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작은딸이 전화했다.
100세 시대라면서 건강하려면 집에서 컴퓨터만 할 게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서 바람을 쐬세요라고 말했다.
예전처럼 등산 배낭을 메고 나들이 나가서 바람을 쐬라고 한다.
나한테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을 딸이 일깨워준다.
길 떠나고 싶다.
산일까? 바다일까? 들판일까? 강일까?
내 고향집에서 자동차 몰고 몇 분만 가면 바닷가가 나온다.
무챙이(무창포해수욕장), 조금 북쪽으로 가면 용머리해수욕장, 더 올라가면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이 나오고, 더 올라가면 오천항도 나오고, 더 올라가면 태안군도 나오고...
내 시골집에서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서천군 마량포구, 홍원항으로 내려가고, 금강하구 쪽으로 간다.
내 시골집에서 조금만 동쪽으로 가면 웅천(강), 보령호, 성주산, 오서산 등도 나온다. 예전 탄광지대도 나오고...
내 시골집에서 조금만 걸어서 무창포 갯가에 나가면 보리새우, 꽃게, 쑥, 갯강구, 민꽃게, 바지락, 소라, 맛조개, 민챙이, 좁살무늬고동, 큰구슬우렁이, 대수리, 낙지, 쭈꾸미, 따개비, 콩게, 불가사리, 성게 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남쪽으로는 예전 갯벌을 막기 이전에는 사그내, 광양 갯바다에는 망둥이, 방게, 칠게, 농게, 황발이, 도둑게들도 숱하게 많았다. 강물과 갯물이 합수되는 곳이었기에.
내가 한동안 잊었던 바람냄새였구나.
나는 한때 '바람의 아들'이기에 '바람이 되어', '바람처럼', '바람 불어와' '바람의 언덕' 등의 닉네임으로 여러 카페에서 도보여행에 관한 잡글을 올렸던 때도 있었다.
갯바닷가와 가까이 사는 산골마을이라서 그랬을까?
어린시절에는 황새, 종달새, 빕새, 멥새, 까치, 산까지, 산비들기, 수리(매), 곤줄박이,장끼, 까투리, 때까치, 땅까치, 저수지에는 파랑새가 날아왔다. 수십 년이 지난 뒤인 2000년 이후에는 거의 다 사라졌다.
서해 바닷가에 나가면 괭이갈매기 등이나 겨우 볼 뿐.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난해인 2017년 여름철.
내 시골집 앞뜰 구부렁거리는 다랭이 논 위로 나는 몇 마리의 제비를 보았다.
수십 년 만이다.
이웃집 사내, 혼자 귀향해서 살던 사내의 집 앞 마당에서 보았다.
예순일곱 살 사내는 대전 본가에 갔다가 고독사로 죽은 뒤에서야 발견되었고, 내 고향 서낭당 부근의 산에 묻혔다. 새로 개축한 집은 텅 빈 집이 되어서 자물통로 채웠단다.
2.
나를 힘들게 했던 시간들.
퇴직한 뒤에 시골로 내려가서 살기 시작했다. 아흔 살의 늙은 엄니는 자꾸만 강그라지고, 중환자실에 입원시키고, 이별, 상속비에 빚 지고, 고향 앞뜰에 들어서는 산업단지사업으로 산소를 몽땅 이전하는 등 바쁘게 살았던 시간들이 이제는 느리게 간다.
시간이 나한테도 남아 있을까?
오늘은 2018년 1월 6일.
햇볕이 서울 송파구 잠실 4단지 아파트 단지에도 찾아왔기에 남쪽 창유리에 환하게 비친다.
또 길 떠나고 싶다.
강물과 갯물이 합수하는 갯벌로 나가고 싶다. 강물이 나르는 숱한 물을 다 받아들이고는 잦은 물결과 파랑으로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순환하는 갯벌로 흘러가고 싶다.
바다 안쪽으로 빠져나간 갯물이 옹알대는 소리도 듣고, 썰물이 밀물이 되어 도도히 밀려오는 파도소리도 듣고 싶다. 투정부리는 사내처럼 방파제를 후려치는 거센 파도소리도 듣고 싶다.
갯물 흐르던 갯골을 매워 농토를 만들었기에 숱한 망둥어, 갯장어, 은어, 참게가 사라졌고, 염기 많은 땅이 되어서 퉁퉁마디, 칠면초들이나 사는 그런 간사지 들판 가운데에서도 바라보고 싶다.
내 젊은 날.
카빈소총을 어깨에 매고 실탄이 든 탄띠는 허리에 둘러매고는 밤중에 해안가를 돌면서 어둠을 지키던 초병시절도 생각난다. 사구언덕에 피던 가시 많은 해당화, 수수하게 피던 갯메꽃도 생각난다. 갯바람을 막던 방풍림 솔바람도 떠오른다.
십리길 걸어가면 용머리해수욕장 뒷편 외가, 큰외삼춘, 작은쌍둥이 동생도 없고, 아비도 없고, 엄니도 없다.
지금은 가고 없는 그들.
나이 들어가는 나한테는 자꾸만 희미한 추억과 기억만 남아서 가물거리는 곳이 되었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옛것을 몽땅 허물고 없애버린 개발독재의 흔적이 남은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강과 바다는 그렇게 변해버렸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는 고향 앞뜰과 앞산마저도 깡그리 사라지고 있다.
돈, 돈에 밀려서...
하나의 자연처럼 살던 땅주인들은 그렇게 해서 죽었고, 떠났고, 사라져갔다.
지금도 여전히 대형기계의 굉음과 시꺼먼 기름연기가 하늘을 가린다.
개발이 낳은 또하나의 아픔이다.
내 아내의 고향은 전남 광양군 골약면 도이리.
지금은 광양제철소가 들어서서 아내는 고향집을 잃었다. 고향도 잃었다. 옛 지명만 남았다.
신혼 초 처가에 두어 차례 들렀던 나는 그런 곳이 있었던가? 하고는 고개를 가우뚱 한다.
머리속에만 남은 환상인가 싶고...
내 고향땅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또. 또또...
다행히도 내가 사는 북편쪽 산자락 아래는 땅은 조금만 남았다.
대문을 열고 나오면 눈앞에 펼쳐지던 남쪽 땅은 흔적없이 사라져서 지금은 공장단지 울타리가 길게 쳐졌다.
산을 깎아내리는 대형기계의 굉음과 시꺼만 매연이 하늘빛을 가리고...
오늘은 문득 길 떠나고 싶다.
바람 쐬고 싶다.
터덜터덜 걸으면서, 느리게 게으르게 살고 싶다.
바람이 되어.
나는 또 그곳으로 가고 싶다.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는가 싶어서.
이렇게 봄이 오는 소리, 봄이 오는 환한 햇볕이 비치는 날에는 더욱 그렇다.
바람 속에 든 해조움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다.
뜨거운 땡볕에서도 강변과 갯벌, 바다 모래장불에서도 신나게 뛰놀던 티없는 惡童은 늙어서 자꾸만 뒤로 밀리면서 사그라져 간다. 잊혀져 간다.
모두가 바람이 되어...
오후에 아내와 함께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았다.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호수 수변 위에서 얼음은 햇볕에 반짝이고, 물비늘도 촐랑대면서 반짝이고 살아 있었다.
모두가 살아 있다. 바람소리도 살아 있고, 햇볕도 살아 있고, 냉해로 얼어죽은 나뭇잎새도 살아서 바스락대고 있었다.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귀를 덮고는 꾸부정하게 걷는 늙은이는 꿈꾼다.
구름 위에 올라서려고, 바람 위에 올려 서려고 꿈꾼다.
2018. 1. 6. 토요일.
첫댓글 멋진 곳에 사셨군요ㆍ
아닌지요.
전국 곳곳이 다 멋있지요.
지나고 보면...
1750년대 조선시대의 이중환 '택리지'에 花溪(화계)마을로 언급되는 곳이지요.
전란, 관청이 조금 떨어져서 숨어 살기에 적합한 곳이지요.
산말랭이에 있는 작은 마을. 뒷산에 잠깐 오르면 바다가 길게 내려다보이고, 십리도 채 안 되는 곳에는 강이 흐르고, 십리도 안 되는 곳에는 갯벌이 있었고, 갯바다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도 사라졌네요.
이런 글 쓴 이유는 따로 숨었네요.
詩語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따져보려고 옛날 이름들을 더듬고 있지요.
결코 詩語가 되지 못하는 단어들이네요.
집에 있는 것 보다는 자꾸 밖으로 돌면 건강에 좋고
글쓰는데 도움이 되지요
예.
그렇군요.
바깥에 나가면 글감은 온천지에 다 널려 있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