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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23.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527항)
복잡한 이해관계 속 식별 기준은 ‘복음의 가르침’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네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에 맞는 교사들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2티모 4,2-5)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곳?
하느님께서는 복된 생명에 참여하도록 인간을 부르셨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으며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항) 성자께서는 생명과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도록 제자들을 부르셨고 파견하셨습니다.(2항) 하지만 이 세상에 하느님 뜻을 전하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도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수많은 사회 현안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삶 안에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즘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 어려운 것은 식별입니다. 전기요금 인상 문제를 예로 들어 볼까요? 민생과 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요인은 전기 생산 재료인 천연가스와 석탄의 가격 인상, 한국전력공사의 역마진 구조 등입니다. 이와 맞물려 적정 전기요금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 여부를 비롯해서 대체 에너지원 개발과 같은 문제들이 맞물립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
전기요금 해법을 위해 민영화 추진, 혹은 전기의 공공재적 성격을 감안해 적자를 안더라도 현 방향을 유지하는 방법 등 여러 방안이 논의됩니다. 많은 정치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배려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민영화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최소한의 삶조차 보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것으로는 답이 되기 어렵겠지요. 반대로 지금의 적자 상황도 큰 난제입니다. 인상된 전기세를 받아들이는 것도 분명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표심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전기요금을 ‘정치요금’이라고도 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식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까? 전기를 값싸게 생산하는 핵발전소 증설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서 어떻게 작용합니까?
식별과 용기
먼저 현실화된 요금이 정해져야 합니다. 요금 결정 과정에서 유관 인사들은 비판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소비자인 우리도 값싼 요금만이 아니라 정당한 값을 지불해야 하고 동시에 검약에 대한 인식도 길러야 하며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조성돼야 합니다. 이 역시 인내와 불편을 겪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노력들은 결국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이 우리 사회 안에서 뿌리내리는 과정인 셈입니다.
사익이 아닌 이웃을 함께 생각하고, 내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지는 노력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토대로 비복음적 상황을 단호히 거절할 용기도 필요합니다. 값싼 전기를 위해 핵발전소를 증설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방사능 문제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식별과 더불어 우리의 용기 또한 요청됩니다.
“사회 영역에서 교회의 사목 활동은 인간의 진리를 증언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 활동은 인간을 중심에 두는 기본 원리에서 영감을 받아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527항)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23. 구약성경에 나타난 기도 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574-2577항)
존재의 목적을 깨닫게 해주는 기도
‘닉 부이치치’는 여덟 살 때부터 자살 시도를 세 번이나 할 정도로 삶에 비관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양팔과 다리가 없는 장애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화가 나고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열다섯 살 때 그는 요한복음 9장을 읽다가 삶이 완전히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을 보며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탄생하기 전부터 그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자신처럼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심어주는 동기부여 강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고 지금도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닉 부이치치가 성경 말씀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된 과정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그의 기도 습관은 결혼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일본계 미국인 ‘카나에 미야하라’에게 한눈에 반한 그는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합니다. 미야하라에게는 이미 사귀는 사람도 있었고 닉과 같은 장애를 지닌 사람과 평생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닉은 1년 동안 만나지 말고 1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사랑이 더 증가하였다면 그것을 하느님께서 결혼을 허락해 주신 표징으로 믿자고 하였습니다. 미야하라는 자기 생각과는 다르게 1년 뒤 닉에 대한 사랑이 더 증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고 결혼합니다. 이 1년 동안 하느님의 뜻을 묻는 시간이 두 사람의 혼인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모세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친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80이 되어서야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 자비의 구원 사업에 참여시키려고 그를 파견하십니다.”(2575) 모세가 떨기나무를 통해 자신을 부르시는 하느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모세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부르시는 것에 대한 응답”(2593)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의 성취, “하느님께서 당신 몫으로 삼으신 백성을 위해”(2577) 기도합니다. 아말렉족과 싸우는 동안 또는 미르얌의 병이 낫도록, 그리고 변절한 백성을 구하기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소명을 깨닫지 못했던 닉 부이치치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 때는 항상 어떠한 목적으로 만듭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는 물건은 가치를 잃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의 목적을 잃은 삶은 방향을 잃고 망망대해에서 힘겹게 노를 젓기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하는 노력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먼저 ‘북극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육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항상 묻고 행동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한다면 기도하지 않고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 3,5-6)
호교적 대화 (4) 호교적(護敎的) 대처
천주교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에 젖어 있는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위하여 가상 대화 형식으로 꾸몄으며, 주로 서한규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서울, 게쎄마니, 2012)를 참고하였다.
비신자 : 그러면 개신교에서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상당히 많은가요?
천주교인 : 상당히 많아요. 예를 들면, ‘마리아를 믿는다며?’, ‘율법을 지킨다며?’, ‘천주교는 처음과 달리 변해 버렸다며?’ ‘사람이 어떻게 죄를 사하느냐?’, ‘돈을 받고 죄를 사했다며?’, ‘성경보다 전통을 따른다며?’ ‘성경대로 하지 않는다며?’ ‘상을 만들고 우상 숭배한다며?’ 한다든가 그 외에도 상당히 많고, 심지어는 ‘교황이 마귀 대장’이라느니 등 모욕적인 언사도 들려요.
비신자 : 천주교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모욕적 공격이네요.
천주교인 :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공격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아요. 주님이 세운 교회가 조롱에 가깝거나 모욕에 가까운 공격에 침묵을 지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요? 자기를 변호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에요. 개인도 타인이 공격해 온다면 자기를 방어해야 하고 어떤 때는 정당방위도 있는데, 주님의 교회도 공격해 오는 상대가 있다면 마땅히 자기를 방어하고 진리를 수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비신자 : 그야 물론이지요.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 하나요?
천주교인 : 우선 내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비교하면 내 것을 제대로 알게 되어요. 천주교가 참된 교회이고 참된 진리라면, 똑같이 주장하는 다른 교회와 비교함에 주저할 필요가 없지요. 누가 명품이고 짝퉁인지를 가려보자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참된 진리를 찾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어요? 내 구원과 직결된 문제이니 정말 중요하지요.
비신자 : 왜 천주교는 타 교파 비판에 소홀한가요?
천주교인 : 천주교는 어떤 교회를 비판하면서 생겨난 교회가 아니지요. 교회 정당성이 천주교 안에 있어요. 그래서 교리도 순수하게 자기 것만을 가르치지요. 또 성직자들도 타 교파를 비판하지 않고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합니다. 타 교파 비판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신자 : 비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나요?
천주교인 : 비교하면서 교리를 하다 보면 내가 믿는 교회의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또 비교하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타 교파 신자를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교에도 용기가 생깁니다. 어떤 쟁점이 있을 때, 비록 논리적으로 설득은 못하더라도, 저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교리 지식도 충분하고 성경 지식도 풍부한데, 단지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을 뿐이지요.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예수 성심을 묵상하는 성시간
성시간은 예수님의 고통, 특히 겟세마니에서 당하셨던 고통과 인간을 향한 사랑을 기억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담긴 극진한 사랑을 관상하기에, 성시간은 예수 성심과 관련이 깊습니다.
예수 성심에 관한 신심은 성 베르나르도(1090~1153)가 전한 그리스도 수난에 관한 신심에서 시작되었고, 13세기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에 의하여 대중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기에 들어 예수회 회원들이 더욱 열심히 이 신심을 전파하였는데, 이런 흐름 속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의 환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러 환시 중 1674년 초에 본 환시에서, 예수님께서는 ‘첫 첨례 육’ 곧 “매월 첫 금요일에 영성체를 하고, 목요일과 금요일 사이 밤 11시부터 자정까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매월 첫 금요일 영성체와 성시간 신심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829년 교황 비오 8세(1829~1830 재위)는 성시간 거행을 전대사와 함께 인준하였고, 이후 여러 교황도 이 신심을 장려하였습니다.
성시간의 핵심은 죽음의 고통에 번민하는 예수님과 함께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시간은 일반적으로 목요일이나 금요일 밤에 거행되지만, 그 밖의 시간에도 가능합니다. 홀로 또는 여럿이서 지낼 수 있는데, 공적인 성시간은 보통 성체 현시와 함께 진행됩니다.
성시간에 사제는 보통 중백의와 영대, 카파(Cappa)를 입습니다. 입당 후, 사제는 성체 현시와 분향을 하고, 그날 성시간의 간략한 요지를 말한 다음,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은 주로 복음에서 선택하는데, 때로 서간이 될 수도 있고, 독서와 복음을 함께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 봉독 후에는 강론과 묵상이 이어지며, 묵상 후에는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와 <예수 성심께 천하 만민을 바치는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성체께 분향을 하는데, 이때 <지존하신 성체>(Tantum ergo)를 부릅니다. 이어, 사제는 성체 강복 전 기도를 바치고 어깨보를 두른 후, 성광을 들어 올리며 성체 강복을 합니다. 그러면 모든 신자는 고개를 숙이고 성호를 그으며 강복을 받습니다. 강복 후, 성체를 감실에 다시 모시고, 마침 성가로써 성시간을 마칩니다.
성시간의 목적은 세상의 죄, 특히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저버린 죄를 보속하고,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자비를 간구하며, 상처받은 예수님의 성심을 위로해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큰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성심을 관상하는 것이 성시간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성심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참된 회개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가톨릭 신학18]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1) :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부활을 믿으시나요?
솔직하게 답해도 된다고 하면, 어떤 답들이 나올까요?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니 못하실 일이 없지!’, ‘성경에 나오니 믿지.’, 혹은 ‘믿고 싶어요.’라는 응답도 있겠네요. 또 ‘부활이 있든 없든 뭐 그리 중요한가?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되지.’, 또는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나?’ 하실 수도 있고, ‘임사체험’ 같은 걸로 이해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은 부활에 대한 신앙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확신에 찬 보도를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도 함께 먹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습니다.(마태 28,11-15 참조) 그러나 제자들의 부활 체험은 너무나 확실하고 생생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확실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 체험 이후의 변화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비로소’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그때까지 유다인들이 생각했던 정치적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듣게 되지요.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구원하는 메시아, 그렇다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은 분,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제자들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 체험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무엇이 그분의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위해 투신하게 한 걸까요? ‘부활하셨다.’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직역하면 ‘일으켜졌다’(마르 16,6; 루카 24,34; 요한 21,14 참조)입니다. 즉 ‘하느님에 의해서 일으켜졌다’는 것인데,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으키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생명의 주님,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중요 내용 중 하나입니다. “야훼는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 저승에 내리기도 올리기도 하신다.”(1사무 2,6)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하느님의 업적임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15)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곧 삶과 죽음 모두를 관장하시는 분, 따라서 ‘모든 것이 끝장난 거기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분’임을 계시하는 사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대로 부활을 믿는 사람은 미소를 잃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끝나버렸어.’ 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도 우리는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서 생명의 하느님께서 일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모든 희망을 넘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합니다.(로마 4,18)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22.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143항)
섣부른 단죄와 심판은 진정한 해결책 될 수 없어
“맥, 당신은 십자가에서 예수가 무엇을 이루었냐고 물었죠? 내 말 잘 들어요.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는 이 세계와 완전히 화해했어요. 내가 말하는 화해는 상호적인 것이고 나는 모조리 완전히, 최종적으로는 내 역할을 다했어요. 사랑의 본성은 관계를 강요하는 대신 길을 열어주죠.”(윌리엄 폴 영 「오두막」 중)
악을 응징
호탕한 주인공이 악당들을 물리치는 시원한 이야기 좋아하십니까? 의로운 주인공이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하고 악을 심판하며 정의와 공정을 구현한다는 주제는 모든 사람의 희망입니다. 가톨릭 교리도 인과응보에 입각한 심판을 명시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심판·천국·지옥이라는 종말을 맞이하며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 사람들을 그들의 행업대로 심판하실 거라 가르칩니다.
특히 사회교리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책임에 기초해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 강조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99항) 그런데 멋진 히어로에 의해 응징돼야 할 명확한 악도 존재하겠지만 세상에는 복잡하면서 아픈 현실들이 공존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배고픔을 못이겨 고작 빵을 훔친 죄로 5년 형을 언도받습니다. 학교폭력이나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피해자들, 군대의 내무 부조리 피해자들이 우발적인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가해자가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상황입니다. 소외된 이들을 방치하는 사회적 무관심은 이런 구조를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영화 ‘스파이더맨’ 주인공 피터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방관했던 강도 사건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습니다. 범죄를 합리화할 수 없겠지만 범죄가 양산되는 상황이 존재하고, 선한 사람도 그런 상황 속에서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음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에게 선과 악이 정해져 있다기보다 악한 상황이 발생하는 상황을 주의깊게 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과 심판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비를 내리시며(마태 5,45), 또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그들의 적국 니네베조차 가련하게 보신다고 합니다.(요나 4,11) 지혜로운 식별과 구분도 필요하겠으나 이분법적 사고에서 비롯된 섣부른 단죄와 심판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복잡하고 안타까운 문제일수록 깊은 숙고와 시간이 필요하며 더욱이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상황을 헤아려주고, 문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통찰하고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가르침을 간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모든 시대에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도 요청되고 있으나, 그 심판은 누군가를 친구와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사랑과도 깊이 연관돼 있음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파스카 신비의 힘으로, 이웃을 멸시하고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는 관계의 근원이 되는 무질서한 자기애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유란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완전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희생제사를 통하여 다시 한번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과 친교를 맺게 하신다.”(「간추린 사회교리」 143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