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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21강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 / 마태복음 15:21-31
요절 /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가나안 이방 여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방인 무리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 없이 누구에게라도 열려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불어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게네사렛 지역을 떠나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셨습니다(21). 마가복음에서는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막7:24). 예수님은 무리를 피해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제자 훈련에 힘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문이 이곳까지 퍼져 조용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2).”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딸이 귀신 들려 발작하며 고통스러워할 때 어머니의 마음은 미어터졌을 것입니다. 아마 정신을 잃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갔을 것입니다. 딸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딸을 고쳐보고자 유명한 의사는 다 찾아가고 좋다는 약은 다 먹여 보았을 것입니다. 이 같은 노력을 해도 딸의 증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심해질 뿐이었습니다. 여인의 마음에는 눈물이 마를 때가 없었습니다. 딸의 고통은 여인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여기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 당시 메시아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지 아는 정도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신앙고백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바로 그분’ 즉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 처음 오셨는데 그녀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여인에게는 딸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딸을 어찌하든지 고치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 게다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믿음, 이 예수님이라면 딸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예수님에게 나아가면 자기 딸을 반드시 고쳐주실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처럼 중차대한 힘든 문제들이 자기에게 생겨나면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고통당하고 아픔을 겪는 문제들이 생겨날 때 너무 힘들어 울고 싶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꼬투리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 간절히 주님을 의지할 수 있고 이것이 주님의 복을 받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고 작은 인생 문제들 앞에서 무엇보다 예수님께 나아가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인이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 외에는 달리 무슨 말을 예수님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인을 이 자리에까지 나오게 한 것은 딸을 향한 사랑과 애잔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여인이 기대고 의지할 곳은 인생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긍휼, 불쌍히 여기는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내가 손 쓸 수 없는 영역이 있고 나의 능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능력의 이름 예수님, 구원의 이름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에게 무릎 꿇고 나아가 본문의 여인처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인이 이렇게까지 하면 두말 말고 당장 고쳐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고쳐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23)”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평소 예수님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왜 예수님이 침묵하신 것일까요? 성경은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을 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주님은 때로는 우리가 믿음으로 간구할 때 침묵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 대답도 않고 잠잠히 계실 때 우리는 주님이 나를 외면하신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때로 침묵하시는 것은 나를 향한 무관심이 아니라 나의 믿음을 키우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때로 침묵하심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나섭니다. 대충 안심시켜서 여인이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청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예수님이 고쳐주셨을까요?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예수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고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 ‘이스라엘 집’은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지상 사역에는 우선적인 순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후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방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차별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구속 역사의 우선순위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큰 흐름을 보면 이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는 것에 큰 비중을 두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명령하셨습니다(마28:19).
또 ‘잃어버린 양’이라는 말씀을 보면 단순히 불쌍한 사람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게 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 목자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시면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신 목자로 사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양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찾고자 하셨고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양들을 찾는 게 우선 사명입니다. 결국 이 말인즉슨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에게는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여인은 얼마나 낙심이 되었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힘든 딸을 두고 있는 여인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아니, 그러면 이방 지역인 이곳에 아예 오시질 마시든지, 왜 오셔서 희망 고문을 하나요?” 화가 날 법도 합니다. 이 정도면 예수님이 거절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포기하고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아닙니다.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소리를 지르다가 반응이 없자,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절하며 도움을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25).”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항상 즉시 응답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주님이 침묵하실 때도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기미가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악화됩니다. 이 경우 더 괴롭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이것이 마치 주님이 ‘No’ 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No’일 수도 있고 ‘침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서 기도하다가 상황에 따라 쉽게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감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주님이 기도에 침묵하시거나 ‘No’하는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 더 가까이, 또 더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 또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침묵 또는 ‘No’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왜 이러십니까? 대체 들어주실 것입니까? 말 것입니까?” 이렇게 하지 말고 이때 해야 할 바른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본문을 보면 여인이 특별히 무슨 일을 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여인은 세 번에 걸쳐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을 입증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현실 문제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면 엎드려 절하며 간구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보통 때라면 ‘딸아,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습니다. 더 크게 거절하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는 실로 여인에게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여기 ‘자녀’는 이스라엘을, ‘개’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개를 ‘애완견’, ‘반려견’ 등으로 부르지만 구약성경에서 ‘개’는 불결하고 수치를 모르고 탐욕스러운 것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개’라는 이미지는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이런 ‘개’ 취급하며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마저도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개’ 취급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은 한 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도 그 몸에 손을 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중풍병자도 고쳐주시고 심지어 동일한 이방인인 백부장이 간구했을 때도 도와주시고 심지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라고 칭찬까지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바쁘고 피곤할지라도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접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왜 유독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만큼은 이런 모욕적인 말로 물리치시는 것일까요? 이방인이니까 은혜를 베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차별이 없다고 하는데 왜 예수님은 차별하는 것처럼 말씀하실까요? 세상 만민의 구주로 오셨다면서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답지 않은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모르셔서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건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시는 방향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여인은 처음에는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국 이 여인의 믿음을 큰 믿음으로 칭찬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절망하고 좌절시키는 말씀이라기보다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는 과정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보내심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지, 궁극적으로는 이방인을 배제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자는 바로 이 경계를 넘어서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베푸실 은혜의 자격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모든 만민의 구원자로 오신 분이시면서 왜 이방인을 차별하십니까?” 이렇게 따지지 않습니다. ‘나도 은혜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고자 하셨을까요? 여인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을 만한가? 정말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사모하는가? 속마음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 부분을 설명할 때 ‘여인의 열심을 자극하고 정열을 부채질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모욕적인 말씀을 하면서까지 거절하신 것은 여인을 좌절에 빠뜨리고 낙담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행위는 사탄이나 하는 짓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가진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고 주님의 어떤 은혜라도 끝까지 붙들고자 하는 믿음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에 여인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27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대체나 예수님의 의도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재치 있게 받아넘겼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딸 문제도 심각한데 멸시까지 받으니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요? 그럼에도 여인은 따지지 않습니다. “왜 이방인이라고 무시하십니까? 왜 차별하십니까? “어떻게 저렇게 믿음 없는 것들이 우선이 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항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은혜 받을 자격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제가 자녀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믿음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다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은 늘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주님이 항상 옳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인은 자신이 은혜받을 자격이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에게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푸실 은혜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기본적으로 모든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빚진 것이 있어서 우리가 청구하면 내놓으실 의무라도 있습니까?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하나님의 주권대로 주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실만한 때에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의를 제기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에 대해 여인처럼 항상 ‘주님이 옳습니다’ 이렇게 인정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은혜는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할 권리나 자격은 없지만 주님이 하시는 것이 다 옳지만 그럼에도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만큼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저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베풀어주소서.”
여러분! 은혜가 무엇일까요? 자격이 안 되어도 주님이 불쌍히 여기사 일방적으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여인은 주님께 은혜받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사람의 자존심은 내가 뭐라도 되는 마냥 자기를 높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할 권리가 있고 내가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무시하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자존심을 꺾지 못해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은혜의 문턱에서 되돌아가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까? 나의 자존심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자존심은 백해무익합니다. 사람은 누구도 창조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여인은 자격이 안 되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역설적으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또 주님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주님이 은혜 베풀어주실 것을 또한 신뢰합니다. 자격이 된다고 자녀로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고 교만해져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사람만이 주님께 나아갈 수 있고 주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받을 자격이 안 되는 존재라는 철저한 자기 인식 가운데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 다만 은혜를 구하며 기도할 때 우리 앞에는 은혜의 세계가 펼쳐지게 될 줄 믿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여인이 믿고 소원한 대로 그녀의 딸이 나았습니다. 집에 가보니 예전의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온 딸이 엄마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영어에 ‘메가(Mega)’라는 접두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메가바이트(Megabyte)’ 또는 ‘메가톤(Megaton)’처럼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 앞에 붙는데 이때 ‘메가’는 ‘백만’을 의미합니다. 이 ‘메가’라는 말이 바로 헬라어 ‘메가스(μέγας)’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용어입니다.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여기 ‘크도다’라는 단어가 바로 ‘메가스’입니다. 여인의 믿음이 매우 크다, 여인의 믿음이 ‘메가(Mega)’급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어떤 점에서 큰 믿음, 메가급 믿음으로 인정받게 되었을까요? 여인의 논리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여인은 자녀의 몫을 빼앗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면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에 대한 엄청난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부스러기만으로도 자기 딸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부스러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귀한 은혜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자녀에게 주는 은혜가 아닐지라도 개에게 흘려지는 부스러기일지라도 주님이 어떤 은혜든 주기만 하시면 자기 딸이 낫는다는 믿음이 여인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입니다. “주님이 가지고 계신 은혜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에서 조금만 흘러나와도 내 딸에게는 충분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자격이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옳다고 순복했고, 예수님의 은혜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은혜에 대한 간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은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이런 믿음을 크게 인정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여인의 딸이 즉시 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갈릴리 호숫가로 가셔서 산에 오르셨는데 예수님께로 많은 장애인들이 나아왔습니다(30). 그들도 여인처럼 도움받고자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치료해 주십니다. 그러자 무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기 ‘무리’에는 유대인들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수의 이방인이 모여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31).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러 오셨지만 이방 세계의 잃어버린 양들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이방인 구분 없이 모든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한 가나안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에서 많은 이방 무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만 머물지 않고 이방인에게 세상 만민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있어 우리의 자격이나 권리를 주장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로움이나 공로를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은혜에 대한 소망은 오직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내세울 것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된 것입니다. “주님,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능력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가나안 여인에게는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스러기를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의 자녀에게도,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교회에도,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본문의 이방 무리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은혜를 붙들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큰 믿음, 메가급의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