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23권, 12년(1557 정사 / 명 가정(嘉靖) 36년) 12월 7일(병술)
폐비(廢妃) 신씨(愼氏)가 졸하였다. 장생전(長生殿)의 관곽(棺槨)을 내리게 하고 또 특별히 부의를 보내게 했다.
【신씨는 중종의 잠저(潛邸) 때의 배위로서 바로 신수근(愼守謹)의 딸이다.
수근은 폐조(廢朝)에 정승이 되어 연산군을 종용하여 살륙을 많이 하였다. 그러므로 반정(反正)할 때 임사홍(任士洪)과 같은 날에 죽임을 당했다.
중종이 즉위하자 비(妃)도 정위(正位)에서 하례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이 죄인의 딸은 정위는 부당하다고 폐하기를 주청했고, 중종은 조강지처는 버릴 수가 없다 하여 굳게 맞서 윤허하지 않았다. 원종 등이 계속해서 굳게 고집하자 중종도 하는 수 없이 따랐다.
그러나 폐비가 무죄한 것을 생각하고 항시 불쌍하게 여기며 잊지 못하였다. 이때에 졸하자 상이 장생전 재궁(梓宮)을 특사하여 왕후의 고비(考妃)의 예에 의하여 염습을 하게 하고 1등례로 호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비(妃)가 폐출당한 것은 본래 그의 죄가 아니었는데 모든 치상(治喪) 절차를 자못 후하게 갖추지 아니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는 마음이 있었다. 상은 폐비의 친정 조카인 별좌 신사원(愼思遠)에게 특별히 상주가 되어 그 제사를 받들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원종 등은 그 아비를 죽이고 그 딸을 그대로 왕후로 둔다면 화가 미칠까 두려웠기 때문에 강제로 군부(君父)를 위협하여 신씨를 폐출했다. 어찌 죄가 있어서 그랬겠는가. 역사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원종 등의 죄악은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병인년 반정 때에 박원종 등은 먼저 수근을 죽이고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곧 그 딸을 내쳤으나, 실은 폐출해야 할 아무런 죄가 없었다. 이때에 졸하니 예관(禮官)과 대신들이 1품례로 치상하기를 청했고 옥당(玉堂)의 의논도 그러했는데, 간원에서는 주자(朱子)의 의견에 따라 출모(出母)의 예로 거애(擧哀) 치상해야 한다고 말했으니 이 역시 경(經)을 근거함이 없는 의론이다. 《가례(家禮)》에 ‘출모’라고 한 것은 낳은 어머니를 지칭한 것이다. 의리는 이미 끊어졌지만 은혜는 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제도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일은 아마도 그 예를 모방하기 어려울 듯하니, 의(義)를 일으켜 예를 행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대신과 예관이 정한 것이 잘못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