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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유익한 성경적 맡 말 풀이
그리스도의 겸비(emptied / ekenosen)
신약에서 이 말을 지닌 매우 중요한 기독론적 구절은 빌 2:7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본체시나...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라고 말한다. 이 '비움'이란 의미에 대해서는 세 가지 중요한 해석이 있다.
(1)첫 번째 해석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외적 형체인 자신을 비어 인간의 외적 형체를 취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울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따르면, 그리스도는 가장한 모습으로 이 땅에 왔고, 실제로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 된다.
(2)두 번째 견해는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적 속성(즉 전지전능 등), 다시 말하면 '위엄의 표지'를 비우고, 그에게 남겨져 있는 모든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그의 속에 있는 신성이 모두 포기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직도 그의 속에서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고로, 이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특성들 중 어느 정도 혹은 대부분을 포기하기는 했으나, 모두 다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3)세 번째 가능한 해석은 곧 '비웠다'(emptied)는 말에 그 내용을 밝히기 위한 소유격이 보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가 자신의 어떤 것을 비웠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를 비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가 비운 것은 그의 특성 중의 어떤 것이나 또는 외형의 어떤 부분을 비운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생명을 비웠다고 말하고 있다. '비웠다'라는 말로 번역되는 단어는 또한 '쏟아버렸다'(poured out)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죽음에' 쏟아버렸다(빌 2:8; 한글개역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번역함). 이 묘사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 53:12, 곧 "그가 그의 생명, 곧 그의 영혼(nephesh)을 죽음에 쏟아버렸다"(한글개역은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라고 번역됨)는 구절이다(참조. 고후 8:9).
그리스도의 날(day of Christ / hemera christou)
구약의 일부 예언적 구절들에 '여호와의 날'이 언급되어 있다(예. 사 2:12 13:6 이하, 욜 1:15, 2:31<행 2:20에 인용됨>, 암 5:18, 습 1:7 이하, 슥 14:1, 말 4:5). 이 날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응보와 복수와 멸망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두려운 날이 될 것이다. 이런 예언적 개념은 유대 묵시록에 전수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악한시대를 그의 최후의 심판을 포함하고 있는 대단원적인 종말로 이끄시리라는 것이다. 몇몇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이 아닌 메시야가 심판자가 되고 있다. '하나님의 날'(hemera tou theou)이라는 구절은 신약에 단 두 번 나오는데, 모두 묵시적인 테두리 안에서 나온다. 벧후 3:12에서 이 시대의 종말에 하늘과 땅이 불에 타서 멸망하시는 날이 하나님의 날이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계 16:14에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은 아마겟돈의 전쟁을 위해 이 현세의 종말 바로 전에 마련된 시간이다. 구약을 희랍어로 번역한 칠십인 역이 번역될 때 번역진은 '여호와'라는 히브리어 낱말을 음역하지 않고 대신에 '주'(kurios)라는 희랍어로 대치하였다. 그래서 칠십인 역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주의 날'로 되었다.
그런데 초대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주'라고 불렀기 때문에 '주의 날'(초대교인들이 그들의 희랍어 성경에서 주의 날이라는 구절을 발견함으로써)을 그리스도의 날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고전 5:5에서 바울은 죄인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는데, 이는 그의 육신은 멸하고 그의 영은 주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날은 살전 5:2-3에서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멸망의 권세를 가지고 하늘로부터 재림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살후 2:1-2에서 독특한데, 여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주의 날'로 불리어지고 이것은 벧후 3:10(참조. 4절)에서도 동일하다. 고전 1:8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아주 열렬히 기대되고 있는데, 그의 오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명백히 불리어지고 있다. 그리고 고후 1:14에서는 그의 오심이 '주 예수의 날'이며, 또한 빌 1:6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불리고 있다. 단지 두 곳(빌 1:10, 2:16)에서 우리는 더 짧은 형태 즉 '그리스도의 날'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들과 비슷한 어구는 "인자가 나타나고 사악한 자가 멸망당하는 날"이다(눅 17:30, 비교 24절).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인자로서 재림으로 나타나실 날이다. 신약의 그 밖의 곳에서 그리스도의 날은 '그 날'(딤후 1:12,18, 4:8, 히 10:25), '권고하시는 날'(벧전 2:12), '심판 날'(벧후 2:9, 요일 4:17) 등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의 날'과 '주의(즉, 예수의) 날'이 항상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즉 벧후 3:10,12에서 이 두 날은 실제로 동일한 날이다. 이와 비슷하게 롬 2:16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대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날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높이 들리심(exaltation of Christ)
'높이다'라는 용어는 행 2:33, 5:31, 빌 2:9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사 52:13도 이러한 부류의 구절 속에 포함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예언에 나오는 종은 그리스도와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동일한 희랍어 용어가 요 3:14, 8:28, 12:32,34에서는 '들리다'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 본문들에서 이 용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겸비'와 '높이 들리심'이라는 용어들은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두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신학에서 흔히 사용된다. 겸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잉태부터 장례까지의 기간에 해당되는 용어이며 그가 성육신되어 지내신 시기를 가리킨다. 성육신 기간, 즉 지상에서의 그의 생애의 지배적인 특징은 '종의 형태'이다. 높이 들리심이란 말은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승천과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 기간과 그의 영광된 재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겸비와 높이 들리심을 각각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적용 시키려고 시도하여 오고 있다. 그러나 두 용어가 다 중보적 직능을 수행함에 있어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용어들로 일반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계열을 따를 때 빌 2:5-11은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될 수 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루터교 전승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주장되어 왔듯이 과연 그리스도의 '음부에 내려가심'이 그리스도의 높이 들리신 시기에 해당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시키고 있고 또한 사도신경에서 '음부에 내려가심'이란 부분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사이 기간에 그리스도에 의해 수행된 특별한 화해(음부에서의 전도)를 뜻한다는 주장을 낳게 한 주된 근거는 벧전 3:19,20에서 발견 된다(한국교회의 사도신경은 이 구절을 생략하였다). 그러나 의미가 모호하고 어느 누구도 참되고 만족스러운 해석을 내리기 힘든 것으로 판명되는 이 한 구절에 근거하여 지극히 추론적인 교리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음부에 내려가심을 그리스도의 높이 들리신 상태에서 일어난 한 단계로 보는 사람들은, 그가 음부에 있는 구약시대의 신자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포하였고 그러므로 그들도 그의 구속적 충족된 유익됨에 내려가신 것이라고 흔히 가정한다(참조. 엡 4:8-10). 그러나 음부에 있는 사람들을 구약시대 신자들로 묘사하는 것은 그들에 관한 베드로의 묘사 즉 '옥에 있는 영들로 이들은 노아의 날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는 묘사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보다 타당한 결론으로 여겨지는 것은, '음부에 내려가심'의 교리가 박약한 근거 위에 세워진 것이며, 또한 그의 음부에 내려가심이 그리스도의 겸비의 기간에 속하는 지 또는 그의 높임을 받으신 기간에 속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일차적인 중요성을 띤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높이 들리신 기간에서의 첫번째로 분명한 단계이다(행 2:32, 롬 1:4). 부활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이 다시 생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예를 들면 나사로의 경우와 같다), 그의 전 인간성이 부패되지 않고 영광스럽고 권능 있으며 영적인 것으로 대치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전 인간성은 그의 영의 목적에 합당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전 15:42-45).
그리스도의 높이 들리신 기간의 둘째 단계에서 일어난 그의 승천에서 우리는 부활에 의해 시작된 영광이 완성됨을 본다. 하늘에 들어가심으로 중보자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과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주선하시고, 그 백성들과 그와의 궁극적인 재결합을 준비하신다(요 14:2,3).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단계에서는(시 110:1, 마 22:44, 막 12:36과 눅 20:42의 병행구절; 만일 사실이라면 마 26:64과 막 14:62 및 눅 22:69의 병행구절; 행 2:33-36, 5:31, 7:55,56, 롬 8:34, 엡 1:20, 골 3:1, 히 1:3,13, 8:1, 10:12 12:2, 벧전 3:22, 계 3:21, 22:1) 그리스도는 왕의 통치를 행사하시고(엡 1:20-22),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고(요 14:26, 16:7), 중보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롬 8:34, 히 7:25, 9:24, 요일 2:1 등).
그리스도의 재림 단계에서는 승천하신 주님은 그의 구속 사업을 완성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인류와 천사들을 심판하고, 거룩한 신랑으로서 그의 교회와의 연합을 성취하고, 영원한 그의 통치를 시작하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 of Christ)
전통적으로 아버지가 없이 태어난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교리의 신학적 의의는 항상 신적인 로고스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이 교리는 성적인 교제가 죄라든가, 혹은 이것을 통하여 원죄가 전달된다든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점차로 이 두 가지의 사상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 속에, 또한 좀 더 정교한 신학들의 속으로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초대 교회에서 원래 가지고 있던 의의는 의심할 바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특수한 방법을 통하여 인간 속으로 오셨다고 하는, 즉 그분이 메시야라고 하는 확신을 증거 하기 위한 사상이었다. 성서비평이 발달하면서는 성경 속의 동정녀 탄생의 유일한 기사인 마태와 누가의 기술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고, 또한 그것들이 서로 합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종류의 기적을 부인하는 개신교 자유주의에서는 이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종교적 의의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정통 신학자들은 이러한 자유주의의 주장에 다소 과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시금석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 교리를 이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중요한 위치로 격상시켰던 것이다. 신개혁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신약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의 기사를 신화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이 기록이 신화라는 사실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최종적인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사실에 어떤 신학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정녀 탄생은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지가 마지막으로 나타났다는 고백을 위한 상징으로 취급된다.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n of Christ)
그리스도인이 이상인 '그리스도의 모방'은 기독교윤리 및 영적인 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예수에 관한 복음서 전승의 발전과정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방'에 관한 관념의 성장과정을 추적해 낼 수 있다. 복음서들은 그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면서도 동시에 제자 됨에 대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비유이며, 또한 예수의 생활양식이 초기 기독교신자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신앙을 증언하는 매우 중요한 기념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예수 자신의 사상에 근거한 것인가? 복음서에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갈 길이 구약의 몇몇 중요부분에서 이미 윤곽 지어진 것으로 믿었고, 자신의 사역은 그 길을 안내하는 범규로 생각한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 것 같다. 예수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지정해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한 이 윤곽은, 곧 그가 가야만 한다고 믿은 '인자의 길'로서 이것은 주의 길을 따르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환 가운데서 아버지로부터 예수에게 지시된 것이었다.
바울의 저서들 가운데 나타난 바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에 의하여 생활화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그가 말하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고후 13:3,5)의 신비인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새롭고 보다 나은 '길'로서 그를 따르는 자들의 생활 가운데서 식별될 것이다(고전13장).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주 예수의 흔적(극기, 순종, 사랑과 같은)을 보이고 있는 한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모방이란 뜻이 글자 그대로 역사적인 예수를 흉내 내기 위한 어떤 노력이라는 암시는 없다.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참 모형이며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되게 하기 위한 성령의 역사이며, 모방되어야 할 중요한 내용은 성육신의 과정 그 자체와 역사적인 예수 안에 나타난 자신을 내어줌 및 극기인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관심이 결핍됨으로써 이 사상은 즉각 적으로 발전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모방이란 문자 그대로의 어떤 모방을 의미했을 뿐이었다. 초기에는 그리스도의 모방의 진수의 강조점을 극기에 두었으며, 이것이 순교 또는 이러한 유의 사건들 가운데서 표현되었다. 중세기의 발전된 기독교(예배의식의 신비주의와 예수의 신성시된 인성에 대한 신앙심)는 그리스도의 모방사상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엄밀한 고고학적인 재생의 관념으로 형성시켰다. 이러한 보기들은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x)의 명상록 가운데서 발견되며,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의 경우도 이에 해당되는데, 그에게서는 과거의 그리스도를 재생하고자 한 엄밀한 시도가 엿보인다. 정확한 모방의 가장 빈틈없는 시도는 아마도 미사(Mass), 곧 그 가운데서 행해진 모든 활동이 주님의 생활의 어떤 단면을 흉내 내는 것으로 해석되게 된 미사 예배 식에서 주님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일일이 모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루터는 베르나르두스와 같은 신비주의자들과 [Theologia Germa-nica](독일신학)과 같은 저서들, 그리고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a Kempis)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그는 주요한 두 가지 이유에서, 그들에 반대되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첫째, 그는 쉬밸머라이 집단들(Schwaermerei groups; 16세기 종교개혁 시에 일어난 광신적이며 과격한 기독교 소종파들) 중의 어떤 유치하고 방종한 사건들(예를 들면, 루터는 그들 중 늙은이들이 복음서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기록되었다 해서 거리에서 굴렁쇠 놀이를 하는 것을 발견함)로부터 반박을 받았기 때문이었고,
둘째, 그는 그리스도의 모방의 전 사상이 행위의 교리(doc-trine of works)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모방이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시작할 수 있는, 일종의 그리스도와 겨루는 행동이 되었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imitatio'(모방)라는 말을 싫어하고, 그 대신 'conformitas'(일치)란 말을 택하였으며, 이 주제 전체에 대한 그의 견해는 경구투로 된 그의 유명한 말(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 있음) "non imitatio fecit filios, sed filiatio fecit imitatores"(모방한다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 됨이 선행하므로 모방자들이 된다)에 잘 표현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현저한 특징은 그리스도의 모방의 사상이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 신약의 내용에 온전히 충실함으로써 성취된다는 사실이다.
현대에 이루어진 이 사상의 두 가지 발전은 특기할 만한 것들이다.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할 것은 특별히 [Training in Christianity](기독교의 수련) 같은 작품에 나타난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의 그리스도의 모방에 대한 사상이다. 그는 이 논제를 세가지 국면에서 취급하였고, 그것들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즉 그것은
(1)그리스도를 '우러러 보는 것'과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 사이의 구분,
(2)그리스도의 모방의 사상과 속죄 및 은혜의 교리 사이의 관련성,
(3)그리스도의 모방과 그의 '그리스도의 동시대성' 사상에 나타난 신비주의 사이의 관계 등이다.
둘째, 불트만(Rudolf Bultmann)이 그의 저서(공관복음서 전승사, 1921)에서 이룩한 업적과 일반적인 양식비평의 결과로 인해서, 신약 성서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상을 회복하는 일의 가능성에 대하여 회의적이 되었고, 이러한 현상이 과거의 그리스도의 모방의 관념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파들에서 그리스도의 모방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이상으로 남아 있으며, 몇몇 불트만의 추종자들(특히 G. Ebeling과 E. Fuchs) 가운데서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진술을 구성한다. 에벨링은 말하기를 "예수 안에 표현된 것은 믿음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실상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말하자면, 예수가 행한 바와 같이 완전한 위임을 의미하는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모방의 사상에 대한 연구에서 신학적 중요성을 지닌 논쟁들 가운데는 성령의 역할, 곧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형상과 성례전 및 은총에 대한 교회의 교리들에 순응시키는 성령의 역할이 포함된다.
1. 기독교윤리적인 측면에서 : 특히 종교개혁 이래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윤리적 이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방'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일반적으로 이때까지 그리스도의 모방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이루는 뚜렷한 동기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그리스도의 모방이란 사상은 신약에서 발견되며 바울은 이것을 윤리적 이상으로서 명백하게 묘사하였다. 신약에 나타나 있는 이 관념은 역사적 예수를 그대로 닮기 위한 노력이 아니고,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과 비슷하게 변형시키는 상태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할 때, 그 배후에 역사적 예수의 생활방식의 리듬(겸손과 영광: 고난과 승리)이 작용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즉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령이 하나님의 형상(eikon), 곧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성령의 역할이 요한의 '보혜사'(paraclete)라는 관념 배후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모방이 윤리적 관념은 예수 자신의 교훈과 실행 가운데서 식별할 수 있는 제자 직에 대한 뚜렷한 관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고, 특히 '인자'의 '가는 길'을 '따르라'란 함축된 의미 속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기독교사에서 그리스도의 모방의 관념은 특별히 금욕주의적 관습을 낳았다. 교부시대에는 이 관념이 순교사상, 독신생활 사상, 순결사상의 추진력이었다. 후기에, 특별히 베르나르두스와 프란체스코가 영향을 끼쳤던 시대에는 개인의 생활과 건축양식의 이상들(undum Christum undus sequere) 가운데 예수의 가난을 재생시키는 경향이 나타났다. 루터는 이 관념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예수의 교훈을 엄밀하게 재현하려고 시도한 어떤 소종파들의 유치함에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또 한편 부분적으로는 이 관념이 행위의 교리(doctrine of works)를 가리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울의 사상을 따라 imitatio(모방)말 대신 'conformitas'(일치)란 말을 사용하였고, 'imitatio'라는 말은 '경쟁'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키에르케고르는 위대하고 선한 선생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영웅적 '찬탄'과 그리고 루터의 주장처럼 행위의 교리에서는 제기되지 않아도 되는 '모방' 가운데서의 인격적인 자기부정(selfgiving) 사이를 구별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예수의 삶'을 재형성할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상실되면서, 그리스도의 모방의 관념은 예수에 대한 신앙적 결단을 되풀이해 말하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되어 왔다(E. Fuchs, G. Ebeling). 예수의 사명의 역사적 형태를 추적해 낼 수 있는 가능성에 제기된 전적인 회의론이 근거 여부를 다루는 문제와는 별도로, 그리고 예수의 '자의식'이 무슨 말로 표현되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확실히 예수는 모범적인 신앙인(히브리서에서는 이와 같이 묘사됨)이었지만 그러나 신약의 기독론 가운데서는 그 이상의 어떤 분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교 윤리를 '형성'(formation)으로 표현한 본회퍼의 견해는 신약의 교훈, 특히 바울의 사상에 한층 더 가까운 것이다. 심리학은 인성 발달의 과정에서 모방의 근본적 역할에 대하여 잘 설명하였다. 도덕적 감수성의 성장은 다른 사람들(부모, 교사 등)에 대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모방이 결과에 주로 좌우 된다는 것이다. 성인의 생활 속에는 중요한 모방적 요소가 여전히 남는다.(예를 들면, 개인이 본래부터 소유하고 있는 자아의 이상). 노예적인 모방과 창조적인 모방 사이의 차이는, 후가가 그 모방자의 개성에 따라 일반적으로 유사하면서도 순전히 특유한 성격을 지닌 새로운 형태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창조적인 모방의 수많은 예들을 미술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성령은 '창조의 영'으로서 활동하며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방이란 말이 소멸되어가는 고어 또는 문자주의로의 전락을 방지하는 방위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따름(following Christ)
이 구절의 의미가 어떻게 해서 점점 강렬하여졌고 또 이구절의 의미가 얼마나 쉽사리 문자적인 뜻에서 비유적인 뜻으로 옮겨질 수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서 이 구절은 가장 잘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인 경우, 즉 이 구절이 예수께 가서 그를 대하고 그의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로 쓰여진 사례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마 4:25, 8:1, 12:15, 19:2, 20:29 등)는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다 강렬하게 쓰인 경우는 사람들을 제자로 초청하시기 위하여 "나를 따르라"는 표현을 예수가 사용하신 경우이다(막 1:17, 2:14, 8:34 등). "제자들이 서클을 자기 주변에 모으는 일은 랍비들이 행하는 관례였을 뿐만 아니라 주님에게 있어서도 가장 신성한 의무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변황, 즉 단순히 예수를 보러가는 것에서 그의 제자가 되러 가는 것으로의 의미의 변화는, 따른다는 것이 잠간 방문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요 1:37 이하의 말씀과 위의 성경구절과 똑같은 등장인물이 그들의 직업을 포기하고 사람을 낚는 새로운 일을 위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의미로 따름의 의무가 쓰이고 있는 막 1:17 이하의 말씀을 비교함으로써 분명해진다.
이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제자 됨과 동의어가 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은 예수의 교훈과 모범에서 뚜렷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서 예수는 그와 함께 거하고 그의 대변자로 삼기 위하여 열두 명을 택하셨다(막3:7-15). 이들 열둘에게 있어서 제자 됨은 이제 교훈을 받는 것(산상수훈, 하나님의 나라와 행위의 비유들),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열두 명이 보냄을 받고 후에는 70명이 보냄을 받는다), 귀신들을 쫓아내며 병자를 치유하고 세례를 행하는 것(요 4:2)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열둘 이외의 몇몇도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또 예수에 의해 인정을 받는다(막 9:38-41).
베드로의 고백이 행해진 이후, 예수는 다가올 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 16:21).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이 말은 사실상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해치려고 하는 무리들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그와 함께 여행할 준비(막 10:32-34)와 만약 그를 위해 필요하다면 죽음의 고통까지도 감수할 준비를 날마다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비교. 눅 9:24-26, 막 10:38-39, 빌 3:10). 예수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가지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베드로의 고백(요 10:37-38)은 너무 서두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백에 뒤따른 예수의 예언(요 21:18-22)이 있었고, 전승에 따르면 그 예언에 의한 베드로의 실제 고난이 수년 후에 있었다고 한다(예를 들면 쿠오바디스). 그러나 여기서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순교함으로써 예수를 따르는 것이 우리들이나 타인의 죄의 용서를 성취시키는 데 아무 도움도 못 된다는 것을 베드로가 분명히 밝힌 사실이다(벧전 2:19-25). 오직 예수만이 십자가 위에서 그 자신의 육체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셨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한계를 잊곤 한다. 우리가 고난과 죽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지금 혹은 장차 우리에게 어떤 보상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의 용서를 성취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죄의 용서를 성취하지는 못한다. 초대 기독교 시대에는 예수를 위해 순교함으로 예수를 따랐던 개인들(예. 이그나티우스, 폴리카르푸스<Polycarpus>)이 무수히 많았다. 중세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육체에 그리스도의 못자국과 가시나무에 찔린 자국(성흔<stigmata>)을 냄으로써 신비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경험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눅 9:57-62에는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제자로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세 가지 예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철저한 극기와 이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가정을 갖지 않는 일. 둘째, 가정적인 의무에 앞서 예수를 따르는 일에 우선으로 복종하는 일. 셋째, 전적인 충성이다. 그리스도를 따름에 대한 보상은 요 8:12(매일 인도하심), 막 10:28-31(박해와 함께 영적인 친척, 재산을 받음), 그리고 롬 8:17-18(영원한 영광)에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미국 예일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주저(1951년 출판)이다. 니버는 이 책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이성과 계시와의 관계, 과학과 종교의 관계,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개신교와 자본주의와의 관계, 퓨리타니즘과 민주주의와의 관계 등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냐 문화 전체냐'의 갈등을 명쾌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와 같은 혼란 중에 있는 우리에게 니버는 다섯 가지 대표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하며 동시에 그 대표적 인물의 주장을 각각 설명한다.
그 첫째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양극으로 대립시키고 후자를 죄악시하여 온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사회제도와 문명과 문화전체를 무시하라"고 한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죄에 물든 사회와 문화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본 톨스토이를 해설 하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와 문화를 타협시키는 방법이다. 우리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라고 하는 정통사상에 반하여 여기에서 니버는 '자연과 인간'의 문제로 대치, 그리스도는 인간이 문화를 통해서 자연을 정복하는 데 있어서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진술은 그리스도의 합리성을 주장함과 문화의 가장 좋은 본질을 인정하면서 이 양자를 어떤 합일, 혹은 통일로 이끌어 가려는 데 있다. 그 구체적 예로서는 그노시티즘과 중세기의 아벨라르, 쉴라이어마허, 근대의 무화프로테스탄티즘과 리츨을 들고 있다.
셋째,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비연속성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완전히 분리시키려는 과격파와 그리스도를 완전히 인간화하려는 문화주의적 프로테스탄트의 두 양극의 주장을 종합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유지하며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것을 문화와 결부시키고 있다. 그 예증으로 교부 클레멘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들고 있다.
넷째,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과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역설적으로 대립시키고 그리스도와 문화의 권위를 이원론적으로 시인하는 한편 신에의 복종은 그리스도에의 복종임과 동시에 문화에의 복종이기도 하다고 본다. 그 예로서 바울과 루터, 마르키온을 들고 있다.
다섯째, '하나님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세상을 말하려 하심이 아니요 이를 구원하려 하심이다'는 입장에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대립을 인정하지만 그리스도를 문화변혁의 원리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스도의 역할은 혼돈의 사회 가운데 깊숙이 들어와 인간의 자기사랑을 하나님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주체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F.D. 모리스를 그 예로 든다. 한국번역서로는 [그리스도와 문화](김재준 역, 대한기독교서회, 1957)가 있다.
그리스도와 시간(Christus und die Zeit)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저서로서 본서는 초대 기독교의 시간관과 역사관이 특색 있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즉 신약성경에서 영원이란 무시간이 아니라 무한의 시간이다. 더욱이 시간은 희랍에서와 같이 원으로서가 아니라 한 개의 직선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시간과 영원에는 질적인 구별이 없으며, 유한한 시간과 무한한 시간이 그것을 구별한다. 그리고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구속 의지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데, 이 직선적 구속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점에서, 그 중심을 미래에 두는 유대교의 시간관 혹은 구속사관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단 한번' 일어났다. 여기서 구약성경의 역사는 그리스도에의 준비의 시간으로 해석되고, 교회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출발하여 재림에 의한 완성을 기다리는 구속의 시간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시간을 직선으로 해석하여 구속사적인 현재에 사는 인간은, 그리스도의 지배에 복종한 모든 권위아래 있는 이 세상의 국가를 긍정함과 동시에, 이 직선의 궁극인 종말, 즉 완전한 하나님 통치의 도래를 믿고, 남아있는 이 세상의 악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본서는 여러 학자에 의한 지금까지의 소위 기독교의 시간과 역사관에서, 희랍 철학적.유대교적 사고방식을 제거하고 신약성경에 근거한 순수한 역사관을 명확히 그려낸 것으로, 매우 획기적인 저작이다.
그러나 과연 영원과 시간 사이에는 질적인 구별이 없는 것인가, 그것은 단순한 직선에 불과한가, 그리고 또 창조-그리스도-종말이라는 구속사의 과정이 신약성경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것인가 등의 여러가지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identification with Christ)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신학적 교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여러 성경 구절에서 유래된다. 대체로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인류와 동일시되고, 또한 다윗의 예언된 후손으로서 이스라엘과 동일시된다. 이러한 경우들에 있어서 동일시는 물리적인 동일시이다. 이러한 관계들과 대조되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연관을 시킨다. 이때 이 연관은 하나님의 응보와 인간의 신앙경험 및 성령세례에서 결과 된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은 성령의 세례에 의해서 성취된다. 이 성령 세례는 때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 즉 교회가 '되는'(eis) 것으로 표현되고(고전 12:13), 때로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를 몸에 입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갈 3:27)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행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의 이러한 새로운 관계는 주님께서 다락방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 처음 공표되었다. "너희가 내 안에(en emoi), 내가 너희 안에"(요 14:20).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는 하나님의 역할로 인하여 결과 된 새로운 지위, 곧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으로 정의된다. 이 지위는 단순히 하나님의 보답으로서 수여된 지위 이상의 지위라는 사실이 이 말과 나란히 계시된 '내가 너희 안에'라는 말씀에서 밝혀진다. 이 결과로서 생기는 교리는 흔히 '하나 됨'이라는 말의 동의어로서 생각되는 '연합'이란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성경 안에는 이러한 '연합'이란 말과 '하나 됨'이란 말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비유적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예수 자신이 직접 사용한 비유이다(요 15:1-6). 이 말씀 가운데서 연합이란 말은 영적 교제, 영적 생활, 그리고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연합의 결과로 열린 열매로서 나타내어진다.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있고 또한 포도나무의 생명은 그 가지 안에 있다. 연합에 대한 또 다른 한 비유는 머리와 몸의 비유이다(참조. 엡 1:22-23, 4:12-16, 5:23-32). 이 말씀에도 역시 그리스도와 교회의 살아 있는 연합을 묘사하는 몸과 머리의 유기적인 연합이 나타나고 있다.
이 비유의 골자는 몸과 머리의 하나 됨이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몸의 지휘자로 인정해야 할 의무를 내포한다는 사상이다. 머리와 몸에 대한 비유는 이 비유와 동일한 단락(엡 5:23-32) 가운데 나오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관계의 비유로 끝을 맺고 있다. 역시 이 머리와 몸의 관계는 아내와 남편이 '한 몸'이라고 선언된 구절에서 아내와 남편이 동일시된 것에 비유되고 있다.
여러 가지 표현들이 성경에서 이렇게 '하나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라는 용어이다.
그러나 이밖에도 '안에', '그리스도 안으로'(eis christon)와 '주 안에'(en k-urio)라는 용어들이 사용된다. 전치사 en(안에)과 eis(안으로)의 용법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결론적인 교리는 매우 흡사하다. 중요한 신학적 진리들은 성경의 하나 됨의 교리와 관련되어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롬 6:1-11), 장사(롬 6:4), 부활(골 3:1), 승천(엡 2:6), 통치(딤후 2:12), 영광(롬 8:17)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는 제한이 있다. 그리스도는 성육하심으로 인류와 하나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은 오직 신실한 신자들뿐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란 사상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이 신자에게 부여된다는 견해를 낳는다. 그러나 이 현상이 둘째 아담의 속성을 소유하는 데까지 확장되거나 또는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인격적인 구분이 사라지기까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며, 모든 은혜가 역사하는 데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Christ / christos / ho Christos / mashah / mshah')
기름부음을 받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기대한 오실 왕에게 적용된 칭호였고, 신약에서는 예수의 가장 흔한 칭호이다. 신약에서 보통 이 단어는 희랍어로 번역되어 그리스도로 사용 되었으나 두 번(요 1:41, 4:25)은 Messias로서 음역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이 단어는 보통 형용사적 별명(adjectival epithet)으로서 사용되었다(형용사적 별명이란 그리스도란 명칭이 독자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고 수식적 별명으로 쓰인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그리스도시니 이다."(막 8:29). "주의 그리스도"(눅 2:26), "예수는 그리스도라"(행 5:42) 등이다. 그러나 이 말은 곧 실제로 예수의 이름 또는 별명이 되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 1:1),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5:8),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롬 6:3) 등이다. "기독론"은 당연히 예수의 메시야 직을 다루는 신학의 부문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예수의 본성의 모든 면에 관련되므로, 기독론은 그의 인격. 속성. 사명을 다루는 신학이라 하겠다.
1. 구약의 배경 : 기독론은 구약과 유대인들의 희망, 즉 오실 왕과 미래의 구원의 때에 관한 희망에 근거해서 발전되었다. 히브리 왕(삼상 10:1, 16:13)과 대제사장(민 35:25)은 즉위할 때에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래서 왕은 흔히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삼상 16:6, 참조. 눅 2:26)라고 불리었다. 구약의 후기의 책들은 다윗의 자손인, 한 이상적인 통치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지상에 완전하고 영구적인 통치를 수립하실 것이고 이 통치는 평화와 번영, 의. 정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참된 예배에 의하여 특징지어질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구약의 책들과 비정경적인 유대문헌 가운데는 어떤 메시야적인 인물에 대한 언급은 없고 미래의 시대는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도래할 것으로 기록한 책들이 있다.
메시야 사상의 최초의 발생이 이스라엘의 미래 운명에 관한 예언들로부터였는지(예를 들면 창 12:1-3, 49:10, 민 24:17-19) 아니면 다윗왕조가 영구할 것이라는 희망으로부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말할 수 있다. 아마 가장 초기의 다윗왕조의 영구성에 대한 예언은 시 18편(=삼하 22:2-51)인 것으로 보인다. 호 1:11은 유다와 이스라엘이 통치자 밑에서 통일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포로시대의 인물이었던 에스겔은 미래에 관한 그의 묘사 속에 백성의 참된 목자가 될 다윗왕조의 영원한 통치를 포함시켰다(37:24).
구약에서 다윗왕조에 희망을 둔 후기자료의 형태에서 분명히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학 2:21-23과 슥 4:6-10이다. 이 두 예언자가 모두 스룹바벨 아래서 다윗 왕조의 회복을 기대한다. 그것은 바사제국에 항거하는 혁명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라고 선포한다.
시132편은 영구적인 왕정에 대한 포로기 이전의 희망을 넘어가지 않는 것 같다(참조. 시 78:65-72, 89:19-37). 암 9:11-12은 아마 포로기 이후의 신탁일 것이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옛적과 같이 세우고."
사 9-11장에 있는 신탁들은 구약에서 다윗왕조 개념의 정점을 나타낸다.
'평강의 왕'이 나타날 것인데, 그의 통치는 다윗의 위에서 정의와 의로 수립될 것이고 무궁할 것이다(사 9:6-7). 한 싹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것이며 여호와의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실 것이고, 그는 정의로 심판하고 땅의 가난한 자들을 옹호하고 그리고 야수들까지도 평화로이 살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기 때문이다"(사 11:1-9).
그러나 제2 이사야에서 다윗왕조를 계승하는 왕은 배후로 물러난다. 여전히 "다윗을 위한 하나님의 확고하고 확실한 사랑"은 다함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은 영원한 계약을 세울 것이라고 한다(사 55:3). 그러나 다윗왕조의 왕정의 재수립에 관한 명백한 약속은 없다. 전체로서의 백성이 그 기대의 대상이다. 여호와의 종은 고난당하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재하는데, 이 종은 다윗가문 출신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묘사된다.(사 52:13-53:12). 그러나 이 여호와의 종은 이스라엘 자체의 한 상징인 것으로 나타난다.(사49:3). 이 관념은 메시야 사상과 기독론의 후기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엘서. 나훔서. 스바냐서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활동하실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이상적인 왕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예언자 엘리야를 보낼 것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라기서에도 똑같은 사실이 적용된다(말 4:5-6). 다니엘서에 보면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신다. 그때 "인자 같은 이"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을 대표하면서 짐승의 왕국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영원한 지배를 행사할 것이다(단 7:13-) 14,26-27).
2. 마가복음 :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기독론이 이미 상당히 발전 되어 있었다. 예수에 대한 마가복음의 가장 특징적인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동시에 예수는 고난당하고, 죽고, 부활하고, 재림하는 인자이며 가끔 메시야(8:29, 14:61-62), 주(11:3),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1:11, 9:7)이라고 칭하여진다.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에게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10:47-49). 그러나 그는 이 칭호가 다윗의 주가 되는 자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거절한다(12:35-37). 이러한 용어들을 마가가 채택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적 배경이 중요한 한편, 이러한 용어들의 내용은 마가 자신의 지상 예수에 대한 인상에 의하여 실제로는 형성되었다. 그 이유는 예수는 그에게 주어진 어떠한 칭호들보다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고자이고 그 나라의 복음이고(1:14-15), 새 시대의 창시자이다(2:19). 그는 예언자이고(6:4) 초자연적인 지식을 지닌 묵시할 수 있는 교사이다(13장).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11:33), 의 제자들을 권위를 가지고 부르신다는 사실이다(1:16-20, 2:14).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9:3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의 친족이 되는 것이다(3:35). 예수는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고(2:10)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을 소유한다(4:35-41, 6:34-44,45-52). 그의 제자들은 어떤 경외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한 존재 앞에 있기 때문이다(4:41, 6:51, 10:32). 언제인가 한번 그들은 예수가 변모되는 것을 본다.(9:2-8).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 자신이 그의 수세 때에 가졌던 경험에 동참한다(1:9-11). 예수가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로마의 한 백부장까지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말한다.
예수의 선교의 대부분을 통해서 그의 본성은 그의 제자들에게 한 신비로 남아 있고 예수의 제자들은 인자의 고난을 이해하기조차 못한다.(6:52, 8:17-21, 32-33). 예수의 가르침마저도 특별한 계시가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4:10-13, 33-34). 예수는 그의 적들에게 그의 권위를 설명하기를 거절한다(11:27-33).
그러나 영적 존재들인 귀신들은 즉시 예수를 알아보고(1:34),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1:24), "하나님의 아들"(3:1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5:7 ; 이 명칭은 이방인들이 전용한 것이다)로서 부른다. 마가는 어느 정도 그의 자료들에다 '메시야 비밀'(messianic secret) 이론을 부여하였다. 이 이론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왜 예수가 배척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가에서 예수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다. 예수의 수세 기사 배후에는 이때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채택되었다는 사상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에게 내려왔기 때문이다(1:10). 뒤이어 예수는 사단에게 시험받는다(1:13). 예수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주장하며(10:18), 그는 제자들을 그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도록 지명할 수 없으며(10:40), 그의 소명의 표식은 겸손한 섬김이며(10:45), 그는 미래의 모든 세부 사실들을 알지 못한다(13:32).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아버지에게 이 잔이 그로부터 지나가기를 기도하나 결정은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14:35).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외치기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15:34)라고 한다.
3. Q자료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비마가적인 구절들이 보통 Q라는 기호로 표시된다. 이 비마가적 자료들은 예수의 선교와 인격에 대한 해석에서 일종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Q자료에서 예수는 권위 있는 윤리교사로서 나타난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예언적인 도입자(bringer)로서의 예수의 역할이 더 뚜렷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수가 kurie('주' 또는 '님'<Sir> 즉 아마 '랍비'를 가리키는 말로서 쓰여진 것 같다)라고 불리어졌을 때,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칭호를 자신에게 주는 것보다 그의(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예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그가 그들의 거리에서 가르쳤다는 사실이 그들이 심판에서 예수와 대면할 때 그들은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눅 13:26-27).
기독론적인 중요성을 가진 많은 Q의 구절들에 예수의 인격에 관한 직접적인 가르침은 없다. Q의 기독론적 구절들 가운데서 잃은 양의 비유(마 18:12-14,=눅 15:3-7)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물론 예수의 관심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소외 자들에게 가져온 것을 암암리에 입증한다. 큰 잔치의 비유(마 22:1-10=눅 14:15-24)에서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변호가 더 분명해진다(참조. 마태의 포도원의 농부들에 관한 비유<20:1-15>). 달란트 또는 므나의 비유(마 25:14-30=눅 19:11-27)는 복음을 전파해야 할 제자들의 책임에 대한 말씀으로 적용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이 구절들 전체는 예수의 사업에 의하여 시작된 새 시대를 옛 시대와 대조시킨다. 예수는 자신의 능력 있는 행위들에 대하여 세례 요한에게 환기시켜 알린다(마 11:4-6=눅 7:22-23).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마 11:11=눅 7:28).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 였으며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대가 선포되었고 아마 동터오고 있는 것이다(마 11:12=눅 16:16, 참조. 마 12:28=눅 11:20, 마 13:16-17=눅 10:23-24).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보내는(눅10:1-16=마 9:37-38, 10:7-16,21-23,40) 구절에서 예수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를 영접하는 자이고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를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하나님의 사자이다. 이러한 사실들과 관련해서 Q자료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배척과 새로운 사명에 의해서 일어난 갈등과 믿는 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희생을 반영하는 많은 구절들이 있다(예를 들면, 마 10:34-38=눅 12:51-53, 14:26-27, 마 12:30=눅 11:23).
새 시대(눅 11:29-32=마 12:38-42), 예수의 배척(마 8:20=눅 9:58, 마 11:19=눅 7:34)과 제자직(마 10:26-33=눅 12:2-12, 마 24:43-51=눅 12:35-46)을 다루고 있는 어떤 구절들은 또한 예수를 인자와 동일시한다. 자료의 수집자는 아마 예수가 이 칭호에 의하여 알려진 하늘의 심판자로서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앞에 나온 모든 것은 꽤 일관성 있는 모습을 형성한다. 그러나 새로운 요소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또한 하나님의 지혜(the Wisdom of God)를 동일시하는 그런 구절들에서 소개된다. 예수는 그의 시험 기사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어지는데 이 시험 기사는 그의 세례기사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초능력적인 능력들을 소유한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의 왕국들을 소유하는 것은 실제로 가능한 것이고 또한 유혹이다. 그러므로 Q자료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직의 한 표상을 나타내 준다. 마 11:25-30(=눅 10:21-22)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이제 강조점은 그의 메시야적 직분에 대해 주어지지 않고 감추인 지혜에 대해 주어진다. 이 감추인 지혜는 어린아이들에게만 계시되고 아들에게 모두 주어졌으며 이 아들만이 홀로 아버지를 알며 또 그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다. 아들만이 아버지를 안다는 사상은 유대교에서는 생소한 것이며, 이 전체 구절은 메시야의 성격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시킨 것이다. 그와 같은 사상은 외집 51:23-30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이 강화는 예수를 잠언서, 솔로몬의 지혜서, 집회서에 아주 강하게 나타나는 하늘의 지혜와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 눅 11:49-51(=마 23:34-36)에 나오는 '하나님의 지혜'에서 기인한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 말하고 있는 한 예언자에 의해서 전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루살렘에 대한 탄식(마 23:37-39=눅 13:34-35)은 새끼를 품고 있는 비둘기처럼 근심에 잠겨있는 지혜를 암시 한다.
4. 마태복음 : Q자료의 기독론은 마가의 기독론처럼 고도로 발전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태는 그의 자료들의 사상에 약간만을 보태었을 뿐이다. 마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입법자로 해석하는 데 점점 더 강조점을 두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한 것에 대한 마태의 주요한 공헌은 동정녀 탄생의 기사이다(마 1:18-25). 하지만 메시야로서 예수는 그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을 통해서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는다(1:1-17). 마태 기자는 예수가 유아시절에 거하였던 곳이 나사렛이었다는 기정사실을 메시야는 베들레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당시 사람들의 신앙과 조화를 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와 그리고 누가는 베들레헴 성에서의 예수의 탄생을 강조한다. 마태는 구약에서 예수의 메시야적 위엄에 대한 예언들과 그의 생애의 많은 사건들에 대한 예언들을 발견하였다(예. 1:23, 2:6,15,18, 4:15-16, 8:17, 12:18-21, 13:35).
산상설교에 있는 마태의 특수 자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옛 사람들의 가르침과 대조시킨 공식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즉 "옛 사람에게 말한바...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예를 들면, 5:21-22) 라는 공식이다.
5. 누가복음-사도행전 : 비록 누가복음 기자의 사상과 그의 특수 자료들의 사상 사이를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누가는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사상이 지배적인 전승에 보다 가까이 접근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눅 2:4) 가브리엘 천사에 의하여 고지된 기적적인 출생에 의하여 탄생하였다(1:26-38). 예수의 탄생시에 마리아의 처녀성은 1:34과 2:5에만 암시되어 있을 특별히 강조되지 않는다. 1:11,32,33,35과 2:26,38의 어조는 예수가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불리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가장 순수한 유대적인 메시야 사상을 나타낸다. 9:20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불렀으며, 23:35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로서 언급된다(참조. 9:35에서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하였다). 예수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거나 그 나라를 구속하리라는 희망이 눅 24:21과 행 1:6에서 표현된다(참조. 눅 19:11). 마태와 같이 누가도 예수의 삶을 통해서 성경이 성취되었다고 강조한다(예를 들면, 눅 24:25-27,44-46,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자주).
하나님의 아들로서 소년 예수는 그의 아버지(하나님)의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눅 2:49). 다른 한편 그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갔다. 서방 사본(Western text)에 의하여 입증 된 3:22의 중요한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즉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성령이 예수가 세례 받을 때에 구체적인 형태로 내려왔고, 그 후에 예수는 성령으로 충만해진다(4:1, 참조. 행 10:38,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을 부었다고 말한다.). 누가의 족보는(3:23-38) 예수의 혈통을 요셉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 아담에게까지 소급한다. 그밖에 특수 자료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라고 말한다(22:28-30, 23:46, 참조. 23:34, 어떤 사본들에서는 빠져 있다).
누가의 특수 자료는 예언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초기 해석을 반영 한다(7:16). 그리하여 예수는 자기 자신을 한 예언자라고 말한다(13:33). 이와 똑같은 사상이 24:19에 표현되고 있다. 즉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예수는 모세가 약속했던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고 한다(행 3:22-23). 특수 자료에 있는 예수의 몇 개의 교훈들(sayings)은 예언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예를 들면, 눅11:27-28, 12:14,54-56, 13:1-9, 참조. 16:19-31).
다른 자료들은 더 광범한 기적적인 요소를 내포한다. 시몬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고기가 잡힌 데 대해 놀라서 예수에게 그를 떠나달라고 요구한다(눅 5:8). 예수는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다(10:17-20).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회개하는 도적이 그날 그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한다(23:43).
누가는 예수를 명백히 절대적 의미에서의 '주'라고 부르므로 다른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상이하다(예. 10:1, 11:39, 12:42, 17:5-6, 18:6, 19:8, 22:61, 24:34). kurios는 폭넓은 뜻을 가지고 언급된다. 예수는 그의 생애 중에 자주 '랍비' 또는 '랍오니'(Rabboni)로서 불리었으며(예를 들면, 막 9:5, 11:21, 14:45), 복음서 기자들은 흔히 이 단어를 didaskalos(선생)로 번역 한다(예를 들면, 마 23:8, 막 4:38, 13:1, 눅 7:40). 마태는 23:10에서 kathegetes('교사' 또는 '선생')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고 있고, 누가는 epistates('주'<master>)라는 말을 몇 번 사용하였다(예를 들면, 8:24, 9:33,49). 또한 '주'(Lord)라는 말이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 '디다스칼로스'나 '랍비' 대신으로 흔히 사용 된다(예를 들면, 마 7:21-22, 17:4,15, 눅 7:6, 11:1, 18:41). 그러나 누가가 예수를 절대적인 의미로서 ho kurios라고 불렀을 때 누가는 아마 그의 모든 백성의 주로서의 예수의 천상적인 위엄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고 그를 주와 메시야가 되게 했다는 최초의 사상을 증언한다(2:36, 참조. 3:13, 10:40-42, 13:32-35).
사도행전에서 예수에게 적용된 다른 칭호들과 술어들은 설교와 교훈들에 관한 풍부한 전승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흥미가 있다. 예수는 눅 2:11에서와 같이 '구주'(savior; 5:31, 13:23)라고 불리는데, 이 말은 신약에서 매우 흔하지 않은 용어이다. 예수는 또 pais, '종' 또는 '소자'(3:13,26, 4:27,30)라고 불리는데, 이 파이스라는 말은 제2 이사야의 종과 관련될 수 있는 전례적인 칭호이다. 또 예수는 archegos tes zoes, '임금', "생명의 주나 주관자"(3:15, 5:31)라고 불리며 "거룩하고 의로운 자"(3:14, 7:52, 22:14)와 "오시는 이"(19:4) 등등으로 불린다. 이 용어들 중의 몇몇은 메시야적 전문용어가 아니다.
6. 바울 : 바울의 서신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후 몇 년 안에 아주 고도의 기독론이 발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와 같은 기독론적인 이론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바울이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 말해야 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업과 구원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 부수적으로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믿음. 위탁. 복종과 결부되어 있는 정도다. 그런데도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은 제4 복음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에 접근하고 있다.
바울의 모든 서신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예수'를 나타내는 이름이나 별명으로 사용되어졌거나 또는 예수라는 말 앞에 덧붙이거나 또는 예수를 나타내는 대용어로서 사용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넓은 의미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관계성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일어났던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많은 은유를 사용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의롭다함을 얻었거나 죄 사함을 받았으며(롬 3:24), 그의 죄가 속죄되었으며(롬 3:25), 그는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그러므로 자유를 얻었으며(롬 3:24, 갈 3:13),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의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를 노예상태에 얽어맸던 증서는 이제 무효화되었으며(골 2:14-15), 한때는 적이었지만 그는 이제 하나님과 화해하였으며(고후 5:18-20),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되었거나(롬 8:15-16) 또는 그의 성년의 상태에 달했다(갈 4:1-5). 이 모든 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달려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그와의 연합에 의하여 유효해진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분명히 가장 초기에 쓰여 졌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되었고(살전 1:10, 3:13, 4:13-17, 살후 1:7-8, 2:8), 이 서신들은 그리스도를 에녹서와 복음서들의 '인자'의 모습을 암시하는 용어들로 묘사한다. 그리스도를 대적해서 적그리스도 즉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데 이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가 그의 입의 기운으로 죽일 것이다(살후 2:3-12). 이 모든 요소들은 유대 묵시문학으로부터 유래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또한 주(Lord)라고 불린다(살전 1:1).
많은 것이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에 첨가된다. 그리스도 또는 메시야로서 예수는 메시야직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를 뒤엎는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다(고전 1:24). 이 지혜는 모든 참된 지식과 교훈의 원천이고(3:10) 성령을 통해서 계시된다(2:10). 이 지혜는 세상의 통치자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2:8). 기독교의 메시야는 구약의 구원사건들에서도 활동한다. 그는 유대 미드라쉬에 따르면 모세를 따랐던 바위였고 그리고 이 바위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얻었으며, 그는 또한 만나였다(10:1-4). 믿는 자들이 그의 몸에 속하는데, 그의 몸은 '주의 만찬'의 한 떡덩이로 표현되며, 믿는 자들은 그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10:16-17).
그리고 교회는 그 몇 개의 지체들과 함께 또한 그의 몸이다(12:13-31). 메시야는 죽은 자들로부터 최초로 일어날 하늘의 사람이다(15:20-23). 그리고 메시야는 그가 사망을 포함하여 모든 적들을 정복할 때까지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의 통치는 그가 왕국을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 때에 끝나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이다(15:24-27).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게 종속된다. 즉 하나님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듯 그리스도의 머리이다(11:3). '주'(Lord)라는 말이 고린도전서에서 자주 사용되었는데, 그러한 예가 또한 이것을 암시한다. 세상에는 이른바 수많은 신들과 주들이 있으나, 참으로 한 하나님 공 아버지와,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8:5-6). '주'는 동시에 구약의 야훼(Yahweh) 또는 아도나이(Adonai)를 가리키며, 마르(Mar)라는 말은 아람어를 사용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부른 명칭이고(16:22), 이방인들은 kurioi(이방종교의 신자들에게는 신들 또는 영웅들이었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귀신들이었다)라 불렀다. 누구도 (참)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할 수 없다(10:21). 또 한편 그리스도를 주로 아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의 메시야성을 아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사이다(12:3).
고린도후서는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일체성을 강조하고 세 가지 주요한 점들을 첨가한다.
첫째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하였으나(즉 하나님의 부요와 능력을 소유하였으나), 그를 따르는 자들이 부요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가난해지셨다(8:9).
둘째 주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것은 계약인데, 모세의 정죄의 계약 및 그 계약의 일시적인 영광과는 대조된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응시하는 신자들은 영이신 주의 영광을 보고 반사한다(3:4-18). 그러나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eikon)인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사도들의 마음속에서 빛난다(4:4-6).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가능한 한 밀접하게 관련되고, 그 구별이 분명치 않은 성령과도 그렇게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러나 고후 13:13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사귐(또는 성령에의 참여)에 관하여 말한다. 바울은 예수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함으로써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한다(13:4).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예수의 피조성과 하나님에 대한 그의 종속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genomenon)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갈 4:4). 그리스도는 인간을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하기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갈 3:13, 참조. 고후 5:21).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죄 된 육신과 같은 육신의 형태로(문자적으로는 '죄의 육의 모양으로'<homoioma>; 롬 8:3) 보내셨고, 그가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될 것을 계획하였다(롬 8:29). 예수는 육신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다(롬 9:5). 신중한 구별이 롬 1:3-4에서 서술된다. 즉 육신으로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났고, 성결의 영으로서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빌립보서와 골로새서는 다른 서신들처럼 여전히 미래의 재림을 가르친다(빌 1:6, 3:20, 4:5, 골 3:4). 위대한 기독론적 구절인 빌 2:5-11은 하늘의 그리스도의 겸비의 상을 상술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서신들이 진술한 내용에다 실질적으로 첨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의 morphe('형상')이었으나, 자진해서 그 자신을 '비웠으며' 종의 모르페를 취하였다. 이 종의 모르페는 또한 인간의 homoioma(모양)와 schema(형상)로 기술되었다. 그가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높이시고 그에게 모든 이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름, 즉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셨다. 이 용어들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 바울은 그리스도가 희랍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form)을 소유하여 그이 본성도 소유하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모습'(likeness)고 모양(fashion)은 그리스도가 단지 겉으로만 인간인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말해진 것에 비추어 보아, 바울은 예수의 순수한 인간성을 인정하였음에 틀림없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었다는 것은 골 2:9로부터 분명한데, 이 절에서 그는 신성의 모든 충만(pleroma)이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한다고 말한다.
골 1:13-22은 하나님의 아들을 필로(Philo)의 로고스와 신적인 인간을 암시하는 용어로 묘사한다. 만물이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있다. 그래서 그는 창조. 섭리. 구속에 있어서 뛰어난 분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상에서 예수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방법들, 즉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 대한 선생으로서 또 사랑하는 친구로서 행한 인간적인 행동과, 메시야. 신적인 인간. 주. 새 계약의 창시자. 하나님의 지혜의 범주들이 모두 조화되고 알기 쉽게 종합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굉장한 사색과 가르침의 활동이 이러한 종합 속에 투입되었으며 후기 기독론에서 사용된 모든 자료들이 이미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복음의 전승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예수의 선교 시에 행한 어떠한 기적적인 행위도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지상의 예수를 원래 십자가에 못 박힌 선생으로 알고 있고, 경우에 따라 특별히 주의 말씀들을 언급하고 있으나(고전 7:10,25), 복음전승 안에 있었던 교훈들을 자료를 밝히지 않고 더 자주 반영하고 있다(예를 들면, 롬 12:14,19, 13:8).
7. 후기 신약의 책들 : 1세기 말경 바울서신들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왜냐하면 아마 이 서신들이 교회 안에서 수집되었고 유포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문헌들은 바울서신들을 본 땄다.
(1)에베소서 : 이러한 종류의 첫 서신인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의 기독론에
거의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았고 다만 예외적으로 그리스도가 땅 아래로 내려갔음을 시사하였으며(4:9-10), 그래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에게 전파하였다는 교리(벧전 3:18-22)를 위한 길을 열어 놓았다.
(2) 히브리서 : 박해가 임박하였을 때 기록된 설교인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의 독특한 중요성을 지적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강화시키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을 창조의 행위자로 본 히브리서의 사상은(1:1-12)
골로새서에 있는 교리의 발전일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올 시대가 아들에게 종속 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즉 만물이 아직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으나 그동안 그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다(2:5-9). 히브리서는 대다수의 후기의 신약의 책들보다 더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였다. 구원의 archegos(행 3:15)로서 예수는 많은 (다른) 아들들을 영광에로 인도하며, 그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2:10). 예수는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으며(2:9), 그래서 예수는 모든 인류의 대표자이다. 예수가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그는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기도했으며, 그가 받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5;7-8). 다른 사람들처럼 시험을 받았으나 죄가 없는 예수는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긴다(4:15). 예수는 하나님의 독특한 사도, 또는 사자와 대사장이었지만(3:1), 그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으며, 그를 영화롭게 한 이는 하나님이다(5:5). 그이 대제사장직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아론적인 체계에 비교할 때에 완전하고 영구적이며, 멜기세덱에 의하여 예표된 것이다(5:6,10, 6:13-7:17). 예수의 대제사장직은 새 율법과 새 계약을 대표한다(7:18-28). 예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존 안에 반복될 필요가 없는 제사로서 자기 자신을 바쳤으며(9:11-12), 그는 그의 백성을 위해 중재하려고 영원히 살아 계신다(7:25).
(3)요한계시록: 이 예언은 주된 기독론적 발전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메시야에 관한 요한계시록의 견해가 거의 전적으로 후기 유대 묵시문학의 견해인데, 이 묵시문학은 요한계시록이 1천년의 메시야시대와 성도들의 부활(계 20:2-5)과 사단의 최후 공격(20:7-10)과 일반 부활과 심판 그리고 올 시대(20:11-22:5)을 종합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내용을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야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 따른다. 메시야는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5:5, 22:16), 새벽별(22:16)이며, 그러나 메시야는 또한 인자와 죽은 자 가운데서 제일 먼저 나신 자인데, 그는 구름을 타고 오며 완전히 초자연적 인물이다(1:5-7,13-16, 14:14). 이제 요셉자손의 메시야 형태가 문서상에 처음으로 확실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는 전사 메시야이고(6:16, 19:11), 슥 12:10-14의 예언이 예수에게 적용되었다(참조. 마 24:30). 그러나 그는 전투에서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를 낳은 여인(12:1-15)은 분명히 참되고 영광된 이스라엘이다. 이 메시야는 유대 전승에서처럼 황소가 아니며, 그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였고 그들을 그의 피에 의하여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시킨,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다(5:6).
다른 점들에서 이 메시야 상은 기독교화 되었다. 충성된 증인으로서(1:5) 이 메시야는 기독교 순교자들의 모형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14:1). 그이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19:13). 그러나 여기서 이 언급은 아마 로고스 개념보다 오히려 그가 주는 예언적인 말씀에 관련된 것 같다(1:16). 유대 묵시문학적 용어들로 서술된 새 예루살렘은 그의 신부이고(21:9-10) 메시야의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된다(19:9). 아마도 이 잔치는 의식적으로 성만찬 의식과 관련된다(3:20).
(4)베드로전서 : 이와는 대조적으로 역시 박해시대에 쓰여진 베드로전서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편에서의 온순함과 보복이 없음을 강조한다(1:19, 2:21-24). 이 베드로전서에 있는 새로운 사상은 그리스도가 하데스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하데스로 내려갔다는 것이다(3:18-22, 4:6).
(5) 목회서신 :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내진 서신들은 '구주'를 예수를 위한 칭호로서 즐겨 사용한다(딤전 1:1, 딤후 1:10, 딛 1:4, 2:13, 3:6). 이 구주라는 말은 비록 때때로 더 초기에 사용되기도 하였지만(예를 들면 빌 3:20) 원래 세속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었고 아주 정확한 적용 대상이 없었다. 구원에 있어서 그의 인간성과 역할이 모두 강조된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유일한 중보자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다(딤전 2:5, 참조. 6:13-14, 딤후 2:8, 4:1, 딛 2:11-14). 딤전 3:16에 있는 좀 운율적인 신앙고백은 신조와 같은 어떤 것이 발전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6)신약에서의 그 밖의 책들 : 베드로후서에 있는 변형(transfiguration)은 파루시아(parousia)의 예시로서 간주된다(1:16-18). 이 후기 문서인 베드로후서는 '구주'라는 용어를 몇번 사용한다(1:11, 2:20, 3:2,18). 야고보서는 주로 주의 재림을 말하고(5:7), 예수를 영광의 주로 말한다(2:1).
8. 요한복음 : 비록 제4 복음서가 신약의 가장 후기의 책은 아니지만, 이 복음서는 신약의 기독론의 정점을 이룬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공관복음서, 바울서신들, 히브리서에서 발견되는 초기 개념들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예수는 메시야(보통 Christos로서 번역되었다<예를 들면, 9:22, 11:27, 20:31>. 그러나 또한 Messias로도 음역되었다<예를 들면, 1:41, 참조. 1:49>.)와 주(13:13-14, 20:18,28, 21:12)로 번역되었다. 예수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에게 되돌아간다는 충분한 의미에서이다(13:1-3). 예수는 인간에게서 기원하지 않았으며(1:12-14,18, 8:58), 이 세상에서 그의 아버지의 뜻과 사업을 행하고(2:16, 5:17,19-29), 그의 본래의 영광을 회복한다(11:4, 12:27, 14:13,28, 17:1, 참조. 빌 2:5-11). 메시야성의 숨김에 대한 교리는 또한 하나님이 아들과의 관련에서 완성된다(6:42, 8:19, 19:9). 예수가 인자라고 불린 구절들도 이러한 개념들과 관련된다(1:51, 3:13-14, 6:27, 53, 8:28, 12:34). 예수는 또한 구주(예를 들면 4:42; 이 구주란 말에 대한 정이 없이 사용됨)와 선지자(7:40; 참조. 6:14에는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로 불리었다. 선지자라는 말은 충분한 신앙과 지식이 없는 자들에 의하여 사용된다.
예수는 세상의 죄를 '없애거나'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1:29). 이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유월절 어린양이 희생되는 때인 유월절 이전에 고난당한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데, 그렇지만 유월절의 희생은 죄의 제거보다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상징한다. 가능한 다른 해석은 그 '어린양'이 승리의 메시야를 나타내는 묵시문학의 정복하는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이 메시야는 죄 또는 죄의 결과를 '지고 가지' 않고 죄를 결정적으로 없애버린다. 그는 모세의 율법보다 우월하다(5:16-18, 7:22-24). 그러나 그가 주는 유일한 율법은 사랑이 새 계명이다(13:34). 예수의 세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며 대신에 세례 요한이 기능은 그 자신보다 더 위대한 자에 대하여 증거 하는 일이다(1:19-34, 3:22-30). 메시야 비밀의 사상은 이 복음서에서 정교하게 완성되어 있는데, 이 복음서에서도 두세 제자들만이 믿었을 뿐이고, 그것도 불완전하게 믿었다. 반면에 예수의 적들은 심지어 예수가 평이하게 말할 떼에도 예수의 말에 당황하고 그 말을 오해하였다. 이 복음서에서는 이스라엘의 눈멀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의 공적 선교의 막을 내린다.
다른 복음서들과는 대조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사실상 전부가 예수 자신에 대한 신앙과 불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은 진실일 뿐만 아니라(13:20),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구원에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3:14-18,36).
이 복음서는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찬미적 서문으로 시작된다(1:1-18). 이러한 전문적 의미에서의 '로고스'라는 말이 이 복음서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서문(prologue)은 이 복음서 기자에 의하여 각색된 초기의 찬가라고 때때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서문의 주제들이 다시 사용되므로, 이 서문은 서곡의 성격을 갖는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언제나 생명이고(1:4, 11:25, 참조. 6:35,51, 7:37-38) 세상의 빛이다(1:4,9, 8:12, 9:5). 이 서문은 그리스도가 창조의 행위자였다는 골로새서와 히브리서의 사상을 계승한다(참조. 로고스에 관한 필로의 사상과 창조자로서의 지혜에 관한 유대적 사상). 그러나 강조점은 창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있지 않고 구속(1:11-13)과 계시(1:9,14,17-18)에 있다. 요한은 '로고스'를 하나님과 동일시함에 있어서 바울을 능가한다. 물론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pros) 있고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only begotten God)이기도 하지만 말이다(1:18).
이 마지막 사상 역시 이 복음서의 본론에서 완성된다. 왜냐하면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하고(3:35, 5:18, 10:18-30, 16:32, 17:10) 적절하게 하나님이라 불리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10:34-36, 20:28). 그래서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그리스도를 서술하기 위해서 사용된 몇몇 개념들과 단어들은 영지주의 특히 만다이아파의 문헌(Mandean literature)에 뚜렷한 병행구절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이고(6:35, 7:37-38), 생명과 진리이고(14:6), 길이고 그 길을 최초로 밟는 자이고(13:36, 14:2-6), 참 포도나무(15:1-10), 선한 목자(10:11)와 문(door 또는 gate, 10:7), 돕는 이 또는 다른 돕는 이를 보내시는 보혜사이다(14:16-17,26, 16:13-15). 그러나 만다이아파의 문헌과 요한복음의 로고스 서문에서 요한과 영지주의 사이의 차이는 요한이 창조자를 계시자와 구속자가 다 하나이고 그 하나가 하나님이다. 그래서 창조는 어떤 실수나 또는 비극적 타락이 아니었다. 아무리 세상에 죄가 많다할지라도 세상은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3:16).
요한과 영지주의자 사이에 또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세상에 대한 요한의 성경적 기독교적 사상과 관련된다. 영지주의의 구속자는 완전한 인간성을 취할 수 없고 단지 인간성의 모양만 취할 수 있을 뿐이다. 영지주의의 구속자는 그의 추종자들의 전체적 인격을 구속할 수 없고 그들 안에 있는 비물질적인 신적 불꽃만 구속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요한은 로고스가 육이 되었고 그이 백성 가운데 거하였다(장막으로서의 몸의 개념을 위하여는 고후 5:1-5, 벧후 1:13을 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피곤하였고(요 4:6) 목말랐고(4:7, 19:28) 십자가에서 죽었기(19:30)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행위와 말씀에 관한 요한복음서 기자의 이야기는 예수의 인간성에 관한 기록이나 확신에 의해서보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교리에 의해서 더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될 수 없다. 전능자(the Omnipotent; pantokrator) 그리스도에 대한 비잔틴 모자이크와 그림들에서와 같이, 인간성은 단지 신성의 도구일 뿐이다. 제4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의미에 관한 극적 신학적인 표현, 즉 복음서 형식의 한 신조이다. 바울의 견해에서는 부활하시고 영광을 입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성이 예수의 지상 선교때 이미 빛을 발하였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세례의 사건이 이 복음서에서는 요한의 증언이 된다. 요한복음에는 비유들이 없고 우화들(allegory)만이 있으며, 율법에 관한 어떤 특별한 가르침들이 없고 율법과 사랑의 새 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만이 있으며, 보통 인간의 동정에서 나오는 치료들이 없고 대신 전능자와 구주의 신적 동정을 보여주는 어떤 큰 표징들이 있다. 또한 요한복음은 영생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에 대한 교리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을 재해석한다. 예수의 선교는 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그 자신의 백성'을 위함과 같이 사마리아인들과 희랍인들에게도 이제 분명히 행해진다.
예수의 행위들과 설교의 스타일은 요한복음 기자가 신성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그런 것이다. 예수의 지식은 초자연적이다(예를 들면, 1:47-51, 2:25, 4:17-19,29, 13:21-27). 예수는 때때로 수수께끼와 같은 인물이며 그에게 제시 된 제안들을 거절한다. 그 이유는 그가 둔감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들과 생각들이 인간의 방법이나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2:4-5).
'아버지'에게 드리는 예수의 기도들은 완전한 영교와 상호 이해의 기도들이다(11:41-42, 12:27-28, 17장).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기독교의 순교자처럼 진리에 대한 증인으로 그리고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어떤 왕으로서 말한다(18:19-21,33-37, 19:10-11). 예수가 그의 생명을 버리고 그 생명을 다시 얻은 것은 그 자신의 자의에 속한다(10:17-18, 15:13). 그러므로 예수는 그가 자신을 체포하도록 허락할 때까지 체포될 수 없다(7:44-46, 18:5-8).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 즉 '완성했다'이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19:30).
9. 사도 교부들: 많은 옛 기독론적인 관념들이 사도교부들 즉 한 무리의 2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의 글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선택하셨고(클레 일서 64:1), 그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켰다(클레 일서 24:1). 그는 주와 구주와 대제사장이고, 고난 받는 종(the Suffering Serv-ant), 광야의 구리 뱀에 의하여 상징된다. 어떤 개념들은 충분히 발전되었다.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의 신앙고백문(클레 일서 58:2, 디다케 7:1,3)과 한 신조의 시초, 특히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라는 항목(클레 이서 1:1)에 관한 증거가 있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동정녀 탄생을 긍정하였으며, 그리스도가 다만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는 가현설의 오류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왔다고 주장한다. 그의 본성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즉 원래 그는 영이었으나 육이 되었다(클레 이서 9:5). 때때로 사도교부들은 인간이 된 그리스도의 겸손과 겸허를 강조한다(클레 일서 16:2).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를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보는 견해를 발전시켰다. 이제 새 사람의 시대가 나타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나무의 열매들이며, 예수는 교회에 불멸성을 불어넣기 위하여 기름부음(muron)을 받았고, 물을 정화시키기 위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한 저자가 교회는 예수 안에서 명백하게 되었다고 말하고(클레 이서 14:3) 다른 저자는 예수가 공교회의 목자라고 말하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교회가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는 아버지의 문으로서 족장들과 예언자들 사도들과 교회를 위한 입구이다. 이러한 몇몇 개념들은 요한복음을 회상케 한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가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때 그는 예수를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디오그네투스 서신 11:2-3의 어투도 위와 비슷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에서 사용된 pais('종' 또는 '소자')라는 말이 기도문과 의식에 사용된 구절에서 다시 나타났으며(클레 일서 59:2), 폴리카르푸스의 순교서에서도 이 파이스라는 말은 거의 분명히 '소자'를 의미하고 '아들'과 동의어이다. 몇몇 다른 새로운 사상들이 나타난다. 이그나티우스는 예수를 '아버지의 뜻'과 "태어났으나 태어나지 않았고...처음에 고난을 받을 수 있고 다음에 고난 받을 수 없는" 자로서 서술한다. 그리고 이그나티우스는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마술과 사학과 무지를 파괴시키는 것으로 본다.
10. 기독론의 기원 : 우리는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이 기독론으로 변형된 과정을 완전히 확실하게 추적할 수 없다. 확실히 그 자신의 사명과 인격에 관한 예수의 의식이 이러한 과정의 가장 큰 유일한 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비유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언자로서 보여준다. 그리고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범주였다. 심지어 메시야라는 지위조차도 예수가 예언자였다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근거하였다.
예수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그의 메시지의 진리와 이 메시지를 선포하는 그의 사명에 대하여 말하였다. 분명히 예수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어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상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 때까지였고, 반면 예수는 새 시대의 문턱에 서 있었고 그의 활동에 수반된 사건들에서 이 새 시대가 동터오는 것을 보았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운명과 개인들의 생명은 이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달려 있었다. 이 권위와 결부하여 우리의 자료에는 예수가 개인적인 죄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에 관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어떤 것이 없다. 이와 반대로 예수는 하나님과의 친자관계에 대한 어떤 깊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친자관계로부터 배제되지 않았으며, 참으로 예수는 그들 속에 이러한 관계를 일깨워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에게 있어서 이러한 친자관계는 아주 강하고 직접적인 것이었으므로 복음 전승은 예수를 거의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서술하였다. 예수가 또한 자신을 인자로서 말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그의 마지막 여행을 한 것은 오직 종교적 혁명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 자신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위험을 충분히 의식하였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가 평화적인 메시야 왕으로서 왔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특징을 가졌다. 그리고 한 열광적인 여인이 베다니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예수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는데, 아마 이것은 만일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더 준엄한 심판을 내리신다는 표징이었던 것 같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그의 몸이 찢기고 그의 피가 흘려지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그의 제자들에게 주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이 그들을 위한 것임을 나타내는 표징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로마인들은 그가 '유대인의 왕'이었거나 그렇게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3일 이내에 그의 제자들은 그의 부활을 경험하였다.
예수는 그의 선교 중에 그의 제자들로부터 각별한 충성을 받았으며, 그의 제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메시야로 삼으셨다고 확실히 결론지었다. 그들은 곧바로 최근의 사건들을 분명히 예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약의 구절들을 찾기 시작하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일이 얼마나 당연하고 불가피하였는지는 쿰란 문서나 사해 사본으로부터 알 수 있는데, 이 쿰란 문서나 사해 사본은 이미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에 성장하는 신앙은 세례 받을 때와 다른 경우들에서 나타난 성령의 경험에 의하여, 그리고 아마도 주의 만찬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임재 하신다는 의식에 의해서 고조되었고 풍부해졌다. '메시야'라는 단어는 이제 제자들에게는 예언자, 새로운 입법자, 하나님의 아들, 인자를 의미 하게 되었고, 실제로 이 메시야라는 말은 그들이 예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을 표현하게 되었다. 이것에서부터 나머지 신약의 기독론은 어려움 없이 발전하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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