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서숙과 보재 이상설 선생
서전서숙(瑞甸書塾)은 왜적(倭賊)의 침략의 마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1906년에 북간도 연길현 육두구 용정촌(현재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의 서전평야에 배일민족교육을 위해 설립되었던 교육기관이었다. ‘헤이그 3밀사’ 가운데 한 분이기도 한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이 서숙의 설립을 주창하고 사재를 털어 대부분의 자금을 부담하였다. 당시 왜적의 관원이 서전서숙을 내사하여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이상설이 5천원, 전공달 5백원, 왕창동 5백원, 김동환 3백원, 홍창섭 1백원의 회비를 부담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동녕, 정순만, 여준, 박정서, 김우용, 황달영, 여조현 등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서숙의 설립 및 업무와 교육활동에 참여하였다.
당초 서전서숙은 70평 정도의 교사(校舍)에 22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개교하였다. 연길현의 용정 지역을 비롯하여 온성, 종성, 회령 등 북간도 주변을 망라하여 학생을 모집하였으며, 학생 수가 7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주요 교과목으로는 역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헌법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교육방침은 신교육 및 민족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며, 철저한 배일민족교육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1907년 4월 보재 선생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왜적의 침략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규탄하기 위하여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뒤로부터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7월 통감부 간도출장소가 새로 설치되면서 왜적의 감시와 방해가 극심하게 되었다. 안팎으로 난관에 봉착한 서선서숙은 1907년 8월 어쩔 수 없이 폐교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서전서숙은 불과 1년도 넘기지 못하고 폐교되고 말았지만, 북간도 뿐만 아니라 서간도와 연해주를 비롯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 일어난 식민교육에 대항하는 민족교육 또는 구국교육운동의 향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전서숙이 있었던 북간도 연길현 용정촌은 현재는 중국의 관할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로 지명이 바뀌었다. 지금도 용정시에 있는 용정중학교에 가면 서전서숙을 비롯한 민족교육기관이나 보재 선생의 발자취를 아쉬운 대로 만날 수 있다. 주인의 자격이 아니라 손님으로, 그것도 그리 탐탁치 않은 관광객의 입장으로 접할 수 밖에 없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몇 번 가보지는 못했지만, 연변에 갈 때마다 보재 선생의 유적을 볼 때마다 애국지사들의 유적을 볼 때마다 나라의 주권과 민족의 혼백이 풍비박산이 났던 환난의 시절이 촉구하는 뼈아픈 반성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문득, 이스라엘의 위대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의 일화를 생각해 본다. 그는 로마군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왕국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당했을 때,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보전할 수 있는 길은 교육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고, 목숨을 걸고 로마의 장군 티투스와 담판하여 랍비학교의 보전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농부는 흉년이 들어도 씨앗만큼은 손에 쥐고 죽을지언정 결코 삶아 먹지 않는 법이다. 요하난 벤 자카이로부터 시작된 랍비학교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스라엘의 언어, 문자, 역사, 문화, 종교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은 2천여 년에 걸친 참담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끝내고, 그들의 조상이 살던 이스라엘로 돌아가 옛 이름 그대로 그들의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근자에 충청북도 진천시와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주축이 되어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관’을 건립하고, 중국 밀산의 한흥동에 ‘이상설선생 항일무장투쟁운동기지 유적지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보재 선생 현창사업을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늦은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모쪼록 서전서숙을 세웠던 보재 선생과 뜻을 같이 했던 애국지사들의 교육구국 또는 교육입국의 정신이 우리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씨앗이 되고 토대가 되기를 기원한다.
- 금강일보 2019년 7월 19일자 금강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