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조금은 문화적인 갈증이 나 있는 상태라면,
늘 보던 영화와 비디오 말고 다른 뭔가를 하고 싶다면,
공연 하나를 보기 위해 열성 팬들과 예매를 다툴만한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다면,
도시를 훌쩍 떠나기에 별로 여의치 않다면,
어딜 가든 북적대는 인파가 몹시 거슬린다면,
그리고 주머니 사정이 그리 넉넉치 않다면,
여기 괜찮은 전시 하나 -
광화문에 있는 성곡 미술관에서 <아프리카 여정>이라는
제목의 김중만 사진전이 열리고 있어.
패션사진을 주로 찍어온, 그쪽에서는 스타급 사진가인데,
그간의 사진들과는 전혀 다르게
아프리카의 동물과 사람을 찍었거든.
표범과 얼룩말, 사자, 새...
모두 '동물의 세계'에서 익히 보아왔던 것들이지만,
묘한 여운을 남기더라.
처음 1층을 둘러보았을 때는 그냥
'늘 보던 동물 사진이구나' 싶어 조금 실망스러웠었는데,
2층을 거쳐 마지막 3층 전시장을 둘러보다 보면
어느새 그 속에 젖어들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
사람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갤러리의
큰 벽면을 채운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어떤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새들이 퍼더덕거리는 소리...
지금은 눈물이 맺혀 떨어지는 순간을 잡은 기린의 눈과
마사이족 남자의 눈빛이 오버랩되어 떠올려진다.
75일동안 탄자니아와 케냐에서 찍은 사진이래.
어린 시절 아프리카에서 생활했던 사진가이지만,
야생의 자연 속에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라더군.
그동안 연출한 사진만을 찍어 오던 사진가가,
자신과의 오랜 약속을 지키는 마음으로,
연출하지 않은 사진을 찍은 것이지.
간만에 즐겁게 본 전시였기에 전한다.
참고.
1. '동물의 세계' 류의 다큐멘터리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에겐 별로 권하지 않는다.
2. 많은 사람이 보기보다는 혼자 혹은 두서너 명 정도가
좋을 것 같아. 전시라는 게 워낙 휘익 보고 끝나는 것인데
여러 명이 우루루 보다 보면
더 정신없고 더 시시해지기 쉽거든.
3. 전시를 보고 나면, 야외전시장 안의 조그만 찻집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도 좋을 듯. 오후쯤 가면
벽난로에서 구워주는 고구마도 맛볼 수 있단다.
4. 입장료는 무료.
5. 1월말까지 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