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시 모음
이해인 시집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 중에서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
가을바람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달려오는가
함께 있을 땐 잊고 있다가도
멀리 떠나고 나면
다시 그리워지는 바람
처음 듣는 황홀한 음악처럼
나뭇잎을 스쳐가다
내 작은 방 유리창을 두드리는
서늘한 눈매의 바람
이제 바람은
나의 약점까지도 이해하는 오래된 친구처럼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더 넓어지라고 하네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
더 맑게 더 크게 웃으라고 하네.

*흙을 만지면*
바다도 아름압지만 밭도 아름답다
바다는 멀리 있지만 밭은 가까이 있다
바다는 물의 시지만
밭은 흙의 시이다
비온 뒤 밭에 나가면 발이 폭폭 빠지도록
젖어 있는 흙냄새가 눈물나도록 정다웠다
흙은 늘 편안하고 따스했다
흙을 만지면
더없이 맑고 단순한
어린이의 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잎사귀 명상*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잎
어긋나기잎
돌려나기잎
무리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소녀에게*
값비싼 보석보다도
파도에 씻긴 작은 조가비 한 개를
더 사랑하고
거액의 지폐보다도
한 장의 낙엽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너의 순수를 누가 어리석다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기쁨만으로
평생을 살고 싶다.

*몽당연필*
아침마다 새로 맞는
나의 매일 매일도
한 자루의 새 연필과 같은 것
나는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고
열심히 깎아 써야 하겠다
나 역시
한 자루의 연필이 되어
자신을 깎아내는 겸손과
사랑의 서약을
더욱 새롭게 해야겠다.

*기쁨 찾는 기쁨*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생활 안에서
권태나 우울에 빠져들다가도
재빨리 기쁜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슬기를
구하고 싶다
매일 보물찾기라고 하듯이
'기뻐할거리'를 찾는다면
불평의 습성도 차츰 달아나고 말테지
기쁨을 찾는 기쁨만으로도
나의 삶은
더욱 풍요로울 것이다
안에서 만드는 기쁨은
늘 힘이 있다.

*사랑의 털실*
당신을 향한 사랑의 털실을
감다보면 하루가 갑니다
잘못 감긴 것 같아 털실을
풀다보면 또 하루가 갑니다
감거나 풀거나 변함없는 건
사랑
아무것도 뜨지 못한 채
또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도 기쁩니다.

*말과 글*
글은 오래오래 종이에 남는 것이고
말은 그냥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 마디의 말 또한
듣는 이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된다
한 사람의 펜으로 씌여진 글은
그 사람 특유의 개성을 지닌 작품이 되듯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하나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노력으로
참으로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말의 작품을 빚을 일이다.

*기쁨에게*
기쁨아, 너는
맑게 흘러왔다
맑게 흘러나가는
물의 모임이구나
모든 맑은 물이 그러하듯
기쁨아, 누구도 너를
혼자만 간직할 수 없음을
세상은 안다
그래서
흐르는 생명으로 네가 오면
나도 너처럼
멀리 흘러야 한다
메마른 세상을 적시며 흐르는
웃지 않는 세상에 노래를 주는
한 방울의 기쁨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큰 수술 뒤에 잠에서 깨어난 환자가
회복실에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새삼 감격스러워하듯이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나에겐 새 날이요
보물로 꿰어야 할 새 시간이요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임을
오늘도 잊지 말자.

*하늘은 투명한 거울*
하늘은 속일 수 없는 당신과 나의 거울
당신이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나의 얼굴
내가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당신 얼굴
하늘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어도
흔들림이 없다
깨어지지 않는다
자주 들여다보기가 갈수록 두려워지는
너무 크고 투명한 나의 거울.

*들음의 길 위에서*
정확이 듣지 못해
약속이 어긋나고
감정과 편견에 치우쳐
오해가 깊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쓸쓸함을 삼키는
외딴 섬으로 서게 됩니다
잘 들어서
지혜 더욱 밝아지고
잘 들어서
사랑 또한 깊어지는 복된 사람
평범하지만 들꽃 향기 풍기는
아름다운 들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침*
사랑하는 친구에게 처음 받은
시집의 첫 장을 열듯 오늘도
아침을 엽니다
나에겐 오늘이 새날이듯
당신도 언제나 새사람이고
당신을 느끼는 내 마음도 언제나
새마음입니다
처음으로 당신을 만났던 날의
설레임으로
나의 하루는 눈을 뜨고
나는 당신을 향해
출렁이는 안타까운 강입니다.

*내 마음의 방*
혼자 쓰는 방안에서의 극히 단순한 '살림살이' 조차도
바쁜 것을 핑계로 돌보지 않고 소홀히 하면
이내 지저분하게 되곤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나의 방을 치우고 정리하는
일 못지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방을 깨끗이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내 안에 가득찬 미움과 불평과 오만의 먼지,
분노와 이기심과 질투의 쓰레기들을 쓸어내고
그 자리에
사랑과 기쁨과 겸손, 양보와 인내와 관용을 심어야겠다.
내 방 벽 위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 달력을 걸듯이
내 마음의 벽 위에도 '기쁨' 이란
달력을 걸어놓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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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롭고
사랑하며
기쁜
날마다가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을 축복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