 문중에서 주관 했다.
(11) 이런 일은 만고 역사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며,남다른 용기(勇氣)와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 단언하는 바이다. (12) 晩年에 자손들의 교육을 위하여 1615년 기양서당을 세우고 자손들을 열심히 공부하도록 유훈을 남기셨다. 이러한 기봉선조님의 뜻을 이어받은 자손들이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장도에 동참하여 기양정신(岐陶遺業)에 충실했다.
전주류씨 수곡파의 ‘岐陶遺業’이 남긴 업적
첫째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국운동에 앞장선 문중 1.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 제향 대구 동촌 유원지에 있는 망우공원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영남 호국 의병 315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매년 추모의 향례를 올리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조상이신 岐峯 柳復起, ?溪 柳復立 형제분과 기봉의 자제 오형제 분 (柳友潛, 柳得潛, 柳知潛, 柳守潛, 柳宜潛)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592년(임진) 섬 오랑캐의 침략으로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신 것이다. 전국적으로 이런 집은 찾아볼 수 없다.
2. 병자호란 영남소수(嶺南疎首) 도헌(陶軒) 柳友潛 병자호란은 1636년 청나라 태종이 2만의 대군을 끌고 압록강을 건너 불과 10여일 후에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압박하였는데 도헌 류우잠 할아버님께서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말 타고 활쏘기를 단련(鍛鍊)하고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거의(擧義)를 도모(圖謀)하며 시를 짓기를 ※ 한시(漢詩) 나라가 위급(危急)한데 보답(報答)할 길이 없어 무예(武藝)를 익혀서 바야흐로 의병(義兵)을 일으켰도다. 어찌 서생(書生)이라고 본래 담(膽)이 적을소냐? 한바탕 싸워서 오랑캐의 요기(妖氣)를 씻어버리리라. 하였다. 얼마 후에 조정에서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는 이제 오랑캐가 되었구나!” 라고 탄식했다. 또 거의(擧義)를 논의했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서울에서 화의(和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다시 물을 일도 없다.” 했다.
3. 무신창의의 주도자 용와(?窩) 柳升鉉 1728년 조선 후기 최대 규모의 역모사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기위하여 용와 (?窩) 할아버님께서는 유림 지도자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고, 편성하여 의병대장으로 출병 준비를 하였으나 역도들이 관군에게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당시의 파록이 남아 있음)
4.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배출된 문중 - 영남 의병의 중심에 정재 류치명의 문인이 주축을 이루었다. 1895년 안동의소파록(安東義所爬錄)에는 조직과 간부 46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중 8명(參謀- 柳淵博. 中軍將- 柳 琓. 都書記- 柳廷鎬, 柳必永. 書記- 柳淵楫, 柳晦植. 出令- 柳憲鎬, 柳昌植)이 우리문중에서 나왔다. 파록에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당시 70세 노령으로 안동의진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본부지도자로 洗山 柳止鎬(정재의 아들) 西山 金興洛(학봉 종손)의 활동이 이긍연의 일기와 김도현(영양 의병대장)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난다. 義兵大將- 權世淵은 定齋 柳致明의 문인이며, 2차 의병대장 金道和 역시 정재 문인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류연각, 류연익, 류연영, 류벽호,류시연, 등의 활동이 돋보인다. 진성이씨 주촌파 종손 이긍연의 일기에 류연각이 조총 39정을 가지고 왔더란 기록이 있으며, 1896년 4월 17일(음)자에는 박실에 적병이 들이 닥쳐 柳 세 사람을 잡아가서 두 사람은 총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연영, 류연각 두 사람의 제삿날이 4월 17일임을 볼 때 이 두분이 확실한 것 같다고 ‘안동 무실마을’이란 책에 김희곤 교수의 기록이 있다. 의병활동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그 자금은 각 문중에 배정하였는데 그 실적은 무실 류씨, 닭실 권씨, 하회 류씨가 각각 1,000냥, 내앞 김씨 800냥, 금계와 해저의 의성김씨, 법흥의 고성 이씨가 각 500냥, 그밖의 문중은 각각 400냥을 부담했다. 안동의병으로 星南 柳時淵 장군은 전국에서 가장 장기간에 걸쳐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큰 전과를 올렸음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안동 의진의 소모장과 2차 김도화 대장 을 도와 선봉장을 맡았다. 태봉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그 뒷수습을 감당했고, 영양 의진의 김도현 대장, 영덕 의진의 신돌석 대장과 연합작전을 펼치면서 안동 청송 진보 영양 영해 영덕 삼척에서 1911년 만주로 망명한 날까지 활약하였다. 경주 분황사에서 영남의병 지도자의 회의에서 영남의병대장으로 류시연을 추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남의 활동은 의병활동 이후에도 만주 독립군 활동을 계속했고 1912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몰래 귀국했다가 영주 반구 장터에서 체포되어 1914년 1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의병활동은 병영에서 읽혀지는 ‘육군’이란 월간지에 연재되었고 KBS라디오 ‘국군의 방송’ 시간에 ‘다큐멘터리 의병대장 류시연’이란 프로그램으로 오래도록 방송되기도 했다. - 협동학교와 사회계몽운동의 중심에는 東山 柳寅植이 있다. 동산의 교육과정 개혁운동은 1904년부터 시작하여 1907년 임하면 천전리에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개교하고 유교경전 중심에서 탈피하여 수신, 국어, 지지, 역사, 외국지지, 한문, 작문, 미술, 대수, 지리, 체조, 창가, 화학, 생물, 동물, 식물, 박물, 등 17교과를 도입한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고등학교였다. 여기에는 보수 유림의 반발이 많았으나 동산의 개혁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 1910년 7월 18일 오후 3시경 안동 영주 예천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 의병 18명이 난입하여 김기수 교감 안상덕 교사 이종화 서기를 살해하는 큰 변괴가 있었으나 용기를 꺾지 않고 교육을 지속 하였으나, 그해 8월 22일 국권이 강탈 당하고 류인식, 김대락, 김동삼, 이상룡 등이 주동하여 12월 말에 100여명이 만주로 망명하고, ※ 1913년 임동면 수곡동 한들의 정재 종택으로 장소를 옮겨서 재차개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정재 종택 건물을 협동학교 교실로 무상제공이라는 종손 柳淵博의 크나큰 배려와 교장 柳淵甲, 교감 柳東泰의 지극한 정성으로 1915년 제 2회 졸업식을 맞았다, 류인식은 자금 조달을 위하여 일시 귀국하여 고향의 토지를 매각하는 도중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서 1917년부터 학교 경영을 하면서 안동지방의 계몽운동을 이끌어 간 주역의 위치에 있었다. 1919년 제 4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3 ? 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이 협동학교에서 준비 추진되었음을 빌미로 강제 폐교되었으나, 정재 종택에서 우리 문중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데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할 것이다.
- 3?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 중심에는 우리 문중이 있다. 임동면 만세운동은 정재 주손인 류동시(柳東蓍)가 광무황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수중에 숨겨서 귀향하여 대책회의를 열고 숙부인 류연성과 협동학교 류동태, 이규호 등과 논의하여 3월 15일 챗거리 공동타작마당에서 류연성, 류교희, 류동수, 박재식, 박진성 등과 洞별 책임자를 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협동학교에서 준비되었다. 그 때 참가했던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태극기를 만들기 위하여 안동장에 두 사람을 파견하면서 “동시에 점포에 들어가지 말고 두 가지 물감을 동시에 구입하지 말고 한 번에 많은 량을 사지 않도록” 당부해서 보냈다고 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에 500여 명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일본인 순사 우치다가 시위대를 막아섰으나, 우치다와 권태석 순사보를 제압하고 주재소에 들어가서 경찰의 무기를 모두 빼앗아서 우물에 넣어 못쓰게 만들었으며,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각종 서류를 파기하고 건물도 부수었다. 일본인 순사에게 태극기를 들려서 동네마다 찾아다니면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는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었으며, 이날 만세를 부른 전체 인원수는 1,000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 전한다. ? (천안 독립기년관에도 안동의 3.1운동 부분에 편항 1,000명. 예안 500명이 게시되었음) 다음날 임북면(사월) 시위에도 그 다음날 영양 시위에도 참여한 분이 있었다. 이때에도 정재의 손자 류연성의 활동이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柳淵成은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옥중에서 만세를 여러 차례 불렀다고 한다. 류연성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7일 만에 순국했으니 그간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류교희와 류동수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기록된 민족대표 33인에게 3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점과 비교할 때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파리장서에 서명 3?1 운동 직후 유림단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문의 청원서를 보낸 일을 제 1차 유림단 의거라 하는 데 이 장서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137명이며 안동 사람은 5명(한들에 柳淵博, 삼산에 柳必永, 하계에 李晩? 내앞에 金秉植 금계에 金瀁模) 인데 우리 문중 어른 2인이 들었음은 주목할 부분이다.
-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낸 旦洲 柳 林 선생 협동학교를 졸업하고, 챗거리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경의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국무위원에 취임하여 활동하셨다. 광복 후에 한국독립당 당수로서 자유당 독제정치를 규탄하는데 앞장서서 투쟁했음. 수유리 4?19 묘지에 안장
※ 독립운동자로 포상된 무실 류가 어른들 은 22인
독립운동자로 포상된 무실 류가 어른들
※ 자료 미비로 포상되지 못한 무실 류가 어른들은 62인 - 의병 19 인 柳德永 柳鳳熙 柳止鎬 柳昌鎬 柳淵楫 柳淵永 柳淵覺 柳淵翊 柳東翊 柳璧鎬 柳 琓 柳孝淵 柳承洛 柳承鎬 柳鎬輯 柳淵燐 柳晦植 柳憲鎬 柳廷鎬 柳翊鎬 - 협동학교 3 인 柳東泰 柳淵甲 柳周熙 - 3?1운동 13 인 ※ 단순가담자를 포함하면 500명이상 柳基萬 柳基福 柳基泰 柳淵泰 柳宗稙 柳東馥 柳淵琦 柳晩秀 柳春欽 柳致得 柳景發 柳璣永 柳東蓍 (중심에는 柳淵成) - 파라장서 1 인 柳萬植 (柳必永, 柳淵博을 도움) - 청년운동, 노동운동 사회 계몽 운동 10 인 柳 淵建 柳淵述, 柳周熙 柳東著 柳震杰 柳敎? 柳東徹 柳基萬 柳基一 柳淵和(중심에는 柳寅植) - 해외항일 3 인 柳廣鎬 柳基東 柳淵德 - 군자금 모금 2 인 柳淵福 柳淵益 - 참가분야가 불분명한사람 12인 柳東植 柳東範 柳淵龜 柳淵鱗 柳顥集 柳東烈 柳淵一 柳淵模 柳康鎬 柳晩植 柳淵運 柳禹洛 ※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이 많아서 중복된 경우가 있음. 합 계 84인 ※ 3·1운동 단순가담자 500명 이상
1. 수많은 학자와 훌륭한 저술 우리 조상이 무실에 자리 잡고, 훌륭한 문중을 가꾸는 바탕을 만드신 분은 단연 기봉 선조였다. 기봉선조께서는 아들 5형제와 함께 임란 의병에 투신하시고 귀향하시어 자손의 교육에 전념하시면서 자신의 공부도 열심히 하여 본보기가 되었으며, 1615년 기양서당을 세워서 공부하는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후손들은 차차 각처에 정자도 짓고 섬학소도 만들어서 공부하는 기풍을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남들이 이르기를 “무실 류씨가 사는 마을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라고 하였다. (제 소견으로는 안동에는 일찍부터 터를 잡은 대단한 문중이 많은데 우리 문중이 가장 늦게 입향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살아남고 다른 문중에 밀리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하는 길 뿐이라는 생각과 각오로 기봉 선조께서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고 생각한다.) 우리 문중 어른들의 학문하신 기록을 읽어보노라면 형제 숙질이나 10촌 안쪽의 어른들이 가르치고 배우고 연구하고 강회를 통하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또한 기양서당에서 문중의 후예들을 모아서 몇 분의 선비를 정기적으로 지정하여 책임지고 봉사하며 교육하도록 한 점은 정말 위대한 조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 적게는 3권에서 많게는 100권 가까운 저술을 남긴 분이118인이며 책을 만들지는 않았어도 文行으로 타의 존경을 받았던 분도 많았다는 점에 존경심과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바이다. 淵民 李家源 박사는 全州柳氏水谷派之 文獻叢刊 序文에 이르기를 “단 한 사람이 정착하여 불과 400년도 못되는 기간에 그의 자손 중에서 저술(문집)을 남긴 선비가 118인으로 저술의 양은 980여권이나 되니 이 많은 문헌들이 어찌 한 가문의 사람들에 의하여 쓰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양적으로도 다른 가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규모이고, 질적으로도 영남 퇴계학파가 이루어 낸 최고의 학문적 수준을 차지하였으니 이런 훌륭한 가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라며 탄복하신 부분이 있다.
2. 저술의 중요 내용 가. 출중한 시문학(詩文學)작품 (모든 문집에서 道學詩. 山水詩. 憂國憐民詩 등이 수록) 나. 이학(理學)에 관한 저술(류대시의 자양문집 주해. 류치명의 주자서 절요. 주절휘요. 류정문의 근사록집해증산. 류치구의 산와잡록. 천군실록. 류치엄의 성리진원. 인설집해. 사칠휘편. 류건휴의 이학집변) 다. 역학(易學)에 관한 탁월한 업적(류관현의 역도촬요. 류정원의 역해참고. 하락지요. 류휘문의 주역경전통편. 류형진의 독역관구. 류치덕의 독역췌언) 라. 예학(禮學)에 관한 탁월한 업적(류경휘의 가례집설. 류도원의 사례편고. 류장원의 상변통고. 류건휴의 상례비요의의. 류치덕의 전례고증. 류치명의 가례집해. 류연구의 상변요해) 마. 국사(國史)와 학자에 관한 체계적 정리(류건휴의 국조고사. 류도원의 동헌집록. 류치익의 동헌통고. 류인식의 대동사) 바. 경전에 대한 주석(註釋)을 활발히 함 (류장원의 사서찬주증보.사서소주고의. 류건휴의 동유사서해집평.) 사. 퇴계학과 이상정의 호학(湖學)을 크게 발전시킴(류건휴의 계호학적. 류도원의 계집고증. 류장원의 계훈유편. 호서유편. 류병문의 호서요훈. 류치명의 대산실기. 류치엄의 계훈집요. 호학집성 )
3. 배출한 인물 * 불천위(不遷位) 5위- 대 학자로서 영원토록 제사를 모시도록 교지가 내리거나 유림에서 추대하는 조상으로 우리 문중에는 다섯 분이다. (百拙庵 柳 ?, ?窩 柳升鉉, 三山 柳正源, 好古窩 柳徽文, 定齋 柳致明) * 천사(薦仕) 5인- 조정에 출사하는 길에는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 무과에 급제(及第)하는 길, 높은 벼슬에 오른 조상의 후광으로 조정에서 벼슬을 내리는 음사(蔭仕). 가장 명예로운 길이 출중한 재주가 있는 큰 선비로 도 단위 지역 단체나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아서 뽑히는 천사(薦仕)이다. 우리 문중에는 다섯 분이다. (蘆厓 柳道源, 壺谷 柳範休, 壽靜齋 柳鼎文, 好古窩 柳徽文, 東林 柳致고) * 대과 급제 13인- 우리 문중에는 문과 10인 무과 3인의 급제가 있는데, 기봉 선조의 증손자 空空齋 柳廷輝께서 1652년 문과 급제를 시작으로 乖厓 柳 ?, 涵碧堂 柳敬時, ?窩 柳升鉉, 陽坡 柳觀鉉, 三山 柳正源, 柳之源, 定齋 柳致明, 孔庵 柳致好, 柳章鎬, 무과에는 柳致百, 柳星鎬, 柳 琓.
※ 내앞 의성 김씨의 5파 중에서 학봉파에 10인의 급제자가 제일 많다고 하니, 급제의 출발은 학봉의 1568년 급제보다 84년이나 늦은 1652년 기봉 선조의 증손자 류정휘의 문과급제를 시작했는데 전체적인 수는 3인이 더 많은 13인을 배출하였음은 주목할 만하다. 또 영남에서 단 1인의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한 시군이 10여군이나 된다. * 목민심서에 우수사례가 실린 분 2인 (陽坡 柳觀鉉, 三山 柳正源) * 청백리(淸白吏) 2인 (涵碧堂 柳敬時. ?窩 柳升鉉, ) * 생원 진사 33인 * 정려 (旌閭) 5인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은 고결한 부인에게 내린 교지) * 안동좌수 16인 * 안동별감 24인 * 독립유공 훈장 22인 * 자료미비로 훈장을 못 받은 유공자 62인 합 : 84인
* 음사(蔭仕) 39인 * 증직 (贈職) 21인 (돌아가신 후에 그분의 업적을 인정받거나 자손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내리는 교지) * 문집(文集) 118인 * 문행 (文行) 32인 * 영남학맥(嶺南學脈)에 등재 : 6인 (三山 柳正源, 蘆厓 柳道源, 東巖 柳長源, 好古窩 柳徽文, 定齋 柳致明, 西坡 柳必永)
4. 암행어사에게 꾸지람을 내린 定齋 柳致明 定齋 柳致明이 초산부사로 재직 시에 어사 沈承澤이 이 고을에 들어왔다. 온 고을이 놀라고 두려워했지만 정재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어사를 맞았다. 그런데 어사가 용무를 마치고 부사에게 인사를 하고 떠난 후에 이방이 부사에게 달려와서 “영감! 큰일 났습니다. 어사를 따라온 추종자의 금품요구가 있습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보고를 받은 정재께서는 “그를 형틀에 묶으라.” 그리고 “어사가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이니, 모시고 오라.”고 명하셨다. 산천초목도 벌벌 떤다는 어사의 관속을 부사가 형틀에 잡아매는 것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 드는 일이다. 정재는 부당하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거침없이 시행 하신 것이다. 어사 심승택이 불려왔고, 부사는 어사와 함께 형틀에 묶인 추종자의 앞에 나란히 자리를 한 후에 이방의 보고내용에 대한 사실여부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후에 추종자를 풀어주고는 어사를 관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어사의 행차는 고을 수령의 불법을 살펴 공직의 기강을 바르게 세워야 하지만 자신의 수족과 같은 추종자(상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서야.” 라고 꾸지람을 내리셨다. 이에 어사 심승택은 솔직히 시인하고 “돌아가면 정치를 잘 하심을 포상하여 상달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영남학맥에는 장형을 치는 형벌을 가했다고 썼으나, 우리 문중 어른의 이야기에는 위의 내용과 비슷하고, 사리에도 맞는 것 같아서 영남학맥의 기사를 객관적인 자료로 제시하고, 문중 어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 하였음)
(13)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당시 미군장성의 아들 142 명이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는 신문 칼럼을 보고 역시 선진국인 미국인들은 국가가 어려울 때 노불레스 오불리쥬를 실천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음에 감탄한다. (14)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와 백제군의 싸움에서 신라군이 싸움에 밀리자 신라의 김흠춘 장군의 아들 반굴과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이 단신으로 전장에 뛰어들어 장열히 전사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고사는 들어보아도 (15) 나이 어린 아들을 모두 데리고 전쟁터를 누빈 사실은 곽재우 의병대장의 사기진작에도 크게 공헌 한바 되었음이 당시 火旺山城 同苦錄과 守城錄 그리고 참전하신 선비의 문집에 가장 나이 어린 宜潛公의 역할 等이 여러 기록에서 발견되어 大邱 忘憂公園의 壬亂護國 嶺南忠毅壇에 315義士의 위패 중 7인이 우리 집에서 나온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실적이다.
2. 主 配享 人物 (1) 壬亂 義兵將 岐峰 柳復起公(임란 의병장 기봉 류복기공) 가) 임란발발시 37세(1555년,명종 乙卯生) 나) 본사업의 중심인물. 전주류씨 수곡파 4,000여 세대의 중시조 다) 임진(1592) 계사(1593)년에는 장남 우잠이 아버지를 도와서 싸웠고, 라) 병신(1596)년에는 팔공산 상암에서 영남 각읍의 의병대장 32인과 회맹 마) 정유재란(1597~1598)에는 향중의 死士를 모집하면서 아들 五兄弟를 대동하여 방어사 곽재우 장군의 휘하에 합류하여 화왕산에서 조국과 산성을 지킴. 바) 전후에 흉년이 들어 굶주린 유랑민을 많이 구휼함 사) 류영경柳永慶 상국相國<영의정>은 족친으로 겨우 열촌인데 공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불렀으나 공은 권문權門이라고 해서 마침내 가지 않았다. 식암息庵<黃暹>공은 안동부사로 갔을 때 부내府內의 현사賢士들을 추천하는데 첫째로 공의 이름을 말하고 “화살같이 바른 고사高士다.”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식암공 께서는 일찍이 경연에서 <기봉의 행적을> 임금님께 아뢰었고, 류 문충공文忠公, 김 문정공文貞公, 이송와李松窩도 각기 아뢰었다. 인품을 내세워서 당세 인이 신망하였는데,일찍이 자유子游가 자기 집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담대멸명澹臺滅明 (자유가 말하는 담대멸명이라는 자는 길을 가되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자유의 방에 오지 않았다는 말은 지름길을 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 사람의 행동이 바르고 또 일을 급히 서두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자유를 찾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공사를 구별하고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에다 바로 비比했으니, 옛적에 높은 관직에 계시던 분들이 어찌 엿본바가 없으면서 <임금님께> 그런 말을 하였겠는가? 아) 안정기에 들어서는 기양서당을 개설 후진 양성 자) 임란의병공적으로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으심 차) 岐陽追遠祠에 배향되심
기봉 류복기 행장 岐峯 柳復起 行狀
공의 휘諱는 복기復起 자는 성서聖瑞 기봉岐峯은 그의 호號다. 류씨의 본은 문화에서 나왔으니 고려때 대승공 휘 차달車達을 상조로 하였는데 그 후에 휘 습濕에 이르러서 완산백 完山伯 으로 전주지방제후의 작위를 받은 후로는 전주류씨全州柳氏로 하였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휘 빈濱은 관직이 직제학으로 증 이시랑贈 吏侍郞이고, 휘 의손義孫은 세종조에 집현전 학사로서 남수문, 권채 공과 더불어 집현전 삼 선생이라 칭하였는데 세조가 찬위하니 관직을 버리고 전주로 오셔서 소와정笑臥亭을 짓고 일생을 마쳤다. 아우 집의인 말손末孫의 끝 아들을 후사로 하니 휘는 계동季潼이며 증 도승지다. 이분이 공에게는 고조이며 증조는 휘가 식軾이니 홍문관 전한으로 증 참판이며, 조의 휘는 윤선潤善이니 인의引儀고, 아?버지의 휘는 성城? 이며 일찍 돌아가시어 증 판사며, 어머니는 의성김씨 증 판서 진璡의? 따님으로 남편의 뒤를 따라 순절하니 시관諡官이 정려旌閭하였다. 공은 명종 을묘(1555)생으로 6 ?9세 때 연달아서 아버지와 어머니 상을 당?하고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집상을 하는데 수저나 채소 고기 등의 진설이나 절차가 잘 못될까 걱정이 되어 기록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누구나 음식을 먹으라고 주면 굳이 사양했고, 잠자리는 일정하게 하니 사람들은 기이하다 했다. 초행醮行을 가는데 중도에서 어떤 여인이 “신랑은 좋다만 신부는 귀먹고 벙어리며, 눈 먼 병신(장애인)이라” 하니 상객 가던 어른이 놀라서 “그만 돌아가자.”고 했으나 공은 “의리상 그럴 수는 없다.”하고 신부 댁에 가서 행례를 하고 보니 그 말을 전한 자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외삼촌 학봉鶴峯 선생에게 수학修學해서 문장과 덕행으로써 존경을 받았다. 꿋꿋한 기상과 굽힘 없는 절개가 있어서 일에 민첩하고 의義에 용기가 있었는데 임진<1592>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여강서원<현 호계서원>에 가서 동지를 모아 의거를 앞장서서 외치니 인근 여러 군郡에서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는지라 드디어 예안의 한림 김해金垓<호는 근시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동의 배용길裵龍吉을 부장으로 해서 공은 전향참모를 하였다가 뒷날 정제장이 되어 서로 협찬하면서 직책 수행을 정당하게 하였다. 임진년 겨울에 예천의 송구에서 적을 공격하여 여럿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으며, 계사년에는 밀양에서 적봉을 막았으며, 경주에서 대장 김해 공이 전몰하자 의병 진영의 사기가 가라앉았으나 공은 더욱 분투노력하여 도내道內의 여러 의사義士와 더불어 팔공산으로 모여서<32명>회맹會盟을 결의를 하였다. 정유재란<1597> 때는 방어사 곽재우를 따라서 창령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으니 전후에 종군함이 6 ?7년이 되나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아들 5형제와 함께 화왕산성을 지킴> 병란에 이어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이 길에 가득하니 공은 길 가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끓여 그들을 먹여 살렸으니 그 수가 심히 많았다. 류영경柳永慶 상국相國<영의정>은 족친으로 겨우 열촌인데 공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불렀으나 공은 권문權門이라고 해서 마침내 가지 않았다. 집의 남쪽 언덕에 서실을 짓고 「기양서당岐陽書堂」이라 액제額題하고 날로 그곳에서 자신이 공부하고 후생을 가르치면서 은거해도 원망이나 후회하지 않았다. 정사<1617> 2월에 예빈시정 교지禮賓寺正 敎旨가 내렸으나 그해 3월 23일 서거하니 향년 63세로 임하현 동쪽 숲당산林塘山 병향丙向의 원原에 장사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증직이 내리고 기양추원사岐陽追遠祠에 전향奠享하였다. ♣ 1892년에 임란창의 유공으로 증 이조참판 교지가 내림 공은 천품이 수오秀悟하고 도량이 심후深厚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의연毅然하게 성인成人의 기국器局을 가지셨다. 조부大父 인의공引儀公이 영남으로 이사 오시고 선고先考 시정공이 수곡으로 정착하시어 일찍 돌아가시니 불행한 공의 형제 중 아우는 서울 큰댁으로 양자 가시고 고독하게 남았으니, 공은 외로운 심정으로 분발하여 착하고 어진 가르침으로 방향을 잡아 뜻을 세우고 고민하고 부지런히 해서 쉴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학문이 깊어지고 지조와 행실이 견고해졌으니, 공의 학습은 인륜을 바르게 함을 으뜸으로 하였고, 충신忠信에는 아무도 비교할 자가 없었다. 자신은 정正으로써 엄격하게 하고 타인에게는 용서로써 대하여 순박한 덕행을 독실하게 실천함이 일상생활의 원칙으로 나타났다. 언제나 일찍 고아가 되었음을 종신의 애통으로 여겨 형제가 서로 생각함을 한 몸같이 하였다. 조모인 박씨는 연로해서 80이 넘도록 힘을 다해서 즐겁게 해 드리고 멀리 떠나지 않았다. 숙모는 과부가 되어 의탁할 곳이 없는지라 집에 모셔다가 생모처럼 섬겼다. 선조의 산소가 예안 범바위虎巖에 있었는데 오래도록 실전失傳 되었으나 공께서 성심으로 탐문하여 봉분을 수축하고, 영주의 종릉도 퇴폐된 것을 수축하는데 경향각지에 있는 종친들과 함께 상의하고 계획해서 구원久遠한 대책을 세웠으니, 이것이 모두 남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곤궁하고 어렵고 힘 드는 시기를 벗어나서는 생활의 조용함을 노래하고 스스로 좋아하는 바에 따르며, 여가로 노복을 가르쳐서 농사를 지으며 세금 내고 제사를 받들며 빈객을 맞이하고 가정을 꾸려서 문호門戶를 세웠다. 근검勤儉하고 순박淳朴하며 돈후敦厚하고 유원悠遠하였도다. 아아!! 그로써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을 유족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가법家法이 있었던 것이다. 한때 공을 아는 사람 중에 한강 정寒岡 鄭逑 선생은 말하되 “류 모柳某는 가히 심성心性을 논할만하다.”고 하였고, 나의 선조 식암息庵<黃暹>공은 안동부사로 갔을 때 부내府內의 현사賢士들을 추천하는데 첫째로 공의 이름을 말하고 “화살같이 바른 고사高士다.”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식암공 께서는 일찍이 경연에서 <기봉의 행적을> 임금님께 아뢰었고, 류 문충공文忠公, 김 문정공文貞公, 이송와李松窩도 각기 아뢰었다. 인품을 내세워서 당세 인이 신망하였는데, 일찍이 자유子游가 자기 집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담대멸명澹臺滅明 (자유가 말하는 담대멸명이라는 자는 길을 가되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자유의 방에 오지 않았다는 말은 지름길을 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 사람의 행동이 바르고 또 일을 급히 서두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자유를 찾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공사를 구별하고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에다 바로 비比했으니, 옛적에 높은 관직에 계시던 분들이 어찌 엿본바가 없으면서 <임금님께> 그런 말을 하였겠는가? 배配는 영덕 정씨니 참봉 진晉의 딸로서 증 숙부인인데 계축<1553> 생으로 회갑 년에 몰하여 공의 묘전 오향의 원에 장사하였다. 육남 삼녀를 생하였으니, 장남은 우잠友潛이니 호가 도헌陶軒이고 차次는 득잠得潛, 지잠知潛, 수잠守潛, 의잠宜潛이고 계季는 희잠希潛이니 증 참판이며 사위에 정영방鄭榮邦, 이명원李明遠, 김원金遠은 다 생원이고, 여남은 시잠時潛이다. 백방伯房에 5남이니 숙?은 호군이고, 직?은 진사로 호가 백졸암百拙庵이고 다음은 욱, 학이고 계는 격이니 생원이며, 2방의 2남은 재, 래고, 3방의 2자는 간, 은이며, 4방의 1자는 참이고, 5방의 4자는 강, 장, 양, 방이며, 6방의 2자는 위, 지?는 문과로 부윤府尹이다. 그러니 손자가 모두 16인이고, 지금 까지 7 ??8세에 200년간인데 후손이 천 수백 명이나 되고, 선후先後에 현관顯官이 7 ?8인이나 되고 여러 음보蔭補는 다 열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유학의 시詩와 례禮로써 더욱 번창하여 지금 높은 과정의 학문을 하는 선비를 보니, 그의 덕을 쌓음이 무궁하여 ‘선비는 오랜 덕으로 식록食祿하고 농부는 밭에서 부지런히 일하여 먹고사는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일까? 용한龍漢은 어른들을 모시고 있을 때 가만히 들으니 “수곡水谷에는 큰 조상의 기운基運이 미덕美德과 대업大業을 쌓아서 당시當時에는 펴지 못하였으나 뒷날 자손에게 끼쳤으니 자연의 원류源流가 길고도 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윗대 조상에 대한 후손으로서 공이 하신 아름다운 업적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근일에 진사 류약문柳約文이 그의 여러 부형父兄의 명령이라면서 유사遺事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하게 행장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하니 천루淺陋한 나의 할 바가 아니라 사양해도 되지 않아서 드디어 그 큰 것만을 추려서 쓰노니 공은 권력 없는 선비로서 적개심을 갖고 위기에 항거한 보국 충성으로 여러 군郡 인사들의 맹수盟首가 되었음은 크나큰 용기가 있는 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자아의 청백함은 먹물로 염색할 수 없고 자아의 냉철함은 어떤 열기로도 가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궁벽한 시골의 계곡과 구렁을 그의 소박한 삶의 자리로 하여 그에서 즐거움을 갖고 만족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자孔子의 소위 ‘강자剛者’가 아닐까? 성인도 또한 강자剛者는 보지 못했다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성인成人이 되고 덕을 쌓은 때의 일에 속하지만 약관弱冠으로서 초행醮行 갈 때는 잠간 사이에 전해준 망언을 듣고서도 혼례의 대절을 폐하는 일이 없이 인륜의 시원始原을 능히 바루었으니 그의 도량이 크고 넓음과 정력定力이 성실하였음은 세상사람 가운데 소년유자少年儒者로서 능히 이렇게 할 자가 몇이나 될까? 정자程子는 말하되 “나는 30이 안 되었을 때 또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 그 일과도 같다 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용한 평상시와 다급한 시간에 갑자기 내달은 일에는 난이難易가 다른 것이다. 공이 집에서 하던 일을 자세히 살펴보니 운용運用하던 기미氣味가 모두 자애롭고 어질며 조밀하고 신중하며 너무나 둥글둥글해서 옷도 이기지 못하는 듯 하였으나, 그의 하고자하는 바와 그의 하지 않고자하는 바를 생각해 보면 실로 만萬 마리의 소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능히 움직일 만한 무서운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천부天賦에서 얻은 힘이 굳세고 힘차며 모나고 곧은 기력이 있었으니 이것이 또한 스승 학봉鶴峯의 심법心法에서 연원淵源한 것일까? 아아 !! 천하의 대사는 무궁해도 일찍이 세상에는 가히 성취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과 같이 큰 인물을 대하니 전대의 선비가 오히려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 나는구나! 졸문拙文은 참되게 완성되지 못했으니, 후세에 덕을 아는 이의 고정考正이 있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창원 황용한 근장 昌原 黃 龍 漢 謹狀 자료제공 : 류중영
(2)임란 忠臣 墨溪 復立공 가) 기봉공의 아우 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도 관찰사로 진주로 부임하시는 외삼촌이신 학봉 김성일 선생을 수행하여 진주대첩에 공헌하심. 학봉선생이 순국하신 후 충청병사 황진, 의병대장 김천일, 고종후 등과 함께 진주성을 끝까지 사수하시다가 1593년 6월 29일에 순절 하심.(향년 36세) 다) 숙종45년(1719년) 이조참판으로 추증 되시고 영조 5년(1729년)에 충신 정려각이 내려 졌으며, 순조 2년(1802년)1월 진주 彰烈祠 주벽에 김천일등과 나란히 배향 되시고 고종 29년(1892년) 6월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셨다. 라) 조선왕조실록 47집 424면에 기록됨 (3) 陶軒 友潛公(도헌 우잠공) 가) 기봉공의 장자(1575년생) 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엄부(嚴父) 기봉 공을 딸아 초기 전투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7년간 6~700리를 항상 앞장서서 싸웠다. 다) 23년이 지난 후(광해군 7년, 1615년)진주성 함락과 함께 장열하게 순국(殉國)하신 숙부 묵계공의 초혼제(招魂祭)를 진주 촉석루에서 지낼 때 숙부를 애도하는 제문을 낭독하여 주변의 모든 이들을 통곡하게 하였다. 문장은 쉬우면서도 아름다웠으며 시(詩)는 더욱 고아(高雅)하고 감개청명(感慨淸明)하였다. 라) 안동의 영가지(永嘉誌)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嶺南士林 五先生(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 황) 文廟配享 上疏의 嶺南 疏首로 大闕에 나아가서 이를 성사시켰다. 마)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말 타고 활쏘기를 단련(鍛鍊)하고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거의(擧義)를 도모(圖謀)하며 시를 짓기를 ※ 한시(漢詩) 나라가 위급(危急)한데 보답(報答)할 길이 없어 무예(武藝)를 익혀서 바야흐로 의병(義兵)을 일으켰도다. 어찌 서생(書生)이라고 본래 담(膽)이 적을소냐? 한바탕 싸워서 오랑캐의 요기(妖氣)를 씻어버리리라. 하였다. 얼마 후에 조정에서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는 이제 오랑캐가 되었구나!” 라고 탄식했다. 또 거의(擧義)를 논의했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서울에서 화의(和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다시 물을 일도 없다.” 했다. 바) 그 후로는 과거 보기를 단념하고 문을 닫고 독서에 전념하고 학생교육에만 전념하였다. 바) 어려운 사람을 구휼하는 일에 앞장서서 큰 덕을 쌓았다. 사) 臨終에 자제들에게 “너희들은 행동을 삼가 하여 선조를 욕되게 하지 말라” 유언하셨다. ※ 岐峯과 陶軒 兩代의 가르침인 무실 류씨의 ‘岐陶遺業’은 종친의 가훈으로 자손들의 행동과 업적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4) 燕巖 得潛公(연암 득잠공) (1578년생) 가) 19세에 부친을 따라 임진란 팔공산 전투 부터 참전 나) 성품이 매우 침착하심 다) 전후 굶주린 백성 구휼 활동 라) 수많은 직계후손들이 공의 정신을 이어 받음
(5) 龍巖 知潛 (1583년생) 가) 15세에 부친을 따라 정유재란에 死士로 참전 나) 전후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천하고 보급함 다) 수많은 직계후손들이 공의 정신을 이어 받음
(6) 경곡 守潛公(수잠공) (1585년생) 가) 13세에 정유 재란에 死士로 참전하심. 나) 전후 굶주린 백성 구휼 활동 다)수많은 직계후손들이 공의 정신을 이어 받음
(7) 密洞 宜潛公(밀동 의잠공) (1588년생) 가) 10세의 소년으로 정유재란에 死士로 참전 나) 전후 굶주린 백성 구휼 활동 다) 수많은 직계후손들이 공의 정신을 이어 받음
3. 展示 人物(後孫들의 活躍像) 가. 손자 (1) 百拙庵 ?은 1640년 이후 조선왕조 300여년의 인사 정책 때마다 安東의 柳謀로 거론된 강직한 선비. (2) 손자 경주부윤 乖厓 ?, 나. 증손자 (1) 挺輝 공직자의 표상이신 여주 목사, (2) 益輝 효성으로 일세를 뒤덮은, (3) 家禮集說 저술하신 증손자 慶輝, 다. 현손 (1) 청백리에 녹선되신 양양도호부사 函碧堂 敬時, (2) 무신창의에 선봉에서신 醉軒 賁時, (3) 무신창의 때 호계서원 원장으로 용와공을 도 와 무신창의에 앞장서신 壺窩 顯時 라. 五대손 (1) 1724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안동의병대장으로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 무신창의를 하심. 공조참의 ?窩 升鉉, (2) 사도세자의 교육을 맡았던 형조참의 陽坡 觀鉉 다산의 목민심서에 모범사례가 수록됨. (3) 성균관에서 모범이 되신 進士 綠筠軒 晉鉉 마. 六대손 (1) 첨지중추부사 蘆厓 道源 溪集攷證(1998년 중국 四川人民出版社에서 ‘退溪先生文集考證校補’라는 이름으로 중국어로 번역 출판)등 저술 (2) 진사 東岩 長源 常變通攷등 수많은 저술을 남김 (3) 大儒로 칭송 받으신 대사간 삼산 正源 (4) 거문고의 악보 저작을 하신 유학자 江浦 弘源 바. 七대손 (1) 安邊府使 壺谷 範休 호곡집 12권 (2) 儒學者 大? 健休 異學集辨등 70여권의 저술을 남김 사. 九대손 (1) 퇴계 학맥의 정수를 계승하신 병조참판 定齋 致明, (2) 儒學者 守齋 致喬 (3) 典禮攷證 24권과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주제로 한 논문 20편을 남긴 近庵 致德 (4) 進士 小隱 致球 (5) 進士 嘉齊 致敎 아. 10대손 이하 (1) 을미(1896년) 안동의병의 지도자 洗山 止鎬외 8인 (2) 파리 장서 서명 서파 必永 수촌 淵博(定齋先生 宗宅을協同學校 校舍로 無料貸與) (3)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장 星南 時淵(‘70년대 月刊 ‘육군’ 誌에 연재, ‘80년대 KBS 라디오 국군의 방송 시간에 다큐멘터리로 연속방송) 외3인 (4) 3 · 1운동 임동면 만세운동으로 7년 언도를 받고 7일 만에 순국하신 柳淵成 외 24인. (5) 신교육(協東學校)과 만주 독립군의 바탕을 만들고, 민중운동의 선구자 였던 東山 柳寅植외9인 (5) 임시정부 국무위원 旦洲 柳 林외 5인
이렇듯 기봉공과 묵계공 형제분이 끼치신 참 선비 정신 ‘岐陶遺業’이 450여년을 면면히 그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1986년도에 임하댐 공사로 아무런 기념물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수몰이 되는 바람에 이렇듯 훌륭하신 어른의 정신적 문화유산이 망각 되어 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동시에 울분을 느끼면서, 조상에게 부끄러움을 느낀 우리 후손들은 우리조상의 정신문화 즉 참된 선비 정신을 무실의 옛터에 구현 시켜 우리 후손은 물론 국민 모두에게 귀감이 될 충의공원 조성과 충의사 건립을 우리 전주 류씨 수곡파 후손 4,000여 세대의 이름으로 강력히 청원 합니다.
4. 聖域化 場所 및 建立 規模 가. 위치 : 기양문화 선양을 위하여 전주류씨 수곡파의 세거지 인 임하댐 내의 기양서당이 있는 주변에 설치코자 한다.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번지 일대) 나. 성역화 시설의 규모 1) 약 5,000평
다. 시설물 배치 및 건립 내역 (1) 충의사 4칸 기봉공과 묵계공을 주축으로 일곱 분 배향 (2) 강당 5칸 기봉공과 육부자 이하 후손들의 활동상 자료를 전 시하여 후학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후학들의 교육장) (3) 동서재 각 3칸 (후학들의 연구실등) (4) 정문 (5) 충의사 비석 詩碑 등 입구 표지석 (6) 아름다운 조경 및 잔디 광장 설치 7) 기타 현판 및 전시물
4.所要 豫算 가).기본설계 용역비 : 1억원 나),부지조성 및 구입비 부지면적 : 약 5,000평 평당 80,000원/5,000=4억원 조성 공사비 약 5,000평 1억원 다).건조물 공사비 충의사 본관 3칸 및 동서재 및 정문 16억 담장 및 조경비 2억 라).詩碑 건립 및 전시물 제작 1억 총계 25억
5.參考 資料 1.壬辰嶺南義兵史(임란영남충의단 보존회 간행) 2.八公山 上庵 壬亂倡義 諸賢錄(팔공산 상암 임란제현록) 3.岐峰 先生 逸稿(기봉선생일고) 4.梅窩 實紀(매와실기) 5.蘭皐先生 遺稿(난고선생유고) 6.全州 柳氏 大同譜 別錄 7.全州 柳氏 大同譜 別錄 8.全州 柳氏 大同譜 孫錄 岐陽 文化 聖域化 事業 推進委員會 자료수집 담당 : 류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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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greenfield 원문보기 글쓴이: 녹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