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피에트첼리나의 비오 오늘은 성 피에트첼리나의 비오 축일입니다. 서랍 정리를 하다가 성지순례 중에 적은 메모지가 나왔습니다. 상단에 Park Hotel Perugia라고 적힌 메모지였습니다. 페루자이면 안정환이 뛰던 팀 연고지가 아닌가요? 로마를 떠나 성 비오 신부님의 향기를 맡으려고 산 조반니 로톤토를 향해 가는 도중에 묵은 호텔이었습니다. 메모지에 적힌 글을 옮깁니다. “‘태양의 거리’라고 불린다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태양이 산 능선을 따라 파도타기를 하다가 산 속으로 잠기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로지르는 교차로, 전봇대 사이로 태양은 마치 화롯불, 불꽃 춤을 추다가 ……. 이름 모르는 꽃밭, 언덕 위의 하얀 집들, 밀밭 사이로 나무들이 인사를 한다. 어쩌면, 이 ‘태양의 거리’는 쿼바디스, 로마를 떠나던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가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 시간도 지금처럼 석양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제 막 성인으로 선포되신 비오 신부님을 만나러 간다. 성인은 누구인가?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한 사람들이 아닐까? 진정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을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신 비오 신부님. 13세기에 아시씨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러하셨듯이 비오 신부님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단 한 사람이라도 진정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한다면 성인이리라.” 오늘 비오 성인 축일을 맞으며, 그분에 관해 나눕니다. 성 아시씨의 프란치스코가 주님의 오상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2000년이 넘는 교회 역사에서 가장 주님을 닮았던 분으로 공경 받는 아시씨의 프란치스코입니다. 그분은 오상을 받음으로써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닮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즉 비움과 가난의 구체적 표지가 되신 분이었기에 우리의 존경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성 프란치스코는 오상을 받음으로 완전한 해방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해방은 영적인 해방을 의미하며 육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온전히 동참하는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1200년 전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주님의 오상을 받음으로써 주님처럼 피 흘리는 고통을 50년 동안이나 받으셨던 성 비오 신부님이 계십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불과 몇 년이었지만 비오 신부님은 50년 동안이나 오상을 받으셔야 했다는 사실이 우리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오 신부님은 1887년에 이탈리아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나,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한 뒤 191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려는 열망을 지녔던 젊은 신부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은 서품을 받은 지 8년 뒤였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서 수도회나 교회 당국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비오 신부님의 생애동안 역대 교황님들이 모두 신부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교회에서 공적으로 오상을 인정하고 그분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신부님은 오랫동안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등의 박해아닌 박해를 받으시면서 묵묵히 교회에 순종하시면서 겸손하게 기도로 당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셨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비오 신부님을 찾아왔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6월 16일에 그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바로 그해 제가 산 조반니 로톤토를 처음 순례할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이고 주님의 인도였습니다. 송열섭 신부님은 1987년에 처음으로 "마리아"지에서 비오 신부님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비오 신부님에 대해 알리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는 이렇게 썼지요. “‘우리 시대에 이토록 놀라운 분이 사셨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토록 놀라운 분의 이야기를 이제서야 접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현대의 과학자들과 의학자들은 비오 신부님의 오상 현상에 대해 밝히려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의학적 치료를 시도했지만 어떠한 과학적 설명을 찾지 못했지요. 오상(五傷)의 구체적인 모습은 손바닥에 난 작은 동전 크기의 구멍에서, 그리고 발과 가슴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는데 미사를 드리는 중에도 피가 뚝뚝 떨어지기도 할 만큼 실제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였다고 합니다. 고통도 엄청 컸고요. 교회에서는 함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고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병자들이 신부님을 찾아왔지요. 실제 비오 신부님의 기도를 통해 많은 치유들이 일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동자가 없던 시각장애자 소녀 젬마가 보게 된 것이라든지,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실명한 조반니 사비노가 다시 눈을 뜨게 된 것은 주님의 태생 소경이나 다른 장님을 눈뜨게 하신 기적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세계 각처에서 수십만의 순례자들이, 산 넘고 물 건너 비오 신부님을 만나려고 산골 중의 산골인 산 조반니 로톤토를 찾아온 것은 단지 기적을 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성인으로 선포되기 전에 산 조반니 로톤토는 이탈리아 최대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였습니다. 비오 신부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 많은 순례자들은 신부님을 찾은 것은 고해성사를 보고, 영적 지도를 받고 그분이 집전하는 특별한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선종하기 직전인 1967년 한 해 동안에 25000명의 신자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고 합니다. 비오 신부님에게 성사를 받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사를 보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며칠씩 차례를 기다려야 했지요. 먼저 참다운 회개와 통회가 있어야 성사를 볼 수 있었고요. 비오 신부님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단지 당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성사를 보려는 사람들은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진정한 회심을 한 후에 다시 신부님을 찾아 왔지요. 비오 신부님이 집전하는 새벽 미사는 아주 특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미사에 참례하려고 밤을 새워 성당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고 합니다.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하여 1시간 반 정도 집전하는 미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직접 드리는 희생 제물처럼 감동이었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눈물 없이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시는 분이었는데 비오 신부님도 미사를 드리면서 아주 자주 눈물을 흘리셨다고 해요. 사람들이 왜 우시는지를 물으면, “저는 미사를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고 대답하셨답니다, 미사 때마다 양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대포에 떨어지곤 하였지요. 비오 신부님이 미사에 대한 얼마나 커다란 열정을 지니셨는지는 그분이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세상은 태양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미사성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 다시 그곳에 가서 비오 신부님의 향기를 맡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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