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종갓집 冠禮 엿보기
성인의 道를 깨닫다
(사진)관례식의 주인공인 관자(冠者)가 세 차례에 걸쳐 성인의 의관을 갖춰 입는 삼가례(三加禮)를 치르고 있다. 갓을 쓰고 있는 관자 주위로 의례를 주재한 주인(主人:부친이나 조부)과 의례를 돕는 찬(贊)들이 둘러서서 예식을 지켜보고 있다.
관례(冠禮)는 남자가 조상에게 자신이 어른 됨을 알리는 의식(儀式)이다.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네가지 통과의례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양의 성인식(Initiation)과 비슷한 의식이다.
남자는 관례를 치르게 되면 의관(衣冠)부터 달라진다. 더벅머리는 상투를 틀고 망건(網巾)과 갓(冠)을 쓰게 되고, 몸에는 두루마기와 도포(塗布)를 걸쳐 어른의 행색을 갖추게 된다. 여자는 보통 혼약이 이뤄진 뒤 계례를 치렀는데 이날 처음으로 삼자(衫子)와 배자(背子)를 입고 머리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고 화관(華冠)을 쓰게 된다.
옛 사람들은 관례를 혼례보다 오히려 중히 여겨 미혼이라 할지라도 관례를 마치면 온전히 성인 대우를 해주었다. 특히 사대부가에서는 관례 잔치가 혼례 잔치보다 훨씬 성대했고, 남자는 죽어서도 관례를 치른 나이와 관례 때 받는 자(字)를 이력에 남기게 될 정도다.
남자가 관례를 치르게 되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문중 간 사랑 출입이 허락되었고, 관례를 치르지 않은 이들에게 나이가 많더라도 하대(下待)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관례식 때 서양 성인식의 대부(代父)에 해당하는 빈(賓)이 자(字)를 지어주는데 성인이 되면 실제 아호(雅號)를 대신해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서로 자를 부르게 된다.
(사진) 중청에는 관례에 필요한 복장을 미리 준비해두는데 상 위에 보자기를 덮어 깔고 그 위에 초립(草笠)·빗·동곳·망건(網巾)·복건(邏巾)·도포(道袍)·전복(戰服) 등 의관을 미리 준비해 둔다. 이를 진설(陳說)이라고 한다.
관례는 고려 말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들어오면서 사대부가로부터 퍼지기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관례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최근 들어서는 성인식으로 그 맥(脈)은 겨우 잇고있는 정도다. 관례는 보통 20세에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조선후기 들어 조혼 풍습이 생겨나면서 관례를 치르는 나이도 점차 빨라졌다. 하지만 <효경(孝經)> <논어(論語)>에 능통하고 예의를 대강 알고난 나이여야 하고 집안에 기년(朞年:상중인 기간)에는 관례를 치를 수 없었다.
유가의 경전 <예기(藝記)>에는 “관례와 계례는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일깨우는 예(責成人之禮)로써 장차 사람의 자식 된 도리를 다하게 하고, 아우로서 동생의 의리를 다하게 하고, 신하로서 신하의 할 일을 다하게 하고, 남보다 젊은 사람으로서 젊은이의 행실을 다하게 하려는 데 뜻이 있다”고 적고 있다.
관례는 서양의 성인식이 그러하든 아이들의 삶은 죽고 어른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의식이기도 하다. 고대의 성인식은 보통 이때 얼굴이나 몸에 문신을 새기고, 서양에서는 보통 성인식을 통해 생명을 담보로 한 모험의식을 거치게 해 성인 남자(戰士)로서 거듭나게 됐다.
(사진)예식을 모두 마친 뒤 관자와 주인, 찬의 역할을 한 집안 어르신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우리 전통에서 남아있는 관례라는 의식은 세 가지 건(巾)과 세 가지 의(衣)를 입게 되는 의례적 절차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관자는 단순한 의관(衣冠)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도 어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는 집안과 사회 질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융합의 계기를 마련해 자연스럽게 예절교육을 받도록 한 것이다.
관례는 개화기 단발령이 내려져 상투가 사라지자 갓을 모자로 대신하기도 했지만, 조혼 풍속이 사라지면서 혼례에 포함돼 버렸다. 이미 관례는 우리 사회에서 시들해졌지만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던 성인의 도(道)는 지금도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삼을 만하다.(사진/권태균)ⓒ
(사진)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있는 의성김씨 종택(宗宅). 55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보물 제 4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난 음력 2월28일,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에 위치한 의성김씨(義城金氏) 종갓집에서는 근래들어 보기 어려웠던 대사(大事)가 치러졌다. 과거 사대부가에서 중요한 통과의례로 여겼던 관례(冠禮) 의식이 재현된 것이다.
임하면 천전리는 의성김씨 청계공파의 집성촌으로 조선 선조때 문인이었던 학봉(鶴峯) 김성일의 부친인 청계 김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학봉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현재는 청계의 16대 종손인 김창균(金昌鈞)씨가 400년 넘은 종가 고택을 지키고 살고있다. 의성김씨 종가집은 안동을 대표할 만한 명문으로 그 가풍도 뛰어나지만 55칸 기와집인 고택도 보물 제 450호로 지정돼 있을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사진)이날 관례의 주인(主人)이자 관자의 부친인 의성김씨 대종가 종손 창균(昌鈞)씨. 그는 조선 선조대의 문인인 학봉 김성일의 부친인 청계 김진의 16대 종손이다.
보통 관례를 지내기 3일 전에 술과 과일을 준비해 사당(祠堂)에 고(告)하고, 예식 하루전에 조부와 친분이 있는 분으로 예(禮)를 알고 덕망이 있는 학자를 주례자(主禮者)로 모신다. 서양으로 치면 대부(代父)에 해당하는데, 이를 빈(賓)이라고 한다.
이날 의성김씨 종가의 관례에는 의성김씨 가문을 대표하는 학봉 김성일과 교분이 깊은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의 14대 종손인 류영하(柳寧夏) 씨가 초빙되어 주례를 섰다. 서애 류성룡은 풍산류씨(豊山柳氏)를 대표하는 인물로 안동군 풍천면 하회마을에는 풍산류씨 종택인 충효당(忠孝堂:보물 제306호)이 남아있다.
(사진)빈을 초청하는 일은 계빈(戒賓)이라 한다. 종중 혹은 향중(鄕中)에서 학덕이 있고 예법을 잘 아는 분으로 자식의 관례를 주관케 함으로써 장래에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교도해줄 빈(賓)을 청하게 된다. 이날 관례에 빈으로 초청된 류영하(柳寧夏)씨는 학봉 김성일과 교분이 깊었던 서애(西涯) 류성룡의 14대 종손으로 안동 하회마을에서 살고 있다.
청계 김진의 네째아들이었던 학봉 김성일은 이곳 임하에서 태어나 퇴계선생 문하에서 공부했던 인물로 임진왜란 직전에는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정사인 황윤길과 서로 다른 상소를 올려 동인과 서인의 당쟁에 불씨를 낳은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학봉이 왜의 조선 침입은 없을 것이라고 상소를 올린 것은 흔들리는 민심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문인 출신인 학봉은 결국 임란 와중에 의병을 이끌면서 왜와 맞서 싸우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사진)관례를 주재한 주인(主人:보통 관자의 부친)과 관례식의 주인공인 관자가 예식을 조상에게 고(告)하기 위해 사당으로 향하고 있다. 사당에는 의성김씨 청계공파의 시조인 청계 김진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진) 관례를 주재하는 주인은 관례가 열리기 3일전에 미리 사당에 모신 조상께 관례사실을 이렇게 고(告)한다. "아무개의 (몇째) 아들 아무개가 연령이 장성해서 모월모일 관례를 시행하옵기에 술과 과일로 사가 뜻을 고합니다". 관례는 그 예가 특히 중했기 때문에 춘하추동 4계절 중 그 첫 계절에 주로 날짜를 잡았다.
(사진)관례에 참석한 문중 어른들이 삼가례가 시작되기 전 사랑에 모여 담소하고 있다.
이날 관례의 주인공, 즉 관자(冠者)는 청계 선생의 17대 손인 관석(21) 씨다. 관석 씨는 그동안 해외유학중이었는데 군입대를 얼마 앞두고 있어 관례를 치렀다. 이날 의식을 총괄집행했던 김시상씨는 “문중과 문중 간에 교류가 많았던 시절에는 문중의 종손이나 장자의 나이가 지나치게 어릴 경우 미리 관례를 올려 사당에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면서 “오늘의 관자는 의성김씨 종손의 장자로서 해외에서 유학하다 군에 입대하게 돼 서둘러 관례를 치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날 예식을 지켜본 의성김씨 문중 어른들 이야기로는 안동 고을을 통틀어 종갓집에서 관례식이 열리기로는 30여년만에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진)예식이 시작되기 전 관례에 참석한 향중 명문가의 종손이 모였다. 이날 관례에는 풍산류씨의 종손 뿐만 아니라 한산이씨 종손 등이 대거 참석했다. 관자가 종손들의 등뒤에서 다소곳이 삼가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날 예식에는 의성김씨 문중 사람들과 안동지역의 내로라는 명문가 종손들이 두루 초청돼와 성황을 이뤘다. 관례는 보통 가문과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양반가의 남자아이의 나이가 15~20세가 되면 통과의례로 치르는 행사로 보통 머리에는 상투를 틀어 갓을 썼고 몸에는 도포와 두루마기를 입게된다. 여자의 경우는 비슷하게 계례라는 것을 치게 되는데 장계자의 어머니인 주부(主婦)가 일가친척이나 서돈 부녀자 중에서 어질고 예법에 밝은 부인을 계빈(戒賓)으로 정해 기별을 넣어 모셔와 대모를 서게 했다.
(사진)삼가례를 마친 뒤 관자가 빈에게 절하고 있다. 삼가례를 마친뒤 초례(醮禮)를 가지는데, 빈이 관자에게 축하주를 건네주면 관자는 성인의 책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이를 마신다. 초례가 끝나면 빈은 비로소 관자에게 자(字)를 지어준다. 관자는 관례후 아호(兒號)나 이름대신 주로 자를 사용한다.
관례식의 주인공인 관자(冠者)가 세 차례에 걸쳐 성인의 의관을 갖춰 입는 삼가례(三加禮)를 치르고 있다. 갓을 쓰고 있는 관자 주위로 의례를 주재한 주인(主人)과 찬(贊·빈을 돕는 사람)과 그밖에 문중 어른들이 둘러서서 예식을 지켜보고 있다. 관례의 하일라이트는 3가지 관건(冠巾)을 차례대로 씌우는 시가(始哥)·재가(再哥)·삼가(三哥) 등 삼가례(三加禮)다. 삼가례를 치른 뒤 빈은 관자에게 술잔을 건네주어 성년을 축하해준다(初禮). 이 절차가 모두 끝나면 빈은 관자에게 자(字)를 지어 준다(字冠字禮).
(사진)관자는 삼가례를 치른 뒤 갓과 도포를 갖춰 입고 주인을 따라 다시 사당에 고(告)한 뒤 성인으로서 부모님과 일가친척 어른들에게도 하례를 행한다. 관자는 보통 어른들에게 두 차례씩 절을 하게 되는데, 어머니의 경우는 장자(長子)의 하례를 받을때 한 차례는 앉아서, 한 차례는 서서 절을 받는다. 이는 어머니가 제사를 모시는 장자의 위치를 존중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