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2부 12
모스끄바에서 돌아온 직후, 레빈은 청혼을 거절당한 치욕을 떠올릴 때마다 매번 몸서리를 치고 얼굴을 붉히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물리에서 낙제점을 받고 2학년에 유급되었을 때도 모든 게 끝장났다는 생각에 똑같이 얼굴을 붉히고 몸서리를 쳤지. 누나한테 위임받은 일을 망쳐 버렸을 때도 똑같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근데,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를 떠올려 보면 어떻게 그따위 일들로 괴로워했는지 어이가 없을 뿐이잖아. 지금 이 괴로움도 똑같이 그렇게 될거야. 시간이 흐르면 무덤덤해질 거야.’
그러나 석 달이 지났는데도 도무지 무덤덤해지지가 않았고, 그 일을 떠올리면 그때와 똑같이 괴로웠다. 그는 아무래도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가정생활을 꿈꾸어 왔으며 그걸 이룰 만큼 성숙했다고 느꼈던 자신이 아직 미혼 상태일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도 결혼으로부터 멀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자기 또래의 사내가 독신인 건 좋지 않다고들 했고, 그 자신 또한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는 모스끄바로 떠나기 직전 자기가 좋아하는 말벗, 순진한 농부이자 가축지기인 니꼴라이에게 무심코 던졌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봐! 니꼴라이! 나 결혼이 하고 싶다네.” 그러나 니꼴라이는 추호도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서둘러 대답하는 것이었다.
“진작에 하셨어야죠, 꼰스딴친 드미뜨리치.”
그러나 지금 그에게 결혼은 그 어느 때보다 요원해졌다. 자리는 이미 점유되어 있었기에, 이제 그가 아는 처녀들 중에서 누군가를 상상속의 그 자리에 세워 본들, 그런 일은 전혀 불가능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청혼을 거절당한 일과 당시 자신이 연기했던 역할에 대한 기억이 수치심으로 그를 괴롭혔다 자신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그 기억은 여타의 똑같이 부끄러운 기억들과 더불어 그로 하여금 몸서리 치며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나쁜 짓들을 과거에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나쁜 짓들에 대한 기억은 결코 이 사소하면서도 수치스러운 기억처럼 이토록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이 상처는 결코 아무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이젠 그 기억들과 나란히, 거절당한 청혼과 그날 저녁 남들에게 번연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그 비참한 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과 노동은 제 할 일을 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시골 생활의. 중요한 사건들에 의해 점차 가려졌다 한 주가 지날 때마다 그가 키티를 떠올리는 일은 차츰차츰 뜸해졌다. 그는 그녀가 벌써 시집을 갔다는, 혹은 조만간 출가할 거라는 소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치 이를 뽑는 것처럼 그 소식이 자신을 단번에 치유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는 사이 기다리지 않아도 어김없이 아름답고 정겨운 봄이 찾아왔다. 식물과 동물, 사람들이 다 함께 기뻐하는 아주 드문 봄 중 하나였다. 이 아름다운 봄은 레빈을 더욱더 각성시켰으며, 모든 과거지사와 결별하고 독신 생활을 굳건하게 독립적으로 정비하려는 그의 의지를 확고하게 다져 주었다 비록 도시에서 시골로 돌아올 때 마음속에 품었던 계획들 중 많은 것들이 실현되지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청렴결백한 생활을 그는 지켜 나가고 있었다. 도덕적 타락을 저지른 이후로 늘 자신을 괴롭히던 수치심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러하기에 사람들의 눈을 당당하게 쳐다볼 수가 있었다. 그러다 2월에 마리야 니꼴라예브나로부터 니꼴라이 형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형은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를 받은 레빈은 모스끄바에 있는 형에게 가서, 의사한테 진료를 받고 해외 온천으로 요양을 가도록 설득했다. 그는 썩 훌륭하게 설득해 냈으며, 형의 화를 돋우는 일 없이 여행 경비까지 빌려주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꼈다. 봄에 특히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농사와 독서 외에도, 올겨울 레빈은 농업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글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농업에서 노동자의 특성은 기후나 토양처럼 절대적인 소여(所與)로 간주되며, 따라서 농업에 대한 모든 학술적 명제는 단지 토양과 기후만이 아니라, 토양과 기후 그리고 노동자의 불변의 특성이라는 소여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독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고독한 탓에, 그의 삶은 너무나 충만했다. 다만 가끔씩 자신의 머릿속을 맴도는 상념들을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아닌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는 충족될 길 없는 욕망이 일곤 했다. 그래도 그녀와 함께 물리와 농업 이론, 특히 철학에 관하여 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 철학은 특히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좋아하는 분야였다.
봄은 오랫동안 개화하지 않았다. 사순절 재계의 마지막 주간에는 청명한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었다. 낮에는 햇빛에 얼음이 녹았지만,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 7도까지 내려갔다 얼음층이 아주 단단해서 길이 아닌 곳에도 짐수레가 다니곤 했다. 부활절에는 눈이 잔뜩 내렸다. 그런 다음 갑자기 부활절 주간 둘째 날, 따스한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사흘 낮과 밤에 걸쳐 따뜻한 비가 내렸다. 목요일이 되자 바람이 잦아들고, 마치 자연 속에서 일어난 변화의 비밀을 감추듯이 짙은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밀려왔다 안개 속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얼음이 소리를 내며 갈라져 떠내려가고 거품이 이는 탁한 물결이 급속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끄라스나야 고르까’[‘붉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부활절 주간 바로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말한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동슬라브인들의 축일로, 이날 진정한 봄이 시작된다고 여겨 마을마다 야외에서 사람들이 모여 흥겨운 봄맞이 행사를 벌였다.]의 저녁 무렵부터는 안개가 사라지고 먹구름이 양떼구름으로 흩어지며 하늘이 맑게 개더니, 이윽고 진짜 봄이 펼쳐졌다. 아침에 눈부시게 떠오른 해가 수면 위를 얇게 덮고 있던 얼음을 순식간에 녹여 없앴고, 겨울을 버틴 땅에서 올라오는 증기로 가득 찬 따뜻한 대기가 온통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늙은 풀과 뾰족하게 솟아난 어린 풀들이 파릇파릇해졌고, 까마귀밥나무와 구스베리, 찐득한 수액이 흐르는 자작나무에서는 싹눈이 부풀어 올랐으며, 금빛 물감이 흩뿌려진 버드나무에서는 불쑥 나타난 꿀벌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융단 같은 풀밭과 가을걷이 이후 얼음이 덮인 밭 우에서 눈에 띄지 않는 종달새들이 우짖었다. 갈색 흙탕물이 흘러드는 강 하류와 늪지에서는 댕기물떼새들이 울고, 학과 거위들은 봄을 알리듯 깍깍 외쳐 대며 하늘 높이 날아다녔다. 목장의 풀밭에서는 군데군데 아직 털갈이가 덜 끝난 가축들이 울부짖기 시작했고, 다리가 구부정한 새끼 양들이 양털을 잃고 울고 있는 어미 양들 주변에서 장난을 치는가 하면, 걸음이 잽싼 새끼들은 맨발 자국이 난 마른 오솔길을 따라 달음질쳤다. 연못가에서는 아마포를 빨러 나온 아낙네들이 흥겨운 목소리로 재잘거리기 시작했고, 마당마다 농부들이 쟁기와 써레를 수선하느라 도끼를 내리찍는 소리가 울렸다. 진짜 봄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