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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서거로 인해서 급작스레 대통령에 오른 인물.
역시 무능력했으며 전두환의 12.12쿠데타를 막지 못했음.
장면 총리와 비슷함.
(출처 :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 네이버 지식iN)
대통령 부인 홍기 여사.
최규하 대통령 부인 홍기 여사는 역대 대통령 부인 중 재임기간이 가장 짧았고 대외활동면에서 가장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영부인으로, 전통적인 한국여인의 부덕을 지녔다는 평을 듣고 있다.
(출처 : '우리나라의 역대 영부인' - 네이버 지식iN)
최규하 대통령은 평소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말수도 적은지라 별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출처 :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18번 노래들' - 네이버 지식iN)
최규하 대통령도 얼마 집권하지 않았었죠 중요한 사건은 12.12군사 쿠데타와 아까 말했던 5.18광주민주화 운동입니다 10.26 사태때 국무총리로써 서거한 박정희 대통령의 권한 대행 때 12.12사태가 일어나 실권은 전두환 등 신군부에게 넘어갔으며 최규하는 12.21 이름뿐인 대통령직에 취임합니다
가 12.12군사반란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된 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 등의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2·12사태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 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나.5.18 광주 민주화 운동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하였고, 1988년 11월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를 개최했다.
원인은 박정희(朴正熙)의 오랜 군사독재가 통치능력을 상실한 일련의 사태, 즉 1979년의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 제명파동, 같은 해 10월 16일의 부마사태(釜馬事態), 10월 26일 김재규(金載圭)에 의한 대통령 박정희 시해사건(10·26사태) 등이 초래한 국가적 위기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고 군사독재의 연장을 통하여 해결하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
신군부세력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 투옥하기 시작하자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이에 반발하는 학생 ·시민 연대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시민항쟁은 시민자치와 민주주의공동체 구현 등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27일 새벽 2만 5,000명에 달하는 군을 투입한 무력진압에 정부공식 발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을 내고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인식(對美認識) 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 ·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내용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출처 : '윤보선,최규하대통령 임기기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 뭔가요?' - 네이버 지식iN)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암살당했을 당시 최규하씨는 국무총리였죠, 그래서 일단 자동적으로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뒤 며칠후에 정식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 임시대통령을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간단한 연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 국무총리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 취임
12월 6일 : 통일주체국민회의, 최규하 후보 제10대 대 통령으로 선출
12월 12일 :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12.12사태' 발생)
12월 21일 : 최규하 제10대 대통령 취임
1980년
5월 17일 :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5월 18일 : 광주 민주화운동 시작
8월 16일 : 최규하 대통령 사임
(출처 : '최규하 집권 당시에 ??' - 네이버 지식iN)
최규하 대통령 당시 청화대 경호실장은 정동호 입니다
하나회이고 전두환에 심복이지요
최규하에 일상생활 은물론 전화까지 도청 보고 했겠지요
대통령이 행동에 힘을 잃어버린겁니다
대통령은 장관들 과같이 나라행정을 이끌어가지요
전두환은 차관급으로 국보위상임위원회를 만들고 자신이 위원장이되
각부쳐를 를 장악해 국무회의를 무력화시키고 인사권 까지장악합니다
정승화가 참모총장일때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경사(동해안 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전출 시킬려했지요
이를 미리알아버린 전두환이 12.12를 일으킨 것이라 할수 있죠
12.12때수도권 사단장 여단장 연대장급에 하나회회원 들이많았습니다
이들이 대장 ,중장,급 상관에 명령을 듯지않았습니다
하나회는 육사졸업생중 소위,중위시절에 두각을 나타내는 자를 1년에 12명
가입시켜 육군에 핵심세력 으로 만드는 사조직입니다
전두환 노태우가 리더이지요
하나회는 경상도 출신이여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이 아님니다
그예로 전두환이 가장 사랑하던 장세동은 전남출신이고
국민들에게 깊은 존경받던 이춘구는 충북 출신이지요
(출처 : '최규하가 왜 전두환을...그냥 보고만 있었나요?' - 네이버 지식iN)
지금이야 군부의 힘이 많이 약했지만, 박정희때만 하더라도 육군에서 별만 달아도 엄청난 실세였죠.
10.26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씨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지만 역시나 군부 눈치만을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계엄령하에서 나라의 치안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던 사람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보안사령관(지금의 기무사령관)은 전두환 이었습니다.
10.26이후 전두환의 낌새에 불안해 하던 정총장은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외진 곳으로 전출시킴으로서 그 세력을 약화 시키려 하지만 당시 상당한 육사 인맥을 보유하며 군 내에서 신망을 얻고 있었던 전두환은 미리 눈치채고 노태우를 비롯해 육사 선후배들과 함께 12.12쿠데타를 일으켜 정총장과 당시 장태완 수방사령관을 축출해 버리고 자신이 장악함으로서 실질적으로 군부 실세에 오르게 됩니다.
사실상 얼굴마담이나 다름없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역시나 신군부 수장이었던 전두환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전두환은 스스로 소장에서 중장,대장으로 진급해 전역한 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출처 : '[5.18 광주민주화운동] 최규하와 전두환' - 네이버 지식iN)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이끄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 내부의 무력충돌을 말한다.
12·12사태는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을 계기로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하는 등 내부개혁이 진행되면서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여 불법적으로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합수부 소속의 허삼수·우경윤 대령에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한국정치사에서 5·16이후 또 한 번의 군사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조정통제국장이던 허삼수 대령은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2국장 우경윤 등과 함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저녁 6시 50분 경 무장한 제33헌병대 병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하였다.
이로부터 약 20분이 지난 7시 10분경 참모총장 공관으로 들어가서 총으로 위협하는 가운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여 강제로 끌고 나와 저녁 7시 30분경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였다. 연행과정에서 참모총장 부관이 전화로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하자 합수부측 보안사 수사관들이 권총을 발사해 양측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신군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함으로써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다.
같은 시간에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저녁 9시 30분경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백운택·박희도 등과 함께 집단적으로 대통령을 찾아가 재차 정승화 총장의 체포 및 연행에 대한 재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 대법원은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경 신군부세력의 주장대로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승화 총장이 이미 체포되었고 또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서 '사후승낙'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란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하고 있다.
12·12사태 다음날 아침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해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짤막한 배경설명을 발표했지만 그 역시 신군부에 의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2·12사태를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3일 0시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에 육군본부·국방부·중앙청·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하에 두었다.
한편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있던 윤성민 참모차장과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동참모본부장 등 육군본부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자로 정승화 추종세력인 이건영 3군사령관과 정병주·장태완 등을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 참모총장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이들과는 달리
12·12사태를 주도했던 신군부세력은 대부분 승승장구하여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이 임명되었고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황영시·김복동·유학성·유병현·박준병 등 신군부 세력은 군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함으로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12·12사태의 진상은 그 후 십여년간 밝혀지지 못한 채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가 김영삼 정부 아래서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구속되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내용출처 : [기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멀티미디어판 CD
(출처 : '12·12사태' - 네이버 지식iN)
아름다운 나라, 美國의 가면을 벗기다.
광주 민중 항쟁 이후 이 땅의 민중은 하나의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였다.
이 땅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무엇인가. 과연 누가 민주주의, 민족 통일을 향한 우리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가. 우리 민중은 투쟁을 통해 이승만을 몰아냈고 박정희를 몰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미국은 아름다운 나라, 은혜로운 나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5·18을 계기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충격적인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 미국의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미국이 전두환의 학살을 막고 광주시민을 도와주러 왔습니다.”
25일 부산에 미국의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도청 궐기대회에서 발표되자 순진한 시민들은 드디어 미국이 군부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와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온 줄로 알고 함성을 질렀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시민들만의 순진한 환상이었다는 것을 이틀 뒤에 알았다.
항공모함은 왜 왔을까?
미국은 신군부가 진압에 실패해 무장항쟁이 전국적으로 번질 경우 주한미군을 직접 동원하려는 생각이었고 아직 광주에서 대피하지 못한 자기 국민 130명을 안전한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믿는 도끼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광주시민들이 죽어가며 깨달은 “이제야 알았다. 우리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이것은 35년만에 죽음으로 깨달은 ‘피의 교훈’이었다.
2000년 4월 22일 미국에서 “20년 뒤 광주” 라는 5.18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당시 한미연합사의 미군사령관은 특전사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이 병력이 야만적으로 행동하도록 명령을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군 이동은 전두환이 결정했고 최규하가 형식적으로 승인했다.”
96년 한국 관련 극비 문서 1,749건을 공개해 미국이 광주학살에 어떻게 개입했는가를 세상에 널리 알린 팀 셔록 기자는 “미국과 광주 - 20년 뒤”라는 논문에서
“미국이 광주항쟁진압 과정을 알고 있었고 87년 민중항쟁 때 전두환 정권의 군대 동원을 막은 점으로 볼 때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이 아직 5.18 항쟁 관련 중요 문건 20여 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들 자료가 공개되면 미국의 개입 사실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
아마 여기에는 신군부가 진압에 실패했을 때 직접 미군을 동원하려 했던 22일 백악관 회의 문건도 있을 것이다.
셔록(46) 기자는 9살 때 교회 일을 보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 4.19를 직접 목격하고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원 논문도 한국 경제에 대해서였다.
그는 89년 미 국무부가 한국 국회에 제출한 거짓말투성이 백서를 보고 당시 비밀전문을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앞으로 80년대 한미관계를 담은 책을 쓸 생각이란다.
비밀 전문과 그들이 자랑삼아 내뱉은 말에서 그들이 광주학살에 깊숙하게 개입했다는 증거가 엄청나게 있는데도 그들은 아직까지 사과 한마디 없을 뿐만 아니라 뻔뻔스런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홀보루크의 말은 미국의 정확한 입장이다.
“광주학살에 미국이 한국 장성들과 적극적으로 공모했을 것이라는 의심은 솔직히 기상천외의 엉뚱한 생각이다. 이러한 공모행위는 우리 미국이 추구해왔던 모든 정치적 가치에 벗어날 뿐 아니라 역겨운 것이다. 전두환이 특전사를 광주에 투입한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미국은 그 사태를 중지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우리는 특전사에 대한 관할권도 이동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었다. 학생데모에 군대를 사용한다는 계획에 대하여 미국은 경악했다. 미국은 이 사태의 처음부터 끝까지 뒤에서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법적, 외교적, 도덕적 책임도 없다.”
그러나, 셔록 기자가 밝혀낸 비밀전문을 보면 이 말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80년 1월 19일 전문
“12.12 이후 우리는 한국의 정치적 전환기에 안정적인 바탕을 마련하도록 도움을 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적극적인 활동가가 되어버렸다.”
2) 80년 5월 29일 전두환이 편집국장들에게 한 말
“미국은 12.12,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 5.17 조치 등 모두 사전에 통보 받았다.”
3) 80년 8월 27일 워컴이 AP통신과 회견에서
“10월 사태이후 미국이 한국 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 보람도 크다.”
이날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날이다.
4) 뉴욕 타임즈
“12.12 때 새로운 장성들이 정승화보다 오히려 온건하다. 역쿠테타를 해서는 안된다고 정승화 직속 부하들에게 경고했다.”
5) 80년 5월 8일 전문 : 한국 정부, 특수부대를 이동시키다.
“모든 특전사 부대가 비상 대기중이며 13공수는 5월 6일 이미 서울로 이동했고 7일 11공수도 서울지역으로 이동했다. 11공수는 서울로 이동한 마지막 부대로 이동 직전에는 강원도 사북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소요사태 때문에 원주지역에서 대기상태에 있었다. 서울 외곽에 남아 있는 부대는 7공수 뿐으로 이 부대는 아마 전주와 광주 지역 대학생들의 소요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7공수는 5월 18일 새벽 1시에 전대와 조대에 자리잡았다.
6) 5월 7일 전문
“주한 미군사령부는 포항의 해병 1사단이 대전과 부산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있으며 해병 1사단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으므로 병력이동에는 미국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아직 한국 군부로부터 병력 이동에 대한 아무런 요청이 없지만 만일 요청이 오면 미군사령부는 동의할 것이다.”
미국은 공수부대만이 아니라 귀신 잡는다는 해병대까지 동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박정희가 죽고 10일 뒤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로키’라는 최고위 비밀 정책팀을 만들었다. 이 전문은 대통령, 국무장관, 홀보루크, 국가안보회의 고위 정보 담당자와 글라이스틴 대사만 보도록 되어 있다.
7) 워싱턴 전문
17일 비상계엄확대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글라이스틴이 5월 8일 전두환과 최규하를 만나 전한다. 이에 앞서 7일 다음과 같은 전문을 워싱턴에 보낸다.
“한국 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는 것에 대해 미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 답장은 다음과 같다.
“미국 정부는 법과 질서유지를 위한 한국 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미 비상계엄령 확대조치 10일전에 미국은 병력이동을 승인했다.
8) 광주진압 지지한 ‘백악관 정책검토위원회’ 회의록
가. 시간과 장소 : 80년 5월 22일 백악관 상황실 오후 4시 - 5시 15분
나. 주제 : 한국
다. 참가자 : 머스키 국무장관(사회자), 크리스토퍼 차관, 홀보루크, 리치 한국과장(이상 국무부) / 터너 국장, 홀드리지 중국 및 동아 담당관(이상 중앙정보국) 존스 대장, 베시 대장 푸스테이 중장(이상 합참본부) /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아론(이상 백악관) / 그레그(국가안보회의) / 브라운 장관, 맥기퍼드 국제안보담당관 차관보, 플랫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이상 국방부)
라. 주요 내용
- 20사단 추가투입
- 폭력사태가 광주 외곽으로 번질 양상을 보일 때 국방부 입장
9) 5월 22일 전문
“우리는 미국이 계엄당국과 은밀히 결탁했다는 협의가 두렵고 광주지역에서 반미감정을 부추길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조처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10) 22일 오후 10시 전문
“광주 폭도 수는 15만 명으로 증가했고 그들은 자동차 수백대와 화기 수천대를 탈취했다. 광주는 완전히 공포의 현장으로 변했다. 한국 정부는 전남지역에 20사단과 공군 그리고 특수부대를 비상 대기시키고 있다.”
11) 80년 5월 26일 전문
“류병헌 합참의장이 워컴 장군에게 계엄군이 27일 자정 광주에 투입될 것이라고 통보해왔다.”
12) 80년 5월 27일 전문
“계엄군이 광주를 탈환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13) 그리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82년 7월 23일자 전문에 있었다.
“광주항쟁 2주기인 82년 광주, 전남 지역에서 전두환에 대한 반감과 분노가 극에 이르자 정치적으로 폭발성이 강한 이 곳에 잘 훈련되고 80년 당시 진압경험이 있는 11공수를 광주 비행장에 배치했다.”
[오월에서 통일로 !]
5.18광주민중항쟁은 우리나라에게 있어 미국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려준 것과 함께 이 땅의 비극이 중단되기 위해서는 민족의 자주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알려주었다.
26일 제 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투쟁을 다짐했다.
5.18 비극의 뿌리는 분단이다. 분단은 군부독재자들에게는 정권유지의 튼튼한 자양분이 되었고, 국민들의 조그마한 저항도 친북 불순세력으로 몰아 민주주의의 요구를 억압했다. 그들은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을 고정간첩의 선동으로 폭동을 일으킨 폭도로 몰아 세웠다.분단과 남북대결은 정치군인을 양성하는 재료가 되고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또다시 독재로의 퇴보의 길을 걷지 않으려 한다면 민족의 비극인 분단의 철조망은 걷어내야 하고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져야만 5·18과 같은 비극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출처 : '미국의 이중성 : 평화의 상징인가? 악의 화신인가?' - 네이버 지식iN)
삼청교육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발령된후, 전두환의 국보위가 사회정화정책의 일환으로 같은해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를 발표하여 폭력범과 사회풍토문란사범을 소탕한다며 죄질에 따라 순화교육을 군부대에서 실시 하였는데 이것이 삼청교육대 입니다.이것은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지시로 만든것 입니다.그 결과 1981년 1월까지 총 6만 755명을 체포하고 보안사령부·중앙정보부·헌병대 요원과 검찰·경찰서·지역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A·B·C·D의 4등급으로 분류하여 A급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고 B·C급 3만 9786명은 4주 교육 후 6개월 복역케 한 다음 2주 교육하여 훈계방면하였으며,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계 방면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화교육에 있어서는 연병장 둘레에 헌병이 집총 감시하는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가혹한 방법의 훈련을 감행함으로써 1988년 국회의 국방부 국정감사 때 사망자가 54명 발생하였음을 보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위내용은 백과사전에서 발췌한것 입니다. 그때당시 제가살던 서울에 공수 부대원들이 2명씩 조를짜서 총은 안들고 대검만을 옆에 차고 지나는 민간인을 불심검문하여 웃옷을 벗겨보고 몸에 흉터나 문신이 있으면 무조건 파출소로 연행하여 판정을 하게 하였습니다.그런데 그때 생각해보면 총보다도 대검이 더 무서웠습니다.그래서 연행된 사람들이 등급이 정해져서 순화교육을 받을사람을 따로 모아 트럭에 탑승시켜 군부대로 보냈던 것입니다.현재 MBC에서 방영하는 그대로 있는 내용 입니다.같다온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알수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MBC에서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지 꼭 그런부분만 보여준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때 그런일은 실재했던 내용입니다.그러나 그때 사회에서 많은 악을 행하던 깡패라던가 폭력사범도 많이 처벌받아 사회악 근절에도 기여는 했습니다.그것이 초법적이고 월권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